어제는 집에서 혼술을 하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연애의 참견>이란 프로그램을 보게됐다. 연애를 하면서 생기는 고민(이 사랑 계속할 수 있을까요, 끝내야 할까요)을 프로그램에 보내서 패널들이 자신의 의견을 얘기해주는 구성이었다. 뭐, 누가 뭐라하든 결정은 자신의 몫이니, 연애에 대해서라면 나는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제 사연을 보낸이는 남자였는데, 자신의 여자친구가 학교에서 여신으로 불릴 정도로 미모가 빼어난데, 사귄지 1년이 되도록 뽀뽀를 제외한 스킨십도 한 적이 없고, 1박2일 여행도 못간다고 한다, 자신을 만날 때 표정도 별로 없다는 게 고민이었다. 이에 대해 남자의 친구는 '여자가 너무 예뻐 남자들이 하도 달라붙으니 그거 귀찮아서 널 그냥 남자친구로 세워둔 거 아니냐'라고 했고, 친구에게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심 불만이 쌓여 술을 마시고 여자네 집앞으로 찾아가 '잠깐 보자'고 얘기한다. 여자는 '지금은 곤란하다'고 말하는데, 남자는 '너가 만약 안나온다면 나랑 헤어지자는 건 줄 알겠다'고 하며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여자는 나오질 않아, '아, 이 여자는 날 사랑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는 돌아가는데,

다음날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다.
남자는 '너 안나오면 우리 끝이라고 얘기했잖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데, 여자는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 점점 더 좋아져서 그래서 그랬다, 그리고 어제 나갔었다' 라고 말했다. 남자가 떠난 후에 여자가 나왔던 것. 여자가 풀메이크업을 하고 나오느라 두 시간여가 걸린 셈이었다. 머리도 감고 말리고 화장도 하고...

아이고....
알고보니 여자는 굉장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전남친과 연애하면서 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화장을 지우고 자려고 하자 남친이 '너 눈이 왜이렇게 작냐'며 여친에 대한 태도가 확 달라진 것. 자신의 노메이크업을 보고 실망하고 태도가 달라진 그것 만으로도 상처였는데, 남자는 자신의 자는 모습을 단톡방에 공유해서는 '화장이 아니라 분장이다, 나는 얼굴이랑 몸매만 보는데 완전 우웩이다' 하는 메세지를 주고 받은 거였다. 단톡방 참여자들은 '진짜 얘가 걔 맞아? 대박..' 이런 식으로 응대하고...


여자가 화장이 과했을 수 있다. 화장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화장 지운 걸 보고 '어 예쁜애가 아니었네' 할 수도 있다. 트로피 여친을 원해서 '이렇게 예쁘고 몸매 좋은 애를 사귀는 능력 좋은 나'를 과시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니 확 실망했을 거다. 트로피 여친을 원하는 것은 본인 자질의 문제다. 만족을 과시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차피 그 사람이 깜냥이 그것밖에 안되는 거니, 그건 그냥 그가 못난 거라고 할 수 있다. 트로피 여친(혹은 남친)을 원하는 것은 굉장히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사귀는 거였는데, 그 '이것'이 조금이라도 흠집나는 순간, 그것은 사랑도 뭣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트로피 애인을 원하는 것은, 아직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를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본다. 그건 본인 미성숙으로 생각할 수 있고 본인이 연애를 끝내면 된다, 그러나.



'잠든 여자친구의 모습을 사진 찍어 단톡방에 전송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이것이 해서는 안될짓이다'에 대한 개념이 자리잡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건 몰카고 범죄다. 찍히는 줄도 몰랐던 나에 대한 사진이 게다가 불특정 다수에게 전송이 된다. 이건, 해서는 안될 짓이다. 몰래 찍어서도 안되고, 그걸 전송해서도 안된다. 왜 이게 장착이 안되지? 왜죠?
찍힌줄도 몰랐던 나의 사진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송이 되어 그걸 보면서 게다가 품평을 한다. 그 단톡방에서는 아무도 '야, 여자친구도 니가 사진 찍은 거 알아?'라고 묻지 않은걸까? 왜 하나같이 '야 이렇게 생긴 애였다니 ㅋㄷㅋㄷ' 이러고만 있을까?

상대의 허락 없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도 안되고 그것을 전송해서도 안된다. 이게 왜 자리잡지 않지? 이건 뭐 지킬 수 없는 힘든 일이 아니라 그냥 안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잖아. 왜 이 기본 도덕이 자리잡지 않지? 이건 그냥 인간이 인간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그냥, 단순하게, 그냥 지켜야 되는 거잖아.


여자는 자신의 사진이 과연 어디까지 그리고 누구에게까지 전송됐을지 알 수 없어 불안에 떤다. 길을 걸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할까봐 겁난다. 결국 학교까지 옮기고야 만다.



내가 내 단톡방에 있는 다섯명에게 이 사진 하나를 보냈다는 것은, 그들이 또 자신이 속한 다른사람들에게 사진을 전송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단톡방에서 낄낄거린 새끼들이라면, 다른 방에 그런 비슷한 부류가 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단톡방에서 전송받은 새끼들은 또 전송하겠지. 야, 화장할 때 이 얼굴인데 화장 지우면 이 얼굴이래 대박이지 낄낄낄.

내가 이미 상대에게 전송한 순간, '야, 다른 사람에게 전송하지마'가 과연 어떤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유포에 나 역시 힘을 보탰는데, '나는 했지만 너는 하지마~ 낄낄' 이것은 가능하기나 한것인가. 물론 그 단톡방에 있는 새끼들은 '야 다른 데가서는 하지마' 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여자의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도 그녀가 '여신급 외모'라고 사귀었는데, 그가 아무리 '나는 다른 남자랑 달라'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한들, 여자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녀의 트라우마가 사라지기 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중요한 건, 나는 그 트라우마가 좀 괜찮아지는 데에는 현재의 남자친구가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 나 화장 지우면 이런 얼굴이다, 왜, 뭐, 어쩔래.' 가 되기 위해서는 그녀가 화장하지 않은, 머리도 얼굴도 몸매도 제각각인 다른 여자들을 많이 보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것이다. 여신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속에 둘러싸이기 보다는, '왜 여신이어야 해?', '왜 예뻐야 되는데?'를 말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 아, 그러게, 이 한 줌도 안되는 화장으로 나는 왜그렇게 힘들게 지냈지? 라고 스스로 깨달아야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남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두시간씩 메이크업 해야 한다면, 그것은 또 여자에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가장 완벽한 모습의 나'를 보여주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나'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책을 읽고 이런 술을 마시고 이런 술꼬장을 부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고 이렇게 생기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나다. 그녀에게는 '넌 화장 안해도 예뻐'라고 말하는 남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편한대로 살아가도 된다, 남자의 품평에 우리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줄 다른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자의 전남친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 필요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도촬을 하고 전송을 하면서 낄낄대고 웃어버리다니. 불법촬영도 남자가 했고 유포도 남자가 했는데, 왜 울고 트라우마를 가져야 하는 게 여자인가. 왜 학교를 옮기는 게 여자여야 하는가. 세상이 불법촬영하고 유포하는 남자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 돌을 던져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건 안되는 거지'하는 도덕을 그들 스스로 갖추고 있길 바라지만, 그것이 싹수가 노랗다면 강제로라도 주입해야 하지 않겠나.


불법촬영 안된다, 다른 사람의 몸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불법촬영 유포도 안된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몸을 가지고 낄낄대는 것은 안된다.


이 기본적인 도덕을, 굳이 강제로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아 진짜 너무 싫고 너무 끔찍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찍고 그것을 돌려보고 낄낄대며 품평하다니. 세상 쓰레기들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장착되지 않은 것들. '어? 이건 안되는 건데..'라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 장착되지 않았는데, 이 사회에서 어떻게 같이 살아가나.


'으,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찰나의 감정 혹은 생각이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그 '아님'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의를 지키게 만들고 상식을 지키게 만들어주는 것이니까. 불법촬영을 하고 유포하며 낄낄대는 많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때' 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자체가 장착이 안되어있는 것 같다. 여태 여성의 신체를 물화했던 남자들이라서, 내 마음대로 찍고 전송하고 품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걸 고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건 아니지 않나?'하는 기본적 생각을 가르치고 주입할 수 있을까? 왜 어릴 때부터 똑같은 나라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고 살았는데, 누군가는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하고 누군가는 '어머 못생겼어 찍어서 놀려야지'를 하게 될까? 뭐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페미사이드는 아직 조금밖에 읽지 못했지만, 아주 흥미롭게 읽히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들이 끊임없이 세상에는 다양한 여자들이 있고 우리가 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놓칠 수도 있다,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하겠다 라고 반복해 말해주어 너무 좋았다. 이 책을 같이 읽고 있는 친구가 어제 무척 잘 읽혀서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둘다 좀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너무 갈증이 나고 목이 마른 거다. 가장 처음 생각한 건 대학원이었는데, 먹고 사는 게 중요한 나로서는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반드시 이 직장이 필요하고,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서 그걸 해낼 자신이 없다. 대학원 다니는 다른 사람의 학비를 보니, 그것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방통대에는 여성학이 없고, 대학들이 갖추고 있는 평생교육원도 여성학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래저래 여성학을 가르치는 대학들에 들어가 어떤 책들로 공부하는지 보고 우리 그걸 한 번 읽어볼까, 어제 친구랑 얘기했다. 그런 책들 리스트업 해서 우리 나름대로 커리큘럼을 짜고, 어떻게 '함께' 이것을 공부할 수 있을지 의논해보자, 고. 나처럼 친구도 목말라 하고 있었다. 더 하고 싶어, 더 공부하고 싶어, 하고.




















아마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공부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좀 해야하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짬을 내어 공부를 하는 것은 웬만한 의지로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게다가 나는 여행도 다녀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요가도 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다. 그래도 틈틈이 뭔가 시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계속 생각해봐야지, 어떤 좋은 방법이 있나.



















아직 12월의 도서 페미사이드도 다 읽지 못했는데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회사를 그만두고 책만 읽고 싶지만,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면 책만 읽고 사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 뭘까..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걸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삶... 그것이 인생.........


벌써 12월 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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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12-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무례한 전남친이었군요. 이건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문제인데... 그런 일로 두고두고 남을 상처를 안게 된 여자에게... 무시하라고 소리질러 주고 싶어요. 내가 화장 지워서 이 얼굴인게, 뭐 어때서? 라는 당당한 마음을 가지라고. 전남친은 화장을 좋아한거네요. 그럼 너따위 필요없다고 얘기하면 된다고..

회사 다니면서 공부했었는데 정말 힘든 일이에요... 결국 논문 쓸 때는 회사 그만두고 처절하게(정말ㅜ) 지내다 학위를 땄던 기억이. 뭔가 학교를 다녀야만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커리큘럼이나 일종의 강제성이 없으면 계속 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네 공부라는 것이라 항상 딜레마이긴 해요. 정말 배우고 싶은 건, 학교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하고 싶은 공부는 해야 하는 거고... 몇몇이 모여 학습 공동체를 만들고 진행하는 것도 괜챦은 방법 같아요. 페미니즘 연구자들을 초청해서 얘기도 들어보고. 누군가 총대를 잡고 진행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하겠지만.

다락방 2018-12-06 09: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비연님. 기본적 도덕이 갖춰지지 않은 놈이죠. 무례하다는 것만으로는 너무 약한, 그런 놈이에요. 아오 너무 짜증나. 나쁜 짓은 전남친이 했는데 트라우마는 여자가 갖게 되었어요. 하아-

저도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려고 방통대 갔다가, 워낙 공부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는 사람인지라 자퇴했는데요, 이게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퇴근 후에 강의를 듣는다는 게 정말이지 ㅠㅠ 제가 이 회사에서 맡은 일 때문에 대학원을 가기는 좀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돈도 문제고요. 대학교 교수님께 연락해 청강을 듣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걸 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스스로 해야하는데, 특히나 제 경우에는 공부에 대해서라면, 스스로보다 도움을 받는 게 좋은 것 같아서 좀 고민이 되네요. 비연님, 그런데 학위를 따셨다니, 정말 대단하셔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계속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요!

카스피 2018-12-07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가끔 보는데 실제 그런 일이 있을까 싶은 내용이 많더라구요.사실 성형보다 더한 것이 화장이란 말도 있는데 화장으로 실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자신을 가꾸려는 여성의 노력을 매도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단 생각이 듭니다.거꾸로 남성의 경우 상대방 여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되물어 볼 필요가 있지요.여친의 모습이 화장 전후가 크게 다른것에 실망했다면 그건 여친의 외모만을 사랑했단 뜻이기에 여성도 그런 남성에 크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한가지 여성의 자는 모습을 여성 몰래 단톡방에 올린것은 참 남자로써 찌질한 놈이란 생각이 듭니다요.

다락방 2018-12-07 08:05   좋아요 0 | URL
찌질하다기 보다는 비열한 범죄자인 거죠. 해서는 안될짓을 한 놈이고요.
만약 여자가 저 당시에 바로 그 사실에 대해 몰랐다해도 언젠가는 저런 놈인걸 알게 됐을테니 진작에 헤어진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놈이 몰카를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놈이란 것이 소문 나는 거예요. 그래야 다른 여자들이 저 남자를 피해갈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