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통화할 때 나의 아홉살 조카는 지금 《마틸다》를 읽고 있다고 했다. 그거 이모도 읽고 싶었는데! 라고 말했더니, '이모 다 읽고 빌려줄게'라고 하는 거다. 오오, 이제 내 조카가.. 나에게 자신의 책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때가 오다니. 나는 정말이지 너무 기쁘고 짜릿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토요일.
조카는 이 책을 들고 와서는 이모, 자, 하고는 내밀었다. 아홉살 아이가 읽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글자가 많은 게 아닌가 염려스러워 조카에게 '천천히 읽고 빌려줘'라고 했는데, 아이는 기어코 다 읽고 빌려준 것이었다. 너 정말 다 읽었어?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나는 .. 잘 모르겠다. 아홉살 아이에게 이 책은 지나치게 두껍고 글자가 많다는 내 생각이 맞는건지.. 그러니까 아홉살 아이들은 그림이 훨씬 많은 책을 볼 때가 아니던가. 아아 모르겠다. 이 책도 아홉살 아이가 읽기에 적당한 책인가?
나는 조카에게 고맙다고 말했고, 조카는 '이모 다 읽고 꼭 내게 돌려줘야 해' 했다. 물론이지! 꼭 돌려줄게, 말하고, 식구들 모두 일자산 허브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허브공원에서 예쁜 꽃들도 보고 신나게 뛰어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홉살 조카와 손을 잡고 가는데, 나는 아이가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건지 너무 궁금해진거다.
"타미야, 마틸다 재미있었어?"
"응! 너무 재미있어서 엄마한테 이런 책 또 사달라고 할거야."
"아, 그래?"
"응. 나 이제 이모가 왜 책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아 ㅠㅠㅠㅠㅠㅠㅠㅠ 타미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는 대체 어떤 어른이 될까. 이모가 너무 궁금하다. 아홉살에 책 읽는 재미를 알아버린 타미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타미야, 그 책 내용 어떤건지 이모한테 말해줘봐."
"음... 마틸다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마틸다는 책을 엄청 많이 읽었어. 근데 마틸다 아빠는 마틸다가 책 읽는 걸 너무 싫어한거야.."
라면서 곧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아이는 내용 파악을 하고 있었어! 마틸다를 돕는 하니 선생님 얘기도, 마틸다를 비롯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교장선생님 얘기까지도 술술 하는 거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도중에 우리는 시장에 들어섰는데, 시장에 사람이 많고 상인들이 물건 파는 소리로 무척 시끄러웠다. 그러자 타미가 책 이야기하던 말을 끊고 이러는 거다.
"아. 여기서 좀 더 큰 소리로 말해야 되나?"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얘는 뭐 말만 하면 이렇게 사랑스럽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야, 타미야, 이모가 귀 기울여 들을게." 하고 나는 아이의 얼굴에 귀를 바짝 갖다댔다. 아이는 그렇게 종알종알 책 얘기를 내게 다 해준 거다!!
그리고 집에 와 샤워를 했는데 조카가 내 서재방에 들어가서는 나를 부른다. 이모, 나도 책 빌려줘, 라면서.. 나는 당황했다. 내게 있는 건 그림 책 몇 권과 죄다 어른들이 읽는 책들 뿐인데 이를 어쩌지... 뭔가 빌려주고 싶다!! 그렇게 책들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그림책들 옆에 꽂힌 책들이 있다.
꼬마 니콜라는 다섯권 짜리인데 사두고 안읽었다... 이 중에서 두 권을 꺼내들고, 또 루카 루카와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을 꺼내들고, 이 중에서 어떤 거 읽을래? 물었다. 조카는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은 무서워 보인다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꼬마 니콜라 시리즈 중에서 두 권을 빌려갔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모도 아직 안읽은 책이야, 그건...
조카는 다 읽고 가져다주겠노라 했다. 응, 그거 다 읽고 재미있으면 나머지도 빌려가. 나는 조카에게 말하고서 내 책장에 이런 책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고, 그리고 아이들 읽을 책을 좀 더 사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조카가 와서 빌려가도록.
그리고 일요일밤, 조카가 빌려준 마틸다를 읽기 시작하는데, 어어? 밑줄이 그어져 있다?!
나는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미야, 이모 지금 마틸다 읽고 있는데, 여기 책에 분홍색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어. 이거 타미가 한거야?"
"응. 내가 그었어."
"이거 왜 그은거야?"
"음...몰라."
"아, 이모는 이거 타미가 그은 건가 너무 궁금했어. 색연필이야?"
"아니."
"형광펜이야?"
"응."
"응 이모가 궁금해서 전화했어."
"이모도 책에 밑줄 그어?"
"응. 이모도 책에 밑줄 긋지."
"왜?"
"응. 좋아서 긋고 다음에 다시 읽어보려고 긋고."
"뭘로 그어?"
"이모는 색연필로도 긋고, 볼펜으로도 긋고, 형광펜으로도 긋고, 나중에 찾기 쉽게 거기에 포스트잇도 붙여놔."
"아. 그거 좋은 방법이다!"
"응!"
나는 이런 대화를 타미와 한것이다. 아아.... 아이야, 너는 잘 자라고 있구나 ㅠㅠ 아가일 적에 책에 시큰둥해서 책에 관심 없는 아이가 될 줄 알았더니, 어느틈에 자라 이렇게 이모랑 책 얘기하고 책에 밑줄 긋는 얘기하고 있어. 아아... 조카는 사랑이고 책도 사랑이고 책읽기도 사랑이다... 너의 책읽기에 대한 관심은 일시적인걸까 아니면 앞으로 계속될까? 이모 집에 책 많아.. 타미야, 네가 그랬지. 이모 방에 책이 도서관 다음으로 많은 것 같아, 라고. 그러니 어른이 되면 이모 책장에서 마음껏 책을 꺼내 읽으렴! 나는 네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줌파 라히리를, 다니엘 글라타우어를, 빅토르 위고를, 아니 에르노를 읽히고 싶다. 조카여....
그렇게 어젯밤 마틸다를 읽는데 조카가 말해준 내용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조카가 모를 것 같은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거다. 조카는 이 단어들을 그냥 넘기며 분위기를 짐작해 넘겼을까? 아무래도 배경이 영국이고 번역소설이다 보니 단어의 뜻 자체가 어렵다기 보다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분위기상 그냥 넘기며 읽었던 걸까?
마틸다에는 책 읽는 마틸다를 무시하는 부모님이 나온다. 나는 아홉살 아이가 제 자식을 무시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아이들의 머리나 귀를 잡아당기는 폭력적인 교장선생님을 보고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로알드 달의 이 이야기는 많이 읽히고 뮤지컬로도 제작되어졌지만, 나는 이 글이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갈지 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아이들이 읽기에 무리가 없으니 그토록 인기가 많은 거겠지, 싶으면서도, 아이들이 읽기에 적절한걸까? 궁금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할리퀸 중에 《개구리의 연가》라는 게 있었다. 여자주인공은 도시에서 간호사 일로 아버지를 돕고 동화를 쓰는 작가였는데, 시골에 사는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다른 도시여자들처럼 시골에 정착하지 못할까봐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 때 그 남자는 그녀가 동화작가인 줄은 모르는 채로, 그녀에게 동화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얘기하는 거다. 그러면서 말하길,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단어를 쓴다거나 하는 일은 무척 어려울 것 같다'고 하는 거다. 그 대사는 내게 아주 오래도록,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나 역시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적절할지 잘 모르겠는 거다. 내가 너무 '어른'이 되어서일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너무 '어린이'의 어휘력이나 이해력은 성인에 비해 부족하다는 한심한 편견이 가득 작동한 것이어서일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쓴다는 게, 동화 작가가 된다는 게 너무 대단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거다.
책 내용중에 마틸다가 초능력을 쓰는 게 있다. 조카는 제엄마에게 '엄마 마틸다는 눈으로 컵을 움직여, 나도 초능력 갖고 싶어' 했다는 걸 보면, 아이가 집중하는 건 마틸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른이기에 어쩌면 마틸다가 가진 초능력보다 마틸다와 또래 아이들이 당하는 폭력과 무관심에 신경이 쏠렸던 걸지도...
어제 마틸다를 다 읽었고, 다음에 조카집에 가면 다 읽었다고 돌려줄 예정이다. 조카는 내가 빌려준 책을 다 읽었을까? 조카에게 또 빌려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꼬마 니콜라를 읽어야겠다. 집에 있는 세 권만이라도 일단 읽어야 조카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그나저나 루카 루카도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도 내용 1도 기억 안나는데, 다 읽어둬야 겠네... 흐음..
토요일에는 동네 도서관에 회원카드를 만들었다. 내 이름이 아닌 엄마 이름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동네 도서관에 내 책중 한 권이 없는 거라. 어라, 이거봐라? 없어? 신청해야지. 했는데, 대출을 한 회원에 한해서 도서 신청이 가능한 것이다. 으윽. 그런데 내가 내 이름으로 내 책을 신청하자니..너무 사람이... 없어 보이잖아? 그래서 엄마에게 말하니 엄마가 '엄마 이름으로 해~'라고 하셔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랑 같이 간 것. 일단 인터넷에 회원가입을 하고 엄마에게 '신분증 챙겨' 이러고는 같이 도서관에 갔다. 지금 딱히 뭔가 빌리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회원카드를 만들어야 언제가 되었든 빌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도서관에서 회원카드를 만들었고 엄마한테 '좀 보다갈까?'이러고 구경하는데 와.. 세상 흥분되는 거다. 나는 여성학 책이 있는 코너로 갔다. 내가 읽은 책들도 있었지만 당연히 내가 알지 못하는 책들도 많았다. 여성학 책들이 좌르륵 꽂힌 걸 보니 진짜 엄청 흥분이 되는 거다!!
나는 뭔가 이 많은 책들을 두고 그냥 집으로 갈 수가 없어..뭔가 반드시 빌려야 한다!! 그렇게 흥분해서 이것저것 꺼내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깐 엄마가 뭘하나 보니 엄마는 종교서적 있는 데에서 둘러보고 계셨다. 나는 다시 이 책 저 책 꺼내보다가 두 권을 똭- 꺼내 빌리기로 했다. 집에 사두고 안읽은 책들이 수두룩하지만, 당연히 여성학 책들도 수두룩하지만, 후후후후, 그래도 빌려, 빌려, 읽든 안읽든 빌려, 빌려!!
아 너무 씐나. 이 두 권만 빌리자, 하고는 꺼내서 눈누난나 엄마가 있는 데로 갔다. 엄마는 책 두 권을 꺼내 들고, 야, 여기 책 엄청 많아, 이러면서 흥분흥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우리 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이걸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두 권 가지고 망설이시길래, 음 엄마, 혹시 모르니까 일단 얇고 쉬워 보이는 걸로 빌려서 도전해보고, 가능해지면 다음에 또 빌리자, 했더니 엄마도 그게 좋겠다고 하시며 두 권 중에 엄청 갈등 하시다가 한 권을 선택하셨다. 나는 그렇게 총 세 권을 가지고 가서, '이거 빌릴게요' 하고 놓아두고는 회원카드를 내밀었다. 사서분은 회원카드를 스캔하고는 "11월 3일까지 가져다주세요" 하는 거다.
"책들 바코드는 안찍으세요?"
물으니, 그건 내가 놓아둔 그 자리에서 그냥 다 체크가 된다고...
네????
그냥 나란히 쌓아두었는데도 저절로 체크가 된다는 거다. 우와- 세상... 우와-
아무튼 흥분이 온 몸을 타고 짜릿짜릿 막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제 마틸다를 다 읽고나서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중 한 권을 펼쳤다. 너무 흥분했고 너무 좋았지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단점이 확 느껴졌다. 내가 접을 수도, 밑줄을 그을 수도 없었던 것. 당장 포스트잇을 붙여야 되는데 포스트잇도 없었다. 회사에 두고 와서 없는데, 하고는 스맛폰에 쪽수를 메모하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보면서 어? 사무실 책상에도 없네? 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언제든 그게 없으면 안되니까 가방에 넣어두자, 하고 내 가방에 넣어뒀다는 사실을 지금 기억해냈다. 바부...세상 밥통........
하아-
나는 바보야, 바보.
바보바보바보야 바보바보야 사랑 앞에서
오늘도 넌 튕겨튕겨~ ♪♬
아무튼 도서관 회원카드를 만들고 도서관에서 책을 얼마나 빌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랄까, 인생의 제2막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달까.
그나저나,
어제 자기 전에 소설을 한 권 읽자, 하고는 책장 앞으로 가 섰는데 읽고 싶은 소설책이 하나도 없는 거다. (네?) 이렇게 안 읽은 책이 많은데 어째서 지금 읽고 싶은 책이 없는 거지? 하는 기분이 되어, 음....
책을 사야겠구나...
라고 생각하고야 만것이다.
인생 2막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