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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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다닐 때 극기훈련을 간 적이 있었다. 정확히 그것을 어떤 용어로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교관이란 사람은 모든 학생들을 세워두고 여러가지 훈련을 시켰다. 누웠다 일어나기도 있었고 팔벌려 뛰기도 있었다. 너무 힘들면 줄에서 빠져 뒤로 나가 서있으라 했는데, 속속 힘들어 뒤로 나가는 아이들이 생겼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이제 끝이라고 할 때까지 교관이 시키는대로 했다. 나 역시 어떻게든 버텨내는 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고. 다음날엔 근육통에 시달렸었다. 체육시간도 자습하느라 많이 써버렸었는데 이런 갑작스런 몸의 움직은 우리들에게 근육통을 당연히 가져올 터였다.


이게 어떤 특별한 기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가끔 생각난다. 극기훈련 초반, 교관이 술 가진 애들 다 내놓으라며 했던 말들보다도, 캠프파이어의 모닥불과 울던 아이들보다도,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억지로 기억해야만 기억나는데, 교관이 시키는대로 다 따라하고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렸던 그 시간들은, 이상하게도 뜬금없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이 소설,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다 읽고, 뒤에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또 이 일이 생각났다.



나는 한때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운동장 조회 시간에 일렬로 신발주머니의 줄을 맞추고, 친구들이 일사병으로 하나둘 쓰러져나가도 부동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아이, 수련회에 가서 유사 군사훈련을 받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여자로서 순결을 지키며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다나까'로 말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아이.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개인행동이었다. 그 반듯한 줄을 탈출해서 멀리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운동장에 줄을 선 신발주머니들로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로부터, 야, 너, 51번, 차렷, 열중쉬엇, 앞으로나란히, 앉아, 일어서, 앞으로 나와, 싸가지 없는 년, 너희 부모가 돈이 없어서 이런 동네에 살지, 뭐, 너 같은 게 뭐가 되겠어? 지껄이는 입들과 너무 가벼운 손찌검들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로 가고 싶었다.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작가의 말, p.323-324)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조회를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학생이 옆자리 학생과 수다를 떨었다. 그 때 덩치가 큰 미술선생님이 달려와서, 그 전교생이 있는 데에서, 그 아이의 머리를 확 때렸다. 나는 너무 무서워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워낙 폭력적이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고, 그 학생이 맞는 걸 내가 직접 겪으면서 '꼼짝하지 말아야지, 얘기하지 말아야지, 조용히 해야지' 나는 그런 생각만 했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은영의 단편들을 차례로 읽어가노라면, 최은영이 과거의 자신, 의도야 어떻든 무해하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 그대로 내것이 된다. 나는 특별히 못된 아이는 아니었지만, 못되게 굴지 말자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운 아이었지만, 최은영의 말처럼,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어른이 되어서, 이만큼의 나이를 먹어서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 선생님이 그렇게 학생을 과격하게 때리는 걸 보았을 때, 그러는 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요즘 십대 학생들이 교사로부터 당한 성추행에 대해 얘기할 때는, 내가 고스란히 당했던 그 시절에 그걸 공론화 하지 못해서,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말하지 못해서, 그래서 지금 학생들도 그대로 피해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몇십년간 피해자들이 줄줄이 생겨, '살면서 성추행 한 번 안당해본 여자가 어딨냐'는 말이 기정사실이 되게 만들었으니, 나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럽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었을까? 나쁜 걸 유지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닌가.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무심하게 상처 입혔을까.


그래서 이 소설속 최은영의 반성이 나의 반성이 된다. 나는 같이 반성했고 그렇게 매만져주는 최은영의 손길을 한껏 받았다. 그 손길을 따뜻했고, 결국 내 어딘가를 건드리고야 말아,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울고 말았다.



특히 <지나가는 밤> 이 좋았다.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자매가 그러나 소원한 사이가 되어 서로를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립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사이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상처입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어린시절 제게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것을 두고 두고 생각하는 언니의 마음 같은 것,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던 동생의 마음 같은 것들이, 깊은 밤 내게 찾아들어 나는 그냥 훌쩍훌쩍 거렸다.



<아치디에서> 는 브라질 청년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라, 처음에는 '대체 왜 이런 화자를 만들어낸걸까' 좀 갸웃했었다. 그러나 그가 아일랜드에서 한국인 '하민'을 만났고, 서로의 과거에 대해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등장인물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겠구나 했다. 한국에서, 그야말로 '착취당하는 딸과 직장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녀의 '희생'이 당연시 되면서, 그리고 그것을 어린 여동생만이 상황파악을 제대로 해주고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데에서,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비로소 브라질 청년도 자신의 입장과, 자신 때문에 억압받았을 누나에 대해 떠올린다.



<601,602>는 최은영식 '82년생 김지영' 정도로 봐도 되겠다. 여성의 삶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으로 가야만 했던 것처럼, 어린 딸로서 핍박 받으며 사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에 주변 어른들이 반발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어른이 되어 결국 <아치디에서>의 '하민'의 삶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최은영은 이 단편들을 통해 그리고 이 단편들을 엮은 이 단편집을 통해 해야할 이야기들을 했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고, 어쩌면 자신이 무해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는 반성을 했고, 그렇게 독자의 마음을 매만져주었다. '매만지다' 라는 단어는 최은영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이 들만큼, 이 소설은 가만가만 스며든다.



이 책을 사두고도 오래 머뭇거렸다. 《쇼코의 미소》는 좋았는데, 그녀의 두번째 단편집이 그보다 좋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쓸데없는 걱정 같은 것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웬걸, 읽으면서는, 아아, 역시 최은영이구나 했다. 그래, 이런 이야기여야 해, 라고도 생각했다. 아직 국내작가중 가장 좋은 작가가 누구인지 물어오는 질문에는 최은영을 답할 수는 없겠지만, 다음에 나올 최은영과 그 다음에 나올 최은영도 계속계속 읽고싶다.



좋은 독서였고, <지나가는 밤> 은, 다른 사람들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가져본 핸드폰도 여자가 준 선물이었다.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라면서 준 그 선물을 들킬까봐 혜인은 핸드폰을 언제나 무음으로 설정해 가방에 넣어놓았다가 베개 밑에 두고 잤다. 여자는 혜인에게 "뭐하고 있어?"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여러 기호들로 만든 토끼, 수박, 별, 가아지 같은 그림을 보내기도 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음성 메시지를 남겨서 자기가 겪었던 웃긴 이야기들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혜인에게 위안을 줬다.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여자로부터 배운 셈이라고 혜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라고. (손길, p.226)

그때의 여자의 나이가 되어 혜인은 생각한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손길, p.231)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아치디에서‘)은 사랑은 다만 상대 앞에서 자신의 가장 약하고 수치스러운 감wjd을 노출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 곁에 침묵하며 함께 서 있는 것, 대신해 우는 것, 조금씩 속도를 늦춰 걷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해설,강지희,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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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쇼코의 미소>보다 <내게 무해한...>이 더 나은 듯합니다

다락방 2018-10-01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의 책장을 덮으면서 , ‘으음, 쇼코의 미소보다 이게 더 좋은가?‘ 했더랍니다. 후훗.

카알벨루치 2018-10-01 11:44   좋아요 0 | URL
제가 <내게 무해한 사랑>을 먼저 보고 <쇼코의 미소>를 봤는데 조금 degrade되는 느낌 ㅋ 그래도 최은영 좋아요~한주 힘차게 생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