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중력이 좋다는 것은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불편한 점이기도 하다. 오늘만해도 그렇다.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너무 흥미로운 거다. 나는 책 속으로 슉- 빨려들어가서 주인공과 같이 이 남자를 의심했다가 저 여자를 의심했다가, 위험천만한 상황에 안도했다가 하느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미처 신경쓰지 못한다. 정말이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가 할 정도로,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지하철 내의 소리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즉, 정차하는 역이 어디인지 안내멘트 조차도 내게 들리지 않았다는 거다.


아, 명문이다, 명문이야.


하면서 책을 읽다가,


'가만, 그런데 내가 지금 어디쯤 왔지?' 하고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지만 당연히 어디인지 그 지하에서 알 수가 없고, 으응, 모르겠다, 하고 다시 책에 고개를 처박으려는 순간, 지하철에서는 지금 정차할 역이 '남부터미널' 역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네?

남부터미널이요?



나는 너무나 놀라서 가방에 책을 쑤셔넣고 허겁지겁 챙겨 일어났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언제 양재를 지난거야.. ㅠㅠ 이런 씨부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고 헐레벌떡 내려서는 '카카오택시를 불러 회사에 가자'하는 생각으로 부랴부랴 카드를 대고 개찰구를 통과했는데, 통과하고서는 또다시 멘붕...



그런데 택시를 타려면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가.....



혼란한 가운데, 머릿속에는 생각들이 쏟아진다. 어느 출구로 가야하나, 출구는 상관없다 택시가 나를 데려다줄것이다,택시로는 얼마나 걸릴 것인가, 저 많은 계단을 올라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오히려 더 늦지 않을것인가, 가만있자 내가 얼마만큼을 지나친거지, 앗, 역 하나 지났구나, 그렇다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되돌아가는 편이 나을것이다...


그렇게 다시 카드를 띡- 대고 지하철을 타러 들어갔다. 아니, 애초에 한 역만 지나친 걸 알았더라면 카드 대고 나오지나 말것을, 제기랄, 돈만 버렸네, 이게 뭐야, 하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가서는 조금 기다려 지하철을 탔다.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있었지만, 그렇다해도 지각은 아니다. 출근시간은 8시인데, 이렇게 돌아가도 7시30분에는 늦어도 도착할 것이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면서, '오늘 같은 날은 쓴 커피를 마셔야한다'고 생각해 사이렌오더로 커피를 주문해 놓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가장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일단 쉬어가자' 고. 만약 내가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면, 좀 차분하게 그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내가 겨우 한 역만 지나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고, 그랬다면 카드를 대고 통과해서 이중으로 돈을 들이는 대신, 바로 돌아가는 전철을 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어떡하지, 이렇게 하자, 하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현명하지 못한 방법을 쓰고야 말았어. 결국 지하철 비를 날려버렸지... 내 감정이 가장 격할 때, 배고플 때, 황당할 때는 빨리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말자. 그 상황에서 좀 벗어났을 때 판단을 하려고 하자, 새삼 깨달았다.



뭐, 내가 책을 읽다가 내릴 역을 지나친 건 처음도 아니다. 책 읽다가만 지나친 것도 아니다. 애인하고 통화하다가 엉뚱하게 출근길에 상일동에 가 내린 적도 있다. 그 때 택시 불러서 돈 엄청 내고 출근했지..인생은 뭐 그런 거 아니겠나. 남자한테 빠져서 지하철도 잘못타고..뭐 그러면서 사는 거 아닌가...



라고 썼지만, 나의 집중력은 문제인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아무것도 다른 소리가 안들릴까...어째서 왜 때문에....... 집중하면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나는 이런 현상 때문에 몇 해전에 자꾸 '어? 여기 어디지? 내가 여기 왜 와있지?' 하는 바람에 스스로 알츠하이머 초기는 아닌가 걱정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마침 막 연애를 시작하던 때였고 감정이 자꾸 깊어지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신경정신과에 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 만약 알츠하이머 초기라면 치료가 가능한지 물어보자, 그리고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지금 막 연애를 시작한 이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자, 이 남자를 너무 좋아하지만 나 때문에 힘들게 할 수는 없다, 가슴 아프지만 그와 헤어지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이다, 멀리에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자....하는 각본을 머릿속에 써놓은 것이다. 내가 아프다면 당신을 놓아줄게..... 내가 아픈 것도 너무 아프지만 당신하고 헤어지는 것도 아프네.......이런 슬픔의 새드니스에 사로잡혀 나는 그렇게 신경정신과를 찾은 것이다.



도착해서 닥터와 상담을 하는데...상담의 끝은...결론은......



"지금 당신은 알츠하이머와 가장 먼 곳에 있어요"



였다. 선생님은 내게 알츠하이머가 아니며, 알츠하이머가 가장 먼 곳에 있다고 했다. 읽고 쓰기를 매일 한다는 건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는 거였다. 다만 너무 깊이 빠져드는 건 문제이니, 길을 걸으면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하셨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어느 목적지로 가야 한다면 그냥 목적지로만 가라고.... 네.......



그렇지만 나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 남부터미널에 갔지......... 사람, 안바뀌네요? 하하하하하.




내가 오늘 지하철 안에서 읽은 책은 이거였다.

















섬마을 산부인과 의사인 '토라'의 집 앞 마당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토라는 이 사건의 수사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녀가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기 때문인지 그녀에게 자꾸 위험이 닥친다. 이 과정에서 형사인 '데이나'와 서로 협조하게 되는데, 토라도 병원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취급받고 친구가 없는데 데이나 역시 마찬가지. 유능한 형사이지만 다른 남자 형사들이 데이나를 싫어하고 험담하며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사건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고. 게다가 토라에게도 데이나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간질을 하는데, 이번 사건으로 데이나를 처음 알게된 토라는 자신의 직감은 데이나가 유능한 형사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니까 '아닌가' 이러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거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며칠전 보았던 너무나 재미있었던 영화 《히트》가 생각났다.
















최근에 보았던 《오션스8》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였고, 더 많이 생각나는 영화였고, 더 많이 훅훅 치고 들어오는 영화였는데, '히트'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거다. 산드라 블록은 능력있는 FBI 이고 누구보다 범인을 많이 잡았지만 승진이 되질 않으며 다른 남자 동료들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멜리사 맥카시' 역시 능력있는 형사지만 가족으로부터도 그리고 경찰서 내에서도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 이런 둘이 만나 처음에는 서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지만 결국은 함께 사건을 해결해 가는 거다. 히트가 남자공동체에서 배제되는 능력있는 여자들이 만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냈다면, 이 책, 《희생양의 섬》은 좀 묵직하고 음침하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을텐데, 어쨌든 읽는 재미가 상당해서 내가 빠져들고야 만것이다.



내가 내리기 직전에 읽은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데이나'를 이상하다고 하는데 '토라'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물어본다. '너 이상한 사람이라는데, 너 이상해?' 그러면서 사람들이 욕하는 부분,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물어보는데, 아아, 이 남자들이 이 여자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사치를 일삼고 빚더미에 깔려있는 멍충한 여자로 만들어놨어..개똥들.. 데이나는 '아니, 그건 이런 거야' 하면서 얘기해주는 거다. 그리고 이 섬에서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자신을 배척한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글쎄, 이곳에선 적응을 잘 못한 것 같고, 그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말이 맞아요. 이곳 섬들은 작지만 강력한 패거리가 다스리고 있거든요. 체격이 큰 금발의 남자들 말이죠.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스코틀랜드 대학을 다녔고, 노르웨이 부족의 침략이 있던 시절부터 가족끼리 서로 알고 지낸 사람들 말이에요. 토라, 생각해봐요. 병원의 아는 의사들이나, 학교의 교장이나, 경찰이나 치안판사, 또 상공회의소, 지역 시의회까지, 그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고요."

그 점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꽤 많은 섬 주민들이 눈에 띄게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는 사실을 나도 이미 여러차례 실감한 터였다. (p.249)



아아,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소름이 쫙 돋는다. 거대한 백인알탕의 세계.... 그런 강력한 패거리가 있는 곳에 심지어 '여자'이며 '외부인'이 들어갔을 때 배척되어 지는 것... 그 안에서 수사를 하겠다고 하니 이 마을의 남자 백인들이 모두 그녀들에게 으르렁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빡이쳐, 안쳐... 이렇게 빡이 치니 내가 내릴 역을 지나쳐, 안지나쳐....



다 이 책 때문이었다....



그건그렇고, 나는 이 뒤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한데 왜 나는 직장인인가... 왜 나는 회사에 다녀야 하는가......슬픔.. ㅠㅠ 지독한 슬!픔!



아아 아무튼 나는 오늘 아침부터 남부터미널 다녀오느라 지쳤다. 출근하기도 전부터 지쳤어. 그렇지만 저녁엔 와인을 마실거니까 버티자. 금요일이니까 버티자. 동료가 책상에 가만히 놓아둔 샌드위치를 보며 버티자. 진하게 받아온 커피를 마시며 버티자. 버티는 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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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6-2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오늘은 금요일이에요^^
저는 방향 감각이 없어서 가끔 반대방향으로 가서 타곤 해요ㅎㅎ 버스든 지하철이든...
저번에 낯선 곳으로 외근 갔다가 일찍 끝나서 신나게 버스 탔는데 반대방향 종점까지 갔어요. 길을 잘 모르니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거든요ㅠㅠ 아아.. 저도 진단을 받으러 가야하는 걸까요.

다락방 2018-06-22 11:1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내려서 갈아탄 적 있어요. 진짜 방향감각이 형편없어서 건물 입구에 들어가면 출구를 못찾는 경우도 생겨요 ㅠㅠ 바부 ㅠㅠ 바부팅 ㅠㅠ

네, 금요일이니 힘내봅시다!
오늘은 열심히 일하자, 생각했지만 여전히 일 하기 싫어 딴짓만 하고 있어요. 헤헷. 얼른 주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토요일 낮에는 만두 넣고 라면 끓여 먹을 거예요. 꺅 >.< 맥주도 마실래요!

비연 2018-06-2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에 와인.. 으헝. 부러버요....

다락방 2018-06-22 13:55   좋아요 0 | URL
퇴근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