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지난 겨울에 블로그에 썼던 것입니다만, 보석 님 덕분에 생각나서 옮겨 봅니다.
-아이반 사우스올Ivan Southall의 [여우굴Fox Hole]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어느 정도 이상 어둡지 않고서야 눈에 띄지도 않는 게 에이브 전집의 특성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현실의 쓴맛' 을 보여주는 데 있어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초반부터 하여튼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다는 인상을 받으며 힘들게 외삼촌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그 다음날 반나절간 문자그대로 맛이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뭐든 생각했던 것과 다르군, 어째서 이렇게 상황이 피곤할까 하고 불편한 밤을 보낸 다음날 새벽, 여우가 사촌누이의 애완용 당닭을 물어가고 소년은 여우를 쫓다가 여우 굴(이 아니라 실은 금광 탐사용 갱도)에 빠집니다. 갈비뼈가 부러진 채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에게 외삼촌 부부와 사촌형제들은 좀 제정신이 아닌 행태를 보여 주고, 소년이 그 갱도에서 진짜로 금을 발견함으로써 일은 더 복잡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사실 이 소설의 정신없고 애매한 뒷마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재물에 혹했다가 힘겹게 원위치로 돌아오는 선량한 일반시민의 모습이라든지...이런 상황에서 서슴없이 여동생의 아들 대신 금을 선택할 것 같은 대악당도 사실은 인구 대비 비율로 볼 때 별로 높지 않다는 얘기예요. 소심하게 손을 뻗었다가 죽을 정도로 마음고생을 하고 자기 '팔자' 에 안주하고 마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소년은 그 날 진짜로 뭔가 배웠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쓴 사람([여우굴]의 작자소개에서 인용하면 '어느 작품이나 막다른 처지에 몰린 소년 소녀를 다루고 있다')의 대표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산골마을 힐즈엔드Hills End]. 저는 이 소설과 헨리 빈터펠트Henry Winterfeld의 [아이들만의 도시Timpetill-Die Stadt ohne Eltern]을 무의식적으로 늘 한 세트로 묶어 생각하곤 했는데, 재난 이후 빈 마을에 남은 아이들의 정치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 재난의 양상이 엄청나게 다른 만큼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빈터펠트의 책에서 팀페틸의 아이들이 버림받은 것은, 아이들의 장난에 신물이 난 이 마을 어른들이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슬쩍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고(이들은 결국 제 꾀에 넘어가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힐즈 엔드의 아이들이 버림받은 것은 임업이 주요 산업인 오스트레일리아 깡촌 마을(이름부터가...) 힐즈 엔드를 덮친 무시무시한 폭풍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이들만의 도시] 쪽이 좀 더 저연령을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고,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어린이 수준에 맞는 잔혹한 유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문판 [Trouble at Timpetill]
실은 처음 읽었을 당시에도 저런 유머에 도저히 웃을 수 없었지만, 다시 보면 웃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분개하게 됩니다. [산골마을 힐즈엔드]는 그냥 좀 조숙한 애들의 이야기지만 [아이들만의 도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리 대왕]의 라이트 버전입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몸집도 크고 정의감에 넘치는 토마스는, 그 신념이 조금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면 마구 폭주해 독재자가 될 게 분명한 캐릭터입니다-극과 극은 통한다고들 하잖아요. 지금은 그저, 제 주위에서 쓰이는 단어로 하자면 '그리폰(아무런 입체감 없이 정의롭기만 한 캐릭터를 제 주위에서는 그렇게 부릅니다)' 일 뿐이지만요. 심지어 화자인 만프레드 미하엘-이 친구는 어쨌든 자기 친구 토마스에게 홀딱 반해 있기 때문에-이 긍정적인 서술만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무자비한 정의가 표면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이 이야기가 그 유명한 독재자를 겪기 직전의 유럽에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건 좀 지나친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별로 손해볼 건 없겠지요. )
(그런 뜻에서 위 영문판 표지는 좀 재미있습니다. 묘사로 볼 때 저 셋은 만프레드와 마리안네와 하인츠이고, 토마스는 빠져 있습니다!)
힐즈 엔드의 폴과 에이드리언은, 둘 다 토마스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습니다(정말 다행입니다). 정의감이 넘치는 폴은 살짝 그리폰의 징후가 보입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냥 아이입니다. 에이드리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그늘에 살짝 눌려 있는 매력적인 소년으로,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캐릭터입니다-역시 [여우굴]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뭐든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상황과 어른들이 보여 주는 세상의 쓴맛에 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이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더 유사함에도 용케 [파리 대왕]식의 암흑에 빠지지 않고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폴과 에이드리언의 끊임없는 반발과 논쟁이 어떻게든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어른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일 뿐 에이드리언의 아버지 벤 피들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에 아이들 앞에서 화를 터뜨립니다. 겨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던 에이드리언이 다시 눌릴 찰나에 폴은 마을의 유지인 벤 피들러 씨에게 맞서 에이드리언을 변호합니다.
일레인 고드윈 선생의 설명으로 아이들의 노력을 수긍할 기분이 된 피들러 씨가, 폴과 에이드리언을 끌어안으며 감사를 표합니다만, 어쨌든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재건에는 아득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에이드리언은 한동안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 눌려 지낼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시작인 거죠. 그들에게는 그래도 미래가 있습니다.
일본어판 [子どもだけの町(아이들만의 거리)]
[산골마을 힐즈엔드]가 무엇보다 성장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에 비해, [아이들만의 도시]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갖고 있던 것만으로 일을 뚝딱 해결했고, 각별히 더 얻은 것도 없습니다. 양쪽 다 폐허에서의 소꼽놀이 같은 가난한 아기자기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만 팀페틸의 '가난'은 토마스라는 훌륭한 지도자 1인의 지시에서 나온 검약이라는 점이 또 마음에 걸리네요. 힐즈 엔드의 아이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싸운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나 [아이들만의 도시]에는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이 있습니다. 제 2인자인 만프레드가 실은 모든 일의 주축이며, 그것이 그의 엔지니어적 지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엔지니어가 되기를 꿈꾸는 만프레드 미하엘은 국민학생 수준으로는 좀 과할 정도의 공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주변의 아는 과학소년을 적당히 떠올려 주세요), 발전을 시도한 것도 전차를 움직인 것도 그였습니다. 여기에도 뭔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안 하겠습니다. 그저 짧게 한 마디만 : 공돌이에게 사랑을.
다음에는 피터 카터의 [칼과 십자가Madatan]에 대해서.
Trivia
1. [Hills End]는 1989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TV 시리즈로 제작된 적이 있습니다.
2. [Timpetill]의 북커버들을 볼 수 있는 곳 : 링크 1(Versandantiquariat Oliver Schlick) | 링크 2(eBay)
3. [Timpetill]의 불어판 [Les enfants de Timpelbach]와 제목이 같은 2007년작 영화가 있습니다. 내용이 대강 비슷한데 원작자로 빈터펠트의 이름이 안 보이는군요.
4. ABE 판 [아이들만의 도시]의 삽화는 정말 귀엽습니다. 위 링크 중 하나에 있는 독일어판의 Richard Kennedy가 그린 펜 삽화와 느낌이 비슷한데요. 혹시 정보를 아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