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이야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1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이글루스 렛츠리뷰를 통해 본 책이었습니다. [네 탓이야]는 일단 이전 렛츠리뷰 도서였던 [코끼리에게 물을]과 비교되었고, 불행히도 이 작가의 전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비교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네 탓이야]는 분명히 말해 어떤 의미로든 한 획을 그은 걸작이라고 생각되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는 비교될 수 없으며, 다른 작가의 미스터리 장단편과 비교해도 썩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그저 범작일 뿐입니다.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역시 고바야시라는 캐릭터가 완벽한 실패작이라는 점입니다. 이 캐릭터에서 실패한 브라운 신부(혹은 콜럼보 형사)의 향기 외에 어떤 것이 느껴지십니까? 사건도 탐정도 어설프고 한 마디로 보기 괴롭습니다.
또 하나는, 지적하려니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만, 이 책의 악의에서 '일상' 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여기 등장했던 캐릭터 중 누가 '우리 이웃' 입니까? 보통 '네 이웃의 악의를 조심하라' 는 슬로건을 들으면, 이것과는 좀 다른 양상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이 이야기들은 너무나 특수하고 또 특수해서 도저히 그 친근한 이웃의 얼굴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개별 단편 중에서 저 말에 부합하는 것은 [네 탓이야]와 [트러블메이커] 정도일 터, 이것들이 그나마 가장 일상에 가깝고 이웃의 악의 비슷한 것도 느껴집니다. 원서와 달리 [프레젠트] 대신 [네 탓이야]가 표제작이 된 데는 혹시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걸까 잠시 못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이 소설의 가장 큰 공은 하무라 아키라葉村晶라는 캐릭터의 발굴입니다. 하무라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가 겪는 사건들의 질이 고바야시 파트보다 좋습니다. 하무라 파트의 사건들을 보고 있자면 사노 요佐野洋의 [완전범죄연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고 보면 저 단편집의 사건들이 그 '이웃의 악의' 에 매우 충실한 작품들이었죠. 야릇하게 비틀린 뒷맛을 가진 훌륭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장르문학 인심이 후해졌는데 이런 건 좀 다시 나오지 않으려나요? 물론 와카타케 나나미가 저 정도로 잔혹한 배신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에 [네 탓이야]는 [완전범죄연구] 보다 훨씬 읽기 편합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어요. 일단은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장편을 좀 더 기대해 보고 싶군요. :]

마지막으로, 저는 저 표지에 찬성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아니, 요즘 한국 책표지 대부분에 찬성하기가 힘들어요. 사진이나 추상적인 오브젝트나 고전적인 일러스트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 소위 *개성있는* 일러스트를 사용하고자 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OTL 그런 뜻에서 일본판 표지 두 개 보시죠. 어느 쪽도 고르게 마음에 듭니다. 화나게도.


中央公論社 (1996년)


中央公論社 (1998년 문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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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지난 겨울에 블로그에 썼던 것입니다만, 보석 님 덕분에 생각나서 옮겨 봅니다.

-아이반 사우스올Ivan Southall의 [여우굴Fox Hole]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어느 정도 이상 어둡지 않고서야 눈에 띄지도 않는 게 에이브 전집의 특성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현실의 쓴맛' 을 보여주는 데 있어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초반부터 하여튼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다는 인상을 받으며 힘들게 외삼촌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그 다음날 반나절간 문자그대로 맛이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뭐든 생각했던 것과 다르군, 어째서 이렇게 상황이 피곤할까 하고 불편한 밤을 보낸 다음날 새벽, 여우가 사촌누이의 애완용 당닭을 물어가고 소년은 여우를 쫓다가 여우 굴(이 아니라 실은 금광 탐사용 갱도)에 빠집니다. 갈비뼈가 부러진 채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에게 외삼촌 부부와 사촌형제들은 좀 제정신이 아닌 행태를 보여 주고, 소년이 그 갱도에서 진짜로 금을 발견함으로써 일은 더 복잡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사실 이 소설의 정신없고 애매한 뒷마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재물에 혹했다가 힘겹게 원위치로 돌아오는 선량한 일반시민의 모습이라든지...이런 상황에서 서슴없이 여동생의 아들 대신 금을 선택할 것 같은 대악당도 사실은 인구 대비 비율로 볼 때 별로 높지 않다는 얘기예요. 소심하게 손을 뻗었다가 죽을 정도로 마음고생을 하고 자기 '팔자' 에 안주하고 마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소년은 그 날 진짜로 뭔가 배웠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쓴 사람([여우굴]의 작자소개에서 인용하면 '어느 작품이나 막다른 처지에 몰린 소년 소녀를 다루고 있다')의 대표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산골마을 힐즈엔드Hills End]. 저는 이 소설과 헨리 빈터펠트Henry Winterfeld의 [아이들만의 도시Timpetill-Die Stadt ohne Eltern]을 무의식적으로 늘 한 세트로 묶어 생각하곤 했는데, 재난 이후 빈 마을에 남은 아이들의 정치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 재난의 양상이 엄청나게 다른 만큼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빈터펠트의 책에서 팀페틸의 아이들이 버림받은 것은, 아이들의 장난에 신물이 난 이 마을 어른들이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슬쩍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고(이들은 결국 제 꾀에 넘어가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힐즈 엔드의 아이들이 버림받은 것은 임업이 주요 산업인 오스트레일리아 깡촌 마을(이름부터가...) 힐즈 엔드를 덮친 무시무시한 폭풍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이들만의 도시] 쪽이 좀 더 저연령을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고,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어린이 수준에 맞는 잔혹한 유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문판 [Trouble at Timpetill]

 실은 처음 읽었을 당시에도 저런 유머에 도저히 웃을 수 없었지만, 다시 보면 웃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분개하게 됩니다.  [산골마을 힐즈엔드]는 그냥 좀 조숙한 애들의 이야기지만 [아이들만의 도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리 대왕]의 라이트 버전입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몸집도 크고 정의감에 넘치는 토마스는, 그 신념이 조금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면 마구 폭주해 독재자가 될 게 분명한 캐릭터입니다-극과 극은 통한다고들 하잖아요. 지금은 그저, 제 주위에서 쓰이는 단어로 하자면 '그리폰(아무런 입체감 없이 정의롭기만 한 캐릭터를 제 주위에서는 그렇게 부릅니다)' 일 뿐이지만요. 심지어 화자인 만프레드 미하엘-이 친구는 어쨌든 자기 친구 토마스에게 홀딱 반해 있기 때문에-이 긍정적인 서술만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무자비한 정의가 표면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이 이야기가 그 유명한 독재자를 겪기 직전의 유럽에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건 좀 지나친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별로 손해볼 건 없겠지요. )

 (그런 뜻에서 위 영문판 표지는 좀 재미있습니다. 묘사로 볼 때 저 셋은 만프레드와 마리안네와 하인츠이고, 토마스는 빠져 있습니다!)

 힐즈 엔드의 폴과 에이드리언은, 둘 다 토마스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습니다(정말 다행입니다). 정의감이 넘치는 폴은 살짝 그리폰의 징후가 보입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냥 아이입니다. 에이드리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그늘에 살짝 눌려 있는 매력적인 소년으로,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캐릭터입니다-역시 [여우굴]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뭐든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상황과 어른들이 보여 주는 세상의 쓴맛에 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이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더 유사함에도 용케 [파리 대왕]식의 암흑에 빠지지 않고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폴과 에이드리언의 끊임없는 반발과 논쟁이 어떻게든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어른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일 뿐 에이드리언의 아버지 벤 피들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에 아이들 앞에서 화를 터뜨립니다. 겨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던 에이드리언이 다시 눌릴 찰나에 폴은 마을의 유지인 벤 피들러 씨에게 맞서 에이드리언을 변호합니다.

 일레인 고드윈 선생의 설명으로 아이들의 노력을 수긍할 기분이 된 피들러 씨가, 폴과 에이드리언을 끌어안으며 감사를 표합니다만, 어쨌든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재건에는 아득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에이드리언은 한동안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 눌려 지낼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시작인 거죠. 그들에게는 그래도 미래가 있습니다.



일본어판 [子どもだけの町(아이들만의 거리)]

 [산골마을 힐즈엔드]가 무엇보다 성장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에 비해, [아이들만의 도시]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갖고 있던 것만으로 일을 뚝딱 해결했고, 각별히 더 얻은 것도 없습니다. 양쪽 다 폐허에서의 소꼽놀이 같은 가난한 아기자기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만 팀페틸의 '가난'은 토마스라는 훌륭한 지도자 1인의 지시에서 나온 검약이라는 점이 또 마음에 걸리네요. 힐즈 엔드의 아이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싸운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나 [아이들만의 도시]에는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이 있습니다. 제 2인자인 만프레드가 실은 모든 일의 주축이며, 그것이 그의 엔지니어적 지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엔지니어가 되기를 꿈꾸는 만프레드 미하엘은 국민학생 수준으로는 좀 과할 정도의 공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주변의 아는 과학소년을 적당히 떠올려 주세요), 발전을 시도한 것도 전차를 움직인 것도 그였습니다. 여기에도 뭔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안 하겠습니다. 그저 짧게 한 마디만 : 공돌이에게 사랑을.

 다음에는 피터 카터의 [칼과 십자가Madatan]에 대해서.
 
Trivia
1. [Hills End]는 1989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TV 시리즈로 제작된 적이 있습니다.
2. [Timpetill]의 북커버들을 볼 수 있는 곳 : 링크 1(Versandantiquariat Oliver Schlick) | 링크 2(eBay)
 3. [Timpetill]의 불어판 [Les enfants de Timpelbach]와 제목이 같은 2007년작 영화가 있습니다. 내용이 대강 비슷한데 원작자로 빈터펠트의 이름이 안 보이는군요.

4. ABE 판 [아이들만의 도시]의 삽화는 정말 귀엽습니다. 위 링크 중 하나에 있는 독일어판의 Richard Kennedy가 그린 펜 삽화와 느낌이 비슷한데요. 혹시 정보를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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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8-09-1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만의 도시>를 하도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런 해석이 가능하군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eppie 2008-09-19 10:24   좋아요 0 | URL
어릴 때도 그랬지만, 나이가 들면서 소위 '정의로운 캐릭터' 에 점점 더 소름이 돋게 된 탓도 커요.

카스피 2008-09-1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브전집이라 혹시 이거 국내에 번역된적 있나요? 어디선가 아동용으로 본 기억이 나서요

eppie 2008-09-19 10:24   좋아요 0 | URL
아, 국내에 번역된 형식이 ABE 라는 전집이었어요. ^^;

카스피 2008-09-1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님,즐거운 추석보내세요^^

eppie 2008-09-19 10:2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께서도 즐거운 추석 보내셨기를! ...답이 너무 늦어버렸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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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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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 구합니다 리스트에 달아 주신 덧글을 보고 나서, 시간이 좀처럼 안 나서 발을 동동 구르다 지난 금요일에야 헌책방에 들릴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구한다고 썼던 건 [맥널리의 덫] 이었는데, 가 봤더니 말씀하신 [덫]과 [행운] 대신, [행운]과 [비밀] 이 있더라고요. [비밀]은 집에 있다는 걸 확실히 알기에 [행운] 쪽만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웬걸, 집에 와 보니 [비밀]과 [덫]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착각했던 거죠. ^ㅁ^;

 어쨌든 카스피 님 덕분에 [맥널리의 행운]을 구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모험]만 모으면 되네요. 아아 행복해라...v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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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8-08-0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좀 지났는데 다행이 책이 있었네요^^
저도 혹 행운을 보게 된다면 다시 알려드릴께요 ㅎㅎㅎ

eppie 2008-09-11 16:54   좋아요 0 | URL
엄청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감사합니다 ^^
카스피 님께서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 잘 풀릴 듯한 느낌이! +_+
 
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재미있습니다. 제 치우친 취향을 고려할 필요 없이 공정하게 재미있어요. 누구에게나 무난하게 추천 가능한 그늘 없는 블록버스터의 화사함을 가졌으면서도, 영화 [괴물]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생생함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분들께는 너무 생생해서 역효과가 날 것 같기도 하군요. :]

carny n. (pl. -nies) 《미·속어》
1 순회 오락장[쇼]에서 일하는 사람;순회 흥행 배우
2 순회 흥행[쇼](carnival)
3 순회 흥행단의 속어

 드라마 [Carnivàle]을 아는 사람이 이 책과 그 드라마를 비교하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대공황 시대라는 배경과 서커스라는 소재가 같고 주인공이 처음에 외부자로써 카니들과 만난다는 사실도 같아요. 어리버리한 남자애가 여자용 실크 기모노 잠옷을 입고 뛰쳐나가서 쪽팔림을 당하는 장면도 같죠. (...) 하지만 [Carnivàle]이 그 밑도 끝도 없는 꿀꿀함으로 유명한 데 비해 [코끼리에게 물을]은 유쾌합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사회적 및 경제적 어둠(주인공 제이콥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물려줄 게 없었던 이유는, 그가 돈을 저금했던 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이고 수의사였던 그가 그 상황에서 20년간 콩과 달걀만 받으면서 치료를 해 줬기 때문입니다) , 카니라는 특수한 집단 내부의 어둠('빨간불시키다' 라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온갖 종류의 비인권(어쨌든 프릭 쇼라는 게 대중적인 오락으로 존재하던 시대입니다!)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기본 정서는 신나는 모험담입니다. 주인공은 친구의 희생에 힘입어 악당을 응징하고 미녀를 쟁취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요?


 ...음, 이 대목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저의 나쁜 습관입니다. :] 하지만 이 소설에는 진짜로 무엇인가가 더 있습니다. 비교적 단선적인 모험담의 회상에 맛을 더하는 것은 배배꼬인 늙은이가 되어 버린 주인공의 현재 모습과(매력적입니다), 주 무대가 되는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끌고 온 단장 엉클 앨의 매혹적인 페르소나입니다. 루신다의 장례식에서 그가 단원들에게 제시했던 이벤트 내역을 보면서는 정말로 뿜을 뻔 했습니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캐릭터인 오거스트가 제대로 '매력적인 짐승'인 것도 좋았습니다. 기분 좋을 때는 매력이 넘치고 다음 순간에는 돌아서서 마누라를 패는...우린 이런 남자 너무 잘 알죠.


from HBO Drama [Carnivàle] (Episode 1 "Milfay" )
© Home Box Office, Inc.

 [Carnivàle]과의 중대한 차이점은 서커스의 규모입니다.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기차로 이동합니다! 실제로 서커스 기차Circus train는 소위 재즈 시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에 흔했던 이동방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실존하지 않았습니다만, 작가가 이 서커스단의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한(그리고 작중에서는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의, 혹은 엉클 앨의 최대 라이벌인)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Ringling Bros. and Barnum &amp; Bailey Circus의 기록을 보면 대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은 진짜로 코끼리 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그보다는 꽤 작은 규모였겠지만, 소설 중에서 사흘 체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의 분량을 보면 잠시 말이 막힐 정도입니다. (여담이지만 망한 서커스단의 기물을 사들이면서 발전해 온 엉클 앨의 일대기는, 유명한 바넘P. T. Barnum의 서커스단을 사들인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의 역사의 축소판이로군요. :] )

 결말의 '반전'에 대해서는...글쎄, 저는 이번에도 반전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 어쩌죠. 이런 제목을 가진 이런 내용의 책에서 어떤 다른 사건의 진상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_-; 아가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소설 제목으로도 쓰인 적 있는 '코끼리는 기억한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저걸 추측 못 할 수는 없어요. 문제의 장면을 앞뒤로 배치한 의도는 오히려 루스 렌델의 [유니스의 비밀Judgement in Stone]의 아찔한 첫 문장, '유니스 파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처럼 생각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오타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맞춤법 오류들(...)을 제외하면 각별히 눈에 걸리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로컬라이제이션 레벨이 좀 고르지 못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저는 시퀸sequin이 한국에서 주석 없이 쓰일 수 있는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_-;

 아 참, 작가 홈페이지아마존에서 원서 표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 표지가 드물게도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작중의 주요 아이템인 붉은 시퀸 의상이 들어가 있는 원서 표지가 한층 더 인상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

Trivia
1. 역시 제일 궁금했던 것은 자메이카 생강 추출물Jamaican Ginger Extract 사건의 개요였다는 점을 실토해야겠습니다. 인간 삽질의 역사란 길고도 깊군요. 미국 쪽 미디어를 찾아보면 저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데(얼마 전 제 주위에서 화제가 되었던 통조림 오염이라든지), 한국에서는 의외로 '이런 게 들었대! ' 하고 소동은 자주 납니다만 진짜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해를 끼칠 물건이 들어 있었다는 일은 별로 없지 않았나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 제보 바랍니다. (악의적으로 혹은 일부러 첨가한 독극물의 경우는 치지 않습니다. -_-; )

2. '코끼리 물당번' 이란 건 저 연배 미국 노인네들의 '베트남 스키부대' 인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_-;

3. 이 소설의 쿠치 쇼 장면은 좀 무서웠습니다. 원래 저 정도의 개인기(...)를 발휘하곤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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