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재미있습니다. 제 치우친 취향을 고려할 필요 없이 공정하게 재미있어요. 누구에게나 무난하게 추천 가능한 그늘 없는 블록버스터의 화사함을 가졌으면서도, 영화 [괴물]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생생함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분들께는 너무 생생해서 역효과가 날 것 같기도 하군요. :]

carny n. (pl. -nies) 《미·속어》
1 순회 오락장[쇼]에서 일하는 사람;순회 흥행 배우
2 순회 흥행[쇼](carnival)
3 순회 흥행단의 속어

 드라마 [Carnivàle]을 아는 사람이 이 책과 그 드라마를 비교하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대공황 시대라는 배경과 서커스라는 소재가 같고 주인공이 처음에 외부자로써 카니들과 만난다는 사실도 같아요. 어리버리한 남자애가 여자용 실크 기모노 잠옷을 입고 뛰쳐나가서 쪽팔림을 당하는 장면도 같죠. (...) 하지만 [Carnivàle]이 그 밑도 끝도 없는 꿀꿀함으로 유명한 데 비해 [코끼리에게 물을]은 유쾌합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사회적 및 경제적 어둠(주인공 제이콥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물려줄 게 없었던 이유는, 그가 돈을 저금했던 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이고 수의사였던 그가 그 상황에서 20년간 콩과 달걀만 받으면서 치료를 해 줬기 때문입니다) , 카니라는 특수한 집단 내부의 어둠('빨간불시키다' 라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온갖 종류의 비인권(어쨌든 프릭 쇼라는 게 대중적인 오락으로 존재하던 시대입니다!)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기본 정서는 신나는 모험담입니다. 주인공은 친구의 희생에 힘입어 악당을 응징하고 미녀를 쟁취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요?


 ...음, 이 대목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저의 나쁜 습관입니다. :] 하지만 이 소설에는 진짜로 무엇인가가 더 있습니다. 비교적 단선적인 모험담의 회상에 맛을 더하는 것은 배배꼬인 늙은이가 되어 버린 주인공의 현재 모습과(매력적입니다), 주 무대가 되는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끌고 온 단장 엉클 앨의 매혹적인 페르소나입니다. 루신다의 장례식에서 그가 단원들에게 제시했던 이벤트 내역을 보면서는 정말로 뿜을 뻔 했습니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캐릭터인 오거스트가 제대로 '매력적인 짐승'인 것도 좋았습니다. 기분 좋을 때는 매력이 넘치고 다음 순간에는 돌아서서 마누라를 패는...우린 이런 남자 너무 잘 알죠.


from HBO Drama [Carnivàle] (Episode 1 "Milfay" )
© Home Box Office, Inc.

 [Carnivàle]과의 중대한 차이점은 서커스의 규모입니다.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기차로 이동합니다! 실제로 서커스 기차Circus train는 소위 재즈 시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에 흔했던 이동방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실존하지 않았습니다만, 작가가 이 서커스단의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한(그리고 작중에서는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의, 혹은 엉클 앨의 최대 라이벌인)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Ringling Bros. and Barnum & Bailey Circus의 기록을 보면 대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은 진짜로 코끼리 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은 그보다는 꽤 작은 규모였겠지만, 소설 중에서 사흘 체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의 분량을 보면 잠시 말이 막힐 정도입니다. (여담이지만 망한 서커스단의 기물을 사들이면서 발전해 온 엉클 앨의 일대기는, 유명한 바넘P. T. Barnum의 서커스단을 사들인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의 역사의 축소판이로군요. :] )

 결말의 '반전'에 대해서는...글쎄, 저는 이번에도 반전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 어쩌죠. 이런 제목을 가진 이런 내용의 책에서 어떤 다른 사건의 진상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_-; 아가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소설 제목으로도 쓰인 적 있는 '코끼리는 기억한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저걸 추측 못 할 수는 없어요. 문제의 장면을 앞뒤로 배치한 의도는 오히려 루스 렌델의 [유니스의 비밀Judgement in Stone]의 아찔한 첫 문장, '유니스 파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처럼 생각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오타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맞춤법 오류들(...)을 제외하면 각별히 눈에 걸리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로컬라이제이션 레벨이 좀 고르지 못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저는 시퀸sequin이 한국에서 주석 없이 쓰일 수 있는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_-;

 아 참, 작가 홈페이지아마존에서 원서 표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 표지가 드물게도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작중의 주요 아이템인 붉은 시퀸 의상이 들어가 있는 원서 표지가 한층 더 인상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

Trivia
1. 역시 제일 궁금했던 것은 자메이카 생강 추출물Jamaican Ginger Extract 사건의 개요였다는 점을 실토해야겠습니다. 인간 삽질의 역사란 길고도 깊군요. 미국 쪽 미디어를 찾아보면 저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데(얼마 전 제 주위에서 화제가 되었던 통조림 오염이라든지), 한국에서는 의외로 '이런 게 들었대! ' 하고 소동은 자주 납니다만 진짜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해를 끼칠 물건이 들어 있었다는 일은 별로 없지 않았나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 제보 바랍니다. (악의적으로 혹은 일부러 첨가한 독극물의 경우는 치지 않습니다. -_-; )

2. '코끼리 물당번' 이란 건 저 연배 미국 노인네들의 '베트남 스키부대' 인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_-;

3. 이 소설의 쿠치 쇼 장면은 좀 무서웠습니다. 원래 저 정도의 개인기(...)를 발휘하곤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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