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몇달은 벼르다가 이제야 읽었는데, 제가 이 책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군요. 베버가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본주의는 크게 다릅니다. 베버에게는 금전욕 내지는 천민 자본주의, 유태인 자본주의 정도가 될 것입니다.

-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란, 규범성(윤리성)과 직업정신을 두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서구에서만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곧 독점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어준 그것이죠. 이러한 자본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종교개혁기의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는 실증적 연구논문입니다. 사회학 대가의 학문적 치밀함과 겸손함이 돋보이는 분석과 문체였습니다.

- 저는 이 독서후기를 [종교] 카테고리로 분류하고자 합니다. 자본주의 자체 보다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금욕주의와 직업정신(소명의식)이 어떻게 나오는지, 교리적 동인과 심리적 동인을 찾는 과정, 감탄할 만 합니다.

- 아래는 필요에 따라 발췌 정리한 글입니다. 어려운 책 읽느라, 소제목과 코멘트를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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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서문 ]

- 세상 어디에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발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합리적인 체계는 오로지 서구에만 존재한다.
(예)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 (그리스식) 수학적 기초를 결여
인도의 기하학 - (그리스식) 역학과 물리학의 기초를 결여
인도의 자연과학 - (르네상스식) 실험방법을 결여
인도의 약학 - 생화학적 토대를 결여
중국의 역사연구 - (투키디데스식) 방법의 결여
인도의 정치사상 - (아리스토텔레스식) 방법론 결여
근동의 성문화 - (로마법과 같은) 체계적 형식 결여
예술 - 화성음악, 대위법과 화음, 반음계와 미세음계, 기보체계, 등이 결여
건축 - 건물의 구성원칙, 지붕공간의 합리적 사용, 등이 결여
인쇄 -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결여
고등교육 - 대학, 아카데미의 결여
정당 - 합리적 규칙이나 법에 따른 운영의 결여

- 마찬가지 관점에서, 세상 어디에나 자본주의(이윤 추구, 소유욕)가 있어왔지만,
합리적 이윤추구(자본주의 정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시민),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은 서구에만 존재했다. (* 여기서 합리성이란 투기성, 모험성의 반대)

- 이러한 서구만의 합리성은 기술, 법, 행정의 계산가능성(예측가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무역 자본주의와 달리, 고정자본을 갖추고 계산의 확실성을 지닌 합리적 기업
합리적 행위를 채택하는 인간들의 능력과 성향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적 관념(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기인한다.

* 아시아에 대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비교점을 제시하는 정도에서 만족한다.

[ II. 문제 ]

[ 1. 종파와 계층 ]
- 종교개혁기, 자본 소유자와 경영자층, 상급의 숙련 노동자층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이다. 원인이 뭘까?

(전통적 설명)
- 부유한 지역과 도시가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 가톨릭의 비세속성때문이다. 가톨릭은 수공업에 잔존하려는 경향이 보다 크며,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공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도 비세속적이다.
- 프로테스탄트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영리활동에 몰두한다. (예) 러시아의 폴란드인,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 영국의 비국교도들, 영국의 퀘이커교도들, 유태인들. / 반대 사례도 존재한다. (예) 독일의 가톨릭, 영국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 결국, 프로테스탄트는 경제적 합리주의를 향한 특수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 2. 자본주의 정신 ]
- 그런데, 프로테스탄트적인 종교적 생활규제가 영리감각의 발전과 관련이 있을까?

(금전욕이 아닌 에토스로서의 자본주의 정신)
- 벤자민 프랭클린의 주장 "시간이 돈이다. 신용이 돈이다. 돈은 돈을 낳는다. 근면과 검소, 시간 엄수가 출세의 지름길이다." 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일종의 에토스였다. 그는 영리활동을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겼다.
- 이러한 에토스는 자본주의가 존재했던 중국, 인도, 바빌론, 등에는 없었던, 서구에만 독특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자연도태' 과정을 통해 이러한 에토스를 만들어내지만, 초기에는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주의 발달'에 앞서 이미 존재했다.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수공업 자본주의 하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것은, 유물론적 관점과는 정반대이다.)

(자본주의 정신의 필요조건)
- 영리활동의 규범성: 자본주의 정신은 금전욕과는 다른 것이다. (금전욕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 직업정신: 자본주의의 물질적 조건(성과급 혹은 저임금)을 변화시켜도, 노동자들은 되도록 편안하고 적게 일해서 정해진 보수를 받고자 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노동자를 구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특수한 경향을 내재하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예) 러다이트 운동 (* 저곡가정책)
 
[ 3. 루터의 직업개념, 탐구의 과제 ]
- 자본주의 정신의 필요조건(규범성, 직업정신)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프로테스탄트와 직업정신의 탄생)
- 독일어의 직업, Beruf의 어원: 신으로부터 받은 임무
-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인 일상의 노동, 현세적 의무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 직업은 인간이 신의 섭리롤 받은 것이며 그 섭리에 순응하여야 한다. (비) 수도승적 금욕주의
- (이러한 직업정신은 그저 자본주의 정신의 모태가 되었을 뿐이다. 실제적으로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 III.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
- 종교적 영향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 1.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

-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체: 칼뱅주의, 경건주의, 메서디즘, 침례교

(금욕주의의 심리적 동인과 신앙적 기반 - 칼뱅주의의 예정설)
- 중세의 평신도들은 신의 은총이 자기 자신의 노력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고 생각하였고, 성례의 은총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주며, 사제가 죄를 사해 주고 면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칼뱅은, 구원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과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중세적) 참회, 고해성사, 성례(세례), 예배, 교회의 필요성을 부정하였고, 이런 것들은 감정적, 마술적인 요소로서 구원에 무익하다고 주장했다.
- 구원에 대한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신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예정설의 진화, 금욕주의)
- 교리로서의 예정설은, 단지 구원에의 확신(종교적 감성)을 바라는 평신도들과 결합하면서 타협하게 된다.
- 예정설의 교리는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평신도들에게 요구한다. 자신을 선택된 자로 확신하고 모든 의심을 버릴 것, 자기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부단한 직업노동. (중세 가톨릭에서) 신도 개인적 차원에서 요구되던 일상의 선행은, 생활방식의 일부로 격상된다. 과거 수도승이 행하던 금욕이 평신도에게 확장된다.
- 생활방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금욕주의가 탄생한다.

(또 다른 축, 경건주의)
- 칼뱅의 예정설과 더불어, 구원의 확신을 동시에 추구했던 분파. 칼뱅주의(신 중심의 사고)와 루터주의(체계적인 생활방식)의 영향을 고루 받았다.
- 예정설은 숙명론으로 변화했고, 교회는 부정했지만 가정집회를 통해서 일종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 구원에 대한 확신을 추구하면서, 일상생활에서의 금욕주의는 더욱 강화되었고, 직업노동도 강조되었다.

(경건주의의 발전, 메서디즘)
- 대륙 경건주의의 영미분파.
- 확신이라는 주관적 측면에 더욱 매몰되면서, 개인적인 참회나 성별, 등을 강조하며 칼뱅의 예정설은 거의 무시되었다.

(침례교와 침례파, 메노파, 퀘이커교)
- 가시적 교회를 거부하고 종파, 종교공동체를 중요시했다. 퀘이커교의 경우는 성례도 부정한다.
- 그러나 신에 대한 봉사를 생활체계로 공식화하기 보다는, 내면적인 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신의 말씀에 귀기울이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내면에 대한 강조는 품행의 관리, 금욕으로 이어졌다.

- 위와 같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은 수도원에 갇혀 있던 금욕주의를 생활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 2.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
- 일반화된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정신 - 영리활동의 규범성, 직업정신 - 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 금욕주의는 시간 낭비, 사교, 무익한 잡담, 사치, 8시간 이상의 수면시간을 금지했다. 교회의 예술행사,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했고, 복장도 규제했다. 대신, 노동은 오래 전부터 인정된 금욕적 수단이었다. 신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신분과 직업이 주어졌으며, 이에 대한 노동은 하나의 의무였다. 즉,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합리적 직업노동이 바로 신이 원하는 바이다.
- 금욕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한 노동을 장려했다. 신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이윤의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에, 직업의무의 행사로서 부의 추구는 허용이 아니라 명령된 것이었다. 다만, 재산을 가지고 휴식하는 것, 향락하는 것을 금지했다.
- (프로테스탄티즘과 유태교의 경제윤리는 질적으로 다른다. 그것은 모험가 자본주의요, 천민 자본주의다.)

(금욕주의와 자본의 형성)
- 금욕주의는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했으며, 이로 인해 쉽게 자본형성에 이를 수 있었다.

(딜레마)
- 금욕주의가 낳은 근면과 절약이 부를 창조하고, 이러한 부가 오히려 세속적 애착을 증가시켰다.
- 금욕으로 인한 대규모 자본형성은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금욕주의는 사라졌다.

*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 알렉산더제국 이후.
* 투키디데스: 그리스의 역사가. 역사서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다.
* 에토스: 민족적, 사회적 관습. (반) 파토스
* 편람: 보기에 편리하도록 간추린 책
* 정초하다: 기초를 놓다.
* 성례(세례), 성령(신과 인간의 매개체), 성도(신적 성격을 가진 신도), 성별(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물건,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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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제한은 고리대의 폐해를 막는 좋은 장치다. 하지만, 이자율을 무한정 낮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법정 이자율 이하로는 돈을 빌리기 어려울 만큼 신용이 나쁜 이들은 아예 돈줄이 끊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서양 속담은 이처럼 좋은 뜻을 가진 정부의 시장 개입이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차라리 선의를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대안은 늘 있었다. 시장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별도의 신용대출 창구를 만드는 게 좋은 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들은 대부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최저임금제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악용해 임금을 무한정 깎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고용주에겐 고용을 포기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잘못 운용되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최저임금제가 제구실을 하려면 실업자 대책이 충분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도 임금을 깎기보다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움직인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의 ‘기간제 고용 2년 제한’은 고용주로 하여금 2년간 일해 숙련도가 쌓인 사람을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뽑을지, 아니면 그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계속 쓸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 결과를 보면, 법이 시행된 뒤 1년간 비정규직은 22만명 줄고, 정규직은 44만명 늘었다.

그런데 정부가 7월 확대 시행을 앞둔 이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한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대거 해고할까 걱정해서란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정규직 전환 채용을 포기하는 기업들도 일감이 있는 한 사람을 쓴다. 문제는 계약이 끝난 노동자들이 회사를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악용하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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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생활문화> 이흥재, 신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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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생활문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박명희 외 지음 / 교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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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브로노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과학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다른 한 저작 ‘인간의 유래’ 역시 그것에 못지않은 명저라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지며 그 근원은 먼 옛날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요컨대 다윈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동의 조상을 갖는, 결국은 생물학적 진화의 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개 생물종에 불과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찬란한 현대문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여기 한 탁월한 석학의 설명이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동물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자기 환경에 갇혀 있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상상력, 이성, 정서적 예민성과 강인성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일련의 발명을 통해 자기 환경을 개조해온 것은 일종의 다른 종류의 진화, 즉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인 진화인 것이다. 나는 그 문화적인 산봉우리의 연속을 ‘인간의 등정’이라 부른다.” 
 
제이콥 브로노스키(Jacob Bronowski)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는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와 크게 대조적이다. 다윈이 생물학적 인간의 근원을 밝혀서 ‘겸손한 인간’의 면모를 제시했다고 한다면 브로노스키는 문화적 인간의 역사를 설파해서 ‘인간의 성공’을 자축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한 인물이 어느 한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는 경우는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섭렵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다. 더욱이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물리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동시에 시인이자 극작가로도 활동했고 또한 계관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연구가로서도 탁월했던 그런 인물이라면 그는 ‘석학 중의 석학’으로 불려도 별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브로노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서 1908년 태생의 그를 사람들은 ‘20세기의 르네상스인’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서 여러 권의 명저를 남기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하지만 브로노스키를 정녕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한 권의 책 ‘인간 등정의 발자취’ 때문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원래 그가 같은 제목으로 제작했던 13부작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다시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이 TV 프로그램은 1973년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되었는데 이듬해 다시 책으로 발간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작업에 너무 열정을 쏟았던 나머지 그는 책이 간행된 그 해에 6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러면 브로노스키는 이 책에서 과연 어떤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인류문명을 과학이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문명이란 지식과 지식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원래 지식(knowledge)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인류문명사의 근간은 곧 과학의 역사이며 그것이 바로 그가 강조했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브로노스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예술·문학·종교·기술·건축 등 인간 문화의 전반을 두루 망라한다. 그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이런 문화와 문명의 인류역사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전문적이고 난해한 과학적인 해설로서가 아니라 유려한 문학적 비유가 곳곳에 녹아있는 휴머니스트의 필체로서 말이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의 삼림이 초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초원에 노출된 유인원의 일부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서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진화하였다.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두 손을 사용해서 연장과 무기를 움켜쥘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초식성이었던 식성은 점차 잡식성으로 바뀌었으며 그렇게 되자 식물만을 섭취하던 때에 비해서 여가 시간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원시인류는 그런 남겨진 시간 동안에 협동으로 더 큰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가 발달하고 이에 따라 두뇌의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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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마틴 부버의 ‘나와 너’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관계 메말라가
 
‘나와 너(Ich und Du, 1923)’는 언뜻 보기에 ‘만만한’ 책같이 보인다. 책이 얄팍한 데다가 ‘나와 너’라는 제목에서는 연애소설 같은 가벼움마저 풍긴다. 하지만 산뜻한 마음으로 책을 펴든 독자라면 식겁할지도 모르겠다. 책장 가득 철학의 난해함이 시의 오묘함 속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철학적 산문 시(詩)에 가깝다.

하지만 ‘나와 너’에는 마약 같은 매력이 있다. 독자는 쥐나는 머리와 먹먹한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좀처럼 책을 던져버리지 못할 터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종교적인 절정체험을 논리와 언어로 풀어내는 재주를 지닌 철학자다. 표현을 바꾸어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의 핵심 주장은 일상에서 맛보기 힘든 높은 삶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에서 부버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부버는 ‘나-너’와 ‘나-그것’이란 두 개의 근원어로 세상을 분석한다. 부버가 직접 드는 예로 근원어를 설명해 보자. 우리는 흔히 나무와 ‘나-그것’의 관계로 만난다. 생물 종(種)의 하나로 나무를 분류하기도 하고 가구 재료로 쓰기 위해 몇 그루인지 수로 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무와 ‘나-너’ 관계로 만날 때도 있다. 나에게 나무가 단순히 감상하고 이용하는 ‘그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바쳐 사랑하는 ‘너’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부버가 말하려는 바를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에 빗대어 풀어보자. 어린왕자는 자기가 소중하게 가꾸던 꽃이 여느 장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데 실망했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장미는 자신이 쏟았던 그 정성 덕분에 그에게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버는 “‘그것’은 번데기요, ‘너’는 나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제든 ‘너’로 내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다시 ‘그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도 그렇다. 부버에 따르면 ‘나-그것’으로 서로를 대하는 사이에서는 진정한 ‘만남(Begegnung)’은 없다. 인사를 예로 들어보자.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에게 우리는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안녕(安寧)’에 정말 관심을 갖고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네 인사는 따분하고 틀에 박혀 있다. ‘안녕!’이라는 말 속에 당연히 담아야 할 상대방의 안전과 평화를 비는 마음이 얼마나 막연하게 느껴지는가? 카피르(Kaffir) 사람이 쓰는 신선한 인사말과 비교해 보라. 그네들은 사람을 만날 때 자기 몸을 상대 몸에 꼭 붙이면서 ‘자네가 보이네!’라고 말한다. 미국 인디언은 더욱 구성지고도 고상하게 ‘그대여! 내 냄새를 맡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모든 사람과 이렇듯 친근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대도시 상가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상대와 맺는 관계는 대개 ‘나-그것’ 차원에 그친다. 서로 ‘이용’하고 ‘경험’하는 수준에서만 상대를 대한다는 뜻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경제로 복잡하게 얽힌 거대 국가는 반드시 ‘그것’의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버는 유능한 정치가나 경제인일수록 사람을 ‘사업이나 목표를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지녔는지’로만 가늠하고 대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몰인정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사람 하나하나를 ‘너’로 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는 “당장 그네들 머리 위에서 무너지고 말 터”이다. 하나하나의 사정을 다 봐준다면 원칙도 정의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사람을 모두 ‘그것’으로 보고 법과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나-그것’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사회생활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자연과학에서 연구를 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인과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성과와 책임을 나눈다는 뜻이다. 법칙과 원칙에 맞는지를 살펴서 뭐가 옳고 그른지를 가린다. 그래야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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