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 -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
미셸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지음, 김태황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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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첫 번째 지은이인 미셸 아글리에타는 ‘조절이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이다. 1970년대 중후반 등장한 조절이론은 훗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신고전파 경제학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이론이었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반기를 들면서, 그 이론의 근저에 자리잡은 자본주의에 대한 파국론적 인식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 당시 이 이론의 주요 관심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동안 핵심부 국가들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제도화된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타협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관리, 조절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는가, 그리고 그 모순이 새로운 위기의 형태로 진화하였는가에 모아졌었다. 곧 자본주의는 우파들의 바램처럼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지만, 좌파들의 소망처럼 곧 없어질 체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곧 조절이론은 이전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지속적인 자본축적의 재생산을 가능케 했던 조절 기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기조정적이지도 않고 그 자체 운동만으로 파국으로 귀결되지도 않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2007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 아글리에타의 이론적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이론적 패러다임이든 30년에 걸쳐 반대자들의 공박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론의 내구성과 동시에 유연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장기간에 걸쳐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해야 하는 이론 자체가 변화해야 함을 말한다.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서 큰 기대를 갖고 읽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아글리에타 자신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론적 변신 중 일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후한 점수를 주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이론적 변화의 방향이 애초에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로부터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그 이론이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조절이론이 관심을 끌었던 것도 당시 좌우파 경제이론의 무능력과 이데올로기적 맹목성과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등장 초기에 조절이론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파국론적 경제 인식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맑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잉여가치론과 계급 모순의 중심성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젊고 유능한 비판적 경제학자들을 그 이론을 확대재생산하는 데에 충원할 수 있었다. 조절이론은 당시까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목을 잡고 있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전망 제시라는 이데올로기적 족쇄를 벗어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주의적 에피스테메 내부에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아마 다른 많은 이들도) 조절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그 어떤 아쉬움을 동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국적 분석단위, 강한 법칙 지향성, 서구에 국한된 분석 등은 과연 이 이론적 패러다임이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 유용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다. 조절이론을 갖고 신국제분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 등 신흥공업국의 현실을 불완전하게나마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던 리피에츠는 브와이예 같은 또 다른 조절이론가들에 의해 조절이론의 문제의식을 전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브와이예 같은 이의 저작은 제도주의자들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와 친화성을 보이면서, 일국적 분석단위를 고수하면서도 맑스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져 완전히 절연하게 됨으로써 조절이론가 중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모아서 하는 이가 되어 버렸다. 또한 초기에는 맑스주의적 가정에 비교적 충실하였던 리피에츠나 아글리에타 등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본격적 분석은 일국적 문제들이 충실히 설명된 연후에나 설명될 수 있는 문제라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해 왔다. 나중에 아글리에타는 네그리 등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대표적 저작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음에 대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Michel Aglietta (1994). "De 'Regulation et crises du capitalisme' a la 'Violence de la monnaie' et au-dela: Interview de T. Negri, F. Sebai et C. Vercellone," Ecole de la regulation et critique de la raison economique. L'Harmantan, pp. 47-70. 이 내용은 문원에서 출판된 아글리에타의 책에 실린 전창환 선생의 역자서문에서인가 본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어쨌든 미샬레나 미스트랄 같은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글리에타, 리피에츠, 브와이예 등의 파리학파 조절이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분석에는 그닥 기여한 바가 없는 셈이다. 이 문제는 프랑수아 셰네를 비롯한 그르노블 학파에 의해 주도적으로 탐구되고 있다.

2.
아글리에타가 로랑 베레비와 함께 쓴 이 책은 따라서 이전에 그가 표한 아쉬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함을 해소해 주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책은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수용하면서도 (2부), 그러한 일국적 정책들이 어떻게 상호의존적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 곧 “세계적 성장체제”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는가 (3부)를 탐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이전까지 조절이론의 외부로 남아 있던 부분으로 그 이론적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또한 구체적인 이론적 기여로서, 미국의 경상적자 누적 – 자국의 생산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소비 수준을 향유하는 미국 국민들의 생활양식과 저축 부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자본 흐름이 미국으로 집중되는 현상 - 으로 집약된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형의 문제에 대한 실증적 탐구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전환을 가능케 한 동력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파탄시킨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장기간의 수요 부족과 금융 거품으로 인한 구조적인 초과공급”의 결합(34)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 지속”되면서 고객들의 가격 결정력이 강화됨으로써 기업에게는 이윤 압박이 심해지고, 신흥국들에게는 달러보유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함으로써 달러 채무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미국에 대한 채권자 신분으로 변신한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은 순상품 수출국이면서도 채권국의 신분으로서 세계경제의 강력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198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주주가치의 확장, 곧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화이다. 이 두 가지 주요 변동은 결합하여 소득 불평등의 확장, 노동자 계급의 정치력 약화, 가계 채무의 증가 등을 초래하였다.

이는 조절이론이 출현했던 1970년대 당시의 경제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다. 당시 조절이론의 분석 중심에는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 곧 일국 내부의 임노동 관계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쇄도에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가속화된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의 신흥국의 세력 강화가 결합함으로써 이전의 분석의 초점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주변화되어 버린다. 현실에서의 정치력 쇠퇴가 이론에서의 중요성 감소로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도저히 찜찜함을 버릴 수 없다. 문제는 무엇보다 체제 자체가 그 오작동 - 혹은 지속불가능한 작동 - 에도 불구하고, 체제 변환의 가능성, 혹은 그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의 형성 문제는 분석의 지평 내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 분석이 잠재적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수는 있어도 혁명과 전쟁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격발 직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동산 시장의 폭락 가능성 등이 시사되고 있지만, 그로 인한 경제외적 여파 등은 이 책의 지평에서는 포착될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딱히 새롭다 할만한 약점은 아니다. 조절이론은 애초부터 사회운동이나 전쟁 등의 전개에 대한 사후적 설명 가능성은 갖고 있었을지언정 그 체제 불안의 요소가 제도적 총체 내부로 어떻게 매개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석하는 대상 현실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전통적 조절이론 간의 연속성이라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세계적 성장체제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조절이론과 분석단위 상에서의 상이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고수함으로써 연속성을 보인다. 개별 조절이론가마다 개념 사용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성장체제(growth regime) 혹은 발전양식(mode of development)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현실적 결합체로 개념화된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 그리고 조절양식을 구성하는 구조적 (제도적) 형태와 같이 이전의 조절이론이 개발해온 정치한 개념적 장치들을 사용하지 않지만, 성장체제라는 개념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적용한다.

또한 초기 아글리에타의 조절이론에서처럼 사회적 규범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이 점은 특히 일국적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다루는 2부에서 부각된다. 유럽인들은 효율성과 형평성을 상호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244)이나, 이기적 개인들 간의 계약과 이 “계약을 합법화하는 법규와 소송을 재판하는 사법기구가 시장의 바탕을 이루는” 서구의 시장경제와 “개인적 행위를 결정할 때 공동선을 고려함으로써 계약의 불완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중국 시장 사회주의 경제의 유교적 사회 규범 (309-310) 간의 대비에서 잘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지은이들이 중국 자본주의를 평가하면서 유교 자본주의에 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교 자본주의론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꽤 번창하였으나,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로 학계에서는 자취를 감춰 버린 바 있다. 하지만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결정체인 워싱턴 컨센서스가 시효만료된 오늘날 다시금 이 이론이 등장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받았다. 사실 유교 자본주의론은 싱가포르의 리콴유처럼 유교는 쥐뿔도 모르는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보편적 인권 개념을 서구에 특유한 규범 정도로 상대화함으로써 자신의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21세기 초반 세계 경제위기 이후 나온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서구 중도좌파의 긍정적 평가라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받을 만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사실 이는 조절이론 뿐만 아니라, 일부 서구 좌파 이론들이 때때로 나타내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열광의 연장일 수도 있다. 1960-70년대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열광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 표명의 21세기 초반 버전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세히 좀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글리에타는 New Left Review 2008년 11/12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의 조절이론이 브로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었을 당시 나는 그 브로델의 영향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브로델과 조절이론 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중국을 다루면서 “시장경제가 위계적인 중앙 집권 국가에 의해 발전되고 또 조절되는 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에 부합한다”(308)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중국에 자본주의가 번성했던 것은 시기적으로 유럽보다 한참 앞서는 1000년대 무렵부터 1세기 정도의 기간으로서 송나라(960-1279) 때” (309)라고 말한다. 유럽보다 앞서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존재했다는 이 주장은 서구 좌파들이 그 동안 기반하고 있던 맑스주의적 인식에서는 상당히 낯선 주장이지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소개된 브로델의 3층구도 내에서의 자본주의의 개념화를 이용한다면 정당화 가능한 주장이다. 곧 인간의 경제는 맨 아래의 물질생활, 2층의 시장경제, 3층의 자본주의의 중첩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규정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본-임노동 관계가 아니라, 시장의 작동에 개입하는 권력이자 위계의 최정상을 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브로델 식으로 파악하면 이처럼 송대에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발달된 상업 경제를 자본주의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관은 아리기의 Adam Smith in Beijing이나 스기하라 카오루의 산업혁명과 근면혁명의 비교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굴러가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의 거처이면서도 기저의 물질문명에 녹아들어 가 있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축적(시장)은 조절(정치권력, 제도, 규범) 없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조절이론의 기본 명제와 통하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개념화는 참신함만큼이나 불편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 토론이 어떻게 조직될지, 과연 조직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관심을 갖고 지켜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

4.
이 책은 그리 좌파적인 책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기존 제도를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측면에서 현 제도 바깥에 위치해 있는 세력들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체제 이후의 대안이 제시되지만,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주체는 이미 분석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곧 현 제도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세력들이다. 준달러 본위제에서 복수통화 본위제로의 이행, IMF의 개혁, 미국의 내수 억제와 신흥국들의 내수 중심 체제로의 전환, 각국 경제정책의 국제적 조율 등의 정책 제안 등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가도 계급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급 문제는 주변화되는 이론적 역설이 몹시도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 책을 읽은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비극적 패배를 맞은 쌍용자동차 파업은 사실 이 책에서 분석된 금융화의 전개, 중국의 성장, 세계적 수준에서의 과잉투자로 인한 초과 생산 설비라는 맥락과 떼어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와 현 정권의 야만성에 대한 구체적 분석 없이 파업 노동자들, 그리고 남한 좌파 전체의 이 패배를 세계적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겠지만, 이 책에서의 정책 제안을 머리 속으로 수긍하는 것과 현재 느끼는 분노 간의 괴리, 그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론적 실천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해 더 깊이 빠져드는 무기력의 늪에서 질식의 공포는 커져만 간다.

책 내용에 대한 세세한 정리는 관두고, 느낌만 정리하면 이렇다. 이 책은 내가 조절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와 실망을 전도시킨 책이다. 나는 애초에 조절이론이 임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자본주의의 축적과 조절의 동학 속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 부재에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경제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제시하지만, 계급 분석은 완전히 주변화시켜 버린다. 물론 조절이론이 아글리에타만의 것도 아니고, 다른 훌륭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 이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읽고 나서는 지적 희열보다는 공허감이 앞서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사족  

개인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 출판은 그 값어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훌륭하고, 오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어떻게 세계성장체제 전체의 재구성에 기여했는 지에 관한 이론화 자체는 무척 새롭다. 현 경제 위기에 대하여 아글리에타가 대중적인 책을 하나 쓴 모양인데, 그것도 좀 번역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추기 2009. 8. 13] 

2009년초부터 미국 가계 저축률이 급상승했다는 글. 이 책의 지은이들이 제시하는 글로벌 불균형 시정의 필요조건인 미국 저축률의 상승에 관한 마틴 펠트스타인의 분석.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10532 

 

[추기 2009. 9. 21.] 

G20 정상회의에서 세계경제 불균형을 다룬다는 기사. http://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unit/377937.html  

 

[추기 2009. 11. 30] 

아글리에타에 실망한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다. 프랑수아 셰스네[르몽드 디폴로마디티크 한국판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셰네'가 아니라 '셰스네'가 맞다고 한다]가 최근에 프랑스에서 나온 경제위기 관련 저작들에 대한 비판을 실어 놓았다.  셰스네가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는 프레드릭 로르동의 <과도한 위기 - 파산한 세계의 재건>과 앙드레 오를레앙의 <도취에서 공포로: 금융위기를 생각한다>가 무척 보고 싶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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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08-1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llnaru님 안녕하세요. 출판사나 옮긴이들이 보기에, 제 서평은 정말 짜증날 것 같아요. 이 어려운 책을 고생고생하며 한국어로 번역 출판했는데, 책 재미없다고 광고하고 있으니까요. 이 책 읽는데 사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한 달이 좀 못 걸렸는데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읽었을 때 재미있게 느꼈던 부분들 같은 것은 서평에 못 쓴 것 같아요.

<<좌파 현대 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보다는 엄청 재미없고 더 이해하기 힘든 책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사실 그 책은 조절이론 비판이 지나치게 단순명쾌한 데에 비해 지은이 자신의 주장은 별 것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지루하지만 지은이들의 목소리는 확실하지요. 저는 그 주장에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한테 듣고 싶었던 얘기가 그것만은 아닌데...'라고 투덜거리고 있는 셈이구요.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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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아마 현재까지 한국의 경제학자 중에서 장하준 교수만큼이나 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경제학자를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은 아마도 경제란 게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상생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학문인 경제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수식과 모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경제학자들의 학문은 현실 정치의 역관계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읽는 경제서적이라고 해야 고작 재테크 관련 서적밖에 없었던 와중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장하준의 이 책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데에는, 2007년부터 본격화된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퇴조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계적 시류와 동떨어져서 이 책을 국방부 금지도서 목록에 올려놓고 여전히 신자유주의만을 - 그것도 아주 질 나쁜 신자유주의를 - 고집하는 남한의 갑갑한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세계경제의 역사와 제반 경제이론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윤색해온 세계 자본주의의 공식적 역사 서술의 부당함을 일반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현재의 선진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 칭하면서 선진국들의 발전의 실제 과거 역사와 그들이 현재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자유무역의 원리 간의 이율배반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요약하면,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은 보호무역을 통한 유치산업의 보호와 선진기술의 탈법적 도입 등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이들이 자유무역과 지적 재산권 보호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이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무역이 후진국들에게 경제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선진국들과 주류 경제학의 주장은 그들의 실제 경제발전의 경험과 상반되는 것이며, 후진국들과의 무역을 통해서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후진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학교 가지 말고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브라질 대표팀과 여중생들이 축구시합을 하는 것만큼이나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나 헥셔-올린 공리 등에 기반한 자유무역 원리, 또 그에 기반해 진행되는 세계화는 개별 국민경제가 경제발전의 미래를 위해 그 어떤 준비와 육성을 하는 것을 애초부터 부정하고, 현재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가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후진국에 부과되는 불공정한 룰은 비단 자유무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국영기업의 사유화, 지적 재산권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불공정한 룰은 부과되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의 비판을 반박하는 5장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장하준은 공공성의 확장, 수호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장의 서두에서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의 작업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으로 칭한다. 아마도 이 말이 갈브레이스 뿐만 아니라, 장하준의 작업을 가장 잘 기술하는 말일 것 같다. 장하준은 다방면에서 일관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시장 지상주의의 폐해와 부조리함, 불공정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전면적 계획경제를 통한 시장의 철폐를 이야기했던 과거 현실 사회주의나, 후진국의 보호주의에 대한 전면적 관용을 내세우는 자력갱생 (autarky) 같은 급진적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4장 끝부분에서 인용한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착취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존 로빈슨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장하준의 이러한 현실 인식을 뒷받침해준다. 급진적 대안 대신 장하준은 책 전체에 걸쳐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그로부터 초래된 경쟁의 부정적 결과의 규제 간의 올바른 “균형”을 강조한다. 특히 지적 재산권을 다룬 6장에서 이 점은 무척 두드러진다.  


3.
그렇다면 이런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스스로의 반성과 교정을 희망한다.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케인즈의 일화를 인용한다. 자신이 비일관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이 인용은 현재 공공정책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오바마 정부의 경제 각료들이 클린턴 집권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라는 점을 두고 보면 무척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미국 국내경제 문제에 한해서는 신자유주의의 폐기가 공식화되었다 해도, 그것이 과연 개발도상국과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에 관해서는 사실 회의적이다. 장하준은 보호무역을 통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성장은 장기적으로 선진국 기업들에게 시장을 제공해주리라는 근거를 들어 이러한 회의적 시각을 불식시키려 한다. 또한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칭해지는) 2차대전 이후부터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전인 1970년대까지의 시기 동안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샬 플랜을 그것의 사례로 들고 있다. 하지만 냉전으로 인한 미소간의 대립이 없었다면, 과연 그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행동이 가능했겠는가 하고 물어봐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전후의 마샬플랜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동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내경제의 어려움을 개발도상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 확장함으로써 만회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장하준의 주장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순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리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궁색한 처지에 처하고 만다. 신자유주의보다 나은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장하준보다 급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이 그러한 세상을 갖고 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은 장하준이 하는 주장보다 더 비현실적인 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충실한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진국들 스스로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책 강요를 철회하리라는 장하준의 기대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질문으로 장하준의 주장에 흠집을 내는 것은 그 비판이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로의 다른 경로를 보여주지 않는 한 온당치 못해 보인다.  


4.
이 책은 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 관계의 신자유주의적 배열에 대한 포괄적 비판이다. 그러나 장하준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국제 관계에 국한되어 있지만은 않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시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일관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훌륭한 학자 장하준은 한나라당에 가서도 이명박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904/h2009040703195321060.htm), 민주당에 가서도 지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48672). 적어도 그는 자신의 관점에 충실하였고,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정치인스러운 행보는 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로서 장하준은 그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은 그와는 다른 몫이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라고 해봤자, 국회 내에는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밖에 없고, 이들 의석을 다 합해봤자 한 줌도 안 된다. 장하준은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임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로 그의 선견지명은 더욱 돋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힘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몫이지, 장하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노무현 서거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이 반신자유주의 세력들에게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반MB의 당위가 반신자유주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MB 연대의 주체로 거론되고 있는 제 세력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은 꼭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아니면, 반MB 연대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때문에 피해 보는 서민들한테 반MB 연대가 그 의미 이상의 괜한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령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바보 노무현이 했던 실패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거라도 이명박에 대면 감지덕지라고 얘기하면 맞는 말이지만, 노무현 정권처럼 신자유주의 강행하다 지지세력 이반해서 똑같이 정권 내주면 다음에는 더 이상한 꼴통이 등장할 지 모른다. 한나라당이 자기 손으로 신자유주의를 포기할 리도 만무하고, 설령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한들 립서비스에 그치거나 박정희식 파시즘의 부활로 경도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박근혜는 공식석상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605295

 
문제는 민주당과 친노세력이다. 알라딘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도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하던데, 그 중에는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 『국가의 역할』도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가에 있었나 본데, 그리고 그가 진보주의에 대한 연구도 계획했다는데, 도대체 이들에게 진보주의는 뭐고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화살은 민주당과 친노세력에게만 겨눠져서는 안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가 알기로는 제대로 나와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장하준은 크게는 반MB 연대, 작게는 반신자유주의 연대의 이론적 공약수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반MB 연대는 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그것을 반신자유주의 연대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안된다고 반MB연대의 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문제는 연대의 수준일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의 연대나마 가능하려면, 제 세력의 반성과 쇄신 노력이 상호 간에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민주당과 친노의 행보가 결정적일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만약 노무현이라면, 학자로서 장하준의 말은 다 맞는데 정치인으로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다음에 조금 더 잘하려면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친노는 장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만약 여기에 대한 대답들이 제 세력들로부터 제시된다면 반MB연대의 수준을 가늠하기는 더 쉬워질 것 같다. 사실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들린다. 이것은 상대방에 따라 말이 바뀌는 정치인의 생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좌파적 비판”에 반MB 세력들이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부분을 긍정하고 어떤 부분을 부정하는가는 그들의 자유일테지만, 만약 스스로에게 그 부분들이 분명해진다면 상대방과 이야기하기는 좀더 편해질 것 같고, 보는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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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2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감해요^^

에로이카 2009-06-2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엔 감사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리뷰가 좀 산만하네요.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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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체제 변동이라는 주제로 한 우물을 파온 노중기 선생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열세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1부에서는 87년 노동체제와 그 전후의 노동체제의 성격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1, 2, 3장은 모두 대상 시기를 소시기로 구분하여 노동체제 변동의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97년 이후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성립을 다루는 4장은 발표 당시인 2006년에도 해당 노동체제가 지속 중이어서 그런 지, 소시기 구분은 없었다. 1부에 소개된 노동체제 변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군부 독재기의 억업적 배제 체제 (1961-87), (2) 1987년 체제 (1987-1997), (3)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 (1997-)로 나눠볼 수 있다. 1부는 술술 읽히는 데에 반해서 지은이의 주장이 이제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져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3장에서 1960-70년대의 노동체제를 “국가 코포라티즘의 배제적 하위 유형”으로 규정했던 최장집을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최장집의 이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이론화의 한계”를 보이고 있고, 한국노총이 외형적 코포라티즘 기제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체제 규정적 요소”는 아니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83-87).

1부를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역시 노중기스럽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고 맞는 말만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이 중 몇몇 글들을 이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나의 이런 판단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6년 이후를 살펴보는 5장부터 10장까지의 글들은 주로 사회적 합의 시도들과 이에 대한 주요 논자들의 이론적 전제에 해당하는 코포라티즘 담론을 겨냥하고 있다. 5장과 10장은 1부의 1, 2, 3장처럼 소시기별로 사회적 합의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경제위기가 그 직접적 원인이었던 노사정 합의 실험은 “노동의 저항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다”(233)는 전략적 목표를 지닌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경제위기와 노사정위원회는 “노사관계의 자유화•민주화”라는 노동 측의 압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라는 국가•자본 측의 압박 사이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던 1987년 체제의 종식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241).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시도들을 코포라티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와 코포라티즘은 양립 가능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제3세계에서 코포라티즘의 이식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논의는 1부와 달리 아주 흥미롭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한 원론적 논의들(274, 285)을 살펴보면서 이를 “국가의 경제 개입을 통해서 조직적 강제와 동의가 동시에 조직화되는 계급적 타협 체제”(243)로 정의한다. 코포라티즘은 원래 2차 대전 후 “포드주의 체제의 거시적 계급 타협을 유지시킨 통제와 이익 대표의 교환 체제” (309-310)로 인식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코포라티즘은 전통적 사민주의 국가들이 갖춘 구조적 조건을 결여한 나라들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모델이나 아일랜드 모델 등을 들먹이면서, 미래 한국 사회 노동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길이 아니라면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단순 이원론을 고집했던 사회적 합의론자들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무시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305). 지은이의 이 비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나저나 이전에 읽었던 조영철과 정이환의 책도 그랬지만,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퇴조 속에서 이 이론적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무척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이다.] 8장에서는 한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던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험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특히 동유럽에서 시도된 코포라티즘의 이식 시도들 또한 고찰된다. 그는 서구의 연구들이 “서구 내부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제3세계 내부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코포라티즘의 역사적 조건 상의 차이를 구별한다: “불안정한 민주화 이행과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스페인),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동유럽 국가), 경제 위기와 기존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의 연장 (멕시코), 배제적 노사관계로부터의 이행과정(브라질, 칠레, 한국) 등”.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취약한 정권이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포섭해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는 점 또한 지적된다 (319).

9장에서는 한국과 멕시코의 비교 연구를 통해 코포라티즘이 신자유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섣불리 이식되었을 경우 어떠한 파멸적 결과가 양산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비교들이 시도된다. “국가-지배 정당-공식 노조로 이어진 강력하고 집중적인 권력 체제, 그리고 노동계급에 대한 거의 완벽한 포섭과 통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멕시코 국가 코포라티즘 체제와 달리 한국은 “기업별로 분산된 노조 체제, 노동 정당의 부재와 반노동자 이데올로기의 만연, 오랜 국가 폭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모두 “신자유주의 하의 통제의 위기”라는 동일한 구조적 변인을 공유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위기는 코포라티즘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반면, “한국에서 위기는 사회 협약의 실험을 끊임없이 야기한 힘이 되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새로운 사회 협약”은 다시 여러 공통성들을 보인다: (1) “사회협약은 실질적 교환 체계라기보다 ‘참여와 협조'라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장치, 정당화 기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 “협약은 노동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3) “‘협약의 정치’는 ‘국가 폭력’이라는 또 다른 통제 장치로 보완되어야 했다.” (4) “전 과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흔히 강압적 수단을 동원해 합의를 도출했다.” (5) "‘사회 협약의 정치’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에 종속된 하위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358-360) 곧 이들 두 나라에서 사회협약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달 벨트”였을 뿐이다 (347).

1부는 다소 지루했고, 2부는 재미있었다면, 3부는 어떠한가? 3부, 특히 그 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망을 다룬 마지막 13장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글인 것 같다. 또 그동안 전투적 노조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해야 한다는 노중기 선생의 말을 그냥 ‘맞는 말’ 정도로 가벼이 여겼었는데, 이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요 비판 대상은 노동운동 내 국민파로 대변되는 흐름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선이었다. [사실 난 이 노선 자체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읽는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전 얼토당토 않은 노동자 항복 선언을 사회적 “합의”로 포장한 “노사민정 합의”는 이 정권에서 노동자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만들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판 ‘사회적 조합주의’는 남아공의 ‘사회운동적 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와 유럽의 사회적 코포라티즘(societal corporatism)의 異種交配”이다 (409).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에 대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연대와 계급적∙대중적 정치투쟁의 원리를 제거했다. 또 사민주의에서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의주의와 정책 참가만을 수입했다” (409-410).

13장의 서두에서 지은이는 “1987년 노동체제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거의 완전히 해체”된 반면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위력은 압도적”으로 발전한 변화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맞게 된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극복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9장에서 코포라티즘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면, 이 13장에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역사적 다양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서 이것의 세 가지 역사적 기원을 준별한다: (1) 1970-90년대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 급속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경험한 제3세계 일부에서 전개된 “강력한 억압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2)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미국 노조 운동, (3) 신자유주의 하에서 “본래의 순수한 경제주의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정치적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유럽 사민주의 노조 운동. 이 일반적 분류 속에서도 그는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의 차이 또한 주목하고 있다 (474).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 때문에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의 사용 범위는 무척 넓고, 그 개념적 경계는 무척 모호하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노중기는 여기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크게 네 가지의 이념적 지향들, 곧 민주성∙자주성∙연대성∙변혁성의 이념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노선”으로 개념적 정의를 분명하게 한다 (476-479).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과거 제3세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주요 지향은 민주성(조합원의 자발적 가입과 적극적 참가,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감시)과 자주성(노조는 지배 세력의 통치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자주적 기구)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의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강조점은 연대성(노조가 조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 대중과 중간계급 집단과 조직적으로 연대)과 변혁성(사회주의 사회 건설 지향)에 있었다.

지은이는 또 이러한 개념화에 입각하여 1987년 노동체제의 산물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네 가지 요소와 함께 기업별노조 체제 및 그것에 기인한 협소한 경제주의를 동시에 내포한 운동 전략”이었다 (485). 민주노조가 법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확보는 당면 과제였지만, 연대성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자족적인 노조 활동을 전제로 한 연대”에 그쳤으며, “변혁성은” 과격한 구호와 이념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자유와 국가와 자본의 노조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소극적 내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전투적 노조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상반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87년 노동체제의 구조적 제약은 전자[민주성, 자주성]의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했고 이는 서구의 학자들에게 우리 민주 노조 운동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1997년 이후 구조조정 정치과정에서 후자의 측면[연대성과 변혁성의 한계]이 중요해지자 사회적 노조주의 지향의 이론가와 활동가는 전투적 노조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오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487). 이 문장에 대한 각주에서 지은이는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운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귀결은 일본식 기업 단위 노사 협력주의(혹은 미시 코포라티즘)의 아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체제 하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연발생성이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들 일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는 위로부터 지도부의 목적의식적 노력을 매개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운동과 미조직 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현장 의지를 묶는 이중적 전략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 새로운 단계 사회운동성의 핵심은 “연대성과 변혁성의 확장 및 제도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발전방향을 언급한 것이지만,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 또한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적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13장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현재의 노동운동이 처한 내우외환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지은이의 진단과 처방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요되었던 사회적 합의의 신자유주의적 결과의 파괴성이 누적된 지금 지은이의 주장은 더욱 돋보인다. 또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유지 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퇴조 흐름은 분명 경쟁력 코포라티즘으로 정리되는 사회적 합의에의 참여 압력의 명분을 대폭 침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자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실낱 같은 희망을 실력을 통해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은이의 경고대로 일본의 미시 코포라티즘이나, 과거 멕시코의 국가 코포라티즘, 그리고 현재의 한국노총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도 못하고 괜히 현실에 대한 갑갑함만 토로한 것 같아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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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9-03-13 23:37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재미있어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노조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맨 마지막 장만 보세요.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인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 근거가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들은 허벅지 찔러가면서 공부한다고 마음 먹지 않으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2009-05-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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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노중기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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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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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무엇이 문제인가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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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분석한 저작으로서 이 책만큼 국내외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책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IMF가 부과했던 구조조정과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넓이를 동시에 지닌 훌륭한 경제학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2.
먼저 지은이들은, 거셴크론의 논의의 독창적 연장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의 비교역사적 특정성을 고찰하고 있다. 거셴크론은 19세기 (개별기업가와 은행에 의해 주도된) 영국, (겸업은행이 주도한) 독일, (국가 주도의) 러시아의 상이한 발전경험을 유형화하면서, 각국의 발전 궤적을 국가간 경쟁이라는 맥락 위에 자리매김한다. 거셴크론은 이처럼 다른 발전 주도 주체의 차이를 후발국에는 부재한 선발국의 이점 – 자본, 테크놀로지, 금융 상의 이점 - 을 “대체”(substituting)하기 위한 후발국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로 이해한다. 지은이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거셴크론의 따라잡기 전략을 “대체” 전략이라 이름 짓고, 이를 20세기의 상황에 응용하여 미국, 일본, 한국의 발전과정에 적용한다. 20세기 일본과 한국의 따라잡기는 19세기 독일과 러시아의 따라잡기 과정과 유사성을 보인다. 상업은행과 종합상사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케이레츠 모델은 독일의 겸업은행이 했던 역할과 유사하며, 일본보다 사적 부문이 훨씬 더 취약했던 한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러시아의 경험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대체전략을 통한 따라잡기를 시도했던 일본이나 한국과는 달리, 싱가포르와 타이완은 선진국의 이점을 제도적 배열을 통해 대체하기보다는 “보완”(complementing)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3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중심적 역할은 공통적으로 드러나지만, 보완전략을 취했던 싱가포르와 타이완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벌이 주요 산업화를 담당하게 된다. 국유화된 은행은 국가와 재벌의 관계를 매개하는 주요 고리였다. 지은이들이 “주식회사 한국 (Korea Inc.)”이라고 부르는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는 이처럼 후발국가 한국이 선진경제를 따라잡는 과정 중에 선진경제의 이점을 대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지은이의 분석 초점은 바로 이 정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에 집중된다.

이 책의 몸통 격인 3장은 1997년 금융위기의 결과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전개와 이에 대한 IMF와 주류경제학의 진단과 처방을 비판적으로 검토, 기각한 후, 그것과 대별되는 자신들의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그것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비효율성과 부패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라고 보고, 구조조정은 이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지은이들은 주류 입장이 구조적 문제를 과장했을 뿐 아니라,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짧은 지면에 경제위기 전개 과정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한다. 1996년부터 현저하게 드러났던 한국 경제의 문제는 무역적자의 폭증이었는데, 이 자체는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라는 주기적 문제였다. 지은이들은 만약 이 주기적 문제에 의해 야기된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 외채의 급증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는 위기를 안 겪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해 구조적 문제로 지목된 산업정책, 정실자본주의, ‘대마불사’ 논리, 재벌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위기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였다기 보다는 과거 오히려 한국의 발전을 추동했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1998년 말 이후의 경제회복도 구조조정 정책의 성과가 아니었으며,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정책은 위기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심화시켰고, 경제회복은 IMF가 한국 정부가 긴축정책에서 케인즈주의적 경제 팽창정책으로 정책선회를 허용하였던 1998년 중반 이후에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외국 자본도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야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책선회가 가능했던 것은 1998년 하반기 이후의 세계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세계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1998년 8월 러시아와 브라질의 위기가 터지고 뉴욕의 헤지펀드인 LTCM이 부도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을 위시한 G7 경제가 이자율 인하와 통화공급 증가를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이 이자율을 낮추고 원화절하를 한 것은 원래 IMF 프로그램에도 들어있지 않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이 콜시장 금리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이 글로벌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실행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IMF와 달리 지은이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옛 모델에서 새로운 발전 모델로의 “이행 실패” (transition failure)에서 찾으면서 이를 (1) 발전국가 모델의 쇠퇴, (2) 금융자유화 과정의 실패, (3) 재벌의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적응 실패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4장에서는 5대 재벌들의 ‘빅딜’과 기타 재벌들의 ‘워크아웃’을 통해 이루어진 기업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데, 불공정거래로 지목된 재벌의 내부거래의 금지나 금융기관들이 자산건전성 분류기준(forward-looking criteria)이나 BIS 비율을 준수토록 함으로써 기업 대출을 힘들게 한 것 등이 기대한 효과보다는 비용이 훨씬 더 컸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 과정이 과거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강점이었던 국가와 재벌의 위험부담 기능을 사실상 해체시키면서 본질상 보수적 자금운용을 할 수밖에 없는 금융부문에게 이 기능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구조조정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특징은 바로 주요 위험부담 주체의 부재로 요약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미명 아래 강요된 이 특징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인데, 지은이들은 따라잡기 발전 전략을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발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거셴크론의 논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끝에서 지은이들은 한국이 경제위기로 폭발한 “이행 실패”를 딛고 “이차 추격 시스템(second-stage catching-up system)”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경제영역에서 후퇴할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궁극적인 시스템 관리자(the ultimate system manager)로서 경제체제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의 특수성 간의 조정자(media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 해외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권을 다시금 획득해야 하고, 해외 금융에 대한 개방은 국내 상황의 고려에 기반해서 협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를 잘 수행한다면 재벌구조를 해체함으로써 금융 위험을 감소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재벌의 다각적 구조 (diversified structure)에 기반한 내부의 자원동원과 계열사간 상호지원은  바로 재벌의 국제 경쟁력의 원천인데,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3.
분석의 철저함이나 주장의 뚜렷함 모두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또한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28년 동안 지속되어온 레이거노믹스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옛날 책 제목이 생각나는데, 오늘날 이 시점 역사의 판단은 IMF와 주류경제학은 틀렸고, 신장섭, 장하준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은이들의 반신자유주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전에 서평을 썼던 책 두 권이 계속 떠올랐다. 하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http://blog.aladin.co.kr/eroica/2157950 )이고, 다른 하나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http://blog.aladin.co.kr/eroica/1948027 )였다. 전자는 금융자유화가 그것이 기대했던 원활한 기업의 자금 조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 떠올랐으며, 후자는 국가가 고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체제를 다시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었을 때 떠올랐다. 세 저작 모두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내가 쉽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 지은이들의 초점은 국가 – 은행 – 재벌의 연계이다. 지은이들이 이 책에서 이 초점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을 테고, 또 이렇게 초점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분석과 주장이 더욱 빛난다. 그러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의 주요 특징인 국가와 재벌에 의해 부담된 위험은 이 연계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지은이들은 다루지 않는다. 이 연계가 과거 고도 성장을 추동해 온 발전모델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은이들의 진단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연계 바깥에 수출을 통한 기업의 이윤실현에 유리한 기회구조 – 세계적으로 팽창중인 시장 – 에 적절한 타이밍에 결합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연계 내부의 주요 위험 부담 주체, 곧 국가가 비용과 위험을 국민들에게 분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부터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과거 발전모델에 있어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들은 한국 경제 자체의 성숙과 글로벌리제이션이 과거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차 추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은이들의 제안대로 연계 내부를 재정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연계와 연계 외부 간의 채널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지은이들은 국가가 글로벌리제이션과 국내 경제 간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다루고 있지 않다.

지은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시장은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는 폴라니의 인식은 제도주의 경제학의 한 기초를 이룬다. 국가 – 재벌 – 은행 간의 연계라는 제도적 배열의 변화를 통해 경제 발전과 위기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제도주의 경제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연계 또한 그 외부의 더 큰 사회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며, 만약 2차 추격시스템이 이전의 주식회사 한국 모델처럼 다시 한 번 하층 계급에게 고통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시장 전제(market despotism)를 통해 위험을 전가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보다도 나을 게 없을 것이다.

어떠한 책을 읽고, 지은이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의 비판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 서평은 결코 지은이들의 이 훌륭한 책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2차 추격 시스템”으로의 이행이라는 지은이들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연계 내부 자체의 재배열 문제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 장하준, 신장섭에 대한 독자들의 호오 여부는 사실 재벌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재벌 체제의 존속을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인정하면 이들의 논의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기각하고 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지은이들의 대안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어 재벌에 대한 입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국가 - 재벌 - 은행 연계 외부로 전가되었던 위험이 어떻게 재구조화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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