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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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C. P. 스노가 말한 두 문화 (two cultures)의 노예이다. 대부분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교육을 받고, 언젠가부터 같은 문과인이 아니면 대화의 주제와 소재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을 경험상 체득하며 살아 왔다. 음식을 편식하듯, 책도 편독할 수밖에 없다. 젊은 날 드물게 몇 번, 스티븐 호킹이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책에 호기롭게 도전해본 적도 있지만, 역시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었고, 이러한 좌절의 경험은 나의 편독 생활을 부정적으로 강화하였다. 편독이 딱히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은 더구나 아니고 하여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았는데, 생태주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물과 지구과학에 대한 관심들이 다시 일고 있다. “인류세만을 다룬 책은 처음 읽었는데, 역시 공부를 하면 그 전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은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에 몰랐던 것은 새로 알게 되고, 또 새로운 질문들이 생긴다. 좋은 책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구과학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지구 시스템 과학의 기본적 논의들을 역사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하기 수월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사회, 철학, 경제, 예술 텍스트가 그것이 자리잡은 역사적 컨텍스트와 접목될 때에야 비로소 그 텍스트에 대한 자기화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1. 가이아의 부활: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처음부터 인류세 이야기를 바로 다루지 않고, 새로운 시대적 정의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주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지구)가 無로부터 등장하여 신과 인간을 창조하지만,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는 신이 우주, 지구, 인간을 창조한다. 전자에서 인간은 조연일 뿐이지만, 후자에서 인간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따 만든 특권적 존재이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부터 19세기의 다윈까지 이 히브리적 인간관을 다시 전도시켜 인간을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학 지식에 기반하여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힘을 발휘하여 지구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변모시킨다.


화석 증거들을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수립을 도왔던 지질학(23-25)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시스템과학의 기틀을 마련한다. 1926년 베르나츠키는 지구 시스템을 태양 에너지를 전체 동력으로 삼으면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부 권역들 암석권, 대기권, 수권, 생물권, 인류권 의 복잡한 체계로 정의한다(37-39). 그러나 당시에는 이 위대한 소련 학자의 통찰력이 나라 밖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 린 마굴리스 등의 연구는 지구시스템과학과의 연결 속에서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부활시킨다(40-43). 곧 완전한 無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구가 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에서 생명권을 형성시키고 대기의 기후를 40억 년 동안 안정화시키면서 하부 권역들 간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에 의해 작동하는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 작동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이다. 이 지구 시스템 과학의 연구 성과 중 부정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이제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2).


2. 쟁점1: 황금못을 어디에 박을 것인가?

층서학은 지질시대를 累代(eon), (era), (period), (epoch)로 구분한다. 우리는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홀로세(Holocene)는 약 117백년 전에 시작되었다. 가장 오랜 지질시대는 선캄브리아 시대의 명왕누대(Hadean)인데 지구가 생긴 46억년 전부터 40억년 전까지의 시기이다. 인간의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기원 전 몇 세기이니, 지구의 역사는 시간 단위 자체가 달라진다. 층서학자들은 세와 세 사이를 구분하는 표시를 황금못(Golden Spik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홀로세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곧 인간이 지구 시스템에 거대한 힘을 발휘하여 지층에도 흔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하는 황금못을 어디에 박아야 하는가? 제안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는 홀로세 시작 직후인 1 1천년 전이고, 가장 최근의 시기는 1945-64년이다. 여기에 대한 여러 증거 제안들이 제시된다. 표로 더 유력한 일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연대기: 인류세의 잠재적인 시작점 및 제안된 GSSP 표지

사건

시점

층서학적 표지

제안자 (페이지)

집약적 농업

기원전

11천년에서 6천년

빙하 코어에 나타난 8천년 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William Ruddiman (90, 150), Bruce Smith & Melinda Zeder (143)

쌀 생산,

반추동물이 배출하는 메탄

기원전

6천년에서 3천년

빙하코어에 나타난 5020년 전 메탄 최소치 표지

상동 (148), Dorian Fuller (152)

생물 동질화 (동질세)

기원전

5천년에서 5백년

꽃가루, 식물암, 동물 뼈

Gordon Orians (159)

인위적 토양 변형

기원전

3000년에서 500

토양 유기물, 인 축적, 동위원소 비율, 꽃가루

(148)

자본주의

(자본세)

1450

Jason W. Moore (224), Donna Haraway (231)

콜럼버스 교환 (오르비스 못)

1492년에서 1610

빙하 코어에 나타난 1610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꽃가루, 식물암, ,

Simon Lewis &

Mark Maslin (158-62)

산업혁명

(탄소세)

1760년에서 1800

석탄 연소에서 나오는 비산회,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 비율, 호수의 규조 구성비, 빙하 속 이산화탄소

Paul Crutzen & Eugene Stormer (90)

거대한 가속

1945년에서 1964

방사성 핵종 (1964년 탄소 14와 플루토늄 239 정점), 블랙카본, 플라스틱, 오염물질, 기타 동위원소들

Will Steffen (90)


이 황금못 후보들 중에서 루이스와 매슬린의 오르비스 못이 제일 흥미로웠는데, 그것은 단지 나의 의견일 뿐, 2016 8월 인류세실무단은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비교 평가하여 20세기 중반의 거대한 가속에 황금못을 박기로 한 상태이다(126, 241). 흥미로운 점은 투표단 35명 중 4명이 소수의견으로 통시적시작점에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빅뱅을 통해 우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138억년 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 6천만 년이다(27). 그 중 선캄브리아대가 40 6천만년이고, 그 이후의 현생누대는 5억 년의 시간이 누적된 것이다. 포유류의 역사가 2억 년,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30만년쯤이라면, 자본주의의 역사 500년은 매우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의 우주력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보았을 때, 컬럼버스의 신대륙 정복은 그 해 12 31 23 59 59초에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27).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시각에서 자본주의 5백년의 역사는 충분히 긴 시간대이지만, 우주나 지구의 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눈깜빡할 사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황금못을 1610년에 박을지, 1940-60년에 박을지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지구에 끼친 인간의 힘이 누적적임이 분명하다면 인류세가 통시적 시작점을 갖는 것이라고 보는 소수 의견이 타당해 보이고, 지구의 나이라는 긴 시간대에서 바라보면 그것 역시 등시성이라는 층서 결정기준(81)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3. 쟁점2: “인류세라는 명칭은 온당한가?

인류세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과 달리,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인류세를 안트로포스라는 종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지구상 모든 인간을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218-9). 저자인 엘리스도 이 견해에 명시적으로 동의한다(222). 부유한 국가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 미국, 중국, 인도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비교해보면, 중국은 미국의 절반에, 인도는 미국의 1/10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에게 지구 변화의 책임을 묻는 인류세라는 이름이 타당한가? 아마 층서학자들을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은 이 질문에 민감하지 못한 것 같다. 우주와 지구라는 커다란 문제계에 비해 인간 내부의 차이는 너무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이슨 무어를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도나 해러웨이처럼 두 문화의 경계를 부지런히 뛰어넘으며 횡단하는 이들도 예외적으로 이 문제제기에 동참하고 있다.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가 온당한 명칭이라는 이들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인류세실무단의 단원인 저자 엘리스가 이들의 문제제기를 경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224-7). 지난 여름 읽느라 꽤 고생했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4장에서 나온 툴루세(Chthulucene)의 논의도 다뤄진다. 툴루세는 인류세에 체현된 인간중심 사고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비인간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잡한 사회적생태적 과정의 그물 속으로 인간을 연계시킴으로써 탈중심화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231). 툴루세는 인간이 다양한 종의 집합체가 상호의존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 속에 얽혀 있다는 상상, 곧 과학적 우화(scientific fabulation)인 것이다. 엘리스는 해러웨이가 의도적으로 과학적 언어와 거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지구 시스템 과학의 체계적 사고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곧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가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및 에너지 흐름을 통해 기능적으로 연결되고, 비생물적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해러웨이와 지구 시스템 과학이 공유하는 요소이다. 해러웨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보니 현재진행형의 두터운 시간성으로서 툴루세의 의미가 보다 잘 이해되었다.


인류세실무단이 인류세라는 이름이 잘못되었으니 이제부터 자본세를 쓰자고 투표할 일은 없겠지만, 자본세라는 명명은 지구를 망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된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용하면서도 가치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어의 자본세 논의가 지구 파괴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해러웨이의 인류세 비판과 자본세/대농장세/툴루세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4. 맺으며: 과학적 사실의 발명과 경합하는 해법들, 그리고 약간의 반성

인류세가 올바른 명칭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인류세 논의는 하나의 과학적 사실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곧 인간의 힘이 지구에 영구적 흔적을 남길 정도로 강해졌고, 이것을 방치한다면 지구 시스템은 티핑 포인트를 지나서 인류의 역사가 알고 있는 생명권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가짜 뉴스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truth)이다. 하지만 그 진실은 인간성이 배제된 과학이 그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발명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익과 정치가 개입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또 인류세 개념은 위기의식과 함께 어떤 집합적 행동을 촉발한다. 여기에는 성층권에 빛을 반사하는 미세한 황산염 에어로졸 입자를 주입하자는 크뤼천의 지구공학적 제안부터 나오미 클라인을 비롯한 반자본주의적 기후정의운동까지, 스타벅스의 리필 용기 이벤트부터 쓰레기 만들지 않기, 차 없이 살기, 채식, 귀촌 같은 라이프스타일 변화까지, 수퍼리치들의 뉴스페이스 같은 우주여행 민영화부터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돈룩업>의 디스토피아까지, 경합하는 대안들을 산출시킨다.


나쁜 자본세를 좋은 인류세로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질문이며,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답을 하는 과정에서 경합하는 힘들이 대립할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사실의 형성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렇게 형성된 진실은 정치와 경합의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지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내 꼬락서니가 참 한심하다. 내가 건강하면서 지구의 열을 좀 낮출 수 있는 방법들은 참 많은 것 같은데 실천하기 힘들다. 좀 덜 먹을 수 있을까? 고기를 안 먹을 수 있을까? 차 없이 살 수 있을까? 시골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못해도 남은 인생 동안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이 르 면   내년   ‘인류세 ’ 지정…새   지질시대   증거  후보는   플루토늄

내년 ‘ 인류세’  선언 예정... “1950년부터  인류가 자연 압도”


https://youtu.be/GPvyK8dBYqg




[추기: 2024. 3. 19.]

“인류세는 죽었다. 인류세 만세” [오철우의 과학풍경] (hani.co.kr)


Ditching ‘Anthropocene’: why ecologists say the term still matters (nature.com)


15년의 논의 끝에 지질학계는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의 공식명칭으로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저자 엘리스는 1950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단지 명칭만이 아니라, 시점까지도 채택 여부를 따지는 논의의 쟁점였다는 말이다. 이 논의를 새로 투표에 붙이려면 10년이라는 냉각기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 동안 지구 온도는 또 얼마나 올라갈 것이며, 여전히 한반도에도 사과가 재배되고 있을까? 우리 인간은 좀 바뀌려나? 화석 자본주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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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의 배신 - 플랫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유혹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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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쓰여졌지만 2022년에도 맞는 지대넓얕. 2023-4년 혹은 그 이후에 세상이 좀 달라질까? 좋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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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의 배신 - 플랫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유혹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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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내용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학술서적이 아니라 대중서적을 염두에 두고 쓴 저자의 의도에 맞게 오늘날 핫 토픽들 - 플랫폼 자본주의, 빅데이터, 알고리즘, 공유경제, 인류세, 그린뉴딜, 탈성장, 코로나19, 탈진실 등 -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많이 듣는 말들이고, 이미 일상 속에서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이지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말로 풀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과정의 문제점들을 잘 짚고 있다. 넓은 범위를 커버하면서 문제들을 깊게 파고들지않고 얕지만 기초적 핵심들을 잘 짚고 있다. 나 같은 기술문맹 대중들에게 딱 맞는 책이다. 그런데 사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는 이제 다들 연식이 제법 되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신기해 하며 감탄하기는 하되 그것을 몸소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대면회의나 QR 체크인도 해야만 했으니 했지, 코로나19와 같은 객관적 제약이 있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1장에서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플랫폼 세계, 2장에서는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경영, 3장에서는 인류세에 대한 상이한 대응으로서 그린뉴딜과 탈성장 논의, 4장에서는 코로나19와 가짜뉴스, 5장에서는 데이터3법 제정으로 문제가 된 데이터 주권 문제가 다뤄진다. 나로서는 1장과 2장의 논의가 가장 흥미로웠다. 테크놀로지가 야기한 내 주변 일상의 변화들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동네 레코드 가게, 길보드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이, TV, 극장, 비디오가게를 통해 보던 영화들이, 컴퓨터를 통해서 들어갔던 지메일, 페이스북, 유튜브, 인터넷뱅킹 등이 스마트폰 하나로 다 접근하게 되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리소스에 접근한다. 나는 여전히 일어나자마자 FM 라디오를 켜고, 좋은 앨범이 나오면 CD를 사서 소장하고(이사 다니기 힘들어서 LP는 다 기증했다), 노안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넷플릭스도 TV로 보지 폰으로는 못 본다. (물론 컴퓨터로 볼 수밖에 없던 불우한 날들도 있었다.) 나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또는 주방과 식탁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맛의 저하, 배달용 용기, 그리고 배달요금 등의 문제로 음식은 배달시키지 않는다. 물론 당구장에서 먹던 짜장면의 맛이 그립기도 하지만, 이제 같이 당구 칠 친구도 없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아마 당구장 짜장면이 맛있었다면 내가 이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건강 상태를 정형 데이터의 형태로 제공하는 북플의 독보적활동도 안 한다(아니라 귀찮고 하기 싫다)… 생각해보면 은행 업무 말고는 스마트폰의 기본 기능 외에 앱으로 뭘 하는 경우는 곁에 컴퓨터, TV, 라디오 등이 없을 때만 쓰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기술문맹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보다 젊었다면 이럴 수 있을까? 대학에 갔을 때, 나는 상징적 단절의식으로 LP 듣기를 그만 두고 CD를 사서 들었다. 그리고 선후배들과 한메타자교사의 베네치아 신기록 경쟁으로 타자 실력을 키웠고, 어느 날 도트 프린터가 아닌 잉크젯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대하고 이메일을 만들었고, 휴대용 CDP를 들고 다니다 MP3 파일로 갈아탔다가 멜론, 애플 뮤직 등 유료구독 서비스를 하기 싫어서 다시 라디오, CD 세상으로 후퇴했다. 내가 그 나이에 뭔가 첨단의 미디어와 컨텐츠를 수용했던 것(또는 창비 구독)이 자연스러운 것만큼 오늘날 젊은이들이 영상과 음원 리소스, 유료 앱과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내게는 유료 구독 서비스가 첨단 테크놀로지 수용의 장벽 역할을 어느 정도 하기는 했다. 그래도 넷플릭스를 안 볼 수는 없으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자본가-노동자 / 고용주-피고용자의 경계가 애매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공유 경제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온라인 중개 플랫폼경제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노동 배달, 청소, 돌봄, 임상실험, 감정노동 등 이 거래되는데, 노동 수행 주체는 고용주와 근로계약을 맺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 곧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되어 노동을 수행한다. 노동과정에 수반되는 위험들은 이 개인사업자에게 외주화되는 반면, 플랫폼 중개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이윤은 독점한다(66). 애덤 스미스도, 맑스도, 케인즈도, 그리고 아마 하이에크도 몰랐던 시장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시장에는 독점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했겠지만 시장이라는 플랫폼에 주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 중 하나로서 알고리즘 경영은 플랫폼을 매개해 인력 정보들을 수집하고 연결해 필요한 고객에게 매칭하고 노동수행과정을 통제하는 자동화 혹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기술기반형 노동관리방식을 지칭한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계약 노동자들의 플랫폼 활동을 감시, 통제하고 고객의 체험 정보를 연산 처리하는 고도화된 자동 명령어 구실을 한다”(97). 플랫폼 중개인들에게 그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들은 물적 자원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들은 기업조직의 상급자가 없는 대신 고객의 별점과 리뷰라는 훈육장치에 종속되고, 그 평점들 역시 인공지능 기계들에 의해 축적된다(100). 그런데 불평하고 항의할 대상이 없고, 단결할 동료가 없는 개인 사업자들은 저항이나 탈퇴보다는 적응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101-2).


그런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일상적 의미의 경제활동, 곧 돈 버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다. 플랫폼 내 개인사업자는 일이 끝나면 바로 앱으로 배달 주문을 하고 평점을 남기는 소비자로 바뀐다. 그러나 생산이나 소비로 볼 수 없는 전통적 여가의 영역 역시 이 기술혁신에 종속된다. 과로사회실질문맹’, 낮은 독서율 그리고 그냥 멍하니 영상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가볍게 즐기는 콘텐츠 소비문화의 확대는 모두 동일한 과정을 구성하는 계기들인 것이다(51).


그렇다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하는 나는, 우리는 좀 낫나? 나는 단지 공들여 읽은 좋은 책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서 알라딘 서재에 남기지만, 이 서재/북플 플랫폼에서 나의 리뷰는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쓰임을 갖게 된다. 나의 지식은 유용하거나 무용한 정보가 되어 누군가의 지출 여부의 판단을 돕고(부채질하거나 억제하고) 나의 성향을 파악하게 하는 빅데이터의 부스러기를 구성하게 된다. “좋아요와 하트를 받으면 선물 받은 기분인데, 플랫폼 경제는 등가교환 논리 바깥에 있던 선물을 주고 받는 기쁜 마음까지도 수량화하고 금전화한다(25). 2000년대 초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에서 노동가치론이 이제 더 작동하지 않는 경제의 비물질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도 경제의 비물질화가 지식의 상품화에 내재한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키리라는 비판적 전망을 펼친 적이 있다(https://blog.aladin.co.kr/eroica/2588855). 그 때 고르는 빅데이타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간의 화해불가능성에 대한 고르의 지적은 오늘날 더 절실하게 들린다. 이 논의는 그린뉴딜과 탈성장론의 대립 구도로부터 논의를 풀어가는 3장과 코로나19와 가짜 뉴스를 다루는 4장의 내용들로 연결된다. 저자는 그린뉴딜 해법을 탈성장론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하자는 미카엘 뢰비의 주장에 대략 동조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현실적인 해법으로 들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선 국면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열이 오른다. 탄소중립하라고 하니까 핵발전소 더 짓자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탈성장은커녕 그린 뉴딜도 참 먼 나라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쓸 말 많았는데, 빡쳐서 더 못 쓰겠다. 그들에게 Don’t look up에서 아리아나 그란데가 부른 Just look up의 가사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Listen to the goddamn qualified scientists
We really fucked it up, fucked it up this time


어떻게 이런 가사를 있나? ㅋㅋ

전기요금 더 낼 테니 핵발전은 그냥 니들 집 안방에서 해라. 나까지 fucked up되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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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격 -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진리와 돈의 인류학
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 / 눌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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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격이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증여를 경유하여 인정에 도달하는 철학적, 인류학적 여행. 좋은 책. 그러나 번역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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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격 -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진리와 돈의 인류학
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 / 눌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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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받고 주기, 받았기 때문에 줘야함으로 시작해서 받지 않았음에도 줌으로 끝나는 책이라고 하면 될까? 넉달 동안 조금씩 읽고 나서 리뷰를 쓰려니 머릿속에는 몇 가지 파편들만 떠돌고 있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속독하며 정리하고 리뷰를 쓰려 했다. 그런데 속독 정리가 불가능해서 저 밑에까지 쓰다가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ㅠㅠ... 좋은 책이다. 독자의 관심이 무엇이건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의 논의들이 대가의 안목으로 독특하게 직조되며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전망을 여는 책이라고 느꼈다.

 

저자 에나프는 철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문학을 넘나들며 정말 많은 저자들의 작업을 역사적·지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함으로써, 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찬반논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내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맥락적 지식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 역사적 맥락 안에 자리매김되고, 인류학적 연구가 이론적 맥락 안에 자리잡는다. 보통 별 관계를 생각하기 힘든 주제들 소피스트의 경제활동,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 부채, 은총, 저작권, 정신분석가의 급료, 그리고 인정 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들이 재료로 활용되어 이 위대한 인류학자/철학자를 통해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바울, 아퀴나스,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칸트, 스미스, 맑스, 니체, 베버, 짐멜, 프로이트, 말리노브스키, 모스, 폴라니, 벵베니스트, 코제브, 고들리에, 르포르, 세르, 왈저, 호네트, 레비나스, 그리고 처음 들어본 프랑스 학자의 논의들이 각 장마다 비중이 바뀌며 등장한다. 어떤 장의 주연이 다른 장에서는 훌륭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지속된다. 논의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등장인물의 배치가 달라지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음 배치로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점층적 논술형식 때문일지 논의를 기승전결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중간을 딱 떼어내고 앞뒤만 말하자면, “진리의 가치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타자에 대한 인정이라는 출구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나오는 앎과 돈을 동시에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는 없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긴 하지만(23, 170, 502, 530, 541), 책 제목인 진리의 가격”은 사실 입구에 대한 이야기일 뿐, 책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간의 여정이 학문적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다음은 내맘대로 요약이다. 2부에서 비중있게 다뤄진 의례적 선물교환, 희생제의, 은총에 관한 인류학적·신학적 논의는 제외했다.

 

2. 화폐

화폐에 관한 논의는 1장 이전의 서문(36, 53-54)3(8-10)에서 주로 다뤄지고, 모스, 아리스토텔레스, 짐멜, 세르의 논의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모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은 시장교환에서 사용되는 현대 화폐가 미개화폐(archaic money) 또는 야생(savage)화폐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보는데, 에나프는 이에 반대한다. 양자는 공존했지만, 엄밀히 다른 영역에서 쓰였다. 물론 화폐가 통용되려면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의례적 교환에서 쓰이는 것들과 동일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례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대상의 등가성이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바이므로, 엄격한 등가성이 추구되지는 않는다. 반면, 유용품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여야 하는데, 이는 화폐가 사회의 정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화폐를 필요를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이고 정당한 수단으로서 교환에서의 정의를 보장하는 것으로 본다(495-8). 여기에서 교환은 시민간의 교환이지 시장상인이 매개하는 교환은 아니다. 에나프는 모스의 해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대질시키면서, 의례적 교환에서 상품교환으로의 이행을 가정하는 모스의 계보학은 허구라고 비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정보완한다. 곧 물물교환 또는 척도사물이 매개하는 교환에서 주조화폐를 사용하는 상업적 교환으로의 이행은 정치적 조직과 사회적 분업의 출현과 병행하여 이뤄진다(480). 이는 씨족 집단 간의 보복적 정의로부터 법이 규정하는 중재적 정의로의 이행을 수반한다(491). 이제 유용한 재화의 교환은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 측면이며,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결합된다. 의례적 교환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교환되는 사물 자체의 등가성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화폐를 정의의 수단으로 보지만, 정치학은 그것의 역효과, 곧 상인의 화식술(貨殖術, chrematistics)을 경계하였고, 이는 루소와 맑스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화폐가 두 사물 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이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앞문장에서 화폐는 필요의 측정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뒷문장에서 화폐는 이제 화폐에 대한 욕망 자체를 측정한다(149). 이 화폐는 필요의 충족이라는 목적으로부터 단절된, 따라서 한계가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 목적이 되면서, 애초의 도구로서의 본성과 대립하게 된다. 이제 돈이 돈을 낳고, 돈은 상품이 된다. 맑스는 이를 C-M-C에서 M-C-M으로의 이행, 곧 자본으로서 화폐의 출현으로 이해한다(151). 전자에서 화폐는 중간항, 메존, 메소테스, 초연한 판관이지만, 후자에서 화폐는 그 자체로 이윤(ΔM = M‘ - M)을 얻기 위한 하나의 재화가 되며, 이 이윤은 시간으로부터 초연했던 화폐의 성격을 훼손한다. 곧 이윤이 화폐를 도구에서 행위자로 만들고, 이로 인해 시민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도시는 멸망의 위험에 처한다(152).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맑스로 이어지는 이 전통과 단절한 것이 짐멜의 돈의 철학(1900)이다. 화폐는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507)로서, 화폐경제가 도래함으로써 특정 장소나 사물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510). 짐멜은 해방의 수단이 억압의 도구로 바뀔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전자를 중요시한다(513). 임금이라는 화폐의 매개는 막 시작된 자율성의 보증으로서,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더는 인격적으로 종속되지 않음을 뜻하였다(515). 화폐 유통이 현대사회에서 상호교류와 행동의 근본조건이 됨에 따라, 화폐는 사회화의 조건이 되었다. 짐멜은 화폐를 한편으로는 주체의 자율성 획득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의 실행을 위한 틀로 기능하는 객관 세계의 구성이라는 양 측면을 지닌 한 과정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520). 화폐는 통화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 증대에 있어서 상수이자, 구시대의 신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열쇠였던 것이다(528-9, 588-9).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를 시민들 간의 필요를 정당하게 매개하는 정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반면, 짐멜은 근대의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기술변동과 끝없는 확장 운동의 틀 안에 화폐를 자리매김하고 자유의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화폐의 긍정적 힘, 곧 정의와 자유를 분석하였다.

 

시장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는 이윤을 얻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나타난다(467-8). 여기에서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곧 화폐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화폐 앞에 거의 무한한 선택지가 펼쳐진다. 현금에 내재한 이 개방성에서 자유의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504). 에나프는 여기에서 미셸 세르의 논의에 의존한다. 세르는 현찰로서의 화폐를 조커혹은 비어 있는 요소라고 칭한다(506). 일반등가물로서 화폐는 텅 빈 매개체이자 완전히 가상적인 매개체로서, 아무리 큰 가치라도 표현할 수 있고, 어떤 욕망이나 정열도 포획하여 표현할 수 있다. 화폐는 어떤 종류의 가능성도 나타낼 수 있는 추상이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인 유일한 재화이다(588). 바로 이 무한한 번역 가능성 때문에 화폐는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그 욕망을 무한하게 만들고, 이로부터 권력과 부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번역 가능성은 맑스로 하여금 화폐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비판하게 하였지만, 짐멜로 하여금 자유의 근원으로서 화폐를 찬양하게 한 것이다.

 

3. 부채

부채는 3장 뒷부분(142-163)부터 다뤄져서, 4장 일부분(243)에 잠시 나왔다가 주로 6장에서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 돈이 돈을 낳는 것을 부를 얻는 방식 중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며, 이를 자연에 어긋나는 생식이라고 비판한다(145). 이 관점은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에게서도 조금은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지적하지 않은 주제, 곧 빚이 빚을 낳는 것이 문제시된다. 고리대금업 비판은 4세기 카이사레아의 성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되고, 중세(13세기경)에 이르러서 고리대금업은 대죄(mortal sin) 중 하나인 탐욕의 한 형태로 규정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156-8). 고리대금업자들은 시간을 판다. 곧 시간에 값을 매긴다. 서두에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의 자리에 앎, 지식, 진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슬며시 이 시간이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간은 신(초밤의 토마스) 또는 모든 피조물(오세르의 기욤)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고리대금업자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해 파는 것이다. 곧 그들은 신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준 우주적 선물인 시간의 전유를 통해 돈을 버는 자들이다. 공짜로 선물받은 것을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 증여관계를 상업관계로 변형하는 고리대금은 상호 대갚음의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사슬 전체를 깨뜨리고, 상호의존과 인정의 관계를 지배와 착취의 관계로 바꾸는 결과를 낳고, 자연 전체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시간과 세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자들의 관점은 상이하지만, 양자는 모두 고리대금업을 포함한 이윤추구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쇠퇴한다. 18세기 초의 정치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도시를 해체할 위험으로 간주했던 것을 시장 메커니즘의 해방을 위한 계기이자 새로운 기회로 상정한다. 고리대금업에 대한 신학적 저주도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고, 종교개혁 이후 칼뱅주의는 계약적인 교환의 확장과 완전히 도구화된 투자의 시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등식, 시간=을 제시한다(163). 시간과 세계에 대한 재개념화는 이처럼 역사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에나프는 자본주의 시대의 부채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는 대신, 2부에서 여러 받고 주기에 대한 인류학적·철학적 논의들을 살펴본다. 이 중 부채는 선물, 희생, 은총 등에 공통분모(common denominator) 역할을 한다. “부채의 세계는 희생제의의 실천과 더불어 출현한다”(243, 253, 295, 298, 314-5, 6). 곧 부채는 신이 준 큰 선물, 곧 은총과 함께 등장한다.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채무자가 되고, 신 또는 조상에게 채무를 갚기 위한 노력이 희생 제의의 형태를 띤다(295, 298). 모스가 관심을 기울였던 선물 주기 역시 받았기 때문에 줘야 하고, 줌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무, 죄의식, 양심의 가책이 모두 부채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 니체의 통찰은 훌륭하다. 그러나 에나프가 훌륭한 점은 니체의 이 통찰이 유대-그리스도교 바깥의 전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없음을 인류학적·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319-323). 그리고 그는 니체가 선물과 답례 영역의 호혜성의 상징적 의무와 상업적 교환 영역에서 빌린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법적 의무 양자를 혼동하였다고 지적한다. 또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관행은 없었기 때문에 니체가 빚과 죄의 뜻이 함께 있다고 지적한 독일어 Schuld 역시 중세 초기에나 출현하였음을 분명히 힌다(322). 이로부터 에나프는 부채라는 용어를 상업적 교환과 계약에만 국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금융적 부채보다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상징적 부채가 존재함을 주장한다. 또 금융적 부채도 상징적 차원을 지닐 수 있고, 이것이 니체를 매혹시켰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반대로 피해에 대한 경제적 보상처럼 금융적 부채가 상징적 부채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상업적 교환에 의한 선물교환 관계의 주변화와 부채 감정의 감소가 수반되고 있다.

 

에나프는 상징적 부채를 응대(reply)의 빚, 예속(dependence)의 빚, 감사(gratitude)의 빚, 이렇게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응대의 빚은 선물교환 관계처럼 증여와 답례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빚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속의 빚은 채권자에게는 이익을, 채무자에게는 손해를 지속적으로 축적시킴으로써 채무를 갚을 수 없을 때에는 노에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다. 감사의 빚은 사실상 응대이지만 그것은 어떤 제약도 없는 응대로서, 오직 받는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표현되는 상황이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행복해하므로 기쁘다. 그 외의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일방적인 증여의 지속은 가장 교활한 형태의 빚으로 악화될 수 있다(325-330). 이러한 상징적 부채들은 무엇보다 어떤 불균형 상태의 현시이다. 채워져야 할 결여이며, 바로잡아야 하는 어떤 부족함이다. 그것은 회복되어야 할 피해라기보다는 바로잡아야 할 무질서의 표현이다. 따라서 부채는 세계의 질서와 연관되어 있다(353).

 

그러나 현대에서는 화폐가 부채를 없애는 보편적 도구가 됨에 따라 이 상징적 부채들은 점차 소멸되는 경향을 띤다(330). 현대에서는 빚으로 생활하다가 다시 빚을 얻어 빚을 갚을 수 있고, 빚을 내서 투자하기도 한다. 에나프는 이를 자본의 시간성이라고 부른다(368). 자본의 시간성의 등장은 위에서 살펴본 화폐의 자본화에 대한 맑스와 짐멜의 상반된 두 통찰과 포개진다. 이제 이전의 상징적 부채들에서 중요시되었던 균형의 회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 부채는 안정된 우주를 전제하였고, 그것이 청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투자되는 부채는 항구적 운동 상태의 우주를 전제한다. 이러한 우주에서는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끝없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369).

 

에나프는 모더니티가 야기한 세 수준의 변화를 부채의 변화의 맥락으로 제시한다(371-2). 첫째, 평형 모델은 이제 항상성이 아니라, 신용과 금융부채의 동학이 창출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볼 수 있듯 운동의 속성을 전제한다. 시간 자체가 판돈이 되는 것이다. 둘째, 화폐가 상징적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던 여러 재물과 재화들을 대체하였다. 모든 활동과 평가가 시장으로 편입됨에 따라, 돈이 고통, 생명, 범죄를 보상하는 일반적 대체물로 기능한다. 셋째, 모더니티는 이전의 형식적으로 평등한 개인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의무와 연합을 무력화시키게 되었다.

 

4. 인정

책 전체에서 에나프는 의례화폐와 상업화폐, 선물교환과 유용품 교환, 상징적 부채와 금융적 부채가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양자를 진화 과정의 선후 국면으로 이해한 학자들을 비판한다. 자본의 시간성 안에 존재한 해석자들은 그 바깥에 존재하는 부적, 귀중품, 선물을 화폐와 상품의 조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모스도 선물교환이 상업적 교환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526). 양자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업적 교환에서 중요한 것은 등가적인 사물이지만, 선물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남겨져 있는 증여자의 어떤 인격성이다. “선물을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다”(205). 이 선물은 바로 유대를 강화시키는 재화”(231)이다. 시장은 친구와 낯선이를 차별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참여자들 간에 사회적 유대를 창출하지 않는다(237, 592). 법은 시민을 공적으로 인정하지만, 타인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이끌지는 못한다. 에나프는 우리 사회에는 한 쪽에는 법과 시장질서가 다른 한 쪽에는 상호인격적인 선물교환 간의 분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 이 양자의 점이지대가 상당히 넓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집단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 처음부터 인정이 보장된 유대 바깥에 있는 타자, 우리의 일상 공간 안에 들어온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에나프는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제기한 문제와 답을 수용한다.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는 순수한 사건이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예기치 않게, 불시에 온다. “절대적인 새로움, 그것이 타자이다”(595). 타자의 출현 자체로 나는 채무자가 된다. 타자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만큼, 윤리적인 요구는 타자로부터 연원한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관계는 도덕적 증여, 타자를 향한 친절이 아니라, 타자를 그의 절대적 타자성 속에서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자본의 시간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환대의 공간에서 인정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이것이야말로 삶 그 자체이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책의 결말에서 에나프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에 나오는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분위기를 전한다. 일상의 삶의 비루함을 잊게 해주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존엄성을 되찾는다.

 

5. 감상

이질적인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내는 저자의 관점의 독특성은 무엇일까? 저자 에나프는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사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쓴 철학사를 읽다 보면, 보통 두 가지 감정이 든다.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철학사를 본인의 관심에 따라 정리했겠지만, 여기서 그 철학사를 쓴 철학자들로 염두에 둔 이들은 들뢰즈, 하버마스, 라투르(?)이다.] 첫째, 철학에 대해 과문한 탓이겠지만, 그들이 다루는 철학의 선배들은 이름을 들어보았어도 또는 읽어본 적이 있어도 내가 아는 내용과는 괴리가 있으며, 내가 안다 생각한 것은 기껏해야 새발의 피일 뿐이었다는 무지의 자각이다. 둘째, 그들의 철학사는 끊임없이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이동할 뿐, 텍스트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이한 역사적 맥락을 주변화함으로써 철학 비전공자들에게 일종의 진입장벽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난점 때문에 그 철학사를 쓴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도 역시 무지함을 깨닫는다. 무지의 자각이 겸손과 알고 싶다는 오기라는 효과를 가져오면 좋으련만, 보통의 경우는 그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 ‘, 그 어려운 말해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스스로 멀리하게 된다. 그 저자의 작업 말고도 우리는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기 때문이고, 그 책들도 죽을 때까지 다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철학사 독서 경험을 넘어서게 해주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 진리의 척도 문제로부터 시작한 그의 연구는 스승에게는 선물로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전기로 예기치 않게 증여라는 인류학적 주제로 넘어가서, 그 증여 안에는 집단 간, 개인 간 인정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6-8). 그리고 이 책은 출판 이후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고,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논쟁을 담은 책으로는 악셀 호네트 등이 참여한 베스텐트 한국판 2012가 번역되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 폴 리쾨르, 아마르티아 센 등과의 논쟁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고 있는 미셸 세르의 주요 저작들도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좋은 책을 읽었는데, 정리하기 정말 힘들었다. 이 책의 끝맺음은 무척 감동적이다. 내게도 미스 아멜리아의 카페 같은 곳이 있다. 옷매무새를 고칠 정성은 없지만, 오늘은 거기 가서 한 잔 해야 하겠다.

 

6. 번역

번역은 별로 좋지 않다. 불어를 못하므로 제대로 평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저자의 학제횡단적 연구를 역자의 실력으로 따라잡기 힘들었던 것 같다. 역자 후기를 보면, 한국말은 잘 하시는데, 번역 실력은 별로 같다. 똑같은 개념이 서로 다른 한국말로 번역되고(: archaic money), “단편으로 번역되어야 할 fragment입자로 번역되고, 수식어를 엉뚱한 데다 갖다 붙이고, 불필요하게 끊은 문장과 불필요하게 붙인 문장들이 너무 많다.

 

 

더 읽고 싶은 책

악셀 호네트 외. 베스텐트 한국판 2012(문성훈 외 옮김, 사월의책)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장영희 옮김,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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