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아마 내가 앙드레 고르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예전에 출판되었던 한 편집서(이병천,박형준 편저,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III』)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는 고르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번역이 별로 좋지는 않다. 글쎄 번역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유명한 저서 ‘노동자 계급이여 안녕’(Farewell to the Working Class)의 제목이 불쾌해서였는지, 고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그 책을 펴보니, 줄은 잔뜩 쳐져 있는데, 그 논문들에서 그가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반 바뀌고 집어든 책이 이번에 나온 『에콜로지카』이다. 이 책은 고르가 자살한 다음 해인 2008년에 출판된 책인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과 인터뷰들 중, 고르의 핵심 사상이 잘 표현된 글들을 골라 편집한 Essential Gorz인 셈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깊이보다는 한 학자의 일생에 걸친 작업들의 맛보기인 셈이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 그 화해 불가능성
옮긴이는 역자 후기에서 “고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174)고 단언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읽은 고르는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이다. 그는『자본론』에서 집약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의에 충실하다. 그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를 낳는 두 개의 원천, 즉 대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고갈시킴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수단과 기술을 발전”시킨다(『자본론』1권 15장 마지막 부분). 이에 반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는 “연합된 생산자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집합적 통제를 통해 자연과의 교환을 규제”하는 사회(『자본론』제3권 7부 48장)이다 (150, 59). 이처럼 고르의 생태주의적 지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이질적인 어떤 것을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 아니다. 고르의 생태주의적 입장은 『자본론』내부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언명을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르크스나 고르 모두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상 노동착취적이며, 반생태적이다.

고르가 마르크스와 갈라지는 지점은 자연의 착취를 공통분모로 하여 자본이 노동의 포섭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고르의 비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은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 자본과 노동은 일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곧 자본과 노동, 양자는 그들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과 그 생산의 부산물)의 구체적 형태와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오는 보상, 곧 이윤과 임금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된다 (121, 143).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옹호하며, 고용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자연에 대한 “파괴와 약탈의 공동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149).

자본주의적 노동의 역사
고르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논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지 노동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140-148). 그에 따르면, 18세기 공장제 수공업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노동은 그저 자연에 복종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을 변형시키고 지배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140). 이는 몰개성적이고 대체가능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야기한다(141).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동일한 질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에 기반한 것이다 (35, 141-144). 이 동질적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에 의해서만 노동착취에 대해 저항할 수 있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라는 토대 위에서 일치단결하여 투쟁하게 된다. “계급의 일치감과 소속감이 왕성”했던 이 “영웅적 시기”에 노동운동은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의 “생활비로 ‘충분한’ 임금을 요구하면서, 주로 생존권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145-146).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전까지 ‘모두에게 공통된 필요’를 지녔던 소비자들이 점점 더 ‘차별화된 개인적 욕망’을 지닌 소비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소비자의 개성화와 차별화는 산업 판로의 확대를 낳는 동시에 노동자의 결집력과 계급의식을 파먹어” 들었다 (147). 노동과정에서의 존엄성 상실은 높은 임금으로 가능해진 소비 생활에 의해 보상된다. 대략 1973년까지 지속된 포드주의 시기 동안 노동생산성 증가가 총생산 증가를 상회함으로써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가능케 하였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중산층화와 함께 천연자원의 초토화를 가속화시켰다 (147-149).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반경제
이 책은, 포드주의 이후에 일어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야기,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반혁명과 금융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114-119쪽 정도가 예외).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는 대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축소,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통화주의적 경제 운용, 감세, 고용의 유연화, 금융 자유화 등을 동반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 시도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신자유주의 국면을 이전의 자본주의 황금기 혹은 영광의 30년 시기에 대한 반동이자 그 시기의 추세에 대한 역전으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고르는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모순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출되는 것으로 본다. 곧 이전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논리적 연장으로 해석된다. 그는 대략 1980년대부터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위기의 원인으로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공학 혁명”을 들고 있다 (114). [Cf. 도미니크 쁠리옹, 『신자본주의』 67-68쪽 참조]

고르는 이 과거 30년 동안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기본 범주, 즉 노동, 가치, 자본이 더는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남들이 다할 줄 아는 보편적 기본 기술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적 주특기와 노하우(비물질적 구성요소)를 통해 생산과정에 기여할 것을 요구 받는다.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투여되는 상이한 질을 지닌 개별 노동의 가치는 더 이상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는 데에 반해 “상징, 이미지, 메시지, 스타일, 유행을 생산하는 비물질적 차원”의 가격은 상승한다 (169).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그 물질성 충만했던 노동으로부터 추론된 가치 개념은 이제 적용 곤란하게 된다. 또 포드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많은 비용을 들여 지식의 사유화와 인위적 품귀화를 통하여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하려는 시도가 소위 지식경제의 출현이라는 트렌드로 관찰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의 비물질화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본에게 “공급을 독점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33). 그러나 “상품의 성격에서 비물질적인 내용이 차지하는 무게가 늘어감에 따라 … 공급의 독점이 점점 자본에서 벗어난다” (37). 정보 혁명은 이전까지 사유되고 독점되었던 비물질적 콘텐츠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복제 가능하게 함으로써, 비물질적 콘텐츠를 교환가치를 상실한 무상의 ‘공유재’로 만들어 버린다 (38). “컴퓨터와 인터넷은 상품의 지배를 기초부터 무너뜨린다” (39).

자본주의적 팽창, 곧 만물의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리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과 자본의 비물질화와 정보혁명은 지식을 상품화하는 데에 내재해 있는 어려움을 더욱더 노정시킨다. 그리고 이는 애초의 기대를 배반하는 反경제라는 역설적 결과를 산출한다. 지식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와는 달리 측정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통의 표준에 의해 교환될 수 없는 가치이다 (17). 이 반경제에서 “지식의 ‘가치’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얼마나 전파되는가로 측정”된다 (18). 
 

알라딘 서재질
알라딘 서재는 지식의 반경제의 좋은 예 아닐까? 물론 알라딘 서재를 비롯한 인터넷 사업체(언론, 서점, 포탈)들의 블로그는 블로그에 올라오는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한다 (서재지수). 이 측정된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확증된 경우 시스템에 의해 보상된다 (thanks to). 이를 지식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이라 부른다면 너무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까? 알라딘 서재는 분명 지식을 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논리에 포섭하려는 논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생존을 위해, 곧 자신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인 임금을 위해 노동한다. 알라디너는 서재지수 올라가고, thanks to 받으면 기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알라딘 서재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외도 좀 있는 것 같다). 이는 이 책에서 펼쳐진 고르의 논의를 알라딘 서재에 장난삼아 적용해본 것이다.

나는 고르보다는 회의적이다. 서재질의 미덕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나의 알라딘 서재질이 지식의 상품화 논리에 지적 유희마저 복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의 문제

쓰다 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딴 데로 새버렸다. 사실 고르의 생태주의적 대안의 매력이나 이 책의 번역상의 문제에 대해 꼭 좀 지적할 부분들이 있었는데, 요약과 공상이 너무 길었다. 다 집어치우고 나중에 출판사에서 재판 찍게 되거든 참고하라는 마음으로 대표적인 굵직한 실수 몇 개만 지적하겠다.

- 옮긴이는 154쪽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사이의 비율”로 번역하였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이며,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둘 다 불변자본이다. 책 전체에 걸쳐 고정자본이란 번역어는 계속 나오는데 (19, 38, 148, 151, 그리고 또 여기저기) 148쪽의 “물적 설비에 투자된 고정자본”의 경우처럼 고정자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59쪽에서 『자본론』 3권 48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에서 역자는 necessity를 “필요성”으로 번역한다. 이 원문은 내가 갖고 있는 비봉판 김수행의 『자본론』3권 하편의 1011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김수행은 이를 “필연”으로 옮긴다 (내가 갖고 있는 『자본론』은 개역판이 아니기 때문에 좀 그렇지만, 이 부분은 김수행의 번역도 별로 좋지 않다). 분명 necessity에는 필요성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자유의 왕국과 대비되는 필연의 왕국이라는 맥락에서 필요성보다는 “필연”으로 옮기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필요”라는 번역어는 37쪽에서도 나오고, 109-110쪽에서도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결여로 인한 필요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유와 대비되는 필연을 뜻한다고 읽는 것이 올바른 독해일 것 같다.

- 116쪽: “현금가능자산” → “유동성 자산”

- 144쪽: “『노동, 임금, 그리고 자본』” → “『임노동과 자본』”  


같은 출판사에서 앙드레 고르의 유명한 저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책속표지에 선전해 놓았던데, 그 때는 이런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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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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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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