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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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C. P. 스노가 말한 두 문화 (two cultures)의 노예이다. 대부분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교육을 받고, 언젠가부터 같은 문과인이 아니면 대화의 주제와 소재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을 경험상 체득하며 살아 왔다. 음식을 편식하듯, 책도 편독할 수밖에 없다. 젊은 날 드물게 몇 번, 스티븐 호킹이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책에 호기롭게 도전해본 적도 있지만, 역시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었고, 이러한 좌절의 경험은 나의 편독 생활을 부정적으로 강화하였다. 편독이 딱히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은 더구나 아니고 하여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았는데, 생태주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물과 지구과학에 대한 관심들이 다시 일고 있다. “인류세만을 다룬 책은 처음 읽었는데, 역시 공부를 하면 그 전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은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에 몰랐던 것은 새로 알게 되고, 또 새로운 질문들이 생긴다. 좋은 책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구과학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지구 시스템 과학의 기본적 논의들을 역사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하기 수월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사회, 철학, 경제, 예술 텍스트가 그것이 자리잡은 역사적 컨텍스트와 접목될 때에야 비로소 그 텍스트에 대한 자기화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1. 가이아의 부활: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처음부터 인류세 이야기를 바로 다루지 않고, 새로운 시대적 정의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주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지구)가 無로부터 등장하여 신과 인간을 창조하지만,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는 신이 우주, 지구, 인간을 창조한다. 전자에서 인간은 조연일 뿐이지만, 후자에서 인간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따 만든 특권적 존재이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부터 19세기의 다윈까지 이 히브리적 인간관을 다시 전도시켜 인간을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학 지식에 기반하여 자신을 거대한 자연의 힘을 발휘하여 지구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변모시킨다.


화석 증거들을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수립을 도왔던 지질학(23-25)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시스템과학의 기틀을 마련한다. 1926년 베르나츠키는 지구 시스템을 태양 에너지를 전체 동력으로 삼으면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부 권역들 암석권, 대기권, 수권, 생물권, 인류권 의 복잡한 체계로 정의한다(37-39). 그러나 당시에는 이 위대한 소련 학자의 통찰력이 나라 밖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 린 마굴리스 등의 연구는 지구시스템과학과의 연결 속에서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를 부활시킨다(40-43). 곧 완전한 無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구가 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에서 생명권을 형성시키고 대기의 기후를 40억 년 동안 안정화시키면서 하부 권역들 간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에 의해 작동하는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 작동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이다. 이 지구 시스템 과학의 연구 성과 중 부정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이제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2).


2. 쟁점1: 황금못을 어디에 박을 것인가?

층서학은 지질시대를 累代(eon), (era), (period), (epoch)로 구분한다. 우리는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홀로세(Holocene)는 약 117백년 전에 시작되었다. 가장 오랜 지질시대는 선캄브리아 시대의 명왕누대(Hadean)인데 지구가 생긴 46억년 전부터 40억년 전까지의 시기이다. 인간의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기원 전 몇 세기이니, 지구의 역사는 시간 단위 자체가 달라진다. 층서학자들은 세와 세 사이를 구분하는 표시를 황금못(Golden Spike)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홀로세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곧 인간이 지구 시스템에 거대한 힘을 발휘하여 지층에도 흔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하는 황금못을 어디에 박아야 하는가? 제안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는 홀로세 시작 직후인 1 1천년 전이고, 가장 최근의 시기는 1945-64년이다. 여기에 대한 여러 증거 제안들이 제시된다. 표로 더 유력한 일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연대기: 인류세의 잠재적인 시작점 및 제안된 GSSP 표지

사건

시점

층서학적 표지

제안자 (페이지)

집약적 농업

기원전

11천년에서 6천년

빙하 코어에 나타난 8천년 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William Ruddiman (90, 150), Bruce Smith & Melinda Zeder (143)

쌀 생산,

반추동물이 배출하는 메탄

기원전

6천년에서 3천년

빙하코어에 나타난 5020년 전 메탄 최소치 표지

상동 (148), Dorian Fuller (152)

생물 동질화 (동질세)

기원전

5천년에서 5백년

꽃가루, 식물암, 동물 뼈

Gordon Orians (159)

인위적 토양 변형

기원전

3000년에서 500

토양 유기물, 인 축적, 동위원소 비율, 꽃가루

(148)

자본주의

(자본세)

1450

Jason W. Moore (224), Donna Haraway (231)

콜럼버스 교환 (오르비스 못)

1492년에서 1610

빙하 코어에 나타난 1610년 이산화탄소 최소치 표지, 꽃가루, 식물암, ,

Simon Lewis &

Mark Maslin (158-62)

산업혁명

(탄소세)

1760년에서 1800

석탄 연소에서 나오는 비산회,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 비율, 호수의 규조 구성비, 빙하 속 이산화탄소

Paul Crutzen & Eugene Stormer (90)

거대한 가속

1945년에서 1964

방사성 핵종 (1964년 탄소 14와 플루토늄 239 정점), 블랙카본, 플라스틱, 오염물질, 기타 동위원소들

Will Steffen (90)


이 황금못 후보들 중에서 루이스와 매슬린의 오르비스 못이 제일 흥미로웠는데, 그것은 단지 나의 의견일 뿐, 2016 8월 인류세실무단은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비교 평가하여 20세기 중반의 거대한 가속에 황금못을 박기로 한 상태이다(126, 241). 흥미로운 점은 투표단 35명 중 4명이 소수의견으로 통시적시작점에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빅뱅을 통해 우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138억년 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 6천만 년이다(27). 그 중 선캄브리아대가 40 6천만년이고, 그 이후의 현생누대는 5억 년의 시간이 누적된 것이다. 포유류의 역사가 2억 년,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30만년쯤이라면, 자본주의의 역사 500년은 매우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의 우주력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보았을 때, 컬럼버스의 신대륙 정복은 그 해 12 31 23 59 59초에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27).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시각에서 자본주의 5백년의 역사는 충분히 긴 시간대이지만, 우주나 지구의 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눈깜빡할 사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황금못을 1610년에 박을지, 1940-60년에 박을지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지구에 끼친 인간의 힘이 누적적임이 분명하다면 인류세가 통시적 시작점을 갖는 것이라고 보는 소수 의견이 타당해 보이고, 지구의 나이라는 긴 시간대에서 바라보면 그것 역시 등시성이라는 층서 결정기준(81)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3. 쟁점2: “인류세라는 명칭은 온당한가?

인류세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과 달리,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인류세를 안트로포스라는 종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지구상 모든 인간을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218-9). 저자인 엘리스도 이 견해에 명시적으로 동의한다(222). 부유한 국가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 미국, 중국, 인도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비교해보면, 중국은 미국의 절반에, 인도는 미국의 1/10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에게 지구 변화의 책임을 묻는 인류세라는 이름이 타당한가? 아마 층서학자들을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은 이 질문에 민감하지 못한 것 같다. 우주와 지구라는 커다란 문제계에 비해 인간 내부의 차이는 너무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이슨 무어를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도나 해러웨이처럼 두 문화의 경계를 부지런히 뛰어넘으며 횡단하는 이들도 예외적으로 이 문제제기에 동참하고 있다.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가 온당한 명칭이라는 이들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인류세실무단의 단원인 저자 엘리스가 이들의 문제제기를 경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224-7). 지난 여름 읽느라 꽤 고생했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4장에서 나온 툴루세(Chthulucene)의 논의도 다뤄진다. 툴루세는 인류세에 체현된 인간중심 사고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비인간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잡한 사회적생태적 과정의 그물 속으로 인간을 연계시킴으로써 탈중심화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231). 툴루세는 인간이 다양한 종의 집합체가 상호의존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 속에 얽혀 있다는 상상, 곧 과학적 우화(scientific fabulation)인 것이다. 엘리스는 해러웨이가 의도적으로 과학적 언어와 거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지구 시스템 과학의 체계적 사고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곧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가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및 에너지 흐름을 통해 기능적으로 연결되고, 비생물적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해러웨이와 지구 시스템 과학이 공유하는 요소이다. 해러웨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보니 현재진행형의 두터운 시간성으로서 툴루세의 의미가 보다 잘 이해되었다.


인류세실무단이 인류세라는 이름이 잘못되었으니 이제부터 자본세를 쓰자고 투표할 일은 없겠지만, 자본세라는 명명은 지구를 망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된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용하면서도 가치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어의 자본세 논의가 지구 파괴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해러웨이의 인류세 비판과 자본세/대농장세/툴루세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4. 맺으며: 과학적 사실의 발명과 경합하는 해법들, 그리고 약간의 반성

인류세가 올바른 명칭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인류세 논의는 하나의 과학적 사실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곧 인간의 힘이 지구에 영구적 흔적을 남길 정도로 강해졌고, 이것을 방치한다면 지구 시스템은 티핑 포인트를 지나서 인류의 역사가 알고 있는 생명권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가짜 뉴스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truth)이다. 하지만 그 진실은 인간성이 배제된 과학이 그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발명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익과 정치가 개입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또 인류세 개념은 위기의식과 함께 어떤 집합적 행동을 촉발한다. 여기에는 성층권에 빛을 반사하는 미세한 황산염 에어로졸 입자를 주입하자는 크뤼천의 지구공학적 제안부터 나오미 클라인을 비롯한 반자본주의적 기후정의운동까지, 스타벅스의 리필 용기 이벤트부터 쓰레기 만들지 않기, 차 없이 살기, 채식, 귀촌 같은 라이프스타일 변화까지, 수퍼리치들의 뉴스페이스 같은 우주여행 민영화부터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돈룩업>의 디스토피아까지, 경합하는 대안들을 산출시킨다.


나쁜 자본세를 좋은 인류세로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질문이며,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답을 하는 과정에서 경합하는 힘들이 대립할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사실의 형성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렇게 형성된 진실은 정치와 경합의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지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내 꼬락서니가 참 한심하다. 내가 건강하면서 지구의 열을 좀 낮출 수 있는 방법들은 참 많은 것 같은데 실천하기 힘들다. 좀 덜 먹을 수 있을까? 고기를 안 먹을 수 있을까? 차 없이 살 수 있을까? 시골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못해도 남은 인생 동안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이 르 면   내년   ‘인류세 ’ 지정…새   지질시대   증거  후보는   플루토늄

내년 ‘ 인류세’  선언 예정... “1950년부터  인류가 자연 압도”


https://youtu.be/GPvyK8dBYqg




[추기: 2024. 3. 19.]

“인류세는 죽었다. 인류세 만세” [오철우의 과학풍경] (hani.co.kr)


Ditching ‘Anthropocene’: why ecologists say the term still matters (nature.com)


15년의 논의 끝에 지질학계는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의 공식명칭으로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저자 엘리스는 1950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단지 명칭만이 아니라, 시점까지도 채택 여부를 따지는 논의의 쟁점였다는 말이다. 이 논의를 새로 투표에 붙이려면 10년이라는 냉각기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 동안 지구 온도는 또 얼마나 올라갈 것이며, 여전히 한반도에도 사과가 재배되고 있을까? 우리 인간은 좀 바뀌려나? 화석 자본주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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