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자 행성 -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5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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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마굴리스(1938-2011)는 세포, 그 중에서도 핵 바깥의 세포질을 연구한 미생물학자다. 미생물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4부에서 언급한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같은 사람인가 보다 했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이 연구하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 엄밀한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 니체의 말로는 하나만을 알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나? 그러므로?) “정신의 양심을 가진 자(정동호 역, p. 403)이고, 사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지식인이 아닌 지식기사이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충분히 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괄호친, 곧 관심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문제삼지 않는 자, 그 존재자들을 자신의 인식 지평 바깥에 둔 자이다. 이들은 자신의 앎의 지평 안에서는 무수한 물음표들을 만들어내고 대답을 제시하(려 노력하)지만, 그 바깥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이 제기되어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미덕이 있다면, 곧 그들이 정신의 양심을 가졌다면, 이 경계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겸손하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그 밖의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굴리스는 나의 이런 선입견에 멋지게 한 방 날렸다. 그녀는 미생물 연구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동물과 식물, 생명, 진화, 그리고 가이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들을 시도한다. 이와 더불어,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들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명시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이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육지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미생물이 자신들의 막 안에 액체를 유지함으로써 일종의 초바다(hypersea)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고, 광합성을 통해 대기를 산소로 채운 것도 이 미생물이다(192-193). 시간적으로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있었고, 인간이 출현한 다음에는 인간과 함께 그들 안팎에서 존재하며, 인간이 소멸한 다음에도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미생물보다 큰 세상이란 우주밖에 없다. 그 순간 나의 인식 지평이란 참 초라해진다. 인간의 삶과 사유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의 역사가 모두 미생물 앞에서는 하찮아져 버린다. 오만을 반성하고, 그 앎의 상대성과 무지를 인식하게 되면, 쳐졌던 괄호는 풀리고 그 중 일부는 새로운 앎과 새로운 모름의 대상이 되어 인식 지평으로 편입되고, 괄호는 다시 쳐진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창세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신화, 나아가 오늘날의 SF의 위상과 동등한, 믿음직하지 않지만 재미는 있는 픽션이 된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 이후로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 생명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 생물은 좋아하는 과목였지만, 그것은 나와 생명체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살고 죽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였다. 이제 비로소 지금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나를 알기 위해, 나와 같이 살면서 세계를 만들고 있는(worlding) 생명들을 알기 위해, 그리고 이 생명들이 다른 힘들과 함께 이루는 가이아를 알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그래도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정보의 조각들은 여전히 유용하다. 세포, , 세포질, 미토콘드리아, DNA, RNA, 염색체, 감수분열 등 이제는 내게 Inside Out빙봉과 같은 존재가 되어 기억 창고 속에 먼지가 가득 쌓였던 개념들이 다시 등장한다.

 

이 책은 단순한 생물 교양서가 아니다. 마굴리스는 연속 세포 내 공생이론(SET, serial endosymbiosis theory)”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비전공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이론을 확립한 미생물학자이다. 이 책에서 마굴리스는 이 SET과 가이아의 연관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마굴리스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렇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니까, 너도 어렵다고 중간에 책 덮으면 안 돼. 독자 너도 필자 나만큼은 노력해야지. 읽는 게 쓰는 것보다 어렵겠니?” 그런데 읽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 정리해보자.

 

1. SET: 공생자 행성의 공생자들

1967년 마굴리스는 SET을 세상에 선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SET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의 융합, 곧 하나됨의 이론이다(67).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세포는 공생하는 별개의 세포(박테리아)가 합쳐져서 새로 만들어진 개체이다. 이제 공생은 개체간 공생이 아니라, 개체내 공생이 되며,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지닌 개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진화가 일어났음을, 곧 공생발생(symbiogenesis)을 통해 진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포 수준뿐만 아니라, 더 큰 동식물 개체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이 융합은 순서대로(serial) 일어난다. 진핵세포 안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대사 과정은 세포 내로 들어온 호열산세균에서 유래한 것(1단계)이고, 그 다음에는 정자 꼬리 같은 것을 가진 유영 세균이 결합(2단계)하였고, 산소호흡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또한 세균 공생자가 진화한 것(3단계)이고, 조류와 식물의 엽록체와 색소체는 이전에는 독립생활을 하던 광합성 시아노박테리아가 합체(4단계)된 결과이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각 단계는 가설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2단계를 제외한 세 단계에 대한 검증이 완료되었으며, 2단계에 대한 가설도 곧 검증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한다(78-80).

 

이는 단지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된 것, 곧 비어있던 자리가 새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지식과 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싸움에서 이겼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순차적으로 합체한 결과이며, 진화가 이를 통해 발생했다는 공생발생의 기본적인 통찰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러시아 생물학자 콘스탄틴 메레슈코프스키(1855~1921)와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아이번 월린(1883~1969) 등이 이미 공생발생의 주장을 편 바 있다(22-23, 56-57, 67, 77-78, 101).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의 이론을 검증할 도구들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주류에 의해 무시당했다. 마굴리스는 자신의 핵심적 기여는 이 이론의 세부 사항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면서, 한때 배척당했던 이 이론이 정설로 되어가리라는 점을 확신한다(75). [해러웨이는 마굴리스가 이들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자현미경, 핵산서열 분석기 같은 20세기말의 강력한 사이보그 도구들덕분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트러블과 함께하기, p. 114).]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SET 역시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마굴리스도 결코 응전을 회피하지 않는다. 경합의 파트너들은 상대방의 논리를 잘 파악하고 있고, 자신의 이론이 옳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상대방뿐만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검증을 계속한다(81-92).

 

경합이 발생하고 해소되는 방식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다르다. 입장 차이와 경합은 종교에서 억압 또는 회피되지만, 그것들은 과학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것이 해소되는 방식도 다른 것 같다. 설명 대상인 존재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학의 입장이다. 그 존재에 대해 물음표를 끊임없이 던지며, 그 물음에 대한 답들은 언제나 인식가능한 실재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종교는 대상의 초월성을 가정하므로, 보편적 인식 가능성에 기반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설과 검증이라는 진리 테스트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는 도덕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상식을 구성할 수 없다.

 

2. 25계 분류 체계: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경합에서의 승리는 연쇄적이고 확장적이다. 공생발생의 진화 이론은 기존의 진화 이론에 입각하여 고안된 분류체계, 곧 생명을 이름 붙이고 분류하는 방식도 새롭게 다시 쓴다. 우리는 막연히 유기체는 동물과 식물 두 가지가 있다고, 또는 여기에 병원균을 더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교육받고 그것을 상식이라 생각하지만, SET에서 발전된 25계 분류(two-tiered five kingdom classification) 체계는 이 상식을 뒤엎는다.

 

분류학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300년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5백여 종의 동물을 분류했지만 눈에 보이는 동물만을 분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생물은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당시까지 보고된 모든 생물들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유니콘, 인어 등도 들어 있었다(108). 칼 폰 린네(1707~1778)는 생물의 속(genus)과 종(species)二名法[: Homo() sapiens()]을 창안하였고, 1만 종의 생물을 분류하였지만, 신의 창조를 믿었던 그는 진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린네까지는 생물을 크게 동식물 두 종류로, 파스퇴르 이후에는 여기에 세균을 추가하여 세 종류로 구분하게 된다. 분류학에서 진화를 최초로 고려한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인데, 그는 동물과 식물의 공통 조상은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물계와 식물계에 원생생물계를 추가하였다. 생물 분류체계는 이후 허버트 코플런드(1956)와 로버트 휘태커(1969)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화되었다.

 

마굴리스는 칼린 슈워츠와 함께 이를 종합하여 1998년에 25계 분류를 발표한다. 이들은 먼저 1) (핵이 없고 공생발생을 거치지 않은 세균, 곧 박테리아인) 원핵생물과 (핵이 있고 공생발생을 통해 진화한) 진핵생물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진핵생물을 다시 2) 원생생물, 3) 균류, 4) 식물, 5) 동물로 구분한다(99-100, 106-107). 마굴리스(와 칼 세이건)의 큰아들 도리언 세이건은 각 생명군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그려냈다(그림 4, 100).



 

마굴리스는 이 25계 분류가 최종적 지식, 완성된 진리가 아님을 시인한다. 곧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을 연구한 결과를 반영하여 계속 수정되어야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계 분류는 생물을 두 종류, 세 종류로 분류하는 기존의 상식이 허위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상대적 진리임은 분명하다. 인상적인 것은 마굴리스가 기존의 분류법을 비판하면서 더 타당한 분류법을 고안하고자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명과 범주화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잘못된 분류법에 기반해서 잘못 붙여진 이름들이 많다. ‘남조류’, ‘원생동물’, ‘고등동물’, ‘하등식물등이 대표적이다.

 

마굴리스는 언어가 존재와 사태를 명확히 정리하기보다는 혼란을 유발하고 속일 수 있다고 말한다(104).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로 정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이름과 잘못된 분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명명과 분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더라도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올바른 분류 체계를 마련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캐리 울프와의 대화”(황희선 역, p. 308, 325)에서 언급된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유명한 말이 인용된다. (유명하다는데 나는 처음 봤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98). 곧 공생발생하는 생명들이 실제의 땅이라면, 분류법은 그것을 종이에 옮겨놓은 지도이고,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라벨링, 서랍에 넣고 정리(하고 안심)하기는 그 존재를 왜곡한다. 그러나 생물학자의 지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땅에서 사는 생명들은 계속 살아나간다. 이름 붙이려면 제대로 붙이는 것, 그게 인간에게는 최선이다. 하지만 지도 밖의 생명이 마굴리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내게 붙인 이름 또는 부여한 속성이 나의 존재를 다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이쯤에서 자연스레 해러웨이가 연상이 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하자.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p. 123)

 

3. 가이아

마굴리스는 머리말에서 자신은 애초에 SET과 가이아 개념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음을 밝히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바뀌었고,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이아에 대해 논하는 마지막 8장이 제일 인상적이다. 섹스와 감수분열의 기원(6)과 초바다를 통해 생물권이 육지로 확대되면서 지구가 공생자 행성이 된 이력(7)도 흥미롭다. (20227월 초 현재 서울 서북부지역은 이른바 사랑벌레때문에 고생이라는데, 원서 6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벌레(love bugs) 이야기가 나오는데, 184쪽의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가 마지막의 가이아 논의로 모아진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공생발생 논의가 요약되고, 이 논의가 가이아 이론으로 이행하는 연결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도, 생명은 훨씬 더 폭넓은 계(system)를 이룬다. 우리 피부 바깥(그리고 안쪽)에 있는 수백만 종들은 물질과 에너지 측면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다. 지구의 이 이질적인 존재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자, 우리의 일부다. 그들은 우리의 물질을 순환시키고, 우리에게 물과 양분을 준다. ‘(the other)’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을 통해 공생하고, 상호 작용하고, 상호 의존하던 과거와 연결된다.” (196-197)

 

마굴리스는 가이아에 대한 논의를 고유감각(proprioception)”이라는 의학적 개념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곧 몸의 상태에 대한 몸의 느낌이다. 눈을 깜박인다는 것,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 속이 불편해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들 같은 것까지 다 고유감각이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이 없지만, 이러한 생리적으로 조절되는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를 갖고 있다. 제임스 러블록은 이 행성의 조절 체계가 지구의 생명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 초 어느날 그는 이 지구 대기의 화학적 이상을 감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인공두뇌 시스템의 작명을 파리대왕의 저자인 윌리엄 골딩에게 부탁한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가이아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가이아 연구 초기부터 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그것의 개념적 내실을 다져왔다. 가이아는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활동하는 천만 종 이상의 생물들,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 에너지원인 태양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출현(창발)한 전 행성적 체계이다(210-211). 그것은 끊임없이 새 환경과 새 생물을 만들어내는 조절이 이루어지는 행성 표면을 가리킨다(212).

 

가이아 이론은 과학적인, 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생리학적인 가설로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지구의 생명 집합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몸의 속성들을 보여준다”(218).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나 J. Kirchner 같은 이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가이아 이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생명 전체가 자신이 이용하는 환경을 최적화한다(optimize)애초의 개념화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론적뉘앙스를 제거하면서, 가이아 개념 자체의 정당성을 끝까지 고수한다(203, 219-220). 왜냐하면 생물의 다면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지구의 기온과 대기의 구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일관된 입장에는 가이아 이론이 유용한 과학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다.

 

마굴리스는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의 비판보다는 가이아 개념이 대중화되면서 생긴 비과학적 활용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곧 가이아를 신통기의 서술대로 대지의 여신같은 어떤 개체적 생명체로 인식을 한다든가, 이러한 인격화에 기반하여 지구를 강간의 위험에 노출된 여성으로 비유하는 페미니스트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왜곡 가능성을 경계한다(211). 종교, 언론 등에 의해 조장되는 이러한 대중적 곡해에 반대하면서, 마굴리스는 가이아가 인간에게 악의를 드러내지도 인간을 따로 돌보지도 않으며, ”기온, 산성-알칼리성, 기체 조성 조절 같은 지구 규모의 현상의 약칭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12).

 

4. 홀로바이온트의 함께-세계 만들기와 가이아의 두꺼운 현재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해러웨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트러블과 함께 하기의 여러 곳에서 자신이 마굴리스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았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울프와의 대담”(324-5)에서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구성하는 여러 갈래들로 1) 하이데거-아감벤의 생명정치, 2) 푸코의 생명정치, 3) 페미니즘, 4) 마굴리스로부터 영향받은 시스템에 관한 생물학적 사유를 지목하는데, 이 중 마굴리스의 영향이 가장 두터운 갈래라고 말한다. 트러블과 함께 하기는 마굴리스의 공생발생(symbiogenesis) 개념을 공동제작(sympoiesis, -)” 또는 함께-세계 만들기(worlding-with)”, 그리고 하나도 아니고 개체도 아닌 채로 서로 얽혀 있는 실체를 홀로바이온트로 변용한다(61-63, 107-114). 또 해러웨이는 르 귄, 라투르, 스탕제르 등의 논의를 조합하여 마굴리스가 고안하고자 했던 가이아의 비의인화된 형상의 모습을 툴루세와 카밀 이야기를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73-81).


<세포내 공생: 린 마굴리스에 대한 오마쥬> (트러블과 함께 하기』, p. 108)

 

가이아 안에서 우리는 물질대사를 하며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흡수하여 몸을 키우며 살다 죽는다. 그 후에는 분해되어 퇴비(compost)가 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것들의 물질대사를 통해 그들의 몸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체이지만, 그렇게 지금 나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과거에 나 아닌 타자를 구성하였고, 내가 죽은 후 미래에는 또 다른 타자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위의 인용구(196-197)에서 마굴리스가 이야기했던 바가 개체들이 살다 죽으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가이아의 시간대, 곧 툴루세인 것인다. 이 두꺼운 현재(thick now)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친밀한 타자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면서 살다 죽고, 분해되어 흡수되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의 일부를 형성한다.

 

마굴리스는 인간의 오만을 질타한다


인간은 자연을 끝장낼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자연은 불협화음과 화음을 적절히 섞어 가면서 계속 노래부를 것이다”(226-227).

자연으로 먼저 들어간 마굴리스를 대신해 해러웨이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해러웨이는 더 많은 사람들, 반려종들, 사이보그와 함께 킨이 되어 실뜨기와 존재론적 안무를 하며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5. 나가며

마굴리스는 미생물학자이지만,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그 아주 작은 것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관심한 학자가 아니다. 거머리 뇌 학자는 아주 큰 세계에 무관심하지만, 마굴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가이아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으로 확장시킨다. 그녀가 연구하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존재해온 위대한 존재, 인간보다 더 큰 세계이다. 이 작은 미생물에 대한 앎이 인간보다 더 큰 가이아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틀리다고 믿는 것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앎도 믿음도 바뀔 수 있지만 현재의 그것들이 기초하고 있는 탄탄한 근거들보다 더 강한 증거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영토의 변화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지도는 폐기되어야 하고 다시 그려져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린 지도에 대한 믿음보다 그 지도가 그리고자 했던 저 바깥에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야 가능할 것이다. 나이들수록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텐데 존경스럽다. 닮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으려면 인간-비인간 타자에 대한 관심, 그들과의 부분적 연결,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그의 호의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학자로서의 야심과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같이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인데, 마굴리스도 해러웨이도 이 둘 모두를 갖춘 훌륭한 여성, 존경스러운 지식인이다.

 

: 번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번역이다. 딱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읽다가 글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서를 확인해보고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77쪽 마지막 줄부터 787행까지의 부분(공생 발생은 러시아의 ~ 특성들을 많이 잃었다)703행과 4행 사이에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엉뚱한 곳에 번역이 되어 있다. 원래 영어 책의 43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3장의 첫째 문단 다음에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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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자 행성 -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5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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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자연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마굴리스의 단언은 Don‘t Look Up에 열광했던 나를 반성케 한다. 지구적 공생발생 체계라 할 수 있는 가이아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지구가 고유감각을 갖고 유지되도록 하였다. 인간이 없어진 뒤에도 마찬가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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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유형지에서 외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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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터다이크는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4장에서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세 단편들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최초의 고민, 단식 수도자 을 다룬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카프카는 나온다. 난 왜 카프카를 이제야 읽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라도 읽는 것이 맞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다. 그래도 15년만 일찍 카프카 읽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1917)

유럽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빨간 페터가 자신이 원숭이였던 시절을 학술원에 보고한 글이다. 아프리카 골드코스트(가나)에서 총 두 발을 맞고 포획된 원숭이가 좁은 우리에 실려 배를 타고 유럽으로 실려오던 중에 순차적으로 배우게 된 인간 흉내 악수, 침뱉기, 파이프 담배, 코르크를 따서 브랜디를 마시고 병 던져 버리기 의 학습과정을 회상한다. 그의 인간모방 학습은 오직 우리로부터의 출구(the way out of the cage)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 출구는 탈출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탈출은 자살행위로 여겨졌고, 인간이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여기며 동경하는 자유를 그는 이미 느꼈지만 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는 유럽에 도착한 후 그가 있던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 인간들이 추구했던 것이다(212-213).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선원들을 관찰하면서 내적인 안정을 얻게 된 빨간 페터는 살려면 출구를 찾아내야 했고, 그 출구를 사람 흉내에서 찾았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은 사람의 말까지 함으로써 우리에서 나오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노력 끝에 새로운 창살에 불과한 동물원이 아니라 곡마단(서커스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밖으로 뛰어나갔다”(219). 많은 선생들이 그를 가르쳤고, 피나는 노력 끝에 빨간 페터는 유럽인 평균 교양 수준에 도달한다.” 이는 자유를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출구였을 뿐이다. 그는 이제 밤에는 공연을 하고, 매니저를 대동하며, 숙소에 오면 훈련 중인 여자 침팬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지식을 넓히는 일이었고, 그 목표에 도달했다.

 

최초의 고민 (1922)

공중곡예사는 언제나 서커스장 천장에 매달려 완전한 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수련한다. 순회공연은 그에게 고역이고, 흥행주는 이런 그를 경주용 자동차에 태워 초고속으로 이동시키거나, 기차 한 칸을 통째로 그에게 배정하여 그 칸에 서커스장처럼 그물을 쳐준다. 기차 안에서 곡예사는 흥행주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앞으로는 그네 두 개를 써야 하겠다고. 흥행주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전보를 보내 그네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하고 곡예사를 진정시킨다.

 

단식 수도자 (1923)

단식공연이 잘 나갔을 때, 단식 수도자는 온 마을의 관심을 받았다. 감시자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먹지 않나 불철주야 감시했으며, 단식이 끝나면 관중들의 경탄 속에서 귀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련을 마쳐야 했다. 수도자는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단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못 마땅했지만 단식은 늘 40일만에 환호 속에 끝났다.


시간이 흘러 단식공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렸지만,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었던 단식 수도자는 흥행주와 헤어져 곡마단에 고용되어 공연 지속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당최 단식 공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있는 우리는 단지 마구간으로 가는 통로의 방해물신세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도자는 혼자만의 단식을 40일을 훌쩍 넘겨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기록을 계속 갱신하다 밝견된다. 그를 발견한 감독이 그에게 왜 다른 일을 못하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단식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맛있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치워졌으며", 그 우리에는 표범이 새로 들어온다. 표범에게는 계속 먹이가 주어졌고, 사람들은 그 우리에 몰려들었다.

 

아스케시스: 자기에 대한 작업

슬로터다이크는 위의 세 단편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밧줄을 타다 떨어져 죽은 곡예사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슬로터다이크는 릴케처럼 카프카도 니체의 관점을 내재화하였다고 본다. 곡예사가 타던 밧줄과 카프카 단편의 주인공들의 삶은 모두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의 이행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곡예주의(acrobatism)에 초점을 맞춘다. 세 단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해석은 일반적 독자의 시각보다 약간 더 심오하다.

 

그는 <학술원 보고>에서는 빨간 페터의 자발적 스토아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최초의 고민>의 공중곡예사는 세속세계와 단절하고자 하는 종교적 은둔의 패러디로 보면서,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이중적 삶이 초래하는 긴장을 예술가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해소/회피하고자 하는 곡예사는 늘 그 수준을 높이려는 향상에 대한 압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처세에 능한 예술가는 진정한 예술인이 아니며, 이것이 일상이 되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 점은 <단식 수도자>에서도 관찰되는데, 이들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단식은 고전적 자기수련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자기수련 그 자체로서 능동적인 결핍 체험인데, 음식의 결핍은 보다 고귀한 것, 곧 신이나 깨달음에 대해 갈망하는 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냥 지나쳤지만 슬로터다이크는 반전을 지적하는데, 단식술사가 단식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입맛(taste) 때문였다는 것이다. 그는 맛있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헐... 맥빠진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이 영양섭취 거절을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 20: 17)보다 더 심오한 내 안에 넣지 말라(don’t enter me)” 또는 나를 꽉 채우지 말라(don’t stuff me full)”로 해석한다. 단식공연의 인기 소멸은 이제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의 도래에서 기원하며, 이는 신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카프카의 세 단편들을 신의 죽음 이후에 행해지는 참수당한 자기수련(beheaded asceticism)”의 모습으로 해석해낸다. 머리없는 토르소의 자기수련. 토르소를 보는 자는 토르소의 우월한 근육질 몸이 자신의 열등한 지방질 몸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뒤바뀐다. 토르소를 보던 자는 이제 토르소가 보는 자, 토르소의 시선을 느끼는 자로 바뀐다. 그는 위에서 하는 명령을 느끼게 되고, 이 수직적 긴장이 차라투스트라의 외줄타기 곡예사와 카프카의 세 단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출구와 향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수직적 명령였다는 것이다. 우월한 것이 열등한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과 그 명령을 내재화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아스케시스의 멘탈리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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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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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끝자락, 나는 비가 참 많이 오던 제주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 처음 읽는 해러웨이였고, 문제투성이 번역과 겹쳐 무척 힘든 책읽기 경험였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미있었고, 해러웨이에게 매료되었다. 그 때의 경험이 예방주사였을까?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그녀에게 설득되었다. 이 책은 상이한 시점에 작성된 세 글 사이보그 선언”(1985),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캐리 울프와의 대담(2014) - 로 구성되어 있고,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함께 2016년에 출판되었다.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일단 해러웨이가 명확하게(manifestly) 드러나도록 서술하려면 그녀의 지적 정체성(identity)을 실정적으로(positively) 재현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는 생물학(리처드 르원틴, 린 마굴리스, 에벌린 허친슨, 그레고리 베이트슨), 페미니즘(첼라 샌도벌, 케이티 킹,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모니크 위티그 등), 정치경제학(리처드 고든), SF(오드리 로드, 어슐러 르귄, 옥타비아 버틀러), 부정신학, 인류학(애나 칭, 매릴린 스트래선), 철학(화이트헤드, 푸코, 에스포지토, 데리다), 카톨릭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실천과 결부된 과학철학(라투르, 스텡거스), 그리고 반려견 훈련에 대한 저작들까지 해러웨이가 섭렵한 지식들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해러웨이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또 세계를 진행 중인 세계(the world ongoing; worlding)로 바라보면서 불변의 동일성을 지닌 고정된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해러웨이에게 어떤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잠정적으로는 가능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178, 327-333)은 어떤 현재진행형의 넘침(ongoing exceedingness)”이라는 양태에서 기인하는 무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지만, 해러웨이는 유한한 필멸의 존재이다. 우리 같은. 그러나 우리와 다른 엄청 똑똑하고 해박한 인간이면서도 그 도저한 사유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겸손함을 갖고 있는 SF 리얼리스트이다. 그녀만큼 똑똑하지 않다면, 적어도 그녀만큼은, 아니 그녀보다 훨씬 더 겸손하기라도 해야 한다. 정성들여 읽었는데, 미래의 나를 위해 쓰자.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의 어떤 희망을 위해.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던 때 내가 1년도 채 못 되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설득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 속에서 되살아난다. 어쩌면 미래에도.

 

1. 사이보그 선언 (1985)

1985년에 쓰여진 글이니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망하기 전이다. 두 해 전인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하였고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이 큰 히트를 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이 첫 선언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의 진지한 신성모독, 곧 이의제기이다. 무엇에 대한? 직접적으로는 맑스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 “여성의 본질적 통일성은 없으니까!(30, 38) 그런 것을 말하는 우리백인 페미니스트의 여성범주가 순수하고 결백한 것이 아니니까(36). “소외이건 성적 대상화건 핵심 기제를 추상적으로 특권화하여 총체화시킴으로써 (인종처럼) 다른 중요한 적대의 문제에 침묵하니까(41). 또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비판대상과 거울 이미지이기 때문에! 비판대상이란? 맑스주의/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총체성을 전제하는 전체론(holism)!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현재를 원죄 이전의 태초라는 과거와 묵시론적 종말이라는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가정하고, 이 역사(History)의 전개는 세계의 총체성의 발원이자 귀결인 모순(contradiction)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추동자로 자기동일성/정체성(identity)을 지닌 주체(Subject)를 상정하기 때문에! 이 주류 페미니즘들이 가정하는 여성 주체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 하나의 주체로 동화불가능한 여러 목소리를 지닌(polyvocal) 여성들의 근본적 차이를 삭제해 버리기 때문에(40)! 이렇게 정리하고 만다면, 사이보그 선언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모던사상의 맑스주의에 대한 배교행위와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의 뛰어난 점은 그 와중에 세계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고, 가능한 실천양식들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진지하고 겸손하게, 냉소하지 않으며.

 

해러웨이가 보기에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본원적 통일성을 가정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오염되어 있다. 스타워즈 상황에서 탄생한 사이보그는 총체성이 아니라 부분성, 모순이 아니라 아이러니,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혼종성(결연과 연대), 전체론이 아니라 부분적 연결, 전위정당이 아니라 통일전선의 정치를 추구한다(20-22, 31). 사이보그는 아이러니를 통해 전자가 가정하고 있는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킨다. 1) 인간과 동물, 곧 문화와 자연의 경계, 2)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3)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견고했던 경계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이보그 앞에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23-26). 하이브리디즘의 이원론 비판이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보다 앞서 이 <사이보그 선언>에서 선보인다. 라투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이고,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난 라투르보다 해러웨이가 더 좋다.

 

새로운 산업 혁명의 신기술은 사이보그뿐 아니라, (당연히 여성이 포함된) 세계 노동계급을 재형성하며(53), 해러웨이는 이를 가사경제(homework economy)와 연동시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 젠더, 페미니즘의 이념형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56-57).

 

<> 해러웨이의 역사 구분

자본주의 단계

지배양식

미학

가족 형태

젠더 / 페미니즘

상업/초기산업 자본주의

민족주의

리얼리즘

가부장제적 핵가족

19세기 앵글로-아메리칸 부르주아 페미니즘

독점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더니즘

근대 가족

-페미니즘적 이성애주의의 만개

다국적 자본주의

다국적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가사경제의 가족

여성 가장 가정, 페미니즘의 다양화, 젠더의 강화와 붕괴


해러웨이가 수용하는 가사경제라는 시대 진단은 빈곤의 여성화(55), 3세계 여성 노동자의 증가(56), 구조적 실업(57), 기아(58), 민영화(58), 여성 과학기술자의 증가(61) 현상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네트워킹, 집적 회로 속의 여성들로 표상된다. 그녀는 가정, 시장, 직장, 국가, 학교, 병원, 교회 등 여러 구분되는 영역을 관통하는 통합된 여성의 정체성 또는 가부장제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63-68). 만약 그것을 꿈꾸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그/녀 역시 전체론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언어가 여성 정체성/동일성 확립, 전위당, 순수성, 어머니라는 표상에 집착한다면, 진짜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타자화하게 된다. 마치 인간(남성)주의적 신화가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을 타자화하였듯(76).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집착, 곧 하나(One)가 되고자 함은 자율성을 갖는 것, 힘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가 아니라 타자(the other)가 되라고 말한다(77). 곧 다양해지라고, 변치 않는 경계를 꿈꾸지 말라고, 너의 실체를 고집하지 말라고, 물렁물렁해지라고! 젠더는 보편적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84).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무의식을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라고. 총체화하지 말라고. 경계를 구성하되 다시 해체하라고. 기술을 악마화하지 말라고.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재구성하라고. 공통언어로 말해지는 단결투쟁의 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각자의 언어로 터져나오는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꿈꾸라고. 이것이 그녀가 발휘하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86).

 

2. 반려종 선언 (2003)

<사이보그 선언>의 이면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면, <반려종 선언>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271). 전자가 기술과학(technoscience) 속에서 타자(여성)의 타자들(유색인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들과의 부분적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면, 후자는 자연문화(natureculture) 안에서 함께 살과 침을 섞으며 면역을 갖추고,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어 공진화해나가는 이종간의 러브 스토리이다(“지저분한 발달성 감염”, 117).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해러웨이 할머니는 음란마귀 농담을 좋아하신다. <반려종 선언>의 시작과 끝은 소프트 포르노로 되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잘 설명했던 뽀뽀가 아닌 키스로 시작해서 15금 영화 수준에서는 최고로 찐한 러브씬으로 끝난다. 엄청 똑똑한 할머니가 하는 음란농담 - “생명력 넘치는 존재론적 안무”, “메타플라즘”- 은 너무 지적이어서 전혀 야하지 않다.

 

글의 구성은 참 어지러운데, 그 와중에도 일관된 스토리가 제시된다. <반려종 선언>은 로마 숫자가 붙은 다섯 개의 절 - 자연문화의 창발, 진화 이야기, 사랑 이야기, 훈련 이야기, 품종 이야기 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러웨이 자신의 메모라 할 수 있는 스포츠 기자 딸의 기록이 군데군데 네 번 삽입되고, 편지들도 끼어든다. (, 진짜 정리하기 힘들다. 한줄한줄 읽을 때에는 어떤 영감들이 떠오르는 듯했는데, 정리하자니 참 난감하다. 그래도 해야지.)

 

I) 자연문화의 창발

동거하는 인간과 개 간의 반려관계는 서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 곧 소중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이라는 종()횡단적 사회성을 형성하고, 더 긴 시간 스케일에서는 양자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121). 실재(reality)를 역동적 과정, 곧 능동태 동사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요약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공유하고 있는 헤겔-마르크스 계보의 총체성 가정에 대한 비판의 이론적 근거이자, 또한 최근에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개념화한 촉수사유의 전제로 보인다(124-125). 존재는 관계맺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123). 이질적인 존재 간의 관계맺음, 곧 어떤 우연한 기초위에서 맺는 부분적 연결에서 출현(창발)하는 새로운 의미들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의미를 갖는 소중한 타자로 만들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서로를 공구성한다(125-126, 130).

 

관계를 맺는 반려들은 살/육신(flesh)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들을 서로에게 의미(significance)를 갖는 소중한(significant) 타자로 묶는 매개체는 말(word)과 같은 기호(sign)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물질적(material)·신체적(corporeal/physical)일 뿐만 아니라, 기호학적(semiotic)이다. 해러웨이는 개인적 출신배경 아버지가 스포츠신문 기자인 가톨릭 집안 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138)은 언제나 함께 묶여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둘은 근대적 과학이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절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 중에 이 빵은 나의 몸이라는 신부의 이 밀떡을 성()로 변화시키는 신비(化體說, transsubstantiation)를 믿으며, 마감시간을 앞두고 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다음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하는 아버지를 보아온 도나에게 둘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Cf. 345). 심지어 그녀가 자리잡은 또 다른 구체적 상황인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야기(story)가 필연적이었음을 주장한다. 이제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141-142).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II절부터 V절까지의 제목에 이야기(stories)”가 붙는 이유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몸, 관계, 세계,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한들 기호로 바뀌어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곧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의아함 팩트와 픽션의 분리불가능성 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다.

 

II) 진화 이야기

최초의 가축인 개가 어떻게 종 간 사회화(152)를 통해 인간과 공진화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개 길들이기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상호적 과정이며, 인간과 개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물체의 몸을 왔다갔다 하며 양자의 면역체계를 상호구성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행위자로 참여하는 자연사이다.

 

III) 사랑 이야기

개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반려견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해러웨이는 좀 못 마땅하다.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하고, 그래야만 개와 인간은 서로에게 책임/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함께 살 수 있다. 사람은 개에 대해 사랑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며, 개는 맡은 일을 해야 한다(164).

 

IV) 훈련 이야기

도나, 마르코(도나의 대자), 카옌(도나의 반려견이자 마르코의 대견)은 함께 훈련하는 킨(kin) 집단이다. 이들 간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결코 평등이 아니고 소중한 타자성인데 그것은 그들이 함께 추는 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168). 훈련하는 개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이보그 트럭이 아니고, 조련자는 개에게 사부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개와의 놀이를 진정 즐기지 않는다면 개 역시 눈치를 채고 만다는 것이다. 이종 간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소통하는 것, 이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에 적합한 이름은 존중”(177)이며, 그 존중이 타자를 의미를 지닌 존재, 곧 소중한 타자로 만든다(179). 인간과 개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기호가 필요하다는 통찰이 나오는데, (dog)와 신(God)으로 말장난하는 부분은 재미있다(177).

 

V) 품종 이야기

시간스케일의 중층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해러웨이의 독특한 시간관이 드러나는 절이라 할 수 있다(193, 235).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 대면 관계를 맺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룬다(27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현재가 없듯, 영원한 과거도 없다. 여기에서 해러웨이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역자는 scale"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 나오는 "툴루세" 이야기를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자본세/툴루세 이야기는 캐리 울프와 함께한 반려자들의 대화에서 소개되고 있다(292-299, 363-366).

 

3. 반려자들의 대화

독자 겸손하게 만드는 나쁜 인터뷰다. 앞에 실린 두 선언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독자라면 당황할 법하다. 이 책은 2016트러블과 함께하기와 같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2014년에 이뤄진 해러웨이와 울프의 이 대화는 두 선언의 연관성보다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배경 소개 차원에서 두 선언이 다뤄진다. 따라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으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은 활자들일 뿐, 기호로서 다가가기 힘들다. 또 영문과 교수인 울프가 데리다를 너무 좋아해서인지, 데리다 문외한인 나는 바보스러움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문외한인 것이 데리다뿐이랴.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런 독자에게도 좋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상황적 지식부분적 연결이라는. 내 상황에서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부분적으로라도 연결이 된다면, 곧 나의 어떤 맥락 안으로 이 지식을 자리매김해서, 이후의 공부 계획에 영향을 끼친다면 좋은 책이다. 부분적 연결은 또 다른 부분과 연결이 되고, 나와 다른 상황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일반화로, 어떤 총체성 부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황당함에 비하면, 나는 해러웨이와 더 친해지고 더 많이 안다. 그러면 됐다.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그래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다.

 

4. 생명의 정치와 죽음의 정치

이것저것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두 가지만이라도 거칠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해러웨이와 푸코의 생명권력과의 연관성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국역서는 생명정치와 연관된 장을 누락, 출판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울프와 식육용 가축 사육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285-288)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면서 죽임과 죽게 만듦을 통해... 그리고 살게 강요하는 것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이려고 살게 만드는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해러웨이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153-157)에서 과거의 군주권력과는 다른 생명권력의 등장을 말하는 부분을 인간의 생명에서 생명 일반으로 확장한 사유를 선보인다. 푸코는 죽이거나 살게 놔두는(let live)” 군주권력이 19세기에 생명을 양육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해친 이들의) 생명 보전을 허용하지 않는생명권력으로 이행했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이윤을 위한 대량살육, 그리고 이를 위한 대량사육을 문제 삼고 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의 식용육 생산 과정이 생명정치의 시야에서 고찰된다. 이 강요된 삶과 강요된 죽음은 생명정치(biopolitics)를 죽음의 정치(thanatopolitics)로 전화시킨다(27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긍정의 생명정치[affirmative biopolitics, 여기서 affirmative긍정으로 번역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의 문제의식이 논의되는데, 에스포지토를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또 생명정치와 생태정치를 교차시키겠다는 해러웨이의 지향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성이지만, 고기를 마지못해 먹는 것이 아니라 좋아라 하는 나는....

 

5. 촉수사유: 화이트헤드와 우로보로스

<반려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쉽지 않은 와중에도 미덕이 있다면 해러웨이의 선언들이 내세우는 형상(figure)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이보그(와 집적회로 속의 여성들, 그리고 나선형의 춤), (“육신이 된 말씀”, 소중한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그리고) 생식과는 무관한 이종간 또는 비인간 동종-동성애의 형상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크툴루라는 촉수를 지닌 지하 또는 수중 생명체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데, <반려자들의 대화>에서는 진창 속에 존재하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띤다. 해러웨이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은유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하여 이 새로운 형상의 은유를 채택한다(345). 해러웨이에게 촉수는 단지 감각, 감응, 소통, 공격하는 기관만은 아닌 것 같다. 두족류의 다리뿐만 아니라, 뱀의 형상을 한 것(우로보로스, 메두사, 고르곤), 곧 무언가 휘감을 수 있고 엉킬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364). <사이보그 선언>에서의 사이보그처럼, <반려종 선언>에서 나온 화이트헤드의 개념이라는 포착의 합생”(122), “운동 중인 매듭”(123)처럼 우로보로스와 크툴루는 전체론(holism), 총체성, 정체성/동일성, 이원론들, 그리고 해방의 전망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365-366). 


우리의 몸은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고내 몸은 다른 존재들의 몸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휘감긴다그리고 퇴비(compost)가 되어 또 다른 촉수달린 존재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것이다내 촉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진흙, 유기체, 퇴비... 시간의 중층성과 시간적 비동시성(297)...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 사실과 픽션의 공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영감으로 가득찬 통찰들... 가까운 미래의 나는 이를 좀더 잘 정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해러웨이의 다음 선언은 어떤 것일까, 그 선언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형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점을 같이 갖게 한다.

 

6. 번역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나는 이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역자는 한국말 감각이 뛰어난 분 같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299)는 표현이 나와서 원서에 뭐라고 되어 있나 보니까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번역했다.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구중계를 보는 분 같지는 않다. 덴버 베어스 경기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정확한 번역이지만 주자 만루, 투아웃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2사 만루라고 한다. 몇 가지 의문들이 있는데, 하나만 얘기하면 worlding세계화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세계-되기

다음은 나의 읽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

원서 쪽

황희선 옮김 (책세상)

대안적 번역 제안

20: 13-15

8

노동을 비롯하여 ~ 않는다.

노동, 또는 모든 부분들의 힘을 하나의 더 높은 통일성으로 가공하는 최종적 전유라는 유기적 전체성(wholeness)에의 유혹과 상대하지 않는다.

27: 1-2

13

반면 인간은 ~ 없다. 사이보그는

인간은 어디서든 물질이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가 없다. 반면 사이보그는

27: 9-10

13

방어 작업을 ~ 거리 투쟁보다

방위산업에서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종래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남성주의적 정치보다

44: 3-6

28

종래의 안락한 ~ 볼 수 있다.

편안하고 오래된 위계적 지배에서 무섭고 새로운 지배의 정보과학으로의 이행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데, 이 이분법은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51: 1

35

현실의

실재의

63: 20 64: 1

47

유토피아적 공동체 ~ 냉소적 이론들

유토피아 이론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적 이론들

65: 1

48

자본주의적인

자본가의

67: 2

50

개혁과

재형성과

67: 3

50

남성의 산업노조에서는

남성 중심 산별노조에서는

67: 11

50

허위의식 또는

허위의식처럼 보이거나 또는

73: 4

55

종말을

묵시록을

73: 9

56

소통과 통신을

통신(소통)과 첩보(지능)

75: 11

58

정초한다.

좌초시킨다(ground).

75: 18

58

좌초해왔다.

묶여 있었다.

76: 17

59

자율성에 덜 좌우된다고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77: 15 22

 

지배되지 않는 주체 the One이며 ~ 사라지는 것이다.

자아는 지배받지 않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타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인해 그 사실을 안다. 타자는 미래를 부여잡고 있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준 지배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안다.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되고, 강력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타자와 함께 묵시록의 변증법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해져서 올들이 드러난 소매 끝처럼 분명한 경계가 없고 하나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 곧 여럿이 되는 것이다.

86: 9

68

갇혀

묶여

133: 18

106

범주가 생물학적

범주가 실제적인[real, 누락!!] 생물학적

138: 19

110

세례 요한의

요한 복음의

138: 20 - 22

110

베어스가 ~ 않을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40: 2-3

111

팩트는 논문이 ~ 설정해왔다.

팩트들이 다음날 신문에 실리기 위해서는 마감을 지켜야 한다.

140: 14, 15, 17

141: 1

112

수사

비유(trope)

140: 15

112

문형figure of speech

비유()

141: 5

112

방향이

의도가

141: 13

112

취향도

흥미(관심)

150: 3-9

119

인본주의적 기술 ~ 수립했다.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152: 6

120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이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wolf-wannabe-dogs)

178: 2

141

방식으로 아는

방식으로 신을[누락!!] 아는 것

179: 6

142

연결-속의-타자성에

연결-속의-소중한 타자성에

181: 15-16

144

개를 ~ 솔직하게 배우기란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184: 1

146

걸린 듯 뚫어지게

걸린 듯 그 던지는 사람을 뚫어지게

194: 21 이후

155

척도

스케일

209: 7

167

설문조사에서

조사에서 / 서베이에서

218: 14

175

개의 이빨이 달린

송곳니(canine teeth)가 있는

223: 2 이후

178

개 전체

완전한 개(whole dog)” / 만능 개 / 엄친개 ?

225: 17 226: 1

180

이 둘 모두에서 ~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 둘 모두는 나를 근대화라고 점잖게 부르는 것의 자연문화로 딱 이끌었다.

227: 10

181

약재 시장

마약 판매 지역 (drug sale zone)

231: 22

185

이데올로기적 개선

개선이데올로기들

236: 5-6

189

통해 백인 중산층적 ~ 세계의 사람들은,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253: 1

204

인종주의적 구성체

인종 공동체들

274: 8

221

둘 다/또한의

둘 다 맞는 상반된 이야기의

280: 18

227

확립된

공유된

281: 10

227

생명-우선

생명존중/낙태(임신중지)반대(pro-Life)

281: 15

227

-생명-우선

-낙태반대

286: 15-16

232

지속을 분절하는

살아있는 섬유를 칼로 자르는

295: 11

239

단위가

사물이

300: 2

243

자본주의자

자본가

308: 11

250

확장되면서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342: 4

277

유형적인 인지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신체의 인지적 실천을 실행하는

 

 

7. 맺으며

언제나 재미있는 책은 정리를 해도 쓰고 싶은 말들이 남아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읽은, 그러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은 해러웨이의 책, 기대 이상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는데, 해러웨이의 다른 글들도 좀 보고, 여기에서 인용되는 다른 이들의 책들도 보고 싶다. 재미있는 책은 읽고 나면 누구랑 같이 얘기도 좀 하고 해야 하는데... 훗날의 대화를 위해 정리해둔다.

 

읽고 싶은 저작들 (우선순)

1) 해러웨이의 글: “상황적 지식”(1988)과 하나의 세계로서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글들

2) 인류학적 저작들: 특히 스트래선

3) 생물학, 생태학 관련 저작: 마굴리스

4) SF 소설들

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볼 수 있을까? 읽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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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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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4판 나남신서 136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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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군주의 권력을 특징짓는 특권의 하나는 생살여탈권(the right to decide life and death)이었다. - P153

생살여탈권은 ... 비대칭적 권리이다. 군주는 죽일 권리를 행사하거나 죽일 권리를 보유함으로써만 생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뿐이고, 그가 요구할 수 있는 죽음에 의해서만 생명에 대한 권력을 갖는다. "생살여탈권"으로 표명되는 권리는 사실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 권리(the right to take life or let live)이다. - P154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고전주의 시대부터 크게 변화했다. ...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이 요구에 기대고 이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 이 무시무시한 죽음의 권력은 이제 생명에 대해 실제로 행사되는, 생명을 관리하고 최대로 이용하고 생명에 관해 정확한 통제와 전체적 조절을 실행하려 시도하는 권력의 보완물로서 주어[진다]. ... 이제 전쟁은 보호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모든 이의 생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국민 전체는 생존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서로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 P155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오래된 권리가 ‘생명을 양육하거나‘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권력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One might say that the ancient right to take life or let live was replaced by a power to foster life or disallow it to the point of death. - P157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권력은 17세기부터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 먼저 형성된 듯한 극의 중심은 기계로서의 신체였다 (규율권력) ... 다소 늦게 19세기 중엽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의 중심은 종(種)으로서의 신체(the species body), 생명체의 기계론에 의해 검토되고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하는 신체, 즉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와 더불어 이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이것들을 떠맡는 것은 일련의 개입과 ‘조절하는 통제‘ 전체, 즉 ‘인구의 생명정치‘이다.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신체의 규율과 인구의 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P158

... 18세기에 서양의 ... 자본주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 정확히 생명이 역사에서 정치 기술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현상이었는데, 이 현상으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명에 고유한 현상이 지식과 권력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 P161

서양인은 생물계에서 살아 있는 종이라는 것, 신체, 삶의 조건, 생명의 개연성, 개인의 건강과 집단의 활력, 변할 수 있는 체력, 체력이 최적의 방식으로 배분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로 터득한다.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생체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지식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일정 부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된다. - P162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대로 정치적 존재로서의 부가적 역량을 지닌 살아 있는 동물로 남아 있었지만, 근대인은 이제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 ...
인간의 문제가 생명체로서의 특수성,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계 아래 드러나는 특수성의 측면에서 제기된 이유는 역사와 생명의 새로운 관련 양태에서, 즉 생명을 생체의 주변으로서의 역사 외부에 놓고 동시에 지식과 권력의 기술이 스며든 인간의 역사성 내부에 두는 이중의 입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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