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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자 행성 -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 ㅣ 사이언스 마스터스 15
린 마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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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마굴리스(1938-2011)는 세포, 그 중에서도 핵 바깥의 세포질을 연구한 미생물학자다. 미생물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에서 언급한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 같은 사람인가 보다 했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이 연구하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 엄밀한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 니체의 말로는 “하나만을 알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를 바라는” 자, (그러나? 그러므로?) “정신의 양심”을 가진 자(정동호 역, p. 403)이고, 사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지식인이 아닌 지식기사이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충분히 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괄호친” 자, 곧 관심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문제삼지 않는 자, 그 존재자들을 자신의 인식 지평 바깥에 둔 자이다. 이들은 자신의 앎의 지평 안에서는 무수한 물음표들을 만들어내고 대답을 제시하(려 노력하)지만, 그 바깥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이 제기되어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미덕이 있다면, 곧 그들이 정신의 양심을 가졌다면, 이 경계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겸손하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그 밖의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굴리스는 나의 이런 선입견에 멋지게 한 방 날렸다. 그녀는 미생물 연구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동물과 식물, 생명, 진화, 그리고 가이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들을 시도한다. 이와 더불어,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들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명시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이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육지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미생물이 자신들의 막 안에 액체를 유지함으로써 일종의 초바다(hypersea)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고, 광합성을 통해 대기를 산소로 채운 것도 이 미생물이다(192-193). 시간적으로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있었고, 인간이 출현한 다음에는 인간과 함께 그들 안팎에서 존재하며, 인간이 소멸한 다음에도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미생물보다 큰 세상이란 우주밖에 없다. 그 순간 나의 인식 지평이란 참 초라해진다. 인간의 삶과 사유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의 역사가 모두 미생물 앞에서는 하찮아져 버린다. 오만을 반성하고, 그 앎의 상대성과 무지를 인식하게 되면, 쳐졌던 괄호는 풀리고 그 중 일부는 새로운 앎과 새로운 모름의 대상이 되어 인식 지평으로 편입되고, 괄호는 다시 쳐진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창세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신화, 나아가 오늘날의 SF의 위상과 동등한, 믿음직하지 않지만 재미는 있는 픽션이 된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 이후로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 생명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다. 생물은 좋아하는 과목였지만, 그것은 나와 생명체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살고 죽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였다. 이제 비로소 지금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나를 알기 위해, 나와 같이 살면서 세계를 만들고 있는(worlding) 생명들을 알기 위해, 그리고 이 생명들이 다른 힘들과 함께 이루는 가이아를 알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그래도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정보의 조각들은 여전히 유용하다. 세포, 핵, 세포질, 미토콘드리아, DNA, RNA, 염색체, 감수분열 등 이제는 내게 Inside Out의 “빙봉”과 같은 존재가 되어 기억 창고 속에 먼지가 가득 쌓였던 개념들이 다시 등장한다.
이 책은 단순한 생물 교양서가 아니다. 마굴리스는 “연속 세포 내 공생이론(SET, serial endosymbiosis theory)”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비전공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이론을 확립한 미생물학자이다. 이 책에서 마굴리스는 이 SET과 가이아의 연관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마굴리스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렇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니까, 너도 어렵다고 중간에 책 덮으면 안 돼. 독자 너도 필자 나만큼은 노력해야지. 읽는 게 쓰는 것보다 어렵겠니?” 그런데 읽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자, 정리해보자.
1. SET: 공생자 행성의 공생자들
1967년 마굴리스는 SET을 세상에 선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SET은 “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의 융합, 곧 하나됨의 이론”이다(67).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세포는 공생하는 별개의 세포(박테리아)가 합쳐져서 새로 만들어진 개체이다. 이제 공생은 개체간 공생이 아니라, 개체내 공생이 되며,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지닌 개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진화가 일어났음을, 곧 공생발생(symbiogenesis)을 통해 진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포 수준뿐만 아니라, 더 큰 동식물 개체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이 융합은 순서대로(serial) 일어난다. 진핵세포 안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대사 과정은 세포 내로 들어온 호열산세균에서 유래한 것(1단계)이고, 그 다음에는 정자 꼬리 같은 것을 가진 유영 세균이 결합(2단계)하였고, 산소호흡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또한 세균 공생자가 진화한 것(3단계)이고, 조류와 식물의 엽록체와 색소체는 이전에는 독립생활을 하던 광합성 시아노박테리아가 합체(4단계)된 결과이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각 단계는 가설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2단계를 제외한 세 단계에 대한 검증이 완료되었으며, 2단계에 대한 가설도 곧 검증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한다(78-80).
이는 단지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된 것, 곧 비어있던 자리가 새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지식과 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싸움에서 이겼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순차적으로 합체한 결과이며, 진화가 이를 통해 발생했다는 공생발생의 기본적인 통찰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러시아 생물학자 콘스탄틴 메레슈코프스키(1855~1921)와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아이번 월린(1883~1969) 등이 이미 공생발생의 주장을 편 바 있다(22-23, 56-57, 67, 77-78, 101).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의 이론을 검증할 도구들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주류에 의해 무시당했다. 마굴리스는 자신의 핵심적 기여는 이 “이론의 세부 사항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면서, 한때 배척당했던 이 이론이 정설로 되어가리라는 점을 확신한다(75). [해러웨이는 마굴리스가 이들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자현미경, 핵산서열 분석기 같은 20세기말의 “강력한 사이보그 도구들” 덕분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트러블과 함께하기』, p. 114).]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SET 역시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마굴리스도 결코 응전을 회피하지 않는다. 경합의 파트너들은 상대방의 논리를 잘 파악하고 있고, 자신의 이론이 옳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상대방뿐만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검증을 계속한다(81-92).
경합이 발생하고 해소되는 방식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다르다. 입장 차이와 경합은 종교에서 억압 또는 회피되지만, 그것들은 과학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것이 해소되는 방식도 다른 것 같다. 설명 대상인 존재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학의 입장이다. 그 존재에 대해 물음표를 끊임없이 던지며, 그 물음에 대한 답들은 언제나 인식가능한 실재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종교는 대상의 초월성을 가정하므로, 보편적 인식 가능성에 기반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설과 검증이라는 진리 테스트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는 도덕을 구성할 수는 있어도 상식을 구성할 수 없다.
2. 2단 5계 분류 체계: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경합에서의 승리는 연쇄적이고 확장적이다. 공생발생의 진화 이론은 기존의 진화 이론에 입각하여 고안된 분류체계, 곧 생명을 이름 붙이고 분류하는 방식도 새롭게 다시 쓴다. 우리는 막연히 유기체는 동물과 식물 두 가지가 있다고, 또는 여기에 병원균을 더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교육받고 그것을 상식이라 생각하지만, SET에서 발전된 2단 5계 분류(two-tiered five kingdom classification) 체계는 이 상식을 뒤엎는다.
분류학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300년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5백여 종의 동물을 분류했지만 눈에 보이는 동물만을 분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생물은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당시까지 보고된 모든 생물들의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유니콘, 인어 등도 들어 있었다(108). 칼 폰 린네(1707~1778)는 생물의 속(genus)과 종(species)의 二名法[예: Homo(속) sapiens(종)]을 창안하였고, 1만 종의 생물을 분류하였지만, 신의 창조를 믿었던 그는 진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린네까지는 생물을 크게 동식물 두 종류로, 파스퇴르 이후에는 여기에 세균을 추가하여 세 종류로 구분하게 된다. 분류학에서 진화를 최초로 고려한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인데, 그는 동물과 식물의 공통 조상은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물계와 식물계에 원생생물계를 추가하였다. 생물 분류체계는 이후 허버트 코플런드(1956)와 로버트 휘태커(1969)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화되었다.
마굴리스는 칼린 슈워츠와 함께 이를 종합하여 1998년에 2단 5계 분류를 발표한다. 이들은 먼저 1) (핵이 없고 공생발생을 거치지 않은 세균, 곧 박테리아인) 원핵생물과 (핵이 있고 공생발생을 통해 진화한) 진핵생물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진핵생물을 다시 2) 원생생물, 3) 균류, 4) 식물, 5) 동물로 구분한다(99-100, 106-107). 마굴리스(와 칼 세이건)의 큰아들 도리언 세이건은 각 생명군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그려냈다(그림 4, 100).
마굴리스는 이 2단 5계 분류가 최종적 지식, 완성된 진리가 아님을 시인한다. 곧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을 연구한 결과를 반영하여 “계속 수정되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단 5계 분류는 생물을 두 종류, 세 종류로 분류하는 기존의 상식이 허위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상대적 진리임은 분명하다. 인상적인 것은 마굴리스가 기존의 분류법을 비판하면서 더 타당한 분류법을 고안하고자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명과 범주화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잘못된 분류법에 기반해서 잘못 붙여진 이름들이 많다. ‘남조류’, ‘원생동물’, ‘고등동물’, ‘하등식물’ 등이 대표적이다.
마굴리스는 언어가 존재와 사태를 명확히 정리하기보다는 “혼란을 유발하고 속일 수 있다”고 말한다(104).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로 정리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이름과 잘못된 분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명명과 분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더라도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올바른 분류 체계를 마련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캐리 울프와의 대화”(황희선 역, p. 308, 325)에서 언급된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유명한 말이 인용된다. (유명하다는데 나는 처음 봤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98). 곧 공생발생하는 생명들이 실제의 땅이라면, 분류법은 그것을 종이에 옮겨놓은 지도이고,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라벨링, 서랍에 넣고 정리(하고 안심)하기는 그 존재를 왜곡한다. 그러나 생물학자의 지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땅에서 사는 생명들은 계속 살아나간다. 이름 붙이려면 제대로 붙이는 것, 그게 인간에게는 최선이다. 하지만 지도 밖의 생명이 마굴리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내게 붙인 이름 또는 부여한 속성이 나의 존재를 다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이쯤에서 자연스레 해러웨이가 연상이 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하자.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p. 123)
3. 가이아
마굴리스는 머리말에서 자신은 애초에 SET과 가이아 개념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음을 밝히며 이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바뀌었고,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이아에 대해 논하는 마지막 8장이 제일 인상적이다. 섹스와 감수분열의 기원(6장)과 초바다를 통해 생물권이 육지로 확대되면서 지구가 공생자 행성이 된 이력(7장)도 흥미롭다. (2022년 7월 초 현재 서울 서북부지역은 이른바 “사랑벌레” 때문에 고생이라는데, 원서 6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벌레(love bugs) 이야기가 나오는데, 184쪽의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가 마지막의 가이아 논의로 모아진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공생발생 논의가 요약되고, 이 논의가 가이아 이론으로 이행하는 연결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도, 생명은 훨씬 더 폭넓은 계(system)를 이룬다. 우리 피부 바깥(그리고 안쪽)에 있는 수백만 종들은 물질과 에너지 측면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다. 지구의 이 이질적인 존재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자, 우리의 일부다. 그들은 우리의 물질을 순환시키고, 우리에게 물과 양분을 준다. ‘남(the other)’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을 통해 공생하고, 상호 작용하고, 상호 의존하던 과거와 연결된다.” (196-197)
마굴리스는 가이아에 대한 논의를 “고유감각(proprioception)”이라는 의학적 개념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곧 몸의 상태에 대한 몸의 느낌이다. 눈을 깜박인다는 것,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 속이 불편해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들 같은 것까지 다 고유감각이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이 없지만, 이러한 “생리적으로 조절되는” 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를 갖고 있다. 제임스 러블록은 이 행성의 조절 체계가 지구의 생명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 초 어느날 그는 이 “지구 대기의 화학적 이상을 감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인공두뇌 시스템”의 작명을 『파리대왕』의 저자인 윌리엄 골딩에게 부탁한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바로 “가이아”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가이아 연구 초기부터 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그것의 개념적 내실을 다져왔다. 가이아는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활동하는 천만 종 이상의 생물들,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 에너지원인 태양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출현(창발)한 전 행성적 체계이다(210-211). 그것은 “끊임없이 새 환경과 새 생물을 만들어내는 조절이 이루어지는 행성 표면”을 가리킨다(212).
가이아 이론은 과학적인, 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생리학적인 가설로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지구의 생명 집합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몸의 속성들을 보여준다”(218).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나 J. Kirchner 같은 이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가이아 이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러블록과 마굴리스는 “생명 전체가 자신이 이용하는 환경을 최적화한다(optimize)는” 애초의 개념화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론적’ 뉘앙스를 제거하면서, 가이아 개념 자체의 정당성을 끝까지 고수한다(203, 219-220). 왜냐하면 생물의 다면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지구의 기온과 대기의 구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일관된 입장에는 가이아 이론이 “유용한 과학”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다.
마굴리스는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의 비판보다는 가이아 개념이 대중화되면서 생긴 비과학적 활용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곧 가이아를 『신통기』의 서술대로 “대지의 여신” 같은 어떤 개체적 생명체로 인식을 한다든가, 이러한 인격화에 기반하여 지구를 ‘강간’의 위험에 노출된 여성으로 비유하는 페미니스트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왜곡 가능성을 경계한다(211). 종교, 언론 등에 의해 조장되는 이러한 대중적 곡해에 반대하면서, 마굴리스는 가이아가 “인간에게 악의를 드러내지도 인간을 따로 돌보지도 않”으며, ”기온, 산성-알칼리성, 기체 조성 조절 같은 지구 규모의 현상“의 약칭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12).
4. 홀로바이온트의 함께-세계 만들기와 가이아의 두꺼운 현재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해러웨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과 『트러블과 함께 하기』의 여러 곳에서 자신이 마굴리스로부터 강하게 영향받았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울프와의 대담”(324-5)에서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구성하는 여러 갈래들로 1) 하이데거-아감벤의 생명정치, 2) 푸코의 생명정치, 3) 페미니즘, 4) 마굴리스로부터 영향받은 시스템에 관한 생물학적 사유를 지목하는데, 이 중 마굴리스의 영향이 “가장 두터운 갈래”라고 말한다. 『트러블과 함께 하기』는 마굴리스의 공생발생(symbiogenesis) 개념을 “공동제작(sympoiesis, 공-산)” 또는 “함께-세계 만들기(worlding-with)”로, 그리고 하나도 아니고 개체도 아닌 채로 서로 얽혀 있는 실체를 “홀로바이온트”로 변용한다(61-63, 107-114). 또 해러웨이는 르 귄, 라투르, 스탕제르 등의 논의를 조합하여 마굴리스가 고안하고자 했던 가이아의 비의인화된 형상의 모습을 툴루세와 카밀 이야기를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73-81).
<세포내 공생: 린 마굴리스에 대한 오마쥬> (『트러블과 함께 하기』, p. 108)
가이아 안에서 우리는 물질대사를 하며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흡수하여 몸을 키우며 살다 죽는다. 그 후에는 분해되어 퇴비(compost)가 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것들의 물질대사를 통해 그들의 몸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체이지만, 그렇게 지금 나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과거에 나 아닌 타자를 구성하였고, 내가 죽은 후 미래에는 또 다른 타자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위의 인용구(196-197)에서 마굴리스가 이야기했던 바가 개체들이 살다 죽으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가이아의 시간대, 곧 툴루세인 것인다. 이 두꺼운 현재(thick now)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친밀한 타자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면서 살다 죽고, 분해되어 흡수되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의 일부를 형성한다.
마굴리스는 인간의 오만을 질타한다.
인간은 자연을 끝장낼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자연은 “불협화음과 화음을 적절히 섞어 가면서 계속 노래부를 것이다”(226-227).
자연으로 먼저 들어간 마굴리스를 대신해 해러웨이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해러웨이는 더 많은 사람들, 반려종들, 사이보그와 함께 킨이 되어 실뜨기와 존재론적 안무를 하며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5. 나가며
마굴리스는 미생물학자이지만,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그 아주 작은 것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관심한 학자가 아니다. 거머리 뇌 학자는 아주 큰 세계에 무관심하지만, 마굴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가이아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으로 확장시킨다. 그녀가 연구하는 미생물은 공간적으로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존재해온 위대한 존재, 인간보다 더 큰 세계이다. 이 작은 미생물에 대한 앎이 인간보다 더 큰 가이아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틀리다고 믿는 것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앎도 믿음도 바뀔 수 있지만 현재의 그것들이 기초하고 있는 탄탄한 근거들보다 더 강한 증거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영토의 변화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지도는 폐기되어야 하고 다시 그려져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린 지도에 대한 믿음보다 그 지도가 그리고자 했던 저 바깥에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야 가능할 것이다. 나이들수록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텐데 존경스럽다. 닮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으려면 인간-비인간 타자에 대한 관심, 그들과의 부분적 연결,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그의 호의를 통해 서로가 상대방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학자로서의 야심과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같이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인데, 마굴리스도 해러웨이도 이 둘 모두를 갖춘 훌륭한 여성, 존경스러운 지식인이다.
덧: 번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번역이다. 딱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읽다가 글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서를 확인해보고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77쪽 마지막 줄부터 78쪽 7행까지의 부분(공생 발생은 러시아의 ~ 특성들을 많이 잃었다)은 70쪽 3행과 4행 사이에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엉뚱한 곳에 번역이 되어 있다. 원래 영어 책의 43쪽에 나오는 부분인데, 3장의 첫째 문단 다음에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