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부천으로 외근갔을 때,

 아빠가 전화를 하셨다.

강남구청 근처에 왔다가

딸래미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셨단다.

분명 고모부 병원비 때문에 내놓은 땅문제로

길도 낯선 거기까지 오셨을거다.

부천으로 가는 전철 속에서

전화기 속으로 들려오는 아빠 목소리.

지금 부천으로 외근가는 중이라

아빠 얼굴 못볼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데 알수 없는 까닭.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왔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

 엄하고 완고한 당신이

이제는 반백이 되었고,

손에는 검버섯이 피었다.

장미가시와 농약덩어리 국화꽃이 뿜어내는 고약한 먼지 때문에

손바닥 사이사이 때가 끼고 무수한 검은 골짜기가 생겨버렸다.

동생들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무거운 어깨를 일으켜

감겨오는 눈꺼풀에 찬물을 끼얹고

모두가 잠든 밤에 길을 나선다.

빛나던 육체와 당당한 꿈,

당신의 젊음을 갉아먹으며 자란 나.

 

언제부턴가 아빠가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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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과 일본의 명망 있는 여성사회학자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신으로 이뤄진 책이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인문과학서적들이 요즘, 이 책처럼 적극적으로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한 모색을 시도하는 것 같다. 고전을 다시 쓰는 시도라던지, 인터뷰를 통해 깊이있는 사색을 유도하는 책들이라던지, 이미지와 텍스트를 적절히 조화시켜 흥미를 끌게 만드는 책들이 많이 보인다.


여섯 차례 오간 편지는 꽤나 묵직한 주제들을 풀어놓고 있지만, 읽어나가는데 있어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 아마 오랫동안 글쓰기를 해오시던 분들이라, 그리고 많은 사람을 상대로 오래도록 강의를 해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를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것 같다.


조한 선생님은 하자센터에서도 몇 번 뵈었었고, 이전에도 논의의 여지가 있는 많은 책들을 쓰셨던 분이기에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에노 교수는 전혀 존재를 모르던 분이었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생각해보니 동시대 일본학자들의 존재는 거의 모른다. 이런 무지몽매한지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 만나 일어난 화학작용은 언제나 흥미롭다. 두 분의 개인적인 친분과 만남에서 빚어진 재미난 에피소드들은 차치하고라도 이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일 양국 여성지식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잠식해가고 있는 가공할만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과 자본주의의 잔혹한 원칙들, 개인의 힘으로 저항하고 맞설 수 없는 수많은 모순들에 대해 이 두 학자들은 때로는 전투적으로(적의 무기로 싸우는 것에 대해),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대, 인류를 위한 기도) 이야기를 건넨다.


소통과 유대를 위한 지속적인 시도가 왜 필요하고 절실한지,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섬뜩한 현실의 구조와 장치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경계를 넘어 이야기하고 있는 두 여성학자의 유쾌한 목소리가 다음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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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꼬옥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이 있다.

오가와 요코라는 일본 작가가 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소설이다.


교통사고로 현재의 기억이 80분간만 지속되는 노 수학자와 그녀를 돌보기위해 고용된 파출부,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박사와 파출부와 그녀의 아들 루트(앞머리가 평평하게 생겼다고 해서)가 서로 소통하고 교감 하며 따뜻한 나눔을 만들어는 이야기.

잔잔히 흘러가는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소설의 전부인데, 읽다보면 어느새 박사와 파출부와 루트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울림이 가슴을 촉촉히 채운다.


그리고 수학이라면 치가 떨리는 기억이 대부분인 나같은 사람에게조차 다시한번 수학책을 펼쳐보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킨 놀라운 책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때 이책을 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얼마간 들기도 했다..^^;;;;


힘들고 지치고 짜증이 나서 모든걸 놓아버리고 싶을 때, 이전의 나쁜기억을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을 때, 박사의 80분 기억력이 아주아주 조금은 부러워질지도 모르겠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걸까?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라는 영화처럼 말이다(아직 안봤지만 어느분이 "나쁜기억 다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기분일때 볼만한 영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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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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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의 글을 읽다보면,

아, 정말 한국어를 알고 읽고 쓴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그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진중한 미덕을 적절하게 풀어낼 수 있는 뛰어난 글쟁이가 김 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쓴 산문들과 기사들은 여러편 읽어봤지만, 그가 소설을 쓴다니...하고 갸우뚱거리며 이 책을 집어들었다.

몹시도 추운 겨울날, 도서관 서가에서 집어들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단숨에 책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흡입력이 대단했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이순신의 이야기.

정말 너무나 유명하고 위대해서 100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성웅 이순신.

그렇지만 <칼의 노래>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전에 등장하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아니 어찌보면 낯설기까지한 이순신이 등장한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삼엄할 정도로 치열하게, 정말 무섭도록 시대와 나라와 임금을, 그리고자신을 사유하는 인물이다.

김 훈은 지극히 간결하게 서술하는 문체, 정교하고도 압축적인 문장들을 통해, 왜구를 무찌르고 세상의 허무를 통찰하는 이순의 내면과 독백을 완성해냈다.

읽는 동안 가슴이 저릿저릿해서 그 묵직한 존재감이 그대로 전해오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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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백 2004-06-1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인 이순신이 아니라 저는 인간 이순신을 만났습니다
어느덧 정형화되고 박제화 되어버린 먼 옛날의 이순신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순신이었기 때문에 그 승리를 당연히 여기고 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인간 이순신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릅니다

저는 이책을 다 읽었지만 아직도 이순신을 모릅니다
다만 그도 고통속에 괴로워했던 인간이라는 것!
그것만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독일로 간 사람들 -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관한 기록
박찬경.클라우스 펠링 글, 박찬경 사진 / 눈빛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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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이자 끊임없는 문제작을 만들어내는 미술작가 박찬경.

그가 이번에는 우리 역사의 또다른 한 부분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사진집을 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인간의 정신 움직임은 언제나 육체 움직임보다 자유롭다.

미래의 일을 상상할 때 정신은 미래로 날아가지만

몸은 현재에 머물러있게 된다.

과거를 추억할 때도 과거로 달려가는 것은 정신 뿐이다."

이 사진집의 서두에 나오는 소설가 조세희 말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30여년, 고된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이

어찌 한 장의 사진 속에 다 담겨질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진집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버린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과거와 그리고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30여년전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사진과 함께 오버랩되는 이들이 있다.

네팔,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등지에서 온 이들. 이제는 더 이상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들고 거친 일들을 하기 위해 한국땅을 찾은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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