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은 못하고 있었는데 합본으로 이 가격이면 합리적. 근데 에곤 실레 그림이 맞나. 왜 모사화느낌이 나지. 암튼 쌍둥이, 전쟁 이미지를 함께 매치시키려 한 것 같은데 ...흠....어째 요즘은 여차하면 에곤 실레풍을 써먹으려는 기분이.
지젝 어쩌고 문구가 실제로 저렇게 표지에 박혀있는 건 아니겠지@@ 띠지면 안 되었나. 까치글방 제발 표지 좀...  <괴델, 에셔, 바흐> 참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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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14-12-2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괴델, 에셔, 바흐˝는 표지는 둘째치고 번역부터 좀 다시 했으면 좋겠어요 ㅋ

AgalmA 2014-12-27 18:09   좋아요 1 | URL
번역의 산맥이란 늘 험난하니 번역 알피니스트의 고충을 감안하며 읽는 인내는 늘 요구되는 바이죠. 괴랄함 속에서 읽는 고뇌와 재미라는 것도 있어서 그러다 보니 제 말투가 이 꼴입니다.
<괴델, 에셔, 바흐> 지금쯤은 한 20쇄 넘어갔으려나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20년만에 민음사에서 김화영 번역으로 나오는 쾌거도 있었지만 글쎄요. <괴델...>은 향후 20년 안에도, 제가 죽기 전에도 누가 다시 번역 할 일이 있을까 싶어요ㅎ.

뷰리 2014-12-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본으로 나오는 건 반가운 일인데 표지가 🙊

AgalmA 2014-12-27 16:20   좋아요 0 | URL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니 제가 이렇게 토로 중 ...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치, 문학사상, 동문선 이 세 출판사야말로 책디자인계의 영원한 안티`죠. 3권 합권에 이 정도 가격이라면 꽤 괜찮은데요.

AgalmA 2014-12-27 18:18   좋아요 0 | URL
까치가 그 중 단연 top이죠. 서체며 편집까지 총체적으로다가. 뭐랄까. 까치가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초창기 파스퇴르와 쌈지의 키치적 컬쳐효과같은...그들도 다 버린 그것을 혼자 고집하는 장인은 아니고 고집쟁이 영감님 같은 양식
좀 수정된 재판을 기다리다가 품절될까 싶어 사긴 사겠지만...으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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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시적 구동이 중첩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글쓰는 자의 굴레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중첩의 괘(卦)를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기쁘지 않고 슬픈 것일까.

 

 

 

「기린이 그린」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림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그린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나무의 나무」

나무의 나무는 곧고 나무의 나무는 휘어진다

나무의 나무는 어둡고 나무의 나무는 혼자다

 

 

「분실된 기록」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거실의 모든 것」

 …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

이 무수한 교체와 해체 속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매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방식은 매초마다 우리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나또한 충분히, 모든 것을 생각한 사람도 아니다.

어쨌든 시인의 뜻이므로 이렇게 시를 구동하는 것에 동의는 한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문장도 의미도 아닌 음절, 음소로까지 나뉘어져 급기야 음(리듬)만 남는다. 오로지 시인의 숨결만이 남는 셈이다. 그것은 시인의 선명한 의지였을 것이다.

시가 어떤 정언(定言)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무수한 리듬들이 그저 떠돌기만 하고(시인의 뜻이 그렇더라도) 어떤 음악으로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이것은 인간인 내 욕심이다.

시 속의 보이지 않는 무수한 빗금들과 재들을 보며, 나는 그 在들이 이미 죽어있는 것들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무수하고도 협소한 일상적 재들을 후 불어버리고 독자적인 재들을 가져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 형식을 완성시켜 줄 재들을. 그리고 소용돌이쳐 날아올라 정말 무한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심이고 요구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이른 바 논리적인 명제들은 언어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말을 떠올려보며, 이준규 시인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네모』시집과 이 시집을 비교해보고도 싶지만 능력되는 평론가에게 일임한다.

 

ㅡAgalma 

 

 

내가 당신에게 화답할 시는 바로 당신의 시입니다. 당신의 기다림들을 재로 만들지 말아요.

 

 

 

 

 

 

 

「초다면체의 시간」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거나 이제 막 끝났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가슴에 매단 작고 빛나는 훈장 혹은 누군가의 마지막 유품처럼. 언젠가 너는 내게 편지했다. 겨울에는 나에게로 여행 오세요. 이를테면 이런 여행.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는 사막 위를 낡은 캐딜락을 타고 홀로 달려가는. 지평 저 너머로 희미한 모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사막에는 사막밖에 없지. 나에게는 나 자신밖에 없듯이. 내 성질에 맞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미치도록 살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말하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갈망하고, 시시한 일을 떠벌리거나 말하지 않고,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황금빛 양초처럼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길 위에 나란히 서서 잭 케루악을 읽었지. 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기타리스트가 되기를 은밀히 소망해왔다. 하지만 기타리스트가 되기엔 네 손가락은 너무 작고 어두웠다. 너는 남몰래 탁자 밑에서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늘리곤 했었지. 너는 불운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조금 자주 울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들판 위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춤을 추는 야윈 몸의 요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우리의 팔과 다리가 부드럽게 휘저어놓은 공기의 입자를 느낀다. 어제저녁 나는 팔차원 초다면체를 아홉 개나 찾아냈어요. 그것들은 속이 빈 채로 서로 맞물려 있었죠. 나는 콕세터라는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우리들은 마치 만화경 속의 풍경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무한히 흔들린다. 달린다. 날아오른다. 내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유리잔 바닥을 떠도는 녹차 찌꺼기. 내겐 언제나 사소한 것에 쉽게 감동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우리는 한배에서 태어난 두 개의 머리 같구나. 그리고. 그러나. 어느 날 무언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순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입을 다문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죽어 있었다. 빛이 사라진다. 어떤 빛이. 어떤 빛이 어둠 곁으로. 어둠 뒤로. 사라진다. 나 혹은 너는 검은 색 혹은 흰색이 된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망설였던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너에게 여행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나.

 

 

*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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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의 증기기차 같은 문장을 재밌게 읽다가 갑자기 뭔가 두고온 물건이 생각난 듯이 시큰둥해졌다. 책을 덮고 다른 이동수단을 생각했다. 영화라는 수상스키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따뜻한 난로 앞에서 웅크려 있어도 되는 책이 더 낫지, 했다. 10초도 안 걸려 정반대의 문(文)을 열고 프루스트를 탔다. 그런데 책장 너머 발터 벤야민이 자꾸만 지나갔다. 내가 프루스트를 읽고 있는지 발터 벤야민을 읽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니, 내가 발터 벤야민을 원했던 건가, 의심했지만 단순한 내 착각만은 아니었다.

  페터 손디는 프루스트는 시간으로부터의 도피며 벤야민은 시간으로부터의 과거 탈환이라고 너무 매정하게 말했지만, 내가 흥미로운 건 그들이 어린이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방식의 유사성이다. 그리고 그 문체들은 언제나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침대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나는 베개의 예쁜 볼, 토실토실하고 싱싱한 우리들 어린 시절의 볼과 같은 그 볼에 나의 볼을 살짝 댄다. … (중략) … 이러한 방에서, 내가 눈을 치뜨고, 근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심장을 두근거리면서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나의 사념은 정확하게 방 그대로의 꼴이 되어, 그 거대한 깔대기 모양의 천장 꼭대기까지 가득 채우려고 여러 시간 동안 흩어지기도 하고, 위로 늘어나기도 하면서 몇몇 밤을 잠 못 이루어 괴로워하던 끝에, 드디어 습관이 커튼의 빛깔을 변경시키고, 괘종을 침묵시키고, 본체만체하는 인정머리 없는 거울에 연민의 정을 가르치고, 쇠풀 냄새를 깨끗이 쫓아 내진 못했을망정 그다지 코를 찌르지 않게 하고, 눈에 거슬리는 천장의 높이를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습관! 능란한 솜씨지만 매우 느릿느릿한 이 지배인은, 우선 우리의 정신을 몇 주일 동안 임시 배치 속에 가두어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중략) … 몸을 마지막으로 뒤치고, 확실성을 주관하는 천사가 모든 것을 나의 주위에 정착시켜, 나를 나의 방안, 이불 밑에 누이고, 서랍 달린 옷장, 책상, 벽난로, 거리로 난 창문, 두 개의 방문 따위를 어둠 속에서 대략 제자리에 놓았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열」

 

  체온을 재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나 혼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했는데, 베개를 갖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과 산이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에 나는 베개로 만든 산등성이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그 산등성이들로부터 생겨 나오는 힘과 결탁했다. 그리하여 종종 그러한 산면 한가운데 동굴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뻥 뚫린 저 어두운 심연에 귀를 가져다 댄 다음 안의 침묵에 대고 종종 뭔가 말을 하면 그것이 이야기가 되어 되돌아 나왔다. 가끔은 손가락을 온갖 모양으로 뒤섞어 연극의 한 장면을 연기해 보기도 했다. 또 손가락을 전부 합쳐 '백화점'을 세우기도 했다. 중지 두 개로 만든 '카운터' 뒤쪽에서는 두 개의 새끼 손가락이 손님에게-즉 나에게-열심히 대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그러한 즐거움도 줄어들고, 그와 함께 손가락들의 연기를 감독할 힘도 약해져갔다. 결국 나는 호기심도 없이 손가락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는데, 그것들은 불이 집어삼키고 있는 도시의 주변 지역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르고 수상쩍은 불량배들을 흉내내고 있었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어머니가 있는 마법의 나라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프랑수아즈로 말하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고도 쓸데없는 구별을 바탕삼은, 오만하고도 풍성한, 세밀하고도 강경한 법전을 소유하고 있었다(그 때문에, 이 법전은 영아 학살이라는 잔인한 법규와 나란히, 염소 새끼를 그 어미 젖 속에 넣고 끓이거나, 동물의 넓적다리 힘줄을 먹는 일을 지나친 동정심으로 금하는 고대 법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우리가 내린 어떤 분부를 막무가내로 하지 않겠다고 프랑수아즈가 갑자기 고집부리는 것으로 미루어 판단해 보건대, 이 법전은 프랑수아즈의 주위 사람들이나 마을의 하녀살이 중의 어떠한 것도 그녀에게 암시해 줄 수 없었던 사회적인 복잡성과 사교계의 세련성을 미리 알고서 꾸며진 듯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곡해하기 쉽고도 우아한 아주 오래된 프랑스의 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옛날 궁정 생활이 영위되던 흔적이 남아 있는 오래 된 저택을 이웃해서 화약 제조소가 있고, 테오필 성자의 기적 또는 네 아들 에몽을 나타낸 정묘한 조각의 주위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지대 안에, 그러한 옛 프랑스의 과거가 있듯이. 이 법전의 조문에 의하면, 프랑수아즈가 나 같은 하찮은 인물을 위하여 스완 씨 면전에서 엄마를 방해하러 간다는 건 화재가 난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중략)…프랑수아즈는 5분 남짓 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마치 용지의 조사와 서체가, 곧 내용의 성질을 알려 주고, 법전의 몇 조에 비추어 봐야 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이. 그러고 나서 프랑수아즈는, '이러한 자식을 둔 부모는 얼마나 불행할까!'라고 말하는 듯한 단념하는 모양으로 나가 버렸다.

 

 #

ㅎㅎ... 자기 전에 어머니의 입맞춤을 어떻게든 받기 위해 쪽지를 전하려는데, 하녀 프랑수아즈 마음 속에 있는 오래된 프랑스 마을과 법전을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라니ㅎㅎ.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반짇고리」

 

  우리는 '잠자는 미녀'를 찔러 백 년 동안 잠에 빠지게 했다는 물레 가락이 어떠한 것인지는 더이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백설 공주의 어머니인 왕비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바느질감을 갖고 창가에 앉아 계시곤 했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아침 풍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그것은 시골 방이었다 … (중략) … 그 냄새는 과수원에서 찬장으로 옮겨진 그해의 모든 맛있는 젤리, 잘 익은 맛있는 젤리다. 철따라 변하지만, 세간과 하녀처럼 그 집의 특유한 냄새, 따끈한 빵의 보드라움으로 서리의 짜릿함을 조절하는 냄새, 마을의 큰 시계처럼 한가로우나 시각을 어기지 않는 꼼꼼한 냄새,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질서 있는 냄새, 돈담무심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냄새, 세탁물의 냄새, 아침 일찍 일어나는 냄새, 신앙심의 냄새, 평안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불안의 증가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평안을 즐기는 냄새, 그리고 거기서 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 이의 눈에는 詩의 큰 저수지 같아 보이나 실은 산문적인 것밖에 즐기지 못하는 냄새. 그러한 고모의 방 공기는 매우 영양이 되는, 자양분이 많은 침묵의 미묘한 구수한 냄새로 포화되어 있어서, 나는 항상 일종의 왕성한 식욕과 더불어 그곳으로 가곤 하였는데, 부활제 전 주일의 아직 쌀쌀한 이른 아침에는 더욱 그러했다.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겨울날 아침」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이내 불꽃은 마치 석탄으로 가득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너무나도 작은 서랍에 갇혀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 검게 그을린 따뜻한 과일, 막 여행에서 돌아온 가까운 지인처럼 여전히 친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해버린 과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난로의 열이라는 어두운 나라를 순회하는 여행으로, 그로부터 사과는 이날 하루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모든 것의 향기를 뽑아냈다.

 

 

 

 

 

 

 

 

 

 

 

 

 

 

 

 

 

 

 

 

 

[발터 벤야민에 대해 ㅡ 지나간 것으로부터 희망의 불꽃] - 페터 손디

 

프루스트는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치기 위해 과거를 찾아 나선다. 그러한 노력은 오직 과거가 현재와 일치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데, 유사한 경험들만이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온갖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찬 미래-그것의 궁극적 위험은 죽음이다-로부터의 도피이다. 이와 반대로 벤야민이 과거에서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미래이다. 그의 기억이 되찾으려고 하는 거의 모든 장소는 「베를린의 어린 시절」의 한 곳(「수달」)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앞으로 다가올 것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의 기억이 어린 시절의 사람들을 "미래를 예언하는 소명을 다하고 있는 모습"(「두 개의 수수께끼」)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메아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벤야민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의 첫 음을 듣는다. 프루스트와 달리 벤야민은 시간성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없다. 그는 사물들을 탈역사적인 정수精髓 속에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대신 그는 역사적 경험과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 하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과거로, 그리고 미래를 약속하는 과거로 되돌려 보내진다. 벤야민의 시제는 완료형이 아니라 온갖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미래완료형인 것이다. 미래인 동시에 과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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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과 겉>은 20대 초반였던 까뮈(1935~1936)의 첫 출판물이자 그의 평생의 지표들이 묘비명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그가 이 책의 재판을 왜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본질들이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한낮의 태양빛 속에서가 아니라 심연의 저녁 그늘 속에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고액으로 거래되는 초판을 보고 독자들을 위해 개정판에 동의했다고.

개정판에 이처럼 확고한 [서문]을 달아놓은 것은 일종의 (할喝) 장치였으리라. 독자의 동조심리를 막고, 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이 책을 보라는.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매일 자기 전에 읽는다면 그 날의 삶이 정리될 것 같다. 천국과 고독을 하나로 묶는 그 의지와 열정을 생각하며 말이다.

 

 

 

[서문]
p25  극장의 객석......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주는 것이다.

 

 

[아이러니]

p38  젊은이는, 그가 여태껏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참담한 불행ㅡ영화관에 가기 위하여 버려두어야 하는 늙은 불구 여인의 불행ㅡ앞에 놓인 자기의 처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떠 빠져나가고 싶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손을 뽑으려고 했다. 한순간 그에게는 노파에 대한 잔인한 증오심이 일어나 그녀의 뺨을 힘껏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긍정과 부정의 사이]

p54  가난 속에는 어떤 고독이 있다.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고독이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하늘도, 별이 가득 찬 밤도 예사로운 자연의 재화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하류 계층에선 하늘이 본래의 모든 의의를 되찾아 가지게 된다. 즉 그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인 것이다.

 

p63  "따지고 보면 그편이 차라리 나았지. 소경 아니면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테니. 그랬더라면 그 가엾은 사람은……." "하긴 그렇군요." 사실 이 방안에 그를 붙잡아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안에 깃들여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영혼 속의 죽음]

p74  방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푸른 칠을 한 커다란 벽만이 보였다. 앞서 말한 침침한 광선이 그 스크린 위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의 그림자와 시체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관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 빛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빛이야말로 진실한 빛, 삶의 진정한 빛, 기울어가는 삶의 진정한 빛,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삶에의 사랑]

p87~89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때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들 덕분에 우리는 제 고장에서 자기였던ㅡ 그러나 먼 곳에 갖다 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ㅡ 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ㅡ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 (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ㅡ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자연이 내려준 이 모든 산물에 민감해진 나머지 우리가 맛볼 수 있는(명철의 도취감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도취감들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 아마 지중해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어느 나라도 나를 이렇게까지 나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시켜준 일은 없을 것이다.

 

p91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스 조각의 퇴폐와 이탈리아 예술의 해체가 시작된 것은 미소와 시선이 미술 속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마치 정신이 시작하는 곳에서 아름다움은 끝난다는 듯이.)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나의 질문들에 대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NADA(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안과 겉]

p99~100  1월의 어느 날 오후가 이렇게 나를 세계의 이면과 대면시켜준다. 그러나 싸늘한 기운이 대기 속에 남아 있다. 도처에 덮여 있는 태양의 얇은 막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곧 터져버릴 것만 같지만 그래도 그것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감싸주고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뭇잎들과 햇빛의 희롱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담배가 타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이 광선이 되어버리고 공기 속에 감도는 이 다사로운 맛과 이 은은한 정열이 되어버리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 

  아까는 인간들과 그들이 사들이는 무덤 같은, 다른 것들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시간이라는 옷감에서 이 한순간을 오려내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책갈피 속에 한송이 꽃을 접어 넣어 사랑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산책의 기억을 그 속에 간직한다. 나도 산보를 한다. 그러나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하나의 神이다.

 

p101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름] 수수께끼

내가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했던 경험 속에서 부조리는, 설령 그 기억과 감동이 그 후의 내 사고방식에 따라다닌다 할지라도,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지적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차이점은 신중히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방법론적인 것인 데카르트의 회의가 데카르트를 회의론자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하지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든가 만사에 절망해야 한다는 사상에만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유물론이란, 그냥 그 말을 성립시키고자만 해도 이 세상에는 물질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만큼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전적인 허무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물의 밑창에까지 파고들어가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의미 있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세계에 대하여 일체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가치 판단을 말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산다는 것, 예컨대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스스로가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사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리하여 삶의 어떤 가치를, 적어도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절망은 말이 없는 법. 게다가 침묵조차도, 두 눈이 말을 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절망은 죽을 때의 고통,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따지고 특히 글까지 쓰게 되면 즉시 형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나무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랑은 태어난다. 절망한 문학이란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중략)……우리의 허무주의 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과 만났을 때도 나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이유들만을 모색했다. 그것도 무슨 미덕의 소유자라서거나 보기 드문 영혼의 숭고함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태어났고 수천 년 전부터 그 속에서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찬양하도록 배워온 그 빛에 대한 본능적 충실성 때문에 그건 그랬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는 빛을 발하고 다시금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다. 그의 세계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메마른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다시 말해서 눈이 부셔서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깡마른 세기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희랍의 못났지만 악착스럽게 충실한 아들들에게는 우리 역사의 화상(火傷)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을 견디어내게 된다. 비록 어두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성취하는 과업의 한가운데에는 오늘 들과 산들에 걸쳐 절규하는 그것과 똑같은 어떤 굴복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인간적인 까뮈의 생각들 ... 어떻게 보면 불교사상과 상치되어 보이다가도 어느 맥락은 맞닿아도 보이는 ... 까뮈가 우파니샤드를 탐독했었다는 일화와도 연관이 있을까,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도 불교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니 이러저러 그럴지도 ......어쨌거나 깨달음도 인간으로서의 방식이라고 할 때....존재함 그 자체가 굴복일 수가 없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이자 최후까지 태양과 대지를 생각하는 존재.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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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죽었다 했지만 여기선 여전히 서정시로 맘을 달래고, 대공황기 이후 독재와 파국의 길로 들어서던 그 시기는 기어이 다시 왔고....다들 라이타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나 보고 있는데 형국이 참 묘하군. 한국아, 대문 열어두고 낡아빠진 파시즘으로 안방, 부엌 분간도 못하고 푸닥거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다.... 사회민주주의라.......암튼 책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르동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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