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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겉>은 20대 초반였던 까뮈(1935~1936)의 첫 출판물이자 그의 평생의 지표들이 묘비명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그가 이 책의 재판을 왜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본질들이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한낮의 태양빛 속에서가 아니라 심연의 저녁 그늘 속에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고액으로 거래되는 초판을 보고 독자들을 위해 개정판에 동의했다고.

개정판에 이처럼 확고한 [서문]을 달아놓은 것은 일종의 (할喝) 장치였으리라. 독자의 동조심리를 막고, 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이 책을 보라는.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매일 자기 전에 읽는다면 그 날의 삶이 정리될 것 같다. 천국과 고독을 하나로 묶는 그 의지와 열정을 생각하며 말이다.

 

 

 

[서문]
p25  극장의 객석......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주는 것이다.

 

 

[아이러니]

p38  젊은이는, 그가 여태껏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참담한 불행ㅡ영화관에 가기 위하여 버려두어야 하는 늙은 불구 여인의 불행ㅡ앞에 놓인 자기의 처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떠 빠져나가고 싶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손을 뽑으려고 했다. 한순간 그에게는 노파에 대한 잔인한 증오심이 일어나 그녀의 뺨을 힘껏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긍정과 부정의 사이]

p54  가난 속에는 어떤 고독이 있다.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고독이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하늘도, 별이 가득 찬 밤도 예사로운 자연의 재화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하류 계층에선 하늘이 본래의 모든 의의를 되찾아 가지게 된다. 즉 그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인 것이다.

 

p63  "따지고 보면 그편이 차라리 나았지. 소경 아니면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테니. 그랬더라면 그 가엾은 사람은……." "하긴 그렇군요." 사실 이 방안에 그를 붙잡아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안에 깃들여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영혼 속의 죽음]

p74  방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푸른 칠을 한 커다란 벽만이 보였다. 앞서 말한 침침한 광선이 그 스크린 위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의 그림자와 시체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관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 빛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빛이야말로 진실한 빛, 삶의 진정한 빛, 기울어가는 삶의 진정한 빛,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삶에의 사랑]

p87~89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때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들 덕분에 우리는 제 고장에서 자기였던ㅡ 그러나 먼 곳에 갖다 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ㅡ 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ㅡ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 (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ㅡ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자연이 내려준 이 모든 산물에 민감해진 나머지 우리가 맛볼 수 있는(명철의 도취감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도취감들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 아마 지중해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어느 나라도 나를 이렇게까지 나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시켜준 일은 없을 것이다.

 

p91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스 조각의 퇴폐와 이탈리아 예술의 해체가 시작된 것은 미소와 시선이 미술 속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마치 정신이 시작하는 곳에서 아름다움은 끝난다는 듯이.)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나의 질문들에 대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NADA(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안과 겉]

p99~100  1월의 어느 날 오후가 이렇게 나를 세계의 이면과 대면시켜준다. 그러나 싸늘한 기운이 대기 속에 남아 있다. 도처에 덮여 있는 태양의 얇은 막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곧 터져버릴 것만 같지만 그래도 그것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감싸주고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뭇잎들과 햇빛의 희롱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담배가 타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이 광선이 되어버리고 공기 속에 감도는 이 다사로운 맛과 이 은은한 정열이 되어버리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 

  아까는 인간들과 그들이 사들이는 무덤 같은, 다른 것들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시간이라는 옷감에서 이 한순간을 오려내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책갈피 속에 한송이 꽃을 접어 넣어 사랑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산책의 기억을 그 속에 간직한다. 나도 산보를 한다. 그러나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하나의 神이다.

 

p101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름] 수수께끼

내가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했던 경험 속에서 부조리는, 설령 그 기억과 감동이 그 후의 내 사고방식에 따라다닌다 할지라도,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지적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차이점은 신중히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방법론적인 것인 데카르트의 회의가 데카르트를 회의론자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하지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든가 만사에 절망해야 한다는 사상에만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유물론이란, 그냥 그 말을 성립시키고자만 해도 이 세상에는 물질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만큼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전적인 허무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물의 밑창에까지 파고들어가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의미 있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세계에 대하여 일체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가치 판단을 말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산다는 것, 예컨대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스스로가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사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리하여 삶의 어떤 가치를, 적어도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절망은 말이 없는 법. 게다가 침묵조차도, 두 눈이 말을 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절망은 죽을 때의 고통,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따지고 특히 글까지 쓰게 되면 즉시 형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나무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랑은 태어난다. 절망한 문학이란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중략)……우리의 허무주의 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과 만났을 때도 나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이유들만을 모색했다. 그것도 무슨 미덕의 소유자라서거나 보기 드문 영혼의 숭고함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태어났고 수천 년 전부터 그 속에서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찬양하도록 배워온 그 빛에 대한 본능적 충실성 때문에 그건 그랬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는 빛을 발하고 다시금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다. 그의 세계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메마른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다시 말해서 눈이 부셔서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깡마른 세기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희랍의 못났지만 악착스럽게 충실한 아들들에게는 우리 역사의 화상(火傷)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을 견디어내게 된다. 비록 어두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성취하는 과업의 한가운데에는 오늘 들과 산들에 걸쳐 절규하는 그것과 똑같은 어떤 굴복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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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인간적인 까뮈의 생각들 ... 어떻게 보면 불교사상과 상치되어 보이다가도 어느 맥락은 맞닿아도 보이는 ... 까뮈가 우파니샤드를 탐독했었다는 일화와도 연관이 있을까,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도 불교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니 이러저러 그럴지도 ......어쨌거나 깨달음도 인간으로서의 방식이라고 할 때....존재함 그 자체가 굴복일 수가 없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이자 최후까지 태양과 대지를 생각하는 존재.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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