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평점 :
#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시적 구동이 중첩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글쓰는 자의 굴레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중첩의 괘(卦)를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기쁘지 않고 슬픈 것일까.
「기린이 그린」中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림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그린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나무의 나무」中
나무의 나무는 곧고 나무의 나무는 휘어진다
나무의 나무는 어둡고 나무의 나무는 혼자다
「분실된 기록」中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거실의 모든 것」中
…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
이 무수한 교체와 해체 속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매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방식은 매초마다 우리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나또한 충분히, 모든 것을 생각한 사람도 아니다.
어쨌든 시인의 뜻이므로 이렇게 시를 구동하는 것에 동의는 한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문장도 의미도 아닌 음절, 음소로까지 나뉘어져 급기야 음(리듬)만 남는다. 오로지 시인의 숨결만이 남는 셈이다. 그것은 시인의 선명한 의지였을 것이다.
시가 어떤 정언(定言)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무수한 리듬들이 그저 떠돌기만 하고(시인의 뜻이 그렇더라도) 어떤 음악으로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이것은 인간인 내 욕심이다.
시 속의 보이지 않는 무수한 빗금들과 재들을 보며, 나는 그 在들이 이미 죽어있는 것들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무수하고도 협소한 일상적 재들을 후 불어버리고 독자적인 재들을 가져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 형식을 완성시켜 줄 재들을. 그리고 소용돌이쳐 날아올라 정말 무한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심이고 요구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이른 바 논리적인 명제들은 언어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말을 떠올려보며, 이준규 시인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네모』시집과 이 시집을 비교해보고도 싶지만 능력되는 평론가에게 일임한다.
ㅡAgalma
내가 당신에게 화답할 시는 바로 당신의 시입니다. 당신의 기다림들을 재로 만들지 말아요.
「초다면체의 시간」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거나 이제 막 끝났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가슴에 매단 작고 빛나는 훈장 혹은 누군가의 마지막 유품처럼. 언젠가 너는 내게 편지했다. 겨울에는 나에게로 여행 오세요. 이를테면 이런 여행.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는 사막 위를 낡은 캐딜락을 타고 홀로 달려가는. 지평 저 너머로 희미한 모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사막에는 사막밖에 없지. 나에게는 나 자신밖에 없듯이. 내 성질에 맞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미치도록 살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말하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갈망하고, 시시한 일을 떠벌리거나 말하지 않고,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황금빛 양초처럼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길 위에 나란히 서서 잭 케루악을 읽었지. 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기타리스트가 되기를 은밀히 소망해왔다. 하지만 기타리스트가 되기엔 네 손가락은 너무 작고 어두웠다. 너는 남몰래 탁자 밑에서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늘리곤 했었지. 너는 불운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조금 자주 울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들판 위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춤을 추는 야윈 몸의 요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우리의 팔과 다리가 부드럽게 휘저어놓은 공기의 입자를 느낀다. 어제저녁 나는 팔차원 초다면체를 아홉 개나 찾아냈어요. 그것들은 속이 빈 채로 서로 맞물려 있었죠. 나는 콕세터라는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우리들은 마치 만화경 속의 풍경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무한히 흔들린다. 달린다. 날아오른다. 내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유리잔 바닥을 떠도는 녹차 찌꺼기. 내겐 언제나 사소한 것에 쉽게 감동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우리는 한배에서 태어난 두 개의 머리 같구나. 그리고. 그러나. 어느 날 무언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순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입을 다문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죽어 있었다. 빛이 사라진다. 어떤 빛이. 어떤 빛이 어둠 곁으로. 어둠 뒤로. 사라진다. 나 혹은 너는 검은 색 혹은 흰색이 된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망설였던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너에게 여행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나.
*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