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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카르트와 후설과 하이데거와 알랭 바디우와 지젝 에 있었다.

내 가까이에는 열람 독서대에 앉아 후루룩,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와 책을 고르러 100코너 쪽으로 온 남자가 있었는데,

아이는 자기 코너가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간증 고백이라도 하듯 구구절절한 철학 번역서들을 훑어보며

나는 167페이지에 있는 네 잎 클로버를 발견했다.

2012년의 네 잎 클로버였다. 그것은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버려지고 있는 것일까.

본질을 담고 있는 존재,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그것을 살포시 덮는다.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처음 접하고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네 잎 클로버를 보고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길 바랐지만

이미 내 책상에는 잎이 찢겨진 네 잎 클로버가 있었다.

나는 네 잎 클로버가 서서히 부서질 때까지 내내 지켜 볼 것이고

167페이지의 네 잎 클로버 또한 그대로 167페이지에 내버려 둘 것이다.

어떤 이유도 없이 도착한 건 그들도, 나도 마찬가지다.

 

ㅡ Agalma

 

 

 

 

p 21

『신학정치론』의 진정한 독창성은 종교를 하나의 결과로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수 있다. 이때 결과는 인과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광학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결과이다. 인간들 자신은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원인들에 그 결과를 다시 연결시키면서 그것의 생산 과정(예를 들면, 자연법칙들이 강한 상상력과 나약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필연적으로 <기호들signes>로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되는가)을 추적해야 한다.

p24~26

동물들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를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죽음은 자연의 존재들의 질서에서 일어나는 나쁜 만남과 같은 것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내적인 죽음, 노예-폭군의 이러한 보편적인 사디즘-마조키즘을 아직 창조하지 않았다.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하게 될 비난, 즉 부정적인 것과 그것의 능력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스피노자의 영예이고 무구함이며, 그의 고유한 발견이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좀먹은 세계 속에서, 스피노자는 죽음, 인간들의 살인 욕구, 선악의 규범들, 정의와 부정의의 규범들을 의문에 부칠 만큼 삶과 삶의 능력을 확신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모든 유령들을 거부할 만큼의 삶에 대한 확신이다. 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노예 상태가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들, 파문, 전쟁, 전제, 반동, 이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았다. 비트 형제의 살해는 그에게는 한 보기가 된다. 야만의 극치 Ultimi barbarorum. 삶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모든 방식, 모든 부정적인 것은 그가 보기에는 두 원천을 갖고 있다. 하나는 외부로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해 있는데, 원한과 양심의 가책, 증오와 죄의식이 그것들이다. <증오와 양심의 가책은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 스피노자는, 이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그것들은 오직 새로운 의식과 함께, 새로운 전망vision과 새로운 삶의 욕구appetit 속에서만 고갈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삶은 관념이 아니며, 이론이 하는 일도 아니다. 삶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모든 속성들attributs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양태이다.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시하학적 방법은 그 모든 의미를 갖게 된다. 『윤리학』의 기하학적 방법은 스피노자가 풍자satire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대립된다. 풍자, 그것은 인간의 무능력과 고통에서 즐거움을 얻는 모든 것이고, 경멸과 조롱을 표현하는 모든 것이며, 또한 비난, 악의, 과소 평가, 저속한 해석들로 영양을 취하는 모든 것이고, 영혼들을 파괴하는 모든 것(파괴된 영혼들이 폭군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폭군은 파괴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이다. 기하학적 방법은 지성의 설명 방법이기를 그친다. 교수를 위한 설명이 아니라 발명의 방법이 문제가 된다. 기하학적 방법은 생물학적이고 광학적인 교정 방법이다. 인간이 일정 정도 비틀렸을 때, 우리는 이 비틀림의 결과를 기하학적 방식으로more geometrico 그 원인들에 다시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교정하게 될 것이다. 이 광학적 기하학은 『윤리학』전체를 관통한다. 『윤리학』을 사유의 용어들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능력의 용어들로 읽어야 하는지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속성은 능력인가 아니면 개념인가?) 그러나 하나의 용어만이, 즉 삶만이 있을 뿐이다. 삶은 사유 속에 있지 않다.

p33

주어져 있는 우리의 인식 조건들을 넘어 신체의 능력을 파악하고, 주어져 있는 우리의 의식 조건들을 넘어 정신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운동을 통해서이다.

p40

확실히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p36~37

의식은 자신을 구성하는 삼중의 환상, 즉 목적성의 환상, 자유의 환상, 신학적 환상과 분리 불가능하다. 의식은 두 눈 뜨고 꾸는 꿈일 뿐이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는 자유의지에 따라 우유를 욕구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화가 난 젊은이는 복수를 원한다고 생각하며, 겁 많은 사람은 도망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취한 사람은, 이후에 제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을, 영혼의 자유 명령에 의해 말한다고 생각한다,>

의식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것은 단지 욕망에 대한 유명론적 정의일 뿐이며, 의식은 욕망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한다(<우리가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에 이르러야 한다. 이 정의는 동시에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의식이 욕구의 과정에 새겨지게 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conatus)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대상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변용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변용들은 운동과, 즉 우리가 만난 사물이 우리와 결합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우리를 해체하는가에 따라 우리를 보다 큰 완전성으로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시키는 운동(기쁨과 슬픔)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이러한 이행, 즉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요컨대 다른 신체들 혹은 다른 관념들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코나투스의 변이들과 결정들의 증거인 이 이행의 지속적인 감정으로 나타난다. 나의 본성이 적합한 대상을 통해, 나는 우리, 즉 그 대상과 나를 아우르는 보다 우월한 총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p75

중앙의 한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위치해 있는 점들의 자리로서의 원

p79

행위 능력은, 외적 원인들과 관계 속에서 변용 능력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 상이하게 변한다. 감정(기쁨 혹은 슬픔)은 그것이 전제하는 변용-이미지 혹은 관념(우리의 신체에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감정이 자신의 기원이 되는 관념으로 돌아올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이처럼 다양한 계열의 변용들과 감정들은 항상적으로, 그러나 가변적인 조간들 속에서, 변용 능력을 실행한다.

p86

<인간들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자신들이 자유로운 한, 그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다>(윤리학 4부, 명제 68). 정확히 말해 좋음은 한 존재 양태와 관련해서, 그리고 아직 획득하지 못한 가변적인 행위 능력과 관련해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을 총체화할 수는 없다.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전환시킨다면, 그것은 선을 존재 이유와 행위 이유로 삼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목적론적 환상들에 빠지게 되고, 신적인 생산의 필연성과 충만한 신의 능력에 참가하는 우리의 방식을 왜곡하게 된다.

p92

관념은 그것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된다(『윤리학』2부, 명제 21). 이로부터 의식의 세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1)반성: 의식은 주체의 도덕적 성질이 아니라 정신 곳에서의 관념의 반성이다(『지성 개선론』). (2)파생: 의식은 자신의 대상이 되는 관념과 관련하여 항상 이차적이며, 첫번째 관념이 갖는 만큼의 가치만을 갖는다. 스피노자가, 알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으며(같은 책, 문단 35),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떄문이다(『윤리학』 2부, 명제 21, 43). (3) 상관 관계: 의식이 자신의 대상인 관념과 맺는 관계는 그 관념이 자신의 인식 대상과 맺는 관계와 같다(2부, 명제 21). 그러나 사실 스피노자는 관념과 관념 사이에는 이성의 구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4부, 명제 8; 5부, 명제 3). 그것은 두 모두가 동일한 사유 속성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념의 대상과 관념과 마찬가지로, 존재 능력과 사유 능력이라는 상이한 두 능력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p101~102

우리가 신 자체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념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인식하하고 있는 한,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관념이다(5부, 명제 36)

p126

스피노자의 원리는, 자유는 결코 의지의 특성이 아니며,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의지는,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언제나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양태이며, 그 원인이 비록 사유 속성 아래서의 신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1부, 명제 32). 한편으로, 관념들은 그 자체가 양태들이며, 따라서 신의 관념은 무한 양태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 무한 양태 아래서 신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결코 가능태들을 사유하지 않으면서 이해한다.

p127

신체에 대한 영혼의 의지적 작용을 믿는 한, 자유는 의식의 근본적 환상이다(1부, 부록:2부, 명제 35, 주석;3부, 명제 2, 주석;5부, 서문). 양태의 경우는 실체의 경우보다 자유를 의지에 연결시키는 것이 더욱 불가능하다. 반면 양태는 본질, 즉 능력의 정도를 갖는다. 양태가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게 될 때, 이 관념들은 그것이 갖는 다른 존재 양태들과의 내적 적합성을 표현하는 공통 개념들(제2종의 인식)이거나, 아니면 신의 본질 및 다른 모든 본질들과 내적으로 필연적으로 적합한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관념(제3종의 인식)이다.

p129

그리고 『윤리학』에서, 우리는 하나의 속성을 갖는 실체들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부터 모든 속성들을 갖는(1부, 명제 9, 10) 자기 원인으로서의(1부, 명제 11) 유일 실체ㅡ이것으로부터 모든 특성들이 나온다(1부, 명제 16)ㅡ라는 관념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역행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그것은 결과에 대해 인식된 한 특성과 관련하여 그 원인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식 가능한 모든 특성들의 발생적 근거로서의 본질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종합적이다.

p130

관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원인을 표현하고 우리의 이해 능력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신으 관념으로부터 서로서로 연결되어 따라나온다. 정신이 정신적 자동 기계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신의 고유한 관념들의 질서를 전개하면서 표상된 사물들의 질서를 전개하기 때문이다(『지성 개선론』, 문단 85)

p132

스피노자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실체-양태들의 존재론적 관계, 본질-특성들의 인식론적 관계, 원인-결과의 물리적 관계의 동일화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원인-결과 관계가 내재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인데, 바로 이 내재성에 의해 원인은 자신 안에 머무른 채 생산한다. 거꾸로 본질-특성들의 관계눈 역동성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역동성에 의해, 특성들은 무한성을 통해 작동하고, 지성 속에서 설명되거나 표현되는 실체에 의해서 생산될 때에만, 실체를 설명하는 지성에 의해서 이끌어져나오며, 끝으로 특성들을 함유하고 있는 본질과 구별되는 고유한 본질을 향유한다. 아 두 측면은 다음과 같이 통합된다: 양태들은 존재와 본질에서 실체와 다르지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동일하게 같은 속성들 안에서 생산된다.

p136

부정 스피노자의 부정 이론은(부정의 근본적인 제거, 그것이 갖는 추상과 허구의 지위)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인 구별distinction과 부정적인 결정determination 사이의 차이에 의지하고 있다.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편지 50, 옐레스에게』)

p137

유한 존재 양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제한되고, 그 존재에 있어서 결정된다. 제한은 본질에 해당되고, 결정은 존재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부정의 두 형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양태를 그 자체로, 즉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그것을 그렇게 만든 원인에서 분리한 채 추상적으로만 고려할 때만 참이다.

p138

부정은 이성의 존재,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비교의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별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들을 하나의 추상 개념 속에 모아놓고, 그것들을 동일한 허구적 이상에 관련시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 허구적 이상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것들 혹은 저것들이 이러한 이상의 완전성에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편지 19, 블레이은베르흐에게』)

p142

기쁨-정념은 공통 개념의 유발적 원인이다. 이성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두 방식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성적이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이성적이게 되는가를 설명해 준다. (1) 좋은 만남들을, 즉 우리와 결합되고 우리에게 기쁜 정념들(이성과 적합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양태들과의 만남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려는 노력. (2) 공통 개념들에 대한, 즉 결합되는 관계들ㅡ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들을 연역해 내고(추론), 그것들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새로운 감정들, 즉 이번에는 능동적인 감정들(이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ㅡ에 대한 지각과 이해

p147~148

고유한(고유성) 〔고유성은〕본질과 동시에 그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특성들, 귀결들 혹은 결과들)과도 구별된다. 한편으로 고유성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그 어떤 것도 구성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인식하게끔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과 분리 불가능하다. 그것은 본질 자체의 양상이다. 다른 한편, 고유성은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속성이라는 논리적 의미에서건 결과라는 물리적 의미에서건 그 자신이 하나의 본질을 갖는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세 가지 고유성을 구별한다(『소론』, 1부, 2-7장). 신의 본성의 양상들이라는 첫번째 의미에서, 고유성은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자기 원인, 무한성, 영원성, 필연성……) 혹은 어떤 특정한 속성에 대해서(전지성全知性, 편재성偏在性) 말해진다. 두번째 의미로, 고유성은 신을 그의 생산물과 관련하여 규정한다(모든 사물들의 원인……). 세번째 의미로, 그것들은 단지 외적인 결정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외적인 결정들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을 상상하는 방식을 표시하는 것들로서, 우리에게 삶의 규칙과 복종의 원리들로 기능한다(정의, 자비……).

한결같이 신의 본질, 즉 신의 본성은 인식되지 못해왔는데, 그것은 신의 본질이 그 고유성들과 혼동되어 왔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고유성들과 속성들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학의 근본적인 과오가 철학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즉 거의 모든 계시 신학은 앞에서 언급한 세번째 종류의 고유성들에 머물러 있으며, 신의 진정한 속성들이나 신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신학 정치론』, 2장). 그리고 합리적 신학 또한, 두번째와 세번째 고유성에 머물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신의 본성을 무한한 완전성으로 정의할 때가 그러하다. 이러한 일반적 혼동은 우월성과 유비에 관한 모든 언어를 관통해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인간학적이고 신인 동형적인 특성들을, 비록 그것들을 무한에까지 상승시키기는 하지만, 신에게 부여한다.

p151

감정들은, 코나투스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용에 의해 이것 혹은 저것을 하도록 결정될 때, 그 코나투스가 취하는 모습이다. 코나투스를 결정하는 이 변용들은 의식의 원인이다. 이러저러한 감정 아래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코나투스는 욕망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욕망은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3부, 감정들에 대한 정의).

p158~159

기호 첫번째 의미로, 기호는 언제나 결과를 그 원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조건들 속에서 파악되는 결과에 대한 관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신체에 대해 어떤 신체가 미친 결과는 우리 신체의 본질과 외부 신체의 본질과 관련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적인 구성의 순간적 상태와 우리가 그 본성을 알지 못하는 사물의 단순한 현존에 따라 파악된다(『윤리학』, 2부, 명제 17). 이러한 기호들은 지시적이며, 혼합의 결과들이다.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우리 신체의 상태를, 이차적으로 외부 신체의 현존을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는 협약적 기호들의 질서 전체(언어)를 기초짓는데, 이 질서는 이미 그것의 다의성에 의해, 즉 기호들이 갖게 되는 결합의 사슬의 가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2부, 명제 18, 주석).

두번째 의미로, 기호는 원인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본성도 그 결과와의 관계도 이해되지 않은 그러한 조건들 속에서 파악된 원인이다. 예를 들면, 신은 아담에게, 과일은 그의 관계를 해체하면서 아담의 신체에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것이라고 계시한다. 그러나 아담은 미약한 지성을 갖고 있기 떄문에, 그 결과를 처벌로, 원인을 도덕 법칙으로, 즉 명령과 금지의 형태를 취하는 목적인으로 해석한다(『편지 19, 블레이은베르흐에게』). 아담은 신이 자신에게 기호를 통해 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도덕은 법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으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도덕 법칙은 원인과 영원한 진리(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왜곡한다. 법칙이라는 말은 그것의 도덕적 기원에 의해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으며(『신학 정치론』, 4장),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서 발전의 법칙이 아니라 능력의 한계를 보게 된다. 영원한 진리, 즉 관계들의 구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언명령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두번째 종류의 기호는 정언명령적이며, 계시의 결과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복종하게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신학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복종과 인식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식의 모델 대신에 복종의 원리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번째 의미로, 기호는 원인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관념과 법칙에 대한 이러한 신비화를 외부로부터 보증하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법칙으로 해석된 원인은 그 해석과 그 거짓 계시를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외적인 보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기호들은 각각의 사람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각 선지자는 자신이 상상하는 명령이나 금지가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기호들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기호들은 그의 의견, 기질에 맞춰 각색된다(『신학 정치론』, 2장). 이러한 기호들의 통일성은, 그것들이 일의적 표현들로 이루어진 철학의 자연적 언어와는 대립되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인 상상의 언어를 형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기호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러한 기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지성 개선론』, 문단 36;『윤리학』, 1부, 명제 10, 주석 1). 생동하는 지성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할 표현이 아니라 상상의 해석을 요청하는 기호가 되는 것은 부적합한 관념의 고유성이다(설명적 표현과 지시적 기호의 대립에 관해서는 2부, 명제 17, 주석과 명제 18, 주석을 참조).

p186~187

모든 점들은 그 대칭점을 갖는다 : 식물과 비, 거미와 파리. 따라서 한 동물, 한 사물은 그것이 세계와 맺는 관계들과 분리될 수 없다. 내부는 단지 선택된 외부일 뿐이며, 외부는 투사된 내부일 뿐이다. 신진 대사의 빠름과 느림, 지각, 작용과 반작용의 느림과 빠름은 서로 연결되어 세계 속에서 이러저러한 관계들이 상황이나 변용 능력들에 따라 실행되고 실현되는 방식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실행되지만, 현존하는 변용들이 문제의 사물을 위협하는가(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키고 늦추며 최소한으로 줄이는가) 혹은 확고히 하고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증가시키는가에 따라, 즉 독이 되는가 영양물이 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갖 복잡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데, 왜냐하면 독은 문제의 사물의 일부분에는 영양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행동학은 상이한 사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들과 능력들의 결합을 연구한다. 이것은 앞의 것들과는 구별되는 측면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단지 문제의 사물이 자신의 관계들 중의 하나에 적합한 관계를 다른 사물들에 부여하면서, 어떻게 그 다른 사물들을 해체하는가, 혹은 반대로 어떻게 그것은 다른 사물들에 의해 해체될 위험을 갖게 되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관계들이(그리고 어떤 관계들이) 직접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보다 <연장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지, 혹은 능력들이 서로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능력, 즉 보다 <강력한> 역능puissance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용 혹은 포획이 아니라 사회 관계와 공동체이다. 어떻게 개체들은 서로 결합하여 보다 우월한 개체를 형성하는가? 그리고 이 과정은 어떻게 무한하게 진행되는가? 어떻게 한 존재는 다른 존재를, 그것의 고유한 관계와 그것의 고유한 세계를 보존하면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으로 예를 들면, 어떤 상이한 유형의 사회 관계들이 있는가? 인간들의 사회와 이성적 존재들의 사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점과 그것의 대칭점의 관계, 혹은 한 세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교향곡, 즉 점점 더 폭넓어지고 강력해지는 세계의 구성의 문제이다. 역능들을, 빠름과 느림을 어떤 질서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음악의 구성이라는 평면, 이것은 자연이 그것의 부분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풍부한 개체인 한에서, 자연의 평면이다. 행동학의 주요 기초자 가운데 하나인 윅스퀼은, 그가 각 사물에 상응하는 멜로디의 선들 혹은 대위법적 관계들을 먼저 정의하고, 그런 후에 풍부함을 갖는 보다 우월한 내재적 단위로서의 교향곡을 쓸 때(<자연적 구성>), 스피노자주의자이다. 『윤리학』전체에 바로 이 음악적 구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윤리학』을 그 빠름과 느림의 관계들이 연속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로 구성한다. 변화해 가는 상대적인 빠름들로 변용되는, 심지어는 제3종의 인식 속에서의 사유의 절대적인 빠름으로까지 변용되는 『윤리학』의 상이한 부분들에서 우리는 연속적인 변화를 확인한다. 그리고 명제들과 주석들이 동일한 걸음걸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횡단하는 두 운동을 결합시키고 있는 한, 『윤리학』은 동시적으로 변화한다. 구성으로서의 『윤리학』은, 그 모든 부분들이 가장 큰 빠름에 의해서, 가장 풍부한 운동 속에서 펼쳐지는 그러한 구성이다. 아주 훌륭히 씌어진 어떤 장에서, 라뇨는 이러한 속도와 풍부함에 대해서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이것을 통해 『윤리학』을 하나의 음악에 비유한다: 섬광과도 같은 <사유의 속도>, <심원한 폭넓음의 역능>, <단 한 번의 작용 속에서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수의 사유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하는 능력>.

요약: 우리가 스피노자주의자라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그것의 형식에 의해서, 그것의 기관들이나 그것의 기능들에 의해서 정의하지도 않고, 그것을 실체 혹은 주체로서도 정의하지 않을 것이다. 중세의 용어들 혹은 지리학의 용어들을 빌려서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도와 위도에 의해서 정의하게 될 것이다. 신체는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그것은 동물일 수 있고, 소리 신체일 수도 있으며, 영혼 혹은 관념일 수도 있고, 언어적 신체일 수도 있고, 사회적 신체 혹은 어떤 단체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한 신체를 관계의 관점에서 구성하는 분자들, 즉 형식을 갖지 않는 요소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전체를 실행시키는 변용들, 즉 익명의 어떤 한 (존재의 힘, 변용 능력)의 내포적 상태들의 전체를 위도라고 부른다. 경도와 위도의 전체가 자연을, 즉 내재성 혹은 결합성의 평면을 구성한다. 이 자연은 언제나 가변적이며, 개체들과 집단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재구성된다.

<평면>이라는 말, 혹은 평면이라는 관념에 대한 대립되는 두 개념이 존재한다. 비록 이 두 개념이 섞여 있어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천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조직화, 그리고 음폐되어 있는 초월성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초월성에 관계된 모든 조직화는 식학적 평면으로 불린다: 신의 정신적 구도, 자연의 가상적 심원 속에서의 전개, 혹은 한 사회에서의 권력의 조직화. 이러한 평면은 구조적일 수도 있고 발생적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둘 모두일 수도 있다. 이 평면은 언제나 형식들과 이 형식들의 발전, 주체들과 이 주체체들의 형성에 관계된다. 이것은 이러한 첫번째 종류의 평면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이다. 따라서 그것은 조직화와 발전의 평면이다. 이제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상관없이, 형식들과 주체들을 통제하는 초월성의 평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은폐된 채로 있으며, 결코 주어지는 법도 없고, 그것이 부여한 것을 토대로 단지 주축되고, 유도되고, 추론되어야만 한다. 실제로, 그것은 잉여의 차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주어져 있는 것의 차원들에 부가되는 차원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다.

반대로, 내재성의 평면은 부가적 차원을 소유하지 않는다. 구성의 과정은 그것이 부여하고 있는 것을 가로지르며, 그것이 부여하고 있는 것 속에서, 그 자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은 조직화의 평면, 발전의 평면이 아니라 결합의 평면이다. 색이 첫번째 평면을 가리킬 수 있다며, 음악, 침묵, 소리는 이 평면에 속한다. 형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형식을 갖지 않는 물질의 미세한 분자들 사이의 빠름의 관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이상 주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익명의 힘의 개별적인 변용 상태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 평면은 운동과 정지만을, 변용의 역학적 부하charges만을 고려한다. 이 평면은, 그것에 의해 우리가 지각하게 되는 것을 통해, 그리고 그 정도만큼 지각될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평면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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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들이 창조한 위대한 탐정 탄생기
켄 브루언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DAVID MORRELL>편
P 325
창작수업에서 이야기의 종류는 다섯 가지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인간 대 또 다른 인간, 인간 대 자연,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사회 혹은 인간 대 신을 다루는 이야기 이렇게 다섯 개다. 이러한 분류가 글을 쓰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이론이 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쓰려고 보니 세상엔 오직 두 부류의 이야기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부류는 글을 쓰는 데 아주 효과적이며 내가 <First Blood>에 대해 처음 생각하기 시작한 1968년 읽고 있던 책인 조셉 켐벨의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에 나오는 이론과 일치한다. 즉 누군가 여행을 떠나거나, 이방인이 마을에 오는 이야기 두 가지이다.
<CAROL O'CONNELL>편
P351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즉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 용어들은 학계 논문에서는 서로 바꿔가면서 사용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심리학자가 인용한 말이 이 문제에 대한 현대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오늘의 소시오패스가 어제의 사이코패스다." 논리적인 생각은 잠깐 한쪽으로 밀어놓고, 이런 특정 용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 훨씬 더 권위 있어 보인다고 일반인들은 생각한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소시오패스는 아기의 머리에 총을 쏘고 밤새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고, 사이코패스는 아기의 얼굴을 먹어치우고 밤새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정의든 여러분이 가장 불편해하는 정의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말로리가 너무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나는 정신병자들이 보낸 편지들이 종종 통찰력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보내는 편지는 언제든 환영한다. 내가 보기에 정신 이상은 하나의 장소와 같다. 우리는 거기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모두 교대로 정신병 환자가 된다. 약간의 광기가 없다면 문학은 아주 황량한 곳이 될 것이다. 요즘처럼 조심스런 연설, 심지어 두려움에 찬 연설, 담배 연기를 찾아볼 수 없는 영화 대본,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는 노래 가사들, 그리고 아이들이 열 수 없게 자물쇠를 잠근 성인들의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현대에 예술가들이 종종 하는 한탄은 바로 이것이다. "그 멋진 미치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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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해부학 - 살인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방법
마이클 스톤 지음, 허형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뇌과학에 관심을 갖다보니 자연스레 범죄 심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것 같다. 주석을 제외하고도 p576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 한여름밤의 으스스한 책친구가 되어 줬는데, 끔찍한 살인범들의 일화들보다 거기서 차별화되는, 벗어나는 전과자들의 후일담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 파커 레이는 정말 잊지 못할 악한이긴 했다. 제 9장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밝혀낸 범죄의 원인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는 인간 본성이라는 미스터리의 답을 찾기 위해, 과학자와 지성인, 예술가들을 연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연쇄살인범과 성범죄자, 살인자들을 연구한다."
 
--- 어반 웰시 <Crime>
 
"니체는 유명한 수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이렇게 형상화했다. 우리는 팽팽한 밧줄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인생길을 걸어간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며, 그 밧줄은 심연 위에 놓여 있다." 가다가 동물 수준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자신을 초월해 도덕적 우월성을 성취할 수도 있다. 나는 이 "동물" 이미지가 마음에 걸린다.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악행을 보면 종종 "그는 마치 짐승처럼 굴었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좀 더 현대적인 비유로 바꾸어, `인간은 번디와 붓다 사이에 팽팽히 놓여 있는 밧줄이다`라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심연은 테드 번디와 그 부류가 기다리고 있는 곳, 같은 인간의 안녕에 대한 배려가 거품처럼 사라지고 오직 가늠할 수 없는 잔인성과 해악,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악`만이 존재하는 그곳이다."
--- 본문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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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1부 역사와 정치에 관한 고찰

제1장 자유에 대하여

p26

  계몽주의가 자주적 의견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존 로크 시대부터였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과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전쟁들의 직접적인 결과였고, 그러한 전쟁들은 '종교적 관용'이라는 사상을 낳았는데, 종교적 관용은 많은 이들(대표적 아놀드 토인비)이 주장하듯 그렇게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정신, 혹은 두려움이 사람들을 특정한 종교적 믿음으로 몰아넣지 못한다는 깨달음, 그 이상이다. 오히려 그것과 반대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강요된 종교적 일치는 철저하게 무가치하다는, 오직 자유의지로 선택한 종교적 신념만이 가치가 있다는 긍정적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거짓 없는 믿음에 대한 존중, 나아가 모든 개인과 개인의 의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면, 인간적 인격체human person의 가치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인간적인 인격체의 가치'는, 모든 인간 그리고 그 사람의 신념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중략)…

  모든 합리주의자는 칸트의 지론에 동조해야 한다. 누구도 철학을 가르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철학적 사색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지론이다. 그것은 곧 비판적 태도를 취함을 의미한다.

 

#(Agalma) 비판적 태도와 학습된 수용(세뇌)을 구분해 제대로 사유하고 사고하는 보통 인간을 보기가 힘든 시대. 합리적 비판보다 쉽게 동조하는 세태. '(신)자본주의' 탓을 하지만, 애초에 지배계층에 의해 구축된, 시스템 문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우리들 각자의 책임과 행동의 부재 탓은 아니고? 자본주의를 惡으로 본 마르크스의 후예들처럼 굴지 말자구. 이미 그러한가.

 

 

제4장 냉소주의적 역사관에 반하여

(1991년 5월 아이크슈타트 대학에서 한 강연)

p72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은 과거를 미래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옳은지 배워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에서 풍조나 경향을 추론하려고 해선 안 된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Agalma)"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말한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인데, 헤겔의 관념론을 도덕적 대재앙이라 말할 정도니 당연하기도 하지. 칼 포퍼의 긍정주의는 과거 근절주의처럼 보인다. 평행이론을 단지 우연의 절묘함으로만 치부할 것인지? 또한 인간은 생존본능적으로 대비지향주의자이자 경험이라는 나침반을 이용하려는 호모파베르가 아닌가. 그의 사상은 禪사상처럼도 들린다. 내·외부로도 무장해제라니. 긍정주의가 아닌 인도주의에 더 가깝지 않나 했지만 그의 글을 읽을수록 느껴지는 합리성 추구와 정언적 감행력에서 보면 수긍이 되는 듯도.

  하지만 그 자신이 그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도 같은 게, 아래 7장에서 과학과 난센 구호 활동에 대한 언급과 2부 10장에서 "식물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의 행태를 보면 모든 유기생물이 법칙이나 규칙을 좇도록 조건화되어 있"다고 말한 것에서 보면 우리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통해 반복의 발견을 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의 과학이론으로 봐도 '시행착오'(문제에 여러 가지 해解를 대입해보고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해당 동물이 시도하는 시험적 행동들)를 통한 학습에도 해당된다.

  물론 칼 포퍼가 공격하는 점은 관념론의 提言적 성격임은 주지해야 한다. 또한  그의 말은 관념적 과거를  통해 내리는 확증이나 확정이 본질과 진실을 오도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임은 확실이다.

 

 

제2부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 

제10장 과학이론의 논리와 진화

(1972년 3월 7일 North German Radio(북독일)에서 한 강연)

p197

 

 과학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산물의 체계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관념론이 들어맞았다. 그러나 관념은 실재에 부딪혀 시험당할 때 무너지게 돼있다. 이것이 실재론적 세계관이 옳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Agalma) 이 발언엔 동의할 수 없다. 시적 세계, 무의식의 영역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 파급력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느껴진다. 증명되지 않는 것은 참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하겠는데 실재=옳음이 될 수 있는가. 외양과 성질을 파악했다고 해서 어떤 것의 실재를 거론할 수는 있어도 실체와 실제 의미를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케플러를 비롯한 그토록 많은 과학자들이 종국에는 왜 종교와 미신에 빠져 들었겠는가. 칼 포퍼가 왜 자신을 합리주의자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겠다. 헌데 15장 인식론에서의 제3세계(인간의 정신이 낳은 산물들의 세계)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과학 - 인식 실재론적 세계관이 상반되어 보이기도 한다 .

 

 

 

 

 

 

 

 

#

강연과 연설을 묶은 것이라 그의 이론과 신념들이 중복 제시되는 감은 있으나 칼 포퍼의 주요 저작을 읽기 전에 개요서를 본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적당하다. 이 책의 1부는 세계 현상에 대해서, 2부는 현상 뒤에 숨은 실재를 탐구하는 과정(그의 표현에 따르면  '진화론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ㅎ)에 대해 논하고 있다. ​

 

  칼 포퍼는 칸트의 진정한 후예는 쇼펜하우어라고 하지만 그 자신도 만만치 않게 그렇다. 유전학적으로 선험적인 지식에 의해 감각기관이 발달된 것이라고 논하는 진화론 · 인식론 章에서 특히 그렇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 기조는, 지식의 진화에서 자기비판적 태도와 객관적 진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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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9-09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도 포퍼가 과거로 미래를 예측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고, 과거로 미래를 섣부르게 추측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같습니다`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과학은 실재를 갖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관념이란 개념을 좁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관념은 (이론적) 사실과 (실천적) 가치 두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데, 포퍼는 사실(실재)에만 한정하여 언급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같습니다`입니다.^^

좋은 글 소개 고맙습니다.^^ 머리가 따끈해졌습니다.^^

AgalmA 2015-09-11 21:40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저도 적극 동감 :)
단상만 몇 개 올린 거라 칭찬 말씀은 과분하고 좋은 댓글을 달아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시네퐁주
자크 데리다 지음, 허정아 옮김 / 민음사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

저자도 통감하다시피 번역이 매우 실망스럽지만 오솔길을 걸으며 떨어진 나무 열매를 발견하듯이 읽는다.

역자 해제에 데리다 인터뷰와 용어 해설도 수록되어 있어 퐁주 뿐 아니라 데리다 파악에도 도움이 되었다. 해제를 먼저 읽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게 이롭다.

자크 데리다의 문체를 한국어로 제대로 구현하기엔 무리수도 있다.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발화에는-그 유명한 해체적 텍스트 읽기,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와 친구맺으셈ㅋ<)! 나도 끼어들기 빠질 수 없지ㅎㅎ)- 정신사납고 정나미 떨어지는 성미가 느껴져; (하지만 그 '대상 유희'(퐁주가 개발하고 데리다가 적극 수용한)에서는 격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프랑시스 퐁주 작품 분석이 프란시스 퐁주보다 난해하면 어쩌자는 건지; 그러나 퐁주식으로 데리다답게 읽어내려가는 방식이 가장 적절한 퐁주 읽기라는 것엔 반박하기 어렵다. 해체주의 만세? 데리다가 선호한 퐁주, 블랑쇼, 바타이유, 아르토, 조이스 등의 비전통적 현대 작품들엔 멋지게 들어맞는 방법론 같지만 모든 작품 분석에 적절할 지는 글쎄. 비슷한 문제의식과 궁리를 하는 작가와 문학 비평가의 궁합 문제라고나 할까. 독자가 <지적 세수:글쓰기>에 적극 가담할 의욕도, <독특한 어떤 것>을 발견할 감식력도 없다면 이 해체론적 글읽기가 가능하겠는가. 문학과 텍스트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고대인 혹은 중세인들이 지금의 문학을 이해는 커녕 독해 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멀리 볼 것도 없이 보통의 독자가 퐁주를 읽고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여기서, 문학은 훈련된 독자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초월적 글읽기>의 허와 실.

프랑시스 퐁주 시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자크 데리다 비평을 보니 복잡해보이긴 한다. 번역으로는 파악되지 않던 것을 원문 비교해 몰랐던 부분을 상당히 알게 되고, 꽤나 불편하게 하는 예리한 정신 분석이기도 한 그 방식에서 문득 드러나는 것을 만날 때의 쾌감이 있다. <쾌락 없는 해체란 없으며, 해체 없는 쾌락이란 없다>

데리다는, 깨끗함과 순수함을 추구한 프랑시스 퐁주가 헤겔은 읽고 손을 씻어야만 한다고 말했다며, 그걸 밝히면서도 굳이 프랑시스 퐁주에 대한 철학 분석 설거지를 하고 있다. 신빙성 있는 분석임에도 그 추임새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막을 수 없다. 그 방식 또한 형이상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다.

 

p45

에로틱한 장면은 항상 이 양쪽을 겨냥한다(세탁 대야 앞에 선 그는, 그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세탁 대야를 묘사하고 있는 세탁 대야이다). 이제 헹구기를 살펴보자.)

 

p46~47

(의미나 개념을 떠나) 무의미한 것 속에서 스스로를 의미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서명하기가 아니겠는가? 그는 어딘가에서 무의미한 것이 <위생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계속 도움이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세탁물이나 신선한 것(그러나 언제나처럼 <세탁물>과 <신선한 것>이라는 말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에 집착하여 생기는 깨끗한 것에 대한 욕망, 그것이 바로 작품 속에 항상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지금으로서는 세탁물이라는 말에서 세탁물이나 목욕 타월을 빨래 집게와 함께 집어주는, 여러 다른 하위 결정 중의 음성학적, 의미론적, 도식적인 복선은 무시하기로 한다. 그는 기다려주리라).​

 

p86 ​

입 안의 빵, 그것은 모든 숭배로부터 면제되었다고는 해도 역시 하나의 단어이며, 그 구술적 소비가 <죽은 나무>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나무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죽은 나무, 즉 소나무 말이다(<프랑시스 퐁주에 의해 주목받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라고 말해졌을 앞의 송림 부분을 볼 것).

 

 

 

 

§§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간 데리다가 미끼로 권한 붉은 사과를 먹는 덫에 빠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교활하다.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파놓은 구덩이에 미끼를 잔뜩 깔아놓고 독자를 기다린다. 독자가 구덩이에 빠지면 좋아하며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올지 말지는 그들의 뜻이자 자유라고 말한다. 정작 그 자신조차도 구덩이의 결과에 대해 예상도 못했으면서. 더 의심스러운 혐의는 독자가 그 구덩이 속에서 작가가 놓친 무언가를 찾아서 돌아오기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열쇠가 꽂혀 있는 열쇠구멍>같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의 시스템은 그 원죄를 캐물을 수 없음으로 인해 모두에게 혐의를 물을 수 없다. 그로 인한 미스테리함이 떠돈다.

 

 

 

 

ㅡ Agalma

 

 

 

 ​

 

 

 ​* 이 이미지는 데리다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사건을 패러디한 책의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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