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함순 책이 궁금했었는데, 도서관에 있길래 읽어보았다.

젊은 날 뜨거웠던 열정이 생각나더라. 그땐 그게 참 절실했었는데... 

함순은 말초적이고 낯뜨거운 얘기를 하나도 촌스럽지 않게 표현한다.

 

<목신 판> 중에서

 

나는 일어나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젊고 날씬해 보였다. 이솝도 일어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내가 물었다.
“방앗간에서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밤늦게 방앗간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밤늦게 숲 속을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아? 그렇게 어리고 가냘픈데?”
그녀는 소리 내어 웃고는 대답했다.
“난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열아홉 살인걸요.”
하지만 그녀가 열아홉 살일 리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제로는 그보다 두 살 적은 열일곱 살에 불과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왜 나이가 더 많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앉아라. 이름이 뭐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 옆에 앉아서 자기 이름은 헨리에테라고 말했다.
“애인이 있니? 애인 품에 안긴 적은 있니?”
“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이었지?” 나는 되풀이해 물었다.
“두 번.”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가 널 어떻게 했지? 이렇게 했니?”
“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속삭였다.

네 시였다. (38-39)

 

* 된장 이 난봉꾼 같으니라구.

 

 

<빅토리아> 중에서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장미꽃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 - 아니, 피 속의 노란 인광. 가장 늙고 가장 쇠약한 심장조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의 무도'. 사랑은 밤이 다가오면 활짝 피는 마거리트 같고, 가벼운 입김에도 꽃잎을 닫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아네모네 같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늘에 별이 빛나고 땅에 향기가 가득한 여름밤이다. 하지만 왜 사랑은 젊은이로 하여금 은밀한 길을 따라가게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외로운 방에서 발끝으로 서 있게 할까? 아아,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버섯밭으로, 신비롭고 무참한 독버섯이 자라는 무성하고 뻔뻔한 밭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도사로 하여금 한밤중에 높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에 몰래 들어가 침실 창문을 통해 잠자는 사람들을 엿보게 한다. 사랑은 수녀를 어리석음으로 사로잡고 공주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사랑은 왕이 혼잣말로 음란한 말을 속삭이고 소리내어 웃고 혀를 내밀 때 그의 머리카락이 길가 먼지를 쓸 만큼 왕의 머리를 길가에 낮게 내려놓는다.
사랑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230-231)

 

*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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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전 함순 <굶주림>밖에 안 읽어봤는데, 가난한 베르테르 버전으로 읽혔었죠. 이 책에선 상황이 좀 나아보이네요ㅎ;

돌궐 2015-02-10 11:03   좋아요 0 | URL
뭐 결말은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지만... ㅎㅎ
<굶주림>은 못 읽어봤는데 아무래도 좀 나을 거 같긴 해요. 주인공이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거든요.
다만 여자에 시달릴 뿐.ㅋ

붉은돼지 2015-02-1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크누트 함순의 두 세 구절 어쩌고 하던게 생각납니다 아마 고딩 국어교과서에 나왔던듯 굶주림을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오락가락....

돌궐 2015-02-10 14:3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굶주림>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469
박문현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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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 3종(김원중, 신창호, 이을호)을 갖추고 천천히 읽고 있다.

구구절절 무릎을 치는 곳도 있지만 갸우뚱하게 만드는 내용도 있었다.

글이란 것은 그 흐름에 따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논지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그런 걸 찬성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따라서 이 사람과 다른 의견을 가진 또 다른 저자가 있으면 함께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마침 유가에 반대했던 묵자에 관심이 가길래 살림지식총서에 있는 짧은 개설서를 찾아 읽어 보았는데, 묵가 사상의 전반적인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묵가는 대단히 진보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권위적이고, 틀과 체계를 중시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묵자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을 조금 옮겨본다.

 

묵자는 유가의 이념에는 나라를 망칠만한 네 가지 정책(四政)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첫째, 하늘과 귀신의 존재와 작용을 믿지 않는 것. 둘째, 장례를 후하게 하고 상기(喪期)를 오래 하는 것. 셋째,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넷째,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묵자는 ‘사정’이 사회를 해롭게 하고 천하를 망치는 것이라 확신하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네 가지 병폐를 고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천지’ ‘명귀’ ‘절장’ ‘비악’ ‘비명’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정’을 포함해 묵자가 유가에 대해 비판하는 사상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가의 비생산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이다. 묵자는 말하기를 “유자들은 예악을 번거롭게 꾸며 사람들을 음탕하고 어지럽게 하고, 오랜 상기 동안 거짓 슬퍼함으로써 부모를 속인다. 운명을 믿어 가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상한 척하고, 잘난 체하고, 근본을 어기고 할 일은 버리고서 태만하게 편안히 지내며, 먹고 마시기를 탐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게으르다. 그래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빠지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위험에 놓여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묵자는 부잣집에 초상이 나기를 기다리며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유자들을 가리켜 “거지와 두더지, 숫양, 멧돼지와 같다”고 공격한다. 『묵자』의 다른 편에서는 묵자가 유자들을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유가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들은 말하기를 “군자는 반드시 옛 의복을 입고, 예스런 말을 써야만 인자(仁者)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묵자는 반문하기를 “이른바 옛 말, 옛 의복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 옛것이 된 것이지, 처음에는 모두 새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옛 사람이 입었던 의복과 옛 사람이 사용했던 말은 모두가 새로운 것이었으니 옛 사람은 모두 군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의복은 반드시 군자의 의복이 아니요, 말 또한 군자의 말이 아니어야만 비로서 어진 사람이라는 것인가?”라고 한다.

유가는 예악을 중시해 당연히 복장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묵자는 하는 일을 중시해 형식주의를 배척한다. 따라서 군자가 되고 안 됨에 있어 복장이나 언어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뚜렷한 근거도 없는 유가의 형식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셋째, 유가의 ‘술이부작(述而不作)’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인 공맹자(公孟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창작하지 않고 옛것을 계승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묵자가 이에 대해 “옛날의 훌륭한 것은 계승하고, 지금 필요하고 좋은 것은 창작해야 좋은 것이 더욱 많아진다”고 반박한다. 공자는 “옛 것을 배워 권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하니 속으로 나를 노팽(老彭)에 비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공자는 전통을 고집한 보수주의자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해 묵자는 『詩』와 『書』의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형식적인 예와 악을 반대할 뿐 『시』와 『서』에 대해서는 이것들을 자주 인용하고, “옛 성왕의 사적(事蹟)에 근본을 둔다”고 하여 옛 것을 숭상하면서도 현재 백성들의 이목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문제를 찾아내 개선하고, 마지막으로 실용화하려 한다. 이는 곧 ‘술이차작(述而且作)’이라 할 수 있다.
묵자는 유자들이 “군자는 옛 사람의 뒤를 쫓을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君子循而不作)”고 말한 데 대해, 활이나 배, 수레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모두 소인이라면, 그 발명자들의 뒤를 좇아 지금 그것들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소인이라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넷째, 유가의 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발분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으면 일러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즉, 공맹자가 묵자에게 “군자는 자기를 건사하고 기다리다가 물으면 말을 하고, 묻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종과 같은 것이니 두드리면 울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임금이나 부모가 “좋은 일을 하면 칭찬하고, 허물이 있을 때는 잘못을 고치도록 직언하는 것이 어진 사람의 도리”라고 말한다. 묵자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임금이나 부모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묵자는 유가의 공리적인 면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가가 도덕적인 예와 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경험적인 지식은 경시하는 태도, 즉 이지적 태도의 결핍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또 유가는 이상을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그 이상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비교적 소홀하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묵자는 이지적이고 진보적인 실용주의 원칙에 입각해 유가를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7-21)

 

가만히 앉아 남이 알아주길 기다리고만 있으니 유가들은 죄다 게을러 터졌단다.ㅋ

따지고 보면 그것도 맞는 말 같고... ㅎㅎ

 

왜 춘추전국시대에 유가와 묵가가 서로 경쟁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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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논어를 제대로 파고난 뒤에 도가, 묵가 사상 순으로 진도를 나가야겠습니다. ^^

돌궐 2015-02-09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노장은 읽고 싶은데 묵자까지는 엄두가 안나요.^^;
뭐 죽기전에는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합니다. 읽어야죠.
 
한국 과학사 이야기 세트 - 전3권 한국 과학사 이야기
신동원 지음, 임익종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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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의 <묵자-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읽다가 조지프 니덤 책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책이 우리나라 과학사를 소개한 『한국과학사이야기』1-3 세트인데 예전에 써두었던 독후감이 있어서 옮겨온다.

 

#

초등생한테 맞게 나온 과학사 책이라고 하는데, 내용도 꽤 깊이가 있어서 청소년이나 어른이 보기에도 좋다.

 

각 권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자.

먼저 1권과 2권부터 보자(3권은 뒤에 나와서 독후감도 나중에 썼다).

 

먼저 1권에서 <하늘>과 <땅>을 주제로 천문학과 여러 가지 측량과학, 수학, 풍수지리와 지도, 광물지식, 파발과 봉화 등을 얘기하고 있고,

2권에선 <생명>과 <몸>을 주제로 옛날 동물과 식물, 곤충에 관한 주제와 우리나라 의학의 발달사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하면 무척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려운 책일 듯한데, 읽어 보면 매우 재미있다.

물론 정보가 많이 담긴 책이라 한꺼번에 독파하기는 버겁겠지만 군데군데 재미난 이야기와 삽화가 있고, 문헌자료와 고미술품 같은 시각자료도 많이 담고 있어서 책 보는 즐거움이 있다.

좋은 어린이 책을 쓰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겠더라. 다만 이런 거 찾아 읽는 애들은 별로 없다는 게 문제긴 하다.

 

글은 선생님이 쉬운 말로 가르쳐주는 형태로 썼고,

어려운 한자말이나 문헌제목들은 따로 풀이를 보여주면서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각 장 끝에는 참고한 책이나 글들을 제시해서 좋았고, 문헌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이나 옛이야기들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당시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역법이었던 <칠정산> 내외편에 대한 문헌자료는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1432년 세종은 정인지에게 말씀하셨다.

'고려 때 원나라 수시력을 가지고 들어와 그걸로 예측했다. 조선을 세우고도 일식, 월식, 오성의 궤적을 계산하지 못해서 중국의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 수학에 밝은 그대가 정초와 더불어 고전을 연구하고, 관측기구를 제작하여 이 문제를 풀도록 하라. 우리가 중국 문명의 수준에 도달했는데, 유독 하늘을 관찰하는 공부와 기구가 부족하구나. 한양에서 본 북극을 기준으로 해서 새 역법을 만들라.'

명령을 받들어 정초, 정흠지, 정인지가 고전을 공부하여 수시력의 수학적 이치를 깨달았다. 또 이천으로 하여금 각종 관측기구를 제작토록 했고, 장영실로 하여금 자격루와 옥루를 제작토록 했다.

마지막으로 이순지, 김담이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역법과 아라비아 역법을 더 연구하여 마침내 1442년 우리의 역법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예측을 했더니 딱 들어맞았다.

  

역법이란 건 결국 달력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겠는데, 달력이 없다면 농사일이고 뭐고 얼마나 불편했겠나.

근데 이 달력을 만들려면 별자리의 이동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수학도 발달해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은 아니다. 그래서 역법과 수학을 제왕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중국에서 주는 달력을 받아서 쓰다가 <칠정산> 이후에는 조선만의 고유하고 더욱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고인돌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문 지식, 첨성대 이야기, 고려와 조선의 천재지변 기록, 자격루와 혼천시계, 한국 수학의 역사 따위 이야기들이 첫 번째 책 1부 <하늘>편에 실려 있다.

2부 <땅>편은 풍수지리부터 소개되었는데, 풍수지리는 아주 간략하게만 나오고 있고 대부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지도 이야기로 채웠다.

 

2권 1부 <생명>편에서는 암각화에서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보이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연구사를 소개하고 있다.

쌀과 채소, 김치 이야기와 감자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 이야기, 인삼과 후추, 담배, 차 등 식물 분야와 매, 말과 소, 물고기와 곤충학, 옷감의 역사 따위를 소개하였고,

2부 <몸>편에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에 대해 소개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면 중국과 달리 우리만의 '향약'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런 전통이 결국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거쳐 <동의보감>을 탄생케 했다고 한다.

잘 몰랐었는데 <의방유취>는 15세기 세계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이었고, <동의보감>도 17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책으로서 한글 약 이름까지 쓰여져서 민중들한테까지 널리 의학을 보급할 수 있었던 저술이었단다.

의녀 이야기와 약방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시치미 뗀다", "산통 깬다", "학을 뗀다"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만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온다. 

  

하여튼 두 권 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학생들에게 조금씩 읽어주면서 역사 지식을 알려주기에도 좋겠다.

초등 고학년이 읽거나 읽어주기 알맞겠고(단 '정액', '성병'이란 낱말이 나오니까 참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내용이 충실했다.

 

다음으로 3권을 살펴보자.

 

1부에선 우리나라 문화재에 담긴 과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석굴암, 금속활자, 청자, 한지, 수원 화성, 석빙고, 훈민정음 등이 나온다.

과학적 측면에서 문화재를 설명해 주니까 재미있었다.  

2부는 우리나라 근현대 과학 100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니까 과학의 업적만 칭송한 게 아니라 통일벼 심기의 어두운 면이나 산업화 시대에 전태일 등 노동자들의 희생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어서 꽤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1부에서 석빙고를 소개할 때 한겨울에 얼음 캐는 빙역으로 고생한 백성들 얘기도 나온다. 

노찾사의 <사계> 가사(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도 소개되어 있더라.

산업화 시대의 우리 과학사를 다룬 8장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과학 기술계의 노력과 발전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우리 국민들의 눈물과 피땀 어린 노력이 더불어 이루어진 거란다. (344)

 

또 2부 2장 우리 나라 개항과 개화기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평가를 한 프랑스 학자의 글을 인용하여 평가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항과 개화기 시대의 과학 기술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1888년에서 1889년 조선의 내륙 지방을 여행한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바라의 말로 끝을 맺자꾸나. 바라는 다른 서양인 여행자와 달리 자신이 매우 식견 높은 여행자라고 자처한 사람이야. 조선인의 불결과 게으름, 무지와 무능을 비난한 서양인 여행자와 사뭇 다른 견해를 내놓았지. 보통 한양이나 금강산만 보고 떠나는 여행자와 달리 최초로 한양에서 부산으로 여행길을 택한 인물이기도 해. 조선의 내면을 보려는 의도였어. 그는 『조선기행』에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교육열이라고 썼단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글을 쓸 줄 아는 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으며, 만약 우리 유럽의 새로운 문물이 제대로 유입되기만 한다면 조선인들이 얼마나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르는 여정에서 전봇대를 본 자신의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어.

 

바야흐로 우리는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직통 행로로 접어든 셈이었는데, 놀랍게도 가도에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최근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전봇대들도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왠지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발전 도상에서 머지않아 자신들의 이웃 국가를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가르쳐왔던 일본인들에게 비록 지금은 산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뒤져 있는 조선인들이지만, 윤리적인 우월함 덕분에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그들을 따라잡고 결국엔 저만치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 특유의 가족 제도와 강한 연대성, 그로 인한 끈질긴 노동력과 지난 몇 년 동안 이룩한 놀랄 만한 발전상을 감안하면 나의 이런 생각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리라. 저 가도에 늘어선 전봇대들이 말해 주듯, 문명의 연결선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땅덩어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그날이 그리 멀지많은 않은 것이다.

 

바라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심과 교육열, 가족애와 끈질긴 노동력에 매우 후한 점수를 줬어. 갓 가설된 전봇대를 보면서 말이야.

바라의 글을 보면, 근현대에 벌어진 우리 과학사의 놀라운 발전이 꼭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 다만 늦게 시작했을 뿐, 과학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을 일으킬 만한 조선인 고유의 정신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거지. (211-213쪽)

 

2부 4장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산업과 기술이 발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고, 5장에서 7장까지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이후 우리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과학의 역사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되짚어 볼 수 있어서 초등 고학년이나 청소년들이 보기에 괜찮을 거 같고 어른들이 읽기에도 재미있다.

각 장마다 끝부분에 더 읽을거리와 참고문헌도 소개하고 있어서 유용한 책이다.

 

위 3권에서 애써 책 속의 구절들을 인용한 이유는

1.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자기비하에 빠지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스스로 한심한 족속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경우와

2.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성공을 마치 몇몇 얼토당토 않은 인물과 재벌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이다.


왜 어르신들은 스스로 피땀 흘려 일궈낸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박통과 새마을 운동과 재벌 타령만 하는 걸까.
교육열만 봐도 그렇다. 나라에서 교육정책을 제대로 이끌어 준 적이 과연 있기나 한가 말이다.

우리들의 이 '대단한' 교육열은 어찌 보면 조선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전통인지도 모른다.

 

교육열 하면 떠오르는 김홍도 그림 하나 덧붙인다.

 

 

<자리짜기>, 김홍도,《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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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지프 니덤 책은 침만 흘리고 있고 그림으로 보는 중국 과학사만 쟁여 놓고 있습니다. ^^ 한국 과학사도 찔끔식 접하는데 이 책도 마음에 드는군요.

돌궐 2015-02-08 22:58   좋아요 0 | URL
니덤 책이 지금도 시리즈로 나오고 있다지요. 묵자한테 뻑가서 중국과학사를 연구했다는 얘기가 신선했어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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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짜 큭큭큭, 낄낄대며 읽었던 소설.

예전에 썼던 독후감을 옮긴다(소설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썼더라).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278-279쪽)

  

292-292쪽의 난장판 '웃슬픈' 야구 경기를 보면서 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공교롭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난 뒤 잡은 이 책에서 별명이 조르바인 등장인물이 나오니까 이상했다.

결국 두 소설 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셈인데, 공감하는 바는 이 책이 더 컸다.

주인공이 살아온 시절과 장소가 나와 얼추 겹쳐서인가? 모르겠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는 건가?

삼미의 야구를 해 보면 알 수 있을까?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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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미하면 할 이야기 많죠 ㅋㅋ

돌궐 2015-02-08 23:01   좋아요 0 | URL
ㅎㅎ 공감하시는군요.

붉은돼지 2015-02-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있죠...짠하기도 하고요..

어디선가 보니 박민규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고 하더군요...

돌궐 2015-02-09 09:56   좋아요 0 | URL
가끔은 슈퍼스타들처럼 좀 망가지기도 해야하는데, 그러질 못해요.^^;
박민규가 밴드도 한다던데, 그런 일탈을 할 수 있단 게 참 부러워요.

yamoo 2015-02-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박민규의 소설이 재미가 없습니다. 뭐가 좋은지도 딱히 모르겠구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ㅎ

돌궐 2015-02-09 17:2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 작가 있어요. 좋다고는 하는데 왜인지 모르겠는 그런 작가 ㅎㅎ
그런 경우에 전 두고 보지도 않아요.ㅋ
 

 

 

 

 

 

 

 

 

 

 

 

 

 

 

어수선한 부두에서 내가 탈 배를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잠깐 한눈을 팔다간 놓칠지도 모른다.
지난번 항해 때는 어느 여인이 가족들과 작별인사 하느라 잠시 지체하여 배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 이처럼 허둥거리다가 배를 놓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뒤늦게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이미 떠난 배를 되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자비로운 뱃사공이 던져 준 밧줄을 용케 붙들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서쪽나라까지 갔다고 한다. 용맹심과 끈기가 대단했던 그 여인은 십만 억 나유타 국토를 지나가는 긴 여행 내내 악착스럽게/ 밧줄에 매달려 버텼다고 한다.
모두 행복한 여행, 그 여인이 그토록 악착같이 가려고 했던 그곳, 그곳이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라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신나는 여행을 예약해 두었다고 속삭인다면?
불교에서 죽음은 이처럼 밝고 건강하며 때로 익살스러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아미타불이 서원을 세워 만들어 놓은 서방 극락정토까지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여행. 얼마나 즐거우면 나라의 이름이 즐거움이 있는 곳, ‘극락’이라고 했을까? 대성인로왕보살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 주고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을 대동하고 맞이하러 온다. 얼마나 중생을 어여삐 여겼으면 직접 마중 나오기까지 할까? (94-96) 

 

반야용선은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극락정토로 갈 수 있는, 한 명만 아니라 여러 명을 함께 데려가는 좀 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불교가 쇠퇴했던 조선 시대에는 염불수행이 대중화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반야용선도>가 많이 그려졌다. 누구든지 배를 타기만 하면 모두 극락으로 데려가 준다는 반야용선 이야기는 종교적 수행을 하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들에게 더 큰 호소력이 있었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은 통도사에 소장된 <용선접인도>와 김해 은아사, 신륵사, 안성 청룡사에도 남아 있다. 큰 범선에 돛대를 높이 달고 출발하는 반야용선 중앙에 작은 바람막이 막사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누각 같이 큰 건물이 있는 경우도 있다. 앞뒤로 인로왕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서 보호하는 모습이고 배를 탄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아예 법당이 곧 세상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배이기 때문에 ‘법당이 곧 반야용선’이라는 생각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기단부터 천장까지 반야용선의 모티프가 반영되어 있다.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과 바닷게의 문양은 반야용선이 떠 있는 바다를 상징하고, 건물 내부의 들보에 그려진 불보살들은 배를 타고 가는 중생을 호위한다. 건물 밖으로 뻗어 나와 서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용머리는 서방정토를 향해 나아가는 반야용선의 뱃머리를 상징한다. 특히 미황사는 불교가 바닷길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찰로서, 부도탑에 새겨진/ 바다 상징물들과 함께 대웅전의 반야용선 모티프는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반야용선에 타지 못해 밧줄에 매달려 가는 악착보살의 모습은 운문사 대웅보전과 영천 영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101-103)

 

 

 

(사진 출처: 『미술관에 간 붓다』, 95쪽) 
 

운문사에 여러 번을 갔어도 이 악착보살은 못 봤다.

아니, 내 눈에 저 악착보살이 보이질 않은 거다.

모르면 코 앞에 있어도 안 보일 때가 있다.

 

명법 스님은 이 책에서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보는 것을 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58)

고 하시지만 이 경우는 알아야 '면면장(免面牆)'이라도 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알게 된다.

이게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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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05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도사 엄청 크더군요. 자체박물관도 볼만하고. 거대탱화로 소문난 삼신불 탱화 가끔 행사 때 보여준다던데 때 맞추기가 쉽지 않더군요. 통도사 숲길에 맛있는 비빔국수집도 있어요! 스님들 맛집ㅎ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운문사는 새벽예불도 들었음에도, 유홍준씨 때문에 자판기 율무차만 열심히 먹었던. 정말 맛있었...내 댓글엔 왜 절에 가서 먹다 온 기억만 가득한가...

돌궐 2015-02-05 18:03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 가봤는데 아직 비빔국수는 못 먹었어요. 나중에 기억했다가 먹어볼게요. 감사합니다.^^

2015-02-06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2-05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법 스님의 말씀에 공감해요. 아는 것을 믿다가는 자신의 오류나 새로운 지식을 보지 못하니까요.

돌궐 2015-02-05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스님 말씀이 와닿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