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부두에서 내가 탈 배를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잠깐 한눈을 팔다간 놓칠지도 모른다.
지난번 항해 때는 어느 여인이 가족들과 작별인사 하느라 잠시 지체하여 배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 이처럼 허둥거리다가 배를 놓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뒤늦게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이미 떠난 배를 되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자비로운 뱃사공이 던져 준 밧줄을 용케 붙들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서쪽나라까지 갔다고 한다. 용맹심과 끈기가 대단했던 그 여인은 십만 억 나유타 국토를 지나가는 긴 여행 내내 악착스럽게/ 밧줄에 매달려 버텼다고 한다.
모두 행복한 여행, 그 여인이 그토록 악착같이 가려고 했던 그곳, 그곳이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라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신나는 여행을 예약해 두었다고 속삭인다면?
불교에서 죽음은 이처럼 밝고 건강하며 때로 익살스러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아미타불이 서원을 세워 만들어 놓은 서방 극락정토까지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여행. 얼마나 즐거우면 나라의 이름이 즐거움이 있는 곳, ‘극락’이라고 했을까? 대성인로왕보살이 앞장서 길을 안내해 주고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을 대동하고 맞이하러 온다. 얼마나 중생을 어여삐 여겼으면 직접 마중 나오기까지 할까? (94-96)
반야용선은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극락정토로 갈 수 있는, 한 명만 아니라 여러 명을 함께 데려가는 좀 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불교가 쇠퇴했던 조선 시대에는 염불수행이 대중화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반야용선도>가 많이 그려졌다. 누구든지 배를 타기만 하면 모두 극락으로 데려가 준다는 반야용선 이야기는 종교적 수행을 하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들에게 더 큰 호소력이 있었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은 통도사에 소장된 <용선접인도>와 김해 은아사, 신륵사, 안성 청룡사에도 남아 있다. 큰 범선에 돛대를 높이 달고 출발하는 반야용선 중앙에 작은 바람막이 막사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누각 같이 큰 건물이 있는 경우도 있다. 앞뒤로 인로왕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서 보호하는 모습이고 배를 탄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아예 법당이 곧 세상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배이기 때문에 ‘법당이 곧 반야용선’이라는 생각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기단부터 천장까지 반야용선의 모티프가 반영되어 있다.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과 바닷게의 문양은 반야용선이 떠 있는 바다를 상징하고, 건물 내부의 들보에 그려진 불보살들은 배를 타고 가는 중생을 호위한다. 건물 밖으로 뻗어 나와 서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용머리는 서방정토를 향해 나아가는 반야용선의 뱃머리를 상징한다. 특히 미황사는 불교가 바닷길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찰로서, 부도탑에 새겨진/ 바다 상징물들과 함께 대웅전의 반야용선 모티프는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반야용선에 타지 못해 밧줄에 매달려 가는 악착보살의 모습은 운문사 대웅보전과 영천 영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101-103)
(사진 출처: 『미술관에 간 붓다』, 95쪽)
운문사에 여러 번을 갔어도 이 악착보살은 못 봤다.
아니, 내 눈에 저 악착보살이 보이질 않은 거다.
모르면 코 앞에 있어도 안 보일 때가 있다.
명법 스님은 이 책에서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보는 것을 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58)
고 하시지만 이 경우는 알아야 '면면장(免面牆)'이라도 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알게 된다.
이게 내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