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옛 그림 이야기.
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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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뗄 수가 없는 평전이다. 소설처럼 읽힐 정도로 이야기가 매우 박진감이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우리 문화재 수집에 뜻을 두게 된 경위와 일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수많은 보물들을 수장하게 되는 일화들이 쉴새없이 이어진다.

처음에 나온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사들인 얘기며, <혜원전신첩>을 두고 일본인 야마나카와 벌인 심리전 등등...

글쓴이가 여러 자료를 통해 드러난 사실에다 자신의 상상을 조금 덧붙여서 무척 현장감 넘치는 글을 썼더라.

다만 상상이라고 밝힌 <몽유도원도>를 사지 못한 부분은 좀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몇몇 작품을 샀는데, 뜬금없이 상중이라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못 산다는 게 논리가 이상했다.

어쨌거나 그런 부분을 빼면 드라마로 만들어도 아주 재미있겠다.

  

간송은 단순한 허영심과 욕심으로 유물들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얼을 보여주는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모아야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 명품 중의 명품들을 수집했다.

조선시대 서화 작품은 물론,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귀중한 전적, 삼국과 통일신라의 불상,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까지 한국미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 사는 데에 거의 전재산을 투자했다.

간송의 (재력과) 투철한 의지에 감탄했다. 내 손에 그만한 재산이 있었더라도 아마 그렇게까진 못했을 것 같다.

 

 

 

(원본 그림을 보려면 아래 링크로)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1631578&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1445_000_2%2F20121116164707212_YU896YTSE.jpg%2Fea9_098_i1.jpg%3Ftype%3Dm4500_4500_fst_n%26wm%3DY&categoryId=42651&mode=simple|&query=&authorId=&authorId=
 

 

위의 그림은 신윤복 화첩을 수집하기 전에 잠깐 얘기가 나온 신한평의 작품이다.

신한평의 가족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오른쪽에 서럽게 울고 있는 남자아이가 신윤복일 거라고 한다. 2남 1녀 중 첫째 아들이 신윤복이었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추정은 그림 속의 가족이 '신한평 자신의 가족'이라는 가정 위에 '남자아이가 신윤복'일 거라는 이중 가정이라는 한계는 있다.

그렇긴 해도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내밀한 광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

결국 이 가족은 신한평의 가족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쨌거나 여기서 엄마는 "애 젖 먹이잖니! 투정 좀 그만 부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하는 것 같다.

<바람의 화원> 덕에 신윤복을 '사실은 여자'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이 그림에서도 추정되듯이 신윤복은 여자가 아니다. 소설은 소설로만 보자.

 

 

#

이 책은 단순하게 간송의 유물수집 편력을 나열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나름대로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20-30년대에 한국에서 금광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갔다는 이른바 '황금광 시대' 얘기도 나오고, 간송의 외종형 박종화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판칠 때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흉내를 낼 수 없으니까) 절필하고 역사소설을 구상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또 일제가 우리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민족을 압박했는지, 한국전쟁 때 상황이 어땠는지 등등 그때그때 사회배경도 자연스럽게 서술된다.


역사 속에서 살아온 한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잘 담아낸 책이다.

청소년 추천도서라고 하던데, 어른들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간송미술관과 우리나라 미술에 대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010. 5.)

 

 

* 해피북 님 서평을 보고 생각나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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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0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방금 깜짝 놀랐어요^~^ 그렇잖아도 저두 이 책 지금 막 읽기 시작해서 유심히 읽으며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밑에 제 이름이 ㅎ ㅎ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되었어요
더불어 신윤복 그림 짱! 돌궐님 센스쟁이!

돌궐 2015-03-03 19:27   좋아요 0 | URL
옛날에 썼던 서평 똑딱 올려놓고 이런 과찬을 듣고 있자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cyrus 2015-03-03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간송 선생이 <몽유도원도>를 구입할 뻔 했던 사연이 평전에 나오는데 픽션이라는 것이죠? 저는 재력이 많으면 내용면으로 읽을 가치가 높은 절판본을 사고 싶어요.

돌궐 2015-03-03 22:45   좋아요 0 | URL
읽은 지가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한데요, 간송 선생이 아마 사려고 했던 것은 맞는 거 같으나 이 책에서는 사지 않은(못한) 이유를 나름대로 상상해서 서술한 것 같아요.
절판본 가운데 정말 좋은 책도 많더라구요. 전공 서적에 그런 거 많아요.

만병통치약 2015-03-0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작품 수집은 정말 최고의 취미가 될수도 있고 최고의 허세가 될수도 있어 보입니다. ^^ 돈 만있다면 .......백년 후에 호암도 간송과 같은 대접을 받을까요? ㅋㅋ

돌궐 2015-03-03 22:47   좋아요 0 | URL
유물을 재산 축재-세금 탈루용으로 활용하기도 하죠. 주어는 없습니다.ㅋ
 

솔직히 북플로 글을 쓴 적은 없다.

하지만 몇몇 장점 때문에 북플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두 달 남짓 이 새로운 SNS를 쓰면서 마음에 들었던 점과 아쉬운 점을 정리해 본다.

 

먼저 좋은 점은

책을 찾아서 '읽고 싶어요'를 하면 저절로 보관함에 담기는 기능이다.

게다가 바코드를 카메라로 인식해서 책 정보를 불러오는 기능은 매우 요긴하더라.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편리하게 관심책들을 쓸어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알라딘에서 책 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란 건 안다만, 나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서 쓸데없는 책들까지 마구 사제끼는 소비자는 아니다.

무엇보다 책은 내가 지배하는 노예들이기 때문에 절대 그거 하나 사겠다고 무리하지 않는다.

내가 쓸 수 있고 여러 번 펼쳐볼 만한 것으로만, 그러니까 마구 부려먹을 수 있는 책만 산다.

부려먹지도 못할 노예를 왜 사는가? 책은 장식이 아니라 내 도구다.

 

책을 찾으면 다른 사람들의 관련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점도 좋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남들의 서평이 궁금하기 마련인데, 서재에서도 물론 가능하지만 북플에서 좀더 접근이 쉬운 것 같다.

북플이 아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서재 활동도 덜 했을 거 같다.

그랬다면 이웃도 안 생겼을 것이고, 이런저런 좋은 책도 몰랐을 것이다.

근데 이런 딴짓은 평소에도 했던 거라 북플 때문에 글을 못 읽는다거나 그렇지는 않는 거 같다.

오히려 북플 때문에 책을 좀더 찾아보게 되는 면이 있어 상쇄가 된다.

 

다음으로 아쉬운 점.

서재에서 애써서 글꼴이나 색깔을 지정해 봐야 북플에선 구현이 안된다.

서재에서는 제대로 주소가 걸린 문장이 북플에서는 하이퍼링크에 이어지는 글씨까지 링크가 걸린다. 

또 알림 기능이 뜻대로 안된다. 좋아요 받으면 알림이 오도록 해도 오지 않는다.

좋아요 한 글에 다른 사람이 덧글을 달면 알림이 오던데, 이것도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었어요 체크를 한 번만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사람도 있다. '읽었어요'를 중복 체크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책을 100번 이상 읽는 사람도 본 적 있다.

그리고 북플에서는 비밀 덧글 표시가 안 보인다. 그래서 이 덧글이 비밀글인지 아닌지 잘 모를 때가 있다.

마니아가 되는 기준은 좀 낮은 듯하다. 어떤 원칙이 적용되는지 모르지만 리뷰 한두 개 쓰고 마니아 되는 건 좀 아니지 싶다.

 

사실 독서와 SNS는 매우 안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런데 북플처럼 아예 책을 매개로 한 SNS를 표방하고 나서니까 이상한(?) 순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니까 뭐랄까... 대놓고 책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곳에서 하는 것보다는 낯간지럽다거나 잘난체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거다.

너도나도 다 책을 읽는 곳에서 책 좀 읽었다는 게 하나도 자랑이 되지 않으니까 이곳에선 책 얘기를 정말 편하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늘 그렇지만 시스템은 시스템일 뿐, 그걸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앞으로 북플과 북플러들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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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3-02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의 노예;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책이 오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는; 잊고있던 책/재미난 신간 얘기가 북플로 날마다 도착-_-
북플 비밀덧글 수정시 종종 해제가 되어 민망한 사태가 있더군요.
마니아는 좀 세밀한 분류작업이 있어야 할 듯.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니아가 되는 비극 또한 있고 말이죠.
이웃이 늘어나니 잡담 같은 글쓰기가 좀 눈치보여요. 이웃도 별로 없을 땐 혼자 재미삼아 주절주절 100자평 놀이터 재미도 있었는데 말이죠ㅎ.
알라딘 온라인 중고서점도 제겐 북플만큼이나 매력적인데, 북플 이웃들 평점, 리뷰를 보고 중고 신착도서 구매 결정을 바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랄까...사고 싶던 책이 눈깜짝할 사이 사라지면 혼자 비탄에 빠지고...으흑.

돌궐 2015-03-02 17:51   좋아요 1 | URL
아... 저도 그 기분 압니다.ㅎㅎ
보관함에 책 쌓아두고 군침만 삼키는 주제에 `책을 지배한다`고 허세를 떠는 제 자신이 참 가소롭습니다.ㅋㅋㅋ
잡답과 서평 사이에서 줄타기도 참 좋습니다. 전 신변잡기글들 윤활제라 생각합니다.
책 얘기만 있으면 너무 경직될 거 같아요.^^

해피북 2015-03-02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깊~~은 공감을..그런데 비밀 글은 댓글 적는 칸 왼쪽 열쇠모양 꾹누르시면 잠기는데 그게 비밀 글 작성법이랍니다 말씀처럼 눈에 확보여야하는데 그게 참 아쉽더라구요

돌궐 2015-03-02 19:3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근데 비밀글 작성할 때는 알겠는데 작성하고 나면 공개글과 차이가... 없습니다. ㅠㅜ

2015-03-02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2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병통치약 2015-03-02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이 너무 재미있어서 문제죠 ^^ : 제가 맘대로 북플을 수정한다면 카페와 블로그 중간쯤되게 만들고 싶어요. 주제별로 묶어서 활동을 같이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블로그는 너무 각개격파라 재미있으면서도 공허해요. 어디 소속감들게 주제별 게시판이 있으면 좋겠어요.

돌궐 2015-03-02 19:56   좋아요 0 | URL
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네요. 알라딘에서 만병통치약님 스카웃해갈 거 같아요.ㅎㅎ

AgalmA 2015-03-03 00: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의견 좋네요. 알라딘은 소모임 공간, 북플 타운도 만들어달라! 책이 더 잘 팔릴 것이야! ㅎ

cyrus 2015-03-0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에 이웃의 글을 공유하면 PC 상태의 알라딘 서재에서는 공유한 글 전체가 보이지 않더군요. 그냥 링크 한 줄만 나와 있어요. 댓글과 글 작성은 무조건 알라딘 서재에 접속한 상태에서 합니다. 글 올리기 전에 이웃의 글에 먼저 댓글을 남기는 편입니다.

돌궐 2015-03-03 22:50   좋아요 0 | URL
글 공유를 안해봐서 그 사실은 처음 알았네요.
이제 곧 cyrus 님의 글이 올라오겠네요.^^ 기대하겠습니다~ (벌써 올리셨군요^^)
 
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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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사료인데도 전쟁 이야기라 그런가 전혀 따분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요즘 김상중이 나오는 <징비록>을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있다.

 

 

사진 출처: KBS 징비록 홈페이지 '현장 스틸' 중에서

 

아무리 찬사로 도배를 한들 이 책의 진가를 전달할 수 없을 거 같다.

그냥 기억하고 싶은 몇몇 문단들을 옮겨본다.

읽다 보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나고, 억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241쪽을 읽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류성룡이 쓴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던 글이 더 아팠다.

된장, 역사책 읽으면서 운 건 이 책이 처음이다. 

 

 

류성룡, <징비록>(국보 제132호)

 

나중에 들으니 적군이 상주에 들어와서 오히려 험지를 지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문경현 남쪽 10여 리 밖에 옛 성이 있는데 이를 고모성(姑母城)이라 한다. 좌도와 우도의 경계에 있는데 양쪽 산협이 한데 묶인 듯이 싸여 있고 큰 내가 그 가운데에 둘러 있으며 그 아래에 길이 있다. 적군이 그곳을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두 번, 세 번 탐지해본 뒤에야 지키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 후에 명나라 장수인 제독 이여송이 적군을 추격하여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험준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꾀가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대체로 신립은 날쌔어서 그 당시에 이름은 얻었으나 군사 쓰는 계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해둔다. (91-92쪽)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 안에서 수상과 나를 불러 입대(入對)하도록 했다.

강을 건너니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여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날에 세운 승청(丞廳)이 있었는데, 적군이 이곳에 오면 청사의 재목을 헐어 뗏목을 만들어 건너올까 염려되어 이것을 불사르게 했더니, 이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치므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초경(初更)에 동파역에 이르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지대 차사원으로 그곳에 와서 임금께 드릴 음식을 간략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호위하는 사람들이 종일토록 굶주려왔기 때문에 마구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함부로 빼앗아 먹으니 임금께 드릴 것이 없어져서 허진과 구효연은 겁이 나서 도망쳐버렸다. (101쪽)

 

 

부원수 신각이 적군과 양주에서 싸워 이를 패퇴시키고 머리 60여 개를 베었는데,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군중에서 신각을 베어 죽였다.

신각이 처음에는 김명원을 따라가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패전하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의 군사가 도착하여 신각은 군사를 합쳐 적군이 서울에서 나와 민가를 노략질하는 것을 만나서 맞아 싸워 쳐부수었다. 왜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이번의 승전이 처음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뛰면서 좋아했다.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장계를 올려 "신각이 제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떠났으며 호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니, 우상 유홍이 임금에게 급히 베어 죽이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떠났다. 그런데 전쟁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중지시키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죽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지만 본디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었다. 전에 연안 부사로 있을 때 성을 수축하고 참호를 파며 군기(軍器)를 많이 준비해두어 훗날 이정암이 연안을 지켜 성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은 신각의 공이라 했다. (이번에)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고 또 90세 되는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08-110쪽)  

 

 

7월에 요동의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다. 이 기별이 (군대보다) 먼저 이르렀는데, 이때 나는 치질을 앓아 고통이 심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좌상(윤두수)에게 구원병이 오는 길에 나가서 군량을 준비하도록 하셨으므로,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임금께 글을 올려 아뢰기를 "임금 계신 곳에 현직 대신으로서는 다만 윤두수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오니 그를 내보낼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명령을 받았사오니 비록 병든 몸이오나 제 스스로 힘써 나가보겠습니다" 했더니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초 7일에 병든 몸을 억지로 견디어 임금 계신 곳에 나아가서 하직하니, 임금께서 불러 보시므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서 아뢰기를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길에서, 소곶(所串)에서부터 남쪽으로 정주·가산에 이르기까지는 5천 명이 지날 동안에 하루 이틀 먹을 것은 준비될 수 있으나, 안주·숙천·순안 세 고을에는 양식이 전혀 없으니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날 때는 먼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가지고서 안주 이남의 식량에 대비해야 합니다. 군사가 평양에 이르러서 곧바로 수복하게 되면 성안에 곡식이 많으므로 능히 보급될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성을 포위한 것이 여러 날이 되더라도 평양 서쪽 세 고을(강서·용강·함종)의 곡식을 힘을 다하여 운반해 전선(前線)에 수송하게 되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한 사정은 이곳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융통성 있게 계획하고 편의한 대로 일을 시행하도록 하시옵서서" 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내가 곧 나와서 떠나려 하자 위에서 웅담과 납약을 내려주셨다. 내의원복 용운이란 사람은 성문 밖 5리까지 나와 나를 전송하면서 통곡했는데, 내가 전문령 고개를 올랐을 때까지 우는 소리가 들렸다. (144-145쪽)

 

 

이튿날 적병이 전주로 들어오자 관리들이 달아나려 했으나,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이 성안으로 들어와 이속과 백성들을 이끌고서 굳게 지켰다. 이때 적병 중 용맹한 자는 웅령 싸움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기운이 이미 다되었고, 감사 이광이 성 밖에 의병을 설치하여 낮이면 깃발을 많이 달아놓고 밤이 되면 산에 횃불을 벌여놓자 적병이 성 밑에 이르러 몇 번을 둘러보다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고 가버렸다.

적군이 웅령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어 큰 무덤을 몇 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세우고 "조선국의 충간 의담을 조상한다"라고 글을 썼는데, 이는 우리 군사들이 힘을 다해 싸운 것을 칭찬한 것이다. 이 싸움으로 전라 한 도만은 홀로 보전되었다. (176쪽)

 

 

후에 권응수가 영천을 수복하자 박진은 좌도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성 아래까지 밀어 닥쳤으나, 적군이 몰래 북문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엄습하자 박진은 달아나 안강으로 돌아왔다. 밤중에 또 군사를 성 밑에 잠복시켰다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게 하여 성안 객사 뜰 가운데 떨어지자, 적병은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해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하며 서로 굴려보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폭발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무수히 부서져 흩어졌다. 맞아서 곧바로 죽은 적병이 30여 명이나 되고 맞지 않은 적병 또한 쓰러졌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은 적병이 없었으나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하여 모두 신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튿날 적군이 마침내 전 군대가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쳐 돌아가자, 박진은 경주로 들어가서 (적이) 남긴 곡식 1만여 석을 얻게 되었다. (191-192쪽)

 

 

군량미 중 남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주청했더니 허락하셨다. 이때는 적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병화의 피해 때문에 천리 강산이 쓸쓸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어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 하여 동파에 이른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사대수)이 마산(파주에 있는 역) 가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기어가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이를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이 꼴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 하며 탄식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41쪽)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291쪽)

 

 

이순신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웠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했으며,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담력과 국량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죽음을 숨긴 채 이순신의 명령이라 하여 싸움을 급히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진린이 탄 배가 적병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이완이 군사를 지휘하여 구원하니 적선이 흩어져 물러갔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원해준 것을 사례했는데, (그때)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자에서 땅 위로 몸을 던지면서 "나는 노야(이순신)께서 생시에 오셔서 나를 구원한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온 군대가 모두 통곡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평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군을 추격하여 그의 진영을 지나간 틈을 타서 뒤로 빠져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왜적을 괴수 평수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연해에 진영을 설치했던 적군이 모두 물러갔다.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져 있는 각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제 어버이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또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전을 차리고서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기를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며 길을 막아 상여가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329-330쪽)

 

 

통제사(이순신)는 군중에 있을 때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견내량에서 적병과 서로 대치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여러 배들은 이미 닻을 내렸고, 밤에 달빛이 매우 밝았다.

통제사는 갑옷을 입은 채로 전고(戰鼓)를 베고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으면서 측근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게 하여 한 잔을 마시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하고 "오늘 밤에 달이 매우 밝은데, 적병은 간사한 꾀가 많으므로 달이 없을 때도 물론 우리를 습격해 오지만, 달이 밝을 때도 습격해 올 테니 경비를 엄중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호령 신호인 나팔을 불게 하여 여러 배들이 모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선에게 전령했다. 척후 임무를 맡은 군사가 한잠이 들었던 것을 깨워 일으켜서 적병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했는데, 한참 만에 척후가 달려와서 적병이 온다고 보고했다.

이때 달은 서쪽 산에 걸려 있고 산 그림자는 바다 속에 거꾸로 비치는데, 바다의 반쪽은 어슴푸레 그늘이 져 있었다. 적군의 배들은 어두침침한 그늘 속에서 수없이 다가와 장차 우리 배에 접근하려 했다. 이에 중군에서 대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들도 모두 이에 응했다. 적병은 우리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았는데, 소리가 바다 속을 진동하고 총탄이 빗발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적병이 감히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달아나버리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순신을 신으로 여겼다. (339-340쪽)

 

 

우리가 만약 평탄하고 넓은 들판에서 만나 두 진이 서로 마주쳐서 법대로 교전했다면 당적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로 화살의 능력은 백 보에 불과하지만 조총은 능히 수백 보까지 미치고, 날아오는 것이 바람과 우박 같아 그것을 당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지형을 먼저 선택하여 산이 험준하고 숲이 빽빽한 곳에 사수를 분산, 매복시켜 적군에게는 그 형체를 보이지 않게 하고 좌우편에서 한꺼번에 쏘았다면, 저들이 비록 조총과 창·칼이 있더라도 모두 소용없게 되어 크게 승리했을 것이다.

지금 한 가지 일을 예로 들어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임진년에 적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날마다 성 밖에서 노략하여 원릉까지도 보전할 수 없었는데, 고양 사람 진사 이로는 활을 조금 쏠 줄 알고 담력이 있었다. 어느 날 동반한 두 사람과 함께 각기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릉·경릉에 들어갔는데 뜻밖에 적군이 많이 나와서 산골 속에 가득했다. 이로 등은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등나무 우거진 숲 속에 도망쳐 들어갔는데, 적군이 와서 수색하면서 배회하고 엿보았다. 이로 등은 숲 속에서 문득 활을 쏘았는데, 시위 소리가 나자 모두 곧 꺼꾸러졌다. 또 그들이 자리를 옮겨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자 적군은 더욱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적군은 가는 곳마다 우거진 수풀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달아났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으므로 창릉과 경릉 두 능은 보전되었다. 이 일로 미루어본다면 지형을 얻고 얻지 못하는  데 성패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군이 상주에 있을 때 신립·이일 등이 만약 이 계책을 쓸 줄 알아서 먼저 토천과 조령의 삼십수 리 사이에 사수 수천여 명만 매복시켜 적군이 우리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헤아리지 못하게 했더라면 적군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합지졸과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 그 험지를 버리고 평지에서 승부를 겨루었으니, 그가 패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용병의 기밀에 대하여 앞서 상세히 말했는데, 지금 또다시 특별히 기록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356-357쪽)

 

 

이때 서울에 기근이 심해서 나는 용산창의 당속미(중국에서 보내온 좁쌀) 1천 석을 방출하도록 요청하고 매일 한 사람에게 곡식 두 되를 주도록 했는데,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도감 당상 조경은 곡식이 부족하여 능히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제한하고자 하여, 큰 돌 한 개를 놓아두고 모집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먼저 돌을 들게 하여 힘을 시험했다. 또 높이 10척이나 되는 흙담을 뛰어넘게 하여 넘는 사람은 들어오게 하고 넘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굶주려 피곤하여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사람은 10명 중 1~2명이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해서 도감문 밖에서 넘어져 죽기까지 했다.

오래지 않아 수백, 수천 명을 뽑아 파총과 초관을 세워서 부서를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또 조총 쓰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화약이 없었다. 군기시 장인 대풍손이 적진에 들어가서 화약을 많이 만들어 적군에게 주었기 때문에 강화에 가두어두었다가 장차 죽이려 했는데, 내가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해주고 염초(焰硝)를 구워서 속죄하도록 했다. 그 사람이 감격하고 송구해하며 힘을 다하여 하루 동안에 화약을 구워 만든 것이 몇 십 근이나 되었다. (이것을) 날마다 각 부서에 나누어주어 밤낮으로 총 쏘기를 익히도록 하고 잘하고 못하는 것을 등급을 매겨 상벌을 시행했다. 한 달 후에는 능히 나는 새라도 맞히는 정도가 되었으며, 서너 달 후에는 항복한 왜적이나 중국 남방의 조총 잘 쏘는 사람과 서로 비교하여도 그보다 못한 사람은 없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낫기까지 했다. (367-368쪽)

 

군량미 중 남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주청했더니 허락하셨다. 이때는 적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병화의 피해 때문에 천리 강산이 쓸쓸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어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 하여 동파에 이른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사대수)이 마산(파주에 있는 역) 가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기어가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이를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이 꼴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 하며 탄식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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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중일기도 읽으면 분통이 터지는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당시 조선이 돌아가는 꼴이 안습입니다.

돌궐 2015-02-27 17:53   좋아요 0 | URL
요즘 저도 난중일기를 아껴가며 다시 읽고 있습니다. 옛날엔 참 재미없게 읽었는데 나이가 드니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예를 들어 `공무를 봤다`.`활 몇 순을 쐈다`는 내용에 대해 어렸을 때는 그저 지루하다고만 봤는데 이젠 이순신의 엄격한 일상과 꾸준한 실천 같은 게 읽히더라구요.

만병통치약 2015-02-2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한우 선조에서 선조를 옹호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선조시대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유가 웃기지만, 선조가 다행히 인복이 있었어요 ㅋ

돌궐 2015-02-28 09:40   좋아요 0 | URL
근데 선조가 잘 등용해서 인재가 나온 건지 아니면 그냥 난세에 영웅이 나온 건지 잘 모르겠어요. ㅎㅎ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5 -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5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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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시대 역사와 문화의 큰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순대비의 정조 독살설은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과로로 인한 사망일 수도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정조가 죽기 전에 모기 만한 소리로 '수정전(壽靜殿)'을 중얼거린 것은 사실인가 보다.

 

정조는 서얼을 대우하고 등용했으며 암행어사, 격쟁 등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왕이다.

영조와 정조 모두 문벌을 싫어했지만 대놓고 맞서진 않았다. 지역 차별도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성과가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북지방(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는 인재가 등용되기 힘들었고 제주도는 아예 벼슬을 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밖에 유형원, 박지원,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흐름을 자세히 풀어내었다.

실학자들은 노동과 상업을 중시하고 양반들에게도 일을 하도록 권장했단다. 그들의 토지개혁 이론은 매우 급진적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 당시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중국 정세나 일본과 조선의 관계도 소개하고 있어서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도 파악하게 해준다.

 

대중예술을 다룬 5부에서 기억에 남는 얘기는 강독사와 강담사, 세책방 등이다.

강독사가 한장 재미지게 읽어주다가 갑자기 읽기를 멈추고 두리번거리면 안달난 사람들이 다음 대목을 들으려고 다투어 돈을 던져줬다고 한다(281쪽).

강창사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창을 곁들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바로 초기 판소리꾼이라는 것이다. 

박지원은 자기 글에 비어, 속어, 방언, 욕설과 사실적인 묘사를 자유분방하게 구사했다고 하니 나중에 연암의 글들을 좀더 읽어봐야겠다.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1791년, 종이에 수묵담채, 25.6x31.8cm, 한국 개인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송석원시사(또는 玉溪詩社)'라는 시인집단 얘기였다.

김홍도 그림 <송석원시사야연도>는 중인이나 역관 등이 모여 인왕산 기슭의 작은 시냇가 옆 초가집에서 연 시회를 기념하여 그린 것이라 한다.

산밑 바위에 김정희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라 새겼고 초가집 주인은 천수경(千壽慶)이었다.

현실의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자포자기의 마음을 내보이는 시를 많이 읊었단다.

장혼이 쓴 이런 시가 있다(296쪽).

 

아버지는 점점 늙어가고 살림은 나날이 궁색해지네.

밥때에는 소금마저 댈 수 없고 옷은 철에도 맞지 않네.

어버이 비록 말이 없으나 자식의 도리 어찌 편하리까.

두 어린아이까지 딸려 밥 찾느라 울부짖네.

(가난을 진술하는 시: 述貧詩)

 

그밖에 사당패, 판소리꾼 얘기와 윤두서, 김홍도, 신윤복, 최북 등 화가 얘기가 마지막에 짧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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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7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연암의 소설 중에 <호질>이 재미있었어요. 호랑이가 선비를 꾸짖는 장면이 통쾌했어요.

돌궐 2015-02-27 17: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생각나요.
연암글은 읽지 못한 게 많아서 앞으로 많이 찾아보려구요.

AgalmA 2015-02-2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이들의 내실있는 사극도 좀 만들어졌음 싶은데 말이죠...

돌궐 2015-02-28 09:42   좋아요 0 | URL
오오, 그 사극 강추이옵니다. 고품격 사극이 될 듯 싶습니다.
요즘 조선 명탐정 정약용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긴 하네요.ㅎ

AgalmA 2015-02-28 11:05   좋아요 0 | URL
명탐정;;; 대중성도 무시는 못하겠지만 그런 식의 판타지 접근은 정말 비호감입니다_-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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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편이다.

우리 고대사의 마지막 이야기, 다 알고 있는 거 같아도 새삼스러운 역사들이다.

 

원효, 의상, 최치원, 도선과 후삼국의 영웅들이 나온다.

견훤을 이 책에선 '진훤'이라고 하네. 甄자가 성으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왕건의 수하 유검필은 도대체가 패배를 모르는 맹장이었나 보다.

진훤도 끝은 초라했지만 희대의 영웅이었을 거다. 역사에 남은 패자(敗者)의 기록이 이다지도 화려한 걸 봐서는.

 

민심을 얻지 못하는 세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걸 이 시대 역사도 보여주고 있다.

요점 정리와 같은 마지막 세 페이지만 옮겨 보자.

 

 

신라는 결국 골품제의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골품제를 개혁하지는 않고 더욱 권력과 재부를 독점하려고 왕위 쟁탈과 권력 투쟁을 벌여 스스로 붕괴한 것이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창조적 활동이나 생산능력 없이 사치와 방탕으로 일관하였다. 낮은 귀족인 6두품이나 지방의 호족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하여 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도 더 늘리려고 토지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승려와 사찰도 여기에 끼어들었다. 귀족들은 녹읍에서 가혹한 수취를 하였고 고리대라는 수법을 통해 악랄하게 농민들을 압박했다. 재부의 편제는 농민을 떠돌이로 만들었고, 유망민들은 도둑 또는 농민군으로 재편되었다. 낮은 벼슬아치와 호족들도 점차 신라의 왕실세력에서 떨어져나갔다.

 

불교의 선종은 낮은 귀족이나 호족과 연결되었고, 새로 일어난 유학자들은 새 질서로 새 가치관을 추구하며 새 사회 건설을 제창하였다. 또한 도참풍수사상은 일반 민중과 연결되어 새로운 세력을 키워나갔다.

 

신라의 실정(失政) 중에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반감을 계속 유발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자체의 골품이나 귀족의 독점체제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두 지역 주민의 중앙정계 진출을 봉쇄하였고, 지방의 성주·장군이 되는 길도 거의 열어주지 않았다. 이는 골품제 귀족제도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세·공물·군역의 의무는 가혹하게 지웠다. 궁예와 왕건, 진훤은 모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등장하였다.

 

궁예는 지나친 복수심과 폭정으로 신라에 불만을 지닌 세력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민심을 얻지도 못하였다. 진훤은 초기에 인심을 끌어모아 막강한 힘을 축적하고도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개혁을 도모하지 못하였고 경애왕을 죽여 아무런 정치적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신라 주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후백제는 끝내 자체 분열의 길을 걸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었으나 시운을 타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보수 성향을 보였으나 신라 주민의 민심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는 최소한의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내정 개혁에 중심을 두었다. 왕건은 온건한 정책으로 신라의 낮은 귀족과 지방호족, 유학세력, 풍수세력, 선종세력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지방의 성주와 장군은 도둑을 막는 따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건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힘을 키웠다. 또 10분의 1세를 고수하여 호족과 농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자신의 성품이 겸손하고 온유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회유와 환심을 사는 데에도 능란하였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에 따라 여러 갈래로 겹혼인을 맺어 자기 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왕건은 이름과 실제에 걸맞은 군주가 되었고, 고려는 통일국가가 되었다. 고려는 한국사의 본격적인 중세사회를 열었다. (307-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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