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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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사료인데도 전쟁 이야기라 그런가 전혀 따분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요즘 김상중이 나오는 <징비록>을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있다.

 

 

사진 출처: KBS 징비록 홈페이지 '현장 스틸' 중에서

 

아무리 찬사로 도배를 한들 이 책의 진가를 전달할 수 없을 거 같다.

그냥 기억하고 싶은 몇몇 문단들을 옮겨본다.

읽다 보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나고, 억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241쪽을 읽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류성룡이 쓴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던 글이 더 아팠다.

된장, 역사책 읽으면서 운 건 이 책이 처음이다. 

 

 

류성룡, <징비록>(국보 제132호)

 

나중에 들으니 적군이 상주에 들어와서 오히려 험지를 지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문경현 남쪽 10여 리 밖에 옛 성이 있는데 이를 고모성(姑母城)이라 한다. 좌도와 우도의 경계에 있는데 양쪽 산협이 한데 묶인 듯이 싸여 있고 큰 내가 그 가운데에 둘러 있으며 그 아래에 길이 있다. 적군이 그곳을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두 번, 세 번 탐지해본 뒤에야 지키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 후에 명나라 장수인 제독 이여송이 적군을 추격하여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험준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꾀가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대체로 신립은 날쌔어서 그 당시에 이름은 얻었으나 군사 쓰는 계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해둔다. (91-92쪽)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 안에서 수상과 나를 불러 입대(入對)하도록 했다.

강을 건너니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여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날에 세운 승청(丞廳)이 있었는데, 적군이 이곳에 오면 청사의 재목을 헐어 뗏목을 만들어 건너올까 염려되어 이것을 불사르게 했더니, 이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치므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초경(初更)에 동파역에 이르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지대 차사원으로 그곳에 와서 임금께 드릴 음식을 간략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호위하는 사람들이 종일토록 굶주려왔기 때문에 마구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함부로 빼앗아 먹으니 임금께 드릴 것이 없어져서 허진과 구효연은 겁이 나서 도망쳐버렸다. (101쪽)

 

 

부원수 신각이 적군과 양주에서 싸워 이를 패퇴시키고 머리 60여 개를 베었는데,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군중에서 신각을 베어 죽였다.

신각이 처음에는 김명원을 따라가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패전하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의 군사가 도착하여 신각은 군사를 합쳐 적군이 서울에서 나와 민가를 노략질하는 것을 만나서 맞아 싸워 쳐부수었다. 왜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이번의 승전이 처음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뛰면서 좋아했다.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장계를 올려 "신각이 제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떠났으며 호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니, 우상 유홍이 임금에게 급히 베어 죽이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떠났다. 그런데 전쟁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중지시키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죽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지만 본디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었다. 전에 연안 부사로 있을 때 성을 수축하고 참호를 파며 군기(軍器)를 많이 준비해두어 훗날 이정암이 연안을 지켜 성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은 신각의 공이라 했다. (이번에)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고 또 90세 되는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08-110쪽)  

 

 

7월에 요동의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다. 이 기별이 (군대보다) 먼저 이르렀는데, 이때 나는 치질을 앓아 고통이 심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좌상(윤두수)에게 구원병이 오는 길에 나가서 군량을 준비하도록 하셨으므로,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임금께 글을 올려 아뢰기를 "임금 계신 곳에 현직 대신으로서는 다만 윤두수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오니 그를 내보낼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명령을 받았사오니 비록 병든 몸이오나 제 스스로 힘써 나가보겠습니다" 했더니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초 7일에 병든 몸을 억지로 견디어 임금 계신 곳에 나아가서 하직하니, 임금께서 불러 보시므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서 아뢰기를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길에서, 소곶(所串)에서부터 남쪽으로 정주·가산에 이르기까지는 5천 명이 지날 동안에 하루 이틀 먹을 것은 준비될 수 있으나, 안주·숙천·순안 세 고을에는 양식이 전혀 없으니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날 때는 먼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가지고서 안주 이남의 식량에 대비해야 합니다. 군사가 평양에 이르러서 곧바로 수복하게 되면 성안에 곡식이 많으므로 능히 보급될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성을 포위한 것이 여러 날이 되더라도 평양 서쪽 세 고을(강서·용강·함종)의 곡식을 힘을 다하여 운반해 전선(前線)에 수송하게 되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한 사정은 이곳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융통성 있게 계획하고 편의한 대로 일을 시행하도록 하시옵서서" 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내가 곧 나와서 떠나려 하자 위에서 웅담과 납약을 내려주셨다. 내의원복 용운이란 사람은 성문 밖 5리까지 나와 나를 전송하면서 통곡했는데, 내가 전문령 고개를 올랐을 때까지 우는 소리가 들렸다. (144-145쪽)

 

 

이튿날 적병이 전주로 들어오자 관리들이 달아나려 했으나,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이 성안으로 들어와 이속과 백성들을 이끌고서 굳게 지켰다. 이때 적병 중 용맹한 자는 웅령 싸움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기운이 이미 다되었고, 감사 이광이 성 밖에 의병을 설치하여 낮이면 깃발을 많이 달아놓고 밤이 되면 산에 횃불을 벌여놓자 적병이 성 밑에 이르러 몇 번을 둘러보다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고 가버렸다.

적군이 웅령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어 큰 무덤을 몇 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세우고 "조선국의 충간 의담을 조상한다"라고 글을 썼는데, 이는 우리 군사들이 힘을 다해 싸운 것을 칭찬한 것이다. 이 싸움으로 전라 한 도만은 홀로 보전되었다. (176쪽)

 

 

후에 권응수가 영천을 수복하자 박진은 좌도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성 아래까지 밀어 닥쳤으나, 적군이 몰래 북문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엄습하자 박진은 달아나 안강으로 돌아왔다. 밤중에 또 군사를 성 밑에 잠복시켰다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게 하여 성안 객사 뜰 가운데 떨어지자, 적병은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해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하며 서로 굴려보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폭발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무수히 부서져 흩어졌다. 맞아서 곧바로 죽은 적병이 30여 명이나 되고 맞지 않은 적병 또한 쓰러졌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은 적병이 없었으나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하여 모두 신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튿날 적군이 마침내 전 군대가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쳐 돌아가자, 박진은 경주로 들어가서 (적이) 남긴 곡식 1만여 석을 얻게 되었다. (191-192쪽)

 

 

군량미 중 남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주청했더니 허락하셨다. 이때는 적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병화의 피해 때문에 천리 강산이 쓸쓸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어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 하여 동파에 이른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사대수)이 마산(파주에 있는 역) 가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기어가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이를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이 꼴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 하며 탄식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41쪽)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291쪽)

 

 

이순신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웠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했으며,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담력과 국량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죽음을 숨긴 채 이순신의 명령이라 하여 싸움을 급히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진린이 탄 배가 적병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이완이 군사를 지휘하여 구원하니 적선이 흩어져 물러갔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원해준 것을 사례했는데, (그때)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자에서 땅 위로 몸을 던지면서 "나는 노야(이순신)께서 생시에 오셔서 나를 구원한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온 군대가 모두 통곡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평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군을 추격하여 그의 진영을 지나간 틈을 타서 뒤로 빠져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왜적을 괴수 평수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연해에 진영을 설치했던 적군이 모두 물러갔다.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져 있는 각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제 어버이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또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전을 차리고서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기를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며 길을 막아 상여가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329-330쪽)

 

 

통제사(이순신)는 군중에 있을 때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견내량에서 적병과 서로 대치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여러 배들은 이미 닻을 내렸고, 밤에 달빛이 매우 밝았다.

통제사는 갑옷을 입은 채로 전고(戰鼓)를 베고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으면서 측근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게 하여 한 잔을 마시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하고 "오늘 밤에 달이 매우 밝은데, 적병은 간사한 꾀가 많으므로 달이 없을 때도 물론 우리를 습격해 오지만, 달이 밝을 때도 습격해 올 테니 경비를 엄중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호령 신호인 나팔을 불게 하여 여러 배들이 모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선에게 전령했다. 척후 임무를 맡은 군사가 한잠이 들었던 것을 깨워 일으켜서 적병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했는데, 한참 만에 척후가 달려와서 적병이 온다고 보고했다.

이때 달은 서쪽 산에 걸려 있고 산 그림자는 바다 속에 거꾸로 비치는데, 바다의 반쪽은 어슴푸레 그늘이 져 있었다. 적군의 배들은 어두침침한 그늘 속에서 수없이 다가와 장차 우리 배에 접근하려 했다. 이에 중군에서 대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들도 모두 이에 응했다. 적병은 우리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았는데, 소리가 바다 속을 진동하고 총탄이 빗발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적병이 감히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달아나버리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순신을 신으로 여겼다. (339-340쪽)

 

 

우리가 만약 평탄하고 넓은 들판에서 만나 두 진이 서로 마주쳐서 법대로 교전했다면 당적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로 화살의 능력은 백 보에 불과하지만 조총은 능히 수백 보까지 미치고, 날아오는 것이 바람과 우박 같아 그것을 당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지형을 먼저 선택하여 산이 험준하고 숲이 빽빽한 곳에 사수를 분산, 매복시켜 적군에게는 그 형체를 보이지 않게 하고 좌우편에서 한꺼번에 쏘았다면, 저들이 비록 조총과 창·칼이 있더라도 모두 소용없게 되어 크게 승리했을 것이다.

지금 한 가지 일을 예로 들어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임진년에 적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날마다 성 밖에서 노략하여 원릉까지도 보전할 수 없었는데, 고양 사람 진사 이로는 활을 조금 쏠 줄 알고 담력이 있었다. 어느 날 동반한 두 사람과 함께 각기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릉·경릉에 들어갔는데 뜻밖에 적군이 많이 나와서 산골 속에 가득했다. 이로 등은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등나무 우거진 숲 속에 도망쳐 들어갔는데, 적군이 와서 수색하면서 배회하고 엿보았다. 이로 등은 숲 속에서 문득 활을 쏘았는데, 시위 소리가 나자 모두 곧 꺼꾸러졌다. 또 그들이 자리를 옮겨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자 적군은 더욱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적군은 가는 곳마다 우거진 수풀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달아났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으므로 창릉과 경릉 두 능은 보전되었다. 이 일로 미루어본다면 지형을 얻고 얻지 못하는  데 성패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군이 상주에 있을 때 신립·이일 등이 만약 이 계책을 쓸 줄 알아서 먼저 토천과 조령의 삼십수 리 사이에 사수 수천여 명만 매복시켜 적군이 우리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헤아리지 못하게 했더라면 적군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합지졸과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 그 험지를 버리고 평지에서 승부를 겨루었으니, 그가 패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용병의 기밀에 대하여 앞서 상세히 말했는데, 지금 또다시 특별히 기록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356-357쪽)

 

 

이때 서울에 기근이 심해서 나는 용산창의 당속미(중국에서 보내온 좁쌀) 1천 석을 방출하도록 요청하고 매일 한 사람에게 곡식 두 되를 주도록 했는데,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도감 당상 조경은 곡식이 부족하여 능히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제한하고자 하여, 큰 돌 한 개를 놓아두고 모집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먼저 돌을 들게 하여 힘을 시험했다. 또 높이 10척이나 되는 흙담을 뛰어넘게 하여 넘는 사람은 들어오게 하고 넘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굶주려 피곤하여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사람은 10명 중 1~2명이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해서 도감문 밖에서 넘어져 죽기까지 했다.

오래지 않아 수백, 수천 명을 뽑아 파총과 초관을 세워서 부서를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또 조총 쓰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화약이 없었다. 군기시 장인 대풍손이 적진에 들어가서 화약을 많이 만들어 적군에게 주었기 때문에 강화에 가두어두었다가 장차 죽이려 했는데, 내가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해주고 염초(焰硝)를 구워서 속죄하도록 했다. 그 사람이 감격하고 송구해하며 힘을 다하여 하루 동안에 화약을 구워 만든 것이 몇 십 근이나 되었다. (이것을) 날마다 각 부서에 나누어주어 밤낮으로 총 쏘기를 익히도록 하고 잘하고 못하는 것을 등급을 매겨 상벌을 시행했다. 한 달 후에는 능히 나는 새라도 맞히는 정도가 되었으며, 서너 달 후에는 항복한 왜적이나 중국 남방의 조총 잘 쏘는 사람과 서로 비교하여도 그보다 못한 사람은 없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낫기까지 했다. (367-368쪽)

 

군량미 중 남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주청했더니 허락하셨다. 이때는 적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병화의 피해 때문에 천리 강산이 쓸쓸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어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 하여 동파에 이른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사대수)이 마산(파주에 있는 역) 가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기어가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이를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이 꼴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 하며 탄식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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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중일기도 읽으면 분통이 터지는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당시 조선이 돌아가는 꼴이 안습입니다.

돌궐 2015-02-27 17:53   좋아요 0 | URL
요즘 저도 난중일기를 아껴가며 다시 읽고 있습니다. 옛날엔 참 재미없게 읽었는데 나이가 드니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예를 들어 `공무를 봤다`.`활 몇 순을 쐈다`는 내용에 대해 어렸을 때는 그저 지루하다고만 봤는데 이젠 이순신의 엄격한 일상과 꾸준한 실천 같은 게 읽히더라구요.

만병통치약 2015-02-2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한우 선조에서 선조를 옹호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선조시대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유가 웃기지만, 선조가 다행히 인복이 있었어요 ㅋ

돌궐 2015-02-28 09:40   좋아요 0 | URL
근데 선조가 잘 등용해서 인재가 나온 건지 아니면 그냥 난세에 영웅이 나온 건지 잘 모르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