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iver (Mass Market Paperback)
로이스 로리 지음 / Dell Laurel-Leaf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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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그것도 원서를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기란 난감할 때가 있다.

언어들이 내 어설픈 해독과 막연한 감정 때문에 뭔가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꾸 반복해서 읽다보면 좀 나아질까.

문장은 역시 매우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처음으로 오디오북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동안 360여 개의 단어를 찾았고, 찾았던 단어를 또 찾아서 봤다.

카페에선가 어디선가 이 저자가 일부러 낱말을 반복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사실 번역본 <기억 전달자>는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조나스가 커뮤니티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탈출하는 건 기억이 났지만 그게 가브리엘이었단 걸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마지막에 조나스가 모든 힘을 다한 끝에 오른 눈 쌓인 언덕을 내려가면서 본 불빛은,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실제인가 환상인가 긴가민가했다.

기억 속에서 끌어낸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걸 미루어보면 조나스가 의식을 잃으면서 생긴 환상인 거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너무 처절하고 비극적인 결말 아닌가.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번역본도 다시 읽어야겠지만, 원서도 다시 읽어야겠다.

가브리엘을 안은 채 언덕에서 쓰러져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은 문장이었다.

 

Jonas felt himself losing consciousness and with his whole being willed himself to stay upright atop the sled, clutching Gabriel, keeping him safe. The runners sliced through the snow and the wind whipped at his face as they sped in a straight line through an incision that seemed to lead to the final destination, the place that he had always felt was waiting, the Elsewhere that held their future and their past.

He forced his eyes open as they went downward, downward, sliding, and all at once he could see lights, and he recognized them now. He knew they were shining through the windows of rooms, that they were the red, blue, and yellow lights that twinkled from trees in places where families created and kept memories, where they celebrated love.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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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한국불교
이이화 지음 / 역사비평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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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김영태 선생의 <한국 불교사>를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강의 노트식 맥락 없는 정보의 나열이었던 탓도 있겠지만(의미없는 스님들의 저작 나열 같은) 역사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고, 그 시대 사상과 문화에 어떤 구실을 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도 느끼는 바지만 이이화 선생은 민중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유산에 대해 애정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만민의 평등과 민중들의 복지와 이익을 설파한 스님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불교사 속 인물들의 '간판'만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처세와 신념, 사상까지 이야기하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의 흐름을 통해 우리 역사를 한 번 더 훑어보는 듯했다.

저자가 사상사에 집중하지 않고 역사적 실체에 치중했다고는 하지만 필요한 곳에서는 사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불교 승려나 신봉자라고 해서 모두 옳고 신성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남들은 다 욕하고 저평가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얕잡아 보거나 그 가치를 비하하지 않았다.

또 남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감싸주지 않는다.

비판할 부분은 가차없이 비판하고 위대한 것은 아낌없이 위대하다고 말해야 한다.

가치와 한계를 다 말하는 것. 이것은 지식인이라면 늘 가슴에 신조로 삼고 있어야 하니까.

 

승려들은 중생과 떨어져서 수행을 하거나 국가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어용승려로 활약하기도 했다.

꽤 많은 중들이 어용승려였다. 여기서 '어용'이란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스님들은 시대의 큰 스승 역할을 했고, 국가에 정치적으로 많은 기여도 했기에.

가진 자들의 이익과 극락왕생만을 말하지 않고(물론 없잖아 그런 예도 있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과 평등을 주장해 온 것이 불교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일제 시대에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어용 승려의 나쁜 예일 것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권상로, 방한암은 친일 승려였으며, 송만공, 한용운은 끝까지 자존을 지킨 승려였다고 한다.

 

컴퓨터로 책 내용을 입력하고 있다.

제대로 정리하려면 인물과 사건 위주로 노트정리도 필요하다.

일전에 훑어만 봤던 <조계종사>도 다시 읽어야겠다.

 

머리가 나쁘니 손발이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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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려라! - 뇌가 휴식하고 재정비하는 바로 그 시간
신동원 지음 / 센추리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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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의 폐해가 점점 심각해지는 요즘 사람들에게 적절한 책인 거 같다.

멀티태스킹을 멈추고 머리를 비워라, 모니터가 아니라 사람의 눈을 봐라, 접속이 아닌 접촉을 해라,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추구하고, 하이퍼링크가 가득한 웹페이지 말고 불필요한 자극이 없는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뇌와 인간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이라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왜 우리는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한가를 말한다.

1부와 2부가 거의 핵심이고, 3부에는 뇌의 시냅스 단련 문제, 몰입, 전두엽의 기능 등 뇌의 긍정적 사용법을 언급한다.

4부는 인간관계와 잡념을 비울 수 있는 생활 습관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는데 정신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겐 매우 적절한 충고들이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

이제 그 누구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사색을 즐기거나,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지 않는다. 창밖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는 대신 스마트폰 창을 통해 더 많은 사람, 더 큰 세상과의 접속을 선택한다. 덕분에 굳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다. 스마트폰과 대화하고, 스마트폰과 영화를 보고, 스마트폰과 게임을 하는 등 혼자 있어도 할 일이 차고 넘친다.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정보들만 가득하다. (1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프레임과 인식, 경험과 욕구에 따라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논리나 이성보다 인정과 배려에 기초한 공감이 훨씬 중요하다. (74)

세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진료실을 찾은 엄마가 있었다. 동갑내기 옆집 아이는 벌써 한문과 영어를 배우는데 자기 아들은 말이 너무 늦는 게 아니냐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늦은 편이었다. 검사 결과 두뇌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다른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나는 엄마와 아이의 평소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모자를 놀이방으로 안내했다. 신기한 장난감이 가득 찬 방에 들어서자 아이는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가 방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장난감을 집어들었다.

"이 빨간 자동차는 뭐지? 이렇게 하면 앞으로 가네. 신기하지 않아? 한번 해봐."

"여기 원격 비행기도 있네. 엄마가 움직여줄까?"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난감을 들이댔다. 그러자 호기심이 가득했던 아이의 얼굴은 짜증으로 뒤덮이더니 갑자기 모든 것을 거부한 채 바닥에 엎드려버렸다. 지나친 자극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발현된 것이다. 나는 그제야 멀쩡한 아이의 언어 능력이 왜 또래에 비해 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 개그 코너의 유행어처럼 자극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85-86)

사람들은 연일 새로운, 더 새로운 스마트폰을 기다리며 그것이 가진 첨단 기능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스마트한 피조물은 바로 인간의 두뇌다. (88)

책이 가진 네 가지 힘

첫째, 책은 정보의 우선순위를 제공해준다. 웹페이지에는 모든 정보가 무작위로 나와 있다. 만약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를 검색하면, 의사인 나조차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진다. 하지만 좋은 책을 사서 읽으면 ADHD에 대해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치료법을 알 수 있다.

둘째, 쓸모없는 정보를 미리 걸러준다. 방금 말했듯이 인터넷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그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있지만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엉터리 정보도 많다. 요즘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인터넷에서 찾은 지식을 정답처럼 여기는 환자를 대하는 일이다.

책에는 정제된 좋은 지식이 가득 차 있다. 수천 년에 걸쳐 검증된 고전들은 더욱 그렇다. 알짜배기 정보가 가득 차 있으므로 쓸모없는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뇌를 혹사시킬 필요가 없다.

셋째, 불필요한 자극이 없다. 웹 페이지에는 시각적·청각적 자극이 가득한 내용이 돌아다닌다. 요즘에는 움직이는 광고까지 등장했다. 이런 자극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인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뇌의 과부하를 불러온다. 하지만 선형적인Linear 읽기는 그저 책의 안내대로 따라 읽으면 되기 때문에 내용에 몰두하고 내적 성찰을 할 여유가 많아진다.

넷째, 독자의 관심사 혹은 지식 수준에 따라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가지고 간 몇 장의 지도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런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지도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당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면 내 혼란스러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한국판 구글에 런던을 치면 무려 20억 개가 넘는 검색 결과가 뜬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런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키워드를 좁혀보면 어떨까?

런던이 아닌 런던 여행을 검색하면 나오는 페이지 수가 3,500여 개가 된다. 이것 역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억"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오는 정보의 바다에서 헉헉거리고 있느니 런던 초보자인 내 눈높이에 맞춘 알짜배기 정보가 가득한 여행서 한 권을 사서 읽는 것이 낫다. 시간은 물론이고 감정적·육체적 에너지 낭비도 줄어들 것이다. (122-124)

시냅스 형성에 힘을 기울여라

"습관이 만들어질 때는 눈에 안 보이는 실과 같지만 그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그 끈이 차츰 강화되고, 거기에 또 한 가닥씩 더해지면 마침내 굵은 밧줄이 된다. 습관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의 소설가 오리슨 스웨트 마든의 말이다. 19세기에 살던 사람이 두뇌의 메커니즘을 이토록 정확히 표현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흔히들 "습관은 의지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행동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시냅스가 생성되어 두뇌 구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의 습관을 통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의식에 가까운 비언어적 기억, 비선언적 기억에 저장된 경우가 많아서다. 그래서 강제적 습관으로 뇌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가느다란 실이 한 가닥씩 더해져 굵은 밧줄이 되듯 꾸준한 노력으로 반복된 학습만이 우리의 습관과 행동을 변화시킨다. 행복한 표정으로 성취감을 맛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시냅스를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라. (168-169)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의 화학과 교수였던 멘델레예프 교수는 63개의 원소를 정렬할 일련의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원자량과 특성에 대해 진이 빠지도록 연구에 몰두했던 그가 지쳐 잠든 어느 날 모두의 예상대로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모든 원소가 조건에 맞게 정렬된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원소주기율표다. (174)

멍 때리지 못할 거면 잠이라도 제대로 자란 말이다.

나도 언젠가 퍼자다가 꿈 속에서 색다른 아이디어를 얻은 적이 있지 않은가.

인간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타인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손해를 감수하며 타인에게 협조하는 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장기적 보상을 염두에 둔 행위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대가를 바라고 오늘 선행을 하는 거라고 말하면 조금 치사한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인간의 뇌에는 그런 장치가 숨겨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조현병(정신분열증), 우울증, 간질 등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그런데 이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노나 충동을 참지 못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불어 자신의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을지 생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도덕 불감증을 드러냈다. 한 가지 예로 수술에 들어가기 전 환자한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친구에게 빌린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가장 먼저 친구에게 사정을 말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죠. 그리고 같은 가방을 사주거나 돈으로 보상해야죠."

그런데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나서 동일한 질문을 하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온다.

"뭘 어떻게 해요. 다른 가방을 빌리면 되지." (195)

약간 밀도가 떨어지고 급하게 마무리한 듯한 꼭지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필독할 만하다.

지금도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일을 하면서 스마트폰 화면에 시도때도 없이 눈과 손이 가는 사람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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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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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쯤은 읽고 내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나 되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늘 생각해 왔던 이야기들이다. 놀이가 아이들을 치유해주고 앞으로 살아갈 힘과 지혜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도나도 아이들을 억압하여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거기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대 어린이 사기극'과 '대 어린이 잔혹극'에 동참하고 있다는 거다.

놀이터에 나오는 애들이 하나도 없다는 탓은 그만 하고, 나부터 애들 데리고 나가 놀라는 것이다.

단호한 의지와 뚜렷한 철학이 필요한 행위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

 

이런저런 놀이를 이끄는 사람을 본다. 한두 사람이 이끌어서는 놀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레크리에이션이다. 놀이 속에 있는 모든 아이가 주인 노릇을 할 때 그것이 놀이다. 놀이라는 것은 대부분 혼자 할 수 없고 함께 한다. 잘 노는 사람은 노래방 가서 마이크 잡고 분위기를 신들린듯 이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따뜻한 공간과 시간을 가꿔주고 그 속에 자신이 공부했거나 아는 놀이를 공공의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흔쾌히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22-23)

 

돈이다. 세상이 돈에 미쳐가니 아이들도 돈에 미쳐간다. 결국, 일진도 돈이다. 왕따 놀이는 일진들의 소비 놀이를 떠받친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소비' 놀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까? 사지 않고는 아이들 또한 세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쇼핑 중독에 빠진 어른들의 상태와 다를 바 없다. 만약 '닭장'의 닭들에게 쇼핑이 허용되었다면 그 속이 좀 더 견딜 만한 곳이 되었을지 모른다. (38)

 

갓 아기를 낳은 엄마의 전화번호를 빼내 수백만 원 하는 책과 장난감을 꼭 사야 당신 아기가 앞으로 뒤처지지 않는다고 전화를 해대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아이들 영혼은 기업 상품 마케팅의 먹이가 되었다. 소유 그 자체가 놀이의 동기와 과정과 목표가 된 이 씁쓸한 풍경은 어른들의 내면과 크게 다른지 않다. 유희왕이나 포켓몬스터 딱지를 보라. 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 모으기 위해 산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놀이가 어른들의 욕망을 닮았단 말인가. 놀이감을 가지고 놀 때보다 놀이감을 많이 쌓아 놓거나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 옛날에는 공기놀이를 잘하거나 비석치기를 잘하거나 고무줄을 잘하는 것이 동무들 사이에서 자랑거리였는데, 지금은 오로지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가 자랑이다. (43-44)

 

아이들은 친구와 놀이로 세상을 만나야지 책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너무 많은 책을 읽어 관계에 서툴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이 꽤 많다. 이른바 독서영재라 불리는 아이들의 자폐 성향은 자주 보고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76)

 

어려서부터 밖에서 놀면서 '놀이밥'을 꼬박꼬박 하루에 서너 시간씩 먹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2시간 이상 못 한다. 왜? 좀이 쑤시고 몸이 근질거려 못한다. 그렇지만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문 앞에서부터 빼돌렸던 아이들은 이틀을 컴퓨터 앞에 앉혀놔도 아무런 불편을 모른다. 왜냐하면, 몸이 아무런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목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죽은 목숨'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게임을 하다가도 좀이 쑤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친구라도 불러내는 '산 목숨'으로 만들 것인지는 부모와 교사인 우리한테 달려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평생 쓸 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쥐가 나면 움직이고 좀이 쑤시면 벌떡 일어나는 살아 있는 몸 말이다.

 

밖에 나갔더니 우리 아이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아이를 밖에 내놓자. 그렇게 누군가 나와서 놀고 있다면 다른 집 부모도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올 것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옆집 부모와도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이 자본의 분열에 맞서는 용기가 진정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싸움 자체가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에 가장 모질게 저항하는 길 또한 우리 어른도 아이도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만약 우리 스스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못 놀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본에 먹힌 존재라 해도 좋다. 지금도 놀 수 없고 앞으로도 놀 수 없다면 삶은 끝나는 거다. 앞서 놀아야 이긴다고 했다. 더불어 안 사야 이긴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에 이기려면 외로워야 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지는 거다. (215-216)

 

91-92쪽에는 또 이런 글이 있다.

 

 

사주지 마시라

아이들은 엄마아빠와 놀고 싶은데

아이들은 동무들끼리 놀고 싶은데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고 싶은데

장난감을 사서 손에 쥐어주고

한꺼번에 책을 사주고

물건을 사주고 게임기를 사주고

어디를 자꾸 보내다

사지 마시라

사주지 마시라

사주면 아이들은 놀지 못한다

사주면 아이들 놀이는 멈춘다

사주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구르는 돌보다 못한

값비싼 장난감부터 내다 버려야 한다

부모가 사다 준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

아이들의 자유는 그 속에 갇히고

아이들의 퍼덕거리던 몸짓은 잦아든다

세상은 사야 한다고 날마다 떠들어대지만

아이들은 사주지 말아야

맨손과 맨발이어야 아이들로 자란다

사지 말아야 놀이는 시작한다

뭐가 없어야 놀이는 시작한다

심심해야 놀이는 시작한다

사지 않고 사주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이 돈 비린내 진동하는 화폐의 세상을 사는

참된 부모는 사지 않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사지 않고 아이와 지내는 사람이다

사지 않고 아이와 노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지 않고 생활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아무 것도 사주지 말라는 얘기는 조금 지나친 듯하지만 이 땅의 부모라면 새겨 들어야 할 진심 어린 충고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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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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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랄까. 매력 넘치고, 확 달아오르게 만드는 공부론이다.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도 많았고, 공감하는 주장도 꽤 있었다.

 

결국

읽어라, 숨 쉬고 있을 때 읽을 것이며, 읽어도 고전을 읽고, 이를 낭송하고, 구술하고, 함께 공부해라, 우리 몸과 일상에 주목해라,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생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배워라, 배움으로써 가르치라,는 얘기였다.

 

옳다.

옳고, 좋아 보이나 누구나 다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

공부해서 남 주자는 건데, 공부가 꼭 남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자폐적' 글쓰기도 실제로 그런 걸 수시로 하고 있는 나로서는 부정해야할 것이 아니라 어차피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것마저도 하나의 '공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조차도 내 일상이라면 일상일 수 있고, 거기에 더욱 빠져들어 바닥을 쳐 보지 않고 어찌 내 삶과 몸과 일상에 주목할 수 있단 말인가.

 

제도권에서 벗어나고 근대적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또 어떻게 버텨내느냐도 중요하다.

무조건 대학교(학교)는 틀렸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

대학교 가면 모든 이가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도 편견이다.

공부가 안되는 대학, 공부하지 않는 교수는 점점 사라지겠지.

이제 대학이 죽었다고 진단한 글쓴이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조하지만 그럼에도 살아 남는 대학과 학생과 교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질문이 없고, 독서를 하지 않으며, '인정욕망'와 '죽음충동'에 휩싸여 있다고만 보는 건 힘들지 않을까.

책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의견은 귀담아 들어야겠지만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편들은 너무 막연하고 이상적이다.

또 독서 대상으로 고전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다.

아예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으라고 하니(125쪽) 그럼 책 읽으면서 맨날 골머리 싸매고만 있으란 말인가.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는 건 결국 모임을 만들어서 의견을 나누라는 것이고, 눈 앞의 현실에 '존재 전부를 기투'하라는 것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얘기겠지. 근데 공부 한답시고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공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선동적인 책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지나친 일반화가 조금 불편하다.

 

 

그런데, 이 모든 불평에도 여전히 장점이 많은 책이다.

고전은 눈이 아니라 소리로 만나야 한다는 주장은 아마 중국 고전과 시에 해당할 것이다.

모든 문학과 인문서들을 소리로 만날 필요는 없다. 소리보단 이미지를 떠올리며 읽어야 하는 책도 많다.

소통하면서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줘라, 같이 밥 먹어라, 문체를 바꾸려면 표정과 몸과 삶을 바꿔라, 아이와 함께 책에 대해 얘기해라 - 이런 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실천할 만하다.

 

문체는 경쾌하고 속도가 빠르다. 다만 물음표와 느낌표는 너무 남발했다.

'자유에의 도정', '생명에의 의지', '운명으로부터의 소외에 다름 아니다'와 같은 진부한 문체는 고치고,

'코뮌', '네트워킹' , '클리나멘', '레토릭', '기투(企投)해야' 등 현학적인 낱말들은 코뮌→모임/동아리, 네트워킹만남/관계/어울림, 레토릭수사/말장난, 기투해야(내)던져야 등으로 쉽게 쓰면 안되나. 클리나멘은 '변곡점'이라고 함께 써 놓았지만, 그것도 어렵긴 마찬가지.

 

하지만 아래 글들은 참 좋아서 되풀이해서 읽고 싶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부가 되면, 거기에는 배움과 가르침의 경계가 사라진다. 누구든 배울 수 있고, 누구든 가르칠 수 있다. 더이상 배울 게 없을 만큼 많이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모자라는 사람도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이 배움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 이탁오가 말한 바,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사우(師友)의 의미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188)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189-190)

 

초·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억압적 구조, 오직 막무가내로 자기 자식만 챙기는 학부모들,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등 교실의 붕괴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 교사로 살아간다는 건 실로 힘든 일이리라.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왜 부모들은 공부하지 않는가?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갖은 고생도 마다 않고, 심지어 기러기 아빠가 되는 일까지 다 감수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부모들이 앞장서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들한테만 공부를 강조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일단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설령 당장 성적이 처지고 대학에 못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이 경우엔 딱 들어맞는다. 남보다 약간 뒤늦을 수도 있고, 먼 길을 우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어차피 앞으로는 직업과 가족의 유동성이 더 한층 심화될 것이다. 평생직장은 이래저래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당장의 성공에 끌려다니지 말고,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식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미 강조했다시피,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 자식을 배려하는 것은 자칫 과잉보호로 빠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지금은 아이들이 집안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서로에 대한 의존과 집착에 빠져들 확률이 아주 높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 함께 공부를 하면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 평생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 요컨대, 부모는 단지 배움으로써만 자식을 가르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은 늘 스키장이나 화려한 외출, 해외여행 따위로 표현되는가?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자식 혹은 친척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 가장 싸게, 가장 밀도있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190-192)

 

 

스키장, 해외여행 운운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나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노는 것도 중요하다(먹는 거 중요하다면서 노는 건 왜 푸대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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