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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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랄까. 매력 넘치고, 확 달아오르게 만드는 공부론이다.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도 많았고, 공감하는 주장도 꽤 있었다.

 

결국

읽어라, 숨 쉬고 있을 때 읽을 것이며, 읽어도 고전을 읽고, 이를 낭송하고, 구술하고, 함께 공부해라, 우리 몸과 일상에 주목해라,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생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배워라, 배움으로써 가르치라,는 얘기였다.

 

옳다.

옳고, 좋아 보이나 누구나 다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

공부해서 남 주자는 건데, 공부가 꼭 남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자폐적' 글쓰기도 실제로 그런 걸 수시로 하고 있는 나로서는 부정해야할 것이 아니라 어차피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것마저도 하나의 '공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조차도 내 일상이라면 일상일 수 있고, 거기에 더욱 빠져들어 바닥을 쳐 보지 않고 어찌 내 삶과 몸과 일상에 주목할 수 있단 말인가.

 

제도권에서 벗어나고 근대적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또 어떻게 버텨내느냐도 중요하다.

무조건 대학교(학교)는 틀렸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

대학교 가면 모든 이가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도 편견이다.

공부가 안되는 대학, 공부하지 않는 교수는 점점 사라지겠지.

이제 대학이 죽었다고 진단한 글쓴이의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조하지만 그럼에도 살아 남는 대학과 학생과 교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질문이 없고, 독서를 하지 않으며, '인정욕망'와 '죽음충동'에 휩싸여 있다고만 보는 건 힘들지 않을까.

책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의견은 귀담아 들어야겠지만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편들은 너무 막연하고 이상적이다.

또 독서 대상으로 고전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다.

아예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으라고 하니(125쪽) 그럼 책 읽으면서 맨날 골머리 싸매고만 있으란 말인가.

'앎의 코뮌'에 접속하라는 건 결국 모임을 만들어서 의견을 나누라는 것이고, 눈 앞의 현실에 '존재 전부를 기투'하라는 것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얘기겠지. 근데 공부 한답시고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공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선동적인 책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지나친 일반화가 조금 불편하다.

 

 

그런데, 이 모든 불평에도 여전히 장점이 많은 책이다.

고전은 눈이 아니라 소리로 만나야 한다는 주장은 아마 중국 고전과 시에 해당할 것이다.

모든 문학과 인문서들을 소리로 만날 필요는 없다. 소리보단 이미지를 떠올리며 읽어야 하는 책도 많다.

소통하면서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줘라, 같이 밥 먹어라, 문체를 바꾸려면 표정과 몸과 삶을 바꿔라, 아이와 함께 책에 대해 얘기해라 - 이런 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실천할 만하다.

 

문체는 경쾌하고 속도가 빠르다. 다만 물음표와 느낌표는 너무 남발했다.

'자유에의 도정', '생명에의 의지', '운명으로부터의 소외에 다름 아니다'와 같은 진부한 문체는 고치고,

'코뮌', '네트워킹' , '클리나멘', '레토릭', '기투(企投)해야' 등 현학적인 낱말들은 코뮌→모임/동아리, 네트워킹만남/관계/어울림, 레토릭수사/말장난, 기투해야(내)던져야 등으로 쉽게 쓰면 안되나. 클리나멘은 '변곡점'이라고 함께 써 놓았지만, 그것도 어렵긴 마찬가지.

 

하지만 아래 글들은 참 좋아서 되풀이해서 읽고 싶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부가 되면, 거기에는 배움과 가르침의 경계가 사라진다. 누구든 배울 수 있고, 누구든 가르칠 수 있다. 더이상 배울 게 없을 만큼 많이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모자라는 사람도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이 배움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 이탁오가 말한 바,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사우(師友)의 의미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188)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189-190)

 

초·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억압적 구조, 오직 막무가내로 자기 자식만 챙기는 학부모들,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등 교실의 붕괴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 교사로 살아간다는 건 실로 힘든 일이리라.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왜 부모들은 공부하지 않는가?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갖은 고생도 마다 않고, 심지어 기러기 아빠가 되는 일까지 다 감수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부모들이 앞장서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들한테만 공부를 강조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일단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설령 당장 성적이 처지고 대학에 못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이 경우엔 딱 들어맞는다. 남보다 약간 뒤늦을 수도 있고, 먼 길을 우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어차피 앞으로는 직업과 가족의 유동성이 더 한층 심화될 것이다. 평생직장은 이래저래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당장의 성공에 끌려다니지 말고,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식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미 강조했다시피,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 자식을 배려하는 것은 자칫 과잉보호로 빠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지금은 아이들이 집안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서로에 대한 의존과 집착에 빠져들 확률이 아주 높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 함께 공부를 하면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 평생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 요컨대, 부모는 단지 배움으로써만 자식을 가르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은 늘 스키장이나 화려한 외출, 해외여행 따위로 표현되는가?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자식 혹은 친척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 가장 싸게, 가장 밀도있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190-192)

 

 

스키장, 해외여행 운운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나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노는 것도 중요하다(먹는 거 중요하다면서 노는 건 왜 푸대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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