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드>(신정옥 옮김, 전예원)를 읽다. 세익스피어 작품 치고는 출퇴근 시간에 하루면 뚝딱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희곡. 세익스피어의 한문장을 찾기 위해 펼쳐든 것이지만, 그 문장은 맥베드에 없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운명을 기꺼이 수락하는 사내의 장중한 독백들이 눈에 띄었다 :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우매한 인간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준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5막)

세익스피어를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동용으로 윤색돼 희곡 아닌 소설로 뒤바뀐 것. 성경 역시 찰스 램이 풀어 쓴 것으로 읽었을 것이다. 초등학생때의 일이니 <햄릿>의 작가를 찰스 램으로 오랫동안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대로 읽은 것은 빨간색 천으로 싸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오화섭 선생 번역의 세익스피어였을 것. 깨알같은 글씨의 위 아래 두단 세로조판의 이 전집은 스탕달도 플로베르도 가르쳐준 고마운 전집이다. 세익스피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바람둥이 페트루키오의 장광설이 재밌어 몇 번이나 읽었을 것이다.

국내에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그의 연극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오화섭 선생이 아니었을까. 이대 교수이자 남로당 비밀 조직책이었던 아내를 우파의 총에 의해 잃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세익스피어 번역이었던 것. 전후 극우반동의 시대에 자신의 정치적 이력과 성향을 숨긴 채, 고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그의 아들인 오세철 교수가 경영학 교수에서 점차 완강한 좌파로 변신해가는 과정은 어찌할 수 없는 핏줄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오세철이 <다시혁명을 말한다>(빛나는전망, 2009)에서 고백하는 이 집안의 내력을 나는 아프게 읽었다.

<맥베드>는 마녀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맥베드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 운명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본성의 인격화인 것처럼, 맥베드의 마녀는 그의 본성에 내재한 권력 욕망의 현현(epiphany)이었을 것. 비극은 우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맥베드는 운명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이 운명을 수락하고 스스로 패배한다. 그리스 비극과 이 작품이 갈라지는 지점. 운명이란 불가해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기질’의 다른 표현일 것. 백석이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 중얼댄 것은 그의 착하고 여린 심성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

맥베드는 고뇌의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의 아내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 “자, 어서 오너라. 눈을 가리는 밤의 어둠이여. 연민의 정이 고인 낮의 부드러운 눈을 가려다오. 그리하여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나에게 겁주고 있는 저자의 목숨의 증서를 갈기갈기 찢어다오. 어둠발이 내리는 구나, 까마귀는 서둘러 숲속 보금자리로 가고 있다. 낮의 세계의 선량한 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졸기 시작하고, 밤의 사악한 앞잡이들은 먹이를 찾아 눈을 붉힌다.” (3막, 맥베드의 독백) 그러나, 확실히 여자는 욕망 앞에 더 강하다 : “무서운 음모에 끼어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날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끊어, 그래서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이 동하여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 어두운 밤아, 깃을 펼쳐 지옥의 시커먼 연기로 널 뒤덮어라. 나의 날카로운 단도가 찌르는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늘이 암흑의 장막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면서 ‘안된다, 안된다’하고 외치지 않도록(맥베드의 아내, 1막)” 
 

신정옥의 번역은 운문 번역이 아니다. 최종철의 번역이 세익스피어 문장의 리듬을 살린 운문번역이라는데, 그냥 읽기에는 신정옥의 번역이 더 낫다. 게다가 싸고 얇다. 그런데, 전예원의 이 세익스피어 시리즈가 절판인지 검색이 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나머지도 헌책방에서나 찾아야할 모양이다.  

  

* P.S. 마녀의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들(4막), 요컨대 절대적인 악을 구성하는 혐오와 금기, 더러움의 목록들인 셈. 메리 더글러스의 ‘오염과 순수’의 분류체계를 원용해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문화적 금기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 흥미로운 것은 독사의 살점와 늑대이빨과 나란히 유태인과 터키인, 타르타르인(중앙아시아)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를 두고 세익스피어를 반유대주의자이자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오버일까?  


“늪에서 자란 독사의 살점아, 끓어라 익어라 가마솥 속에서.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깃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갈라진 혀와 맹사의 독침,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의 날개, 이 주문으로 무서운 재앙을 일으켜 지옥의 국물처럼 펄펄 끓어라. (...) 용의 비늘과 늑대의 이빨, 마녀의 미이라 탐욕스런 상어의 위와 창자, 신을 모독하는 유태인의 간장, 산양의 쓸개와 월식의 밤에 꺾은 주목의 가지들, 터키인의 코, 타르타르인의 입술, 창녀가 낳아서 목을 졸라 죽여 시궁창에 버린 갓난애의 손가락, 죄다 집어넣어 진국으로 끓여라. 호랑이 내장을 더 넣어서 가마솥 국을 끓여라”(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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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2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화섭 선생 그러면 따님인 오혜령 씨가 먼저 생각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그이의 암 투병 에세이 '일어나 비추어라'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 대학 들어가고 나서 오화섭 박노경 오세철 오혜령...이런 이름을
다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정로 문화일보 앞을 지날 때마다 옛 동양극장 사진이 떠오르는데
오화섭 선생의 집은 아마 그 동양극장 자리 길 건너편에 있었을 겁니다.
북아현동 어디 였다는 기록 본 적 있는데 가물가물...

모든사이 2010-05-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네 쓸모없는지식에 대한 탐닉도 어지간하다. 이 잡식성 호사가야. 집 자리가 뭘 그리 중요하냐. ㅎㅎ

이진성 2010-05-2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함다.

'서울의 오래된 극장은 서대문 네거리 못 미처의 동양극장이다(...)
바로 건너편에 돌로 지은 우람한 집 2층에 '여인소극장'이 있었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박노경의 자연장(紫煙莊)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효선(아동문학가)의 '헐려버린 극장' 중에서

모든사이 2010-05-2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네가 이 서재에 거의 유일하게 댓글을 주르르 다는 열혈독자이니 딴 건 둘째치고 그거 때문에라도 눈물나게 고맙다. 대체 어효선이라니, 언제적 이름이더냐. 초딩때 보고 수십년만에 듣는 이름이로구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