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읽은 두권의 책. 김기협 선생의 <페리스코프>(서해문집)와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 두권 모두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프게 읽었다. 김기협-유시민-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가 애석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김기협과 유시민의 기이한 인연도 그러하거니와 김기협의 책이 거의 노무현에 대한 나름의 추념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세속의 시각으로 경기고-서울대의 주류 엘리트의 길을 걷다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된 김기협은 자연스럽게 노무현과 조우한다. 이게 역사적 필연인지, 혹은 정치적 사회적 마이너리티였던 노무현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정치공학으로 안되는 어떤 진정성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은 눈 밝은 자들의 눈에는 아주 명확한 눈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공학을 거부했고(아니, 생래적으로 그에 맞지 않았고) 김기협의 눈은 그걸 꿰뚫어 보고 기꺼이 ‘노빠’를 자임했다.
사유의 깊이가 어떤 지극한 경지에 달할 때 언어는 지시대상을 넘어 보이되 보이지 않는 진리에 육박한다. 나는 노무현의 ‘유서’가 그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偈頌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어느 해 인가, 조계사 앞 불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가 샀던 ‘선시’ 앤솔로지에서 얼핏 읽었던 김달진 선생이 모은 禪詩集 의 풍경은 그러했다. 그가 죽었던 지난해 어느 시사지에서 그의 비문을 응모했을 때, 나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전직 대통령이 되어서도 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내용의 비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간결 완미해야할 비문으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그 잡지에 오롯이 실려 내심 반갑기도 했다. 이 완강한 기득권 동맹의 철저한 배제의 논리 앞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이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불편했다. 출근버스 안에서 가끔씩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느라 힘겨웠다. 그만큼 그의 삶이 내게 ‘객관화’되지 않은 탓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성찰적 지식인’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성찰의 과잉은 때로 과도한 부끄러움과 명분론을 낳기도 한다. 위선과 위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성찰’하며 사는 것은 스스로의 쪽팔림을 인식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는 생전의 그를 다섯 번 만났다. 민주당 경선후보 시절 금강빌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실에서, 그리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직전에, 그리고 그 후에 두 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점점 역사의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마흔이 넘은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눈빛은 더 형형해졌고, 자신감과 에너지는 점점 더 흘러 넘쳤다. 저렇게 한 개인은 역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정몽준의 사진을 두 번에 걸쳐 두시간 동안 찍었던 한 선배는 “아무리 눈에 초점을 맞춰도 도대체 눈빛이 맑게 찍히질 않아”하고 투덜거렸다. 그는 작가의 반열에 드는 뛰어난 사진작가였다. 눈에서 광채가 나지 않는 정치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는 노무현이 이길 것이라 직감했다. 결단을 앞둔 사람의 눈이 그렇게 정직하다는 것을 나는 사진기자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협과 노무현의 책이 아프고 쓰린 것은 그런 눈을 가진 정치인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공과와는 별개로 그나마 당대와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을 잃어버렸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접근, 요컨대 그는 토론이 가능한 대통령이었다. 천안함 사태를 맞은 청와대에서 전직이랍시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전두환과 김영삼 둘 뿐이라는 것은 정말 희극적이다. 노무현의 책이 아주아주 많이 팔려 조중동에 가려워졌던 그의 진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노무현과 그의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된 회고와 평가를 할 수 있기를.
노무현의 신화를 넘어서는 작업은 조만간 어디에서든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고한 보수기득권 동맹에 에워싸였던, 그래서 개혁의 폭이 대단히 제한되었던 어떤 정치세력의 운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불가피한 '제한성'을 애써 외면하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서 정치적 리얼리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창비)과 같은 전시대에 대한 평가서가 가진 한계도 그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이 책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하나의 규범적 비판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이성과 지향이 한국사회라는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내는 복합성과 중층성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레디앙같은 진보인터넷 신문이나 과거 진보누리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들의 인식과 논리가 참으로 앙상하고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알아도 헤게모니적 실천과는 영 동떨어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