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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 21세기의 계보 ㅣ 프런티어21 9
조반니 아리기 지음, 강진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조반니 아리기는 내게 이름만 익숙한 사회학자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저작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학자쯤으로, 세계체제론자, <뉴레프트 리뷰>에 간혹 글이 실리곤 하는 학자로 안 것이 전부다. 모리스 돕, 폴 스위지, 로버트 브레너 등 그보다 앞선 좌파 경제사학자들의 글에도 익숙치 않은 내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읽으면서 버거워 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이 두꺼운 책을 추천한 놈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아리기의 방법론적 시각을 보여주는 1부와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대목인 4부에 대한 정리와 인상기다.
아리기의 관심사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중국의 세기’를 역사사회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초까지는 동아시아가 서구사회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해 있었다. 그가 ‘大分岐’라고 부르는 이 시기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측 세계’(서구 선진국)가 전세를 역전시켜 20세기 초까지 세계경제를 주도했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다시 이 분기는 역전됐다. 바로 이 역전된 분기의 시기, 곧 ‘신아시아 시대’가 역사적으로 부상하게 된 연원과 매커니즘을 분석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경제발전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리기의 목적이다.
그런데, 왜 애덤 스미스가 베이징에 와 있는가. 중국의 시장경제 확산은 그 속도와 파급력 면에서 가히 “시장레닌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리기는 ‘디트로이트의 마르크스’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대비시킨다. 마르크스의 논리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계속된 유럽에서 더 잘 관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노자대립의 ‘전형’은 미국, 그것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였다고 말한다. <노동과 독점자본>으로 유명한 해리 브레이버만이 “몸으로 쓴” 마르크스주의 노동과정론이 출현할 수 있는 맥락도 바로 여기서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미국 노동운동은 극히 쇠약한 지경이었지만, 브레이버만처럼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은 “시장의 확대가 경제발전 정도를 견인한다”는 스미스적 시각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는 아리기가 중국을 분석하기 위해 들이댄 이론적 프리즘인 셈이다.
동아시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의 ‘근면혁명’이라는 독특한 설명방법을 끌어온다. 19세기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발전은 소농경제에 입각한 노동집약적인 산업화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가족경영을 포함한 노동집약적인 농업경제, 곧 ‘인적자본’을 통한 경제발전을 통해 세계 GDP에서 서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가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의 기적’을 이루었다면, 동아시아는 노동집약적인 에너지 절약형 산업화를 통해 ‘분배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아리기가 애덤 스미스를 끌어들이는 부분이다. 그는 스미스에 대한 몇몇 이론가의 해석에 힘입어 “자기조정적인 시장의 옹호자, 노동분업의 옹호자, 경제팽창 엔진으로서의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 강한 국가의 존재를 전제한 자본을 규율하고 통제하려한 경제학자로 부각시킨다. 스미스는 “공공서비스를 하기에 충분한 세입을 국가에 공급”하기 위해 강한 국가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본친화적이라기 보다 노동친화적이고, 기술적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그 유명한 핀공장의 사례)를 말하면서도 노동분업이 노동자의 지적 능력의 퇴화를 가져온다는 사실로 인하여 분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런 해석. <도덕감정론>에 기대어 시장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지적은 들어봤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계몽적인 대목이었다. 스미스는 중국이 내부의 농경의 확대와 개선이 제조업으로, 제조업의 확대가 외국무역의 진전으로 나아간 “자연스러운 발전경로” 밟았음에 비해, 서구는 외국무역이 제조업을 도입하고, 이것이 다시 농업생산의 개량으로 나아간 정반대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러운 발전경로”라고 평가한다. 중국적 발전경로에서 농업노동자는 생산과정에 대한 주의나 판단이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구 산업노동자보다 지적 퇴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스미스에게 중국은 “시장 기반 발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시장은 자본주의적 관계라기다 조금 더 포괄적인 상업적 거래를 의미한다. 유럽은 외국무역에 의존하고, 중국은 국내의 무역에 기반한 경로를 발전시켜왔는데, 스기하라가 말한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은 소농경제에 기반한 노동력이기 때문에 상황에 유연한 대처능력, 예견과 방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의 유연생산이론에서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노동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대목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능동적 참여를 보장하는 도요타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중국적 발전과정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서구의 경우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농업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되어 산업노동자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파괴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소농경제가 온존되면서 시장기반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적 설명이 중국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구의 경우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경제적 주도국의 변천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비자본주의 경제의 파괴와 식민화를 통해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에 대처하며 자본의 자기팽창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중국과 서구의 또다른 차이는 국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1500년 이래로 중국과 서구 자본주의의 분기의 원인은 서구는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를 발견했으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고, “서구와 중국의 경로의 차이는 특정 비즈니스나 국가제도의 존재가 아니라, 상이한 권력구조내의 조합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는 자본가들의 국가의 힘을 넘어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던 반면, 중국은 국가의 자본가들을 경쟁시키고 국익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말 “자본주의는 오로지 국가와 동일시되거나 자본주의가 바로 국가일 때만 승리한다”는 말은 서구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스미스적 시각에서 본 이런 ‘유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신자유주의적 개방에 따른 결과라는 것은 “깨져야할 신화”다. 중국과 인도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따르지 않았고, 그걸 따른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몰락했다. 중국은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내주지 않고 자신의 룰과 관습을 고집하는 “자국중심적 국민경제의 장점을 결합”하여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국가의 역할은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의 용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본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고 개혁 역시 사유화가 아니라 국가독점과 장벽 제거를 위한 경쟁 강화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중국에서의 자본가는 마르크스의 자본가가 아니라 국익에 복무하는 스미스적 자본가다.
강탈없는 축적과정.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역의 토착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이었는데, 이는 농촌의 잉여인구를 흡수하고 시장진입에 다른 경쟁압력을 완화하고, 농민에게 수입을 보장하여 농민의 조세부담을 완화하고, 이윤과 임대수입을 지방정부에 재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적 인프라로 작용했다. 노동자에 대한 “강탈없는 축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주목을 요한다. 윈펑의 자동차 공장에는 로봇이 한대도 없는데, 여기서 만드는 수제 호화 지프는 8만~15만 달러에 팔린다.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를 감축하지 않고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 아리기는 “중국의 경쟁우위는 노동자 임금이 싸다는 게 아니라 관리자 임금이 미국보다 35% 싸다는 것”에서 찾는다. 자본을 절약하고 노동에 더 많은 역할을 다시 맡김으로써 중국의 공장들은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실제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아리기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만들어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중국의 사회주의 전통은 국가개혁에 대한 내부 억지력으로, 국가의 부패나 불평등한 시장화에 대한 항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은 당과 관료들에게는 문화혁명으로 약화된 힘과 특권을 새롭게 부여했으며, 중국인민들에게는 중국 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공자산의 전유, 국가기금의 횡령 등 강탈에 의한 축적이 거대한 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같은 문제들은 경제적 성공이 낳은 모순들, 예컨대 당-국가와 중국의 서발턴 사이의 전통적인 마오주의적 관계(양방향 사회주의)가 당-국가와 신흥 부르주아지로 대체되는 방식의 문제를 낳았다. 현재로서는 “중국에는 노동운동이 없다”는 전통적 상식은 전복되고 있다.
후진타오는 농촌경제 중시와 균형발전 전략이라는 진로 변경을 꾀하고 있는데, 이는 1장에서 말하는 후진타오의 마르크스주의 재해석과도 일맥상통한다. 농업중심 전략은 마오주의적 전통의 재해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득불평등의 확대에 따른 대중의 불만이 혁명전통을 침식할 우려에 대한 공식적 대응전략이기도 하다. 이미 중국 경제는 마오시대의 사회적 성과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은 농업생산 혁명과 교육의 보급, 기초복지의 확대다. 요컨대,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의 사회적 토대는 마오시대에 이미 갖춰졌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베이징 컨센서스의 등장이고, 이것의 핵심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와 지방화(localization)라고 규정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과거의 제3세계 비동맹 회의인 ‘반둥’의 부활인 ‘새로운 반둥 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대중전략은 제임스 핑커턴의 제3자전략 ; 1차 대전처럼 유럽국가들끼리 싸우도록 놔두고 자금과 군수품을 공급, 헨리 키신저의 ‘끌어들이기 전략 ;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질서로 편입, 로버트 카플란 ;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 등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마땅치 않다.
1997~98년 경제위기는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이 미국 패권이 관철되는 IMF에서 중국으로 옮겨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아시아 원조국가가 됐다. 흥미로운 표현 : “중국은 북쪽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정치적 단서는 더 적게 붙이고, 비싼 상담료도 없으면서 더 많은 차관을 남측국가들에게 제공하고 비용은 북측의 절반밖에 안드는 벽지의 대규모 복합 인프라 프로젝트를 제공하여 남측국가들이 보다 더 여유로운 조건으로 천연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와 중국의 거대인구를 고려할 때 휴대폰의 새로운 표준은 그곳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고, MS의 대체물 역시 중국제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부상을 설명하면서 아리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낙관적이다. 중국과 인도의 지배집단이 자국 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생겨난 생태적 황폐화에서 해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적 발전경로가 동아시아적 경로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근대화의 혜택을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는 서구의 길이 아니라 강탈 없는 축적과 농업기반의 자국중심의 경제발전 전략, 내식대로 말하자면, 내포적 발전전략을 통해 경제적으로 세계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디의 말 : “만약 3억명이나 되는 한 나라 전체가 비슷한 경제적 착취에 몰두한다면 세계를 메뚜기떼처럼 초토화할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4분의 1이라도 미국과 같은 생산 소비 방식을 취한다면 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질식사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결론 : “만약 이 방향전환이 중국의 자국중심적 시장기반 발전, 강탈없는 축적,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자원을 동원하고, 대중의 참여를 통해 정책을 만들어가는 정부 등과 같은 중국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은 문화적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문명연방을 출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방향전환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국은 아마도 사회적, 정치적 대혼란의 새로운 진원지로 변모하여, 흔들리는 세계 지배를 확립하려는 북측(서구 선진국)의 시도를 촉진할 것이다. 혹은 조지프 슘페터의 말을 다시 빌리면, 냉전 세계 질서의 청산에 수반하여 나타난 폭력의 격화라는 공포(혹은 영광) 속에서 인류가 불타버리는 것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리기의 논지. 두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그는 자주 중국=동아시아로 혼동하고 있는데, 중국은 동아시아의 일원이지만 곧 동아시아 전체를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국적 경제발전 과정은 일본과 한국과도 대단히 상이하며 일치보다는 불일치의 경험이 많지 않나하는 것이다. 복수의 동아시아적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 이는 해제에서 역자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세계사적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기여해왔고,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이다. 미국의 포식성과 중국의 포식성 중 어느 것이 더 잔혹스러울 것인가. 제국주의 미국과 제국주의 중국은 어느 것이 더 긍정적일까? 미국은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타자에게 강요하고 심어 왔지만, 중국 역시 과거 제국경영의 과정에서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티벳과 신장위구르를 보라.
어쨌든 방대한 두께만큼이나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해, 나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설명이었다. 아리기의 중국에 대한 상대적 애정(?)은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역시 사회주의라는 국가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도 있다. 마르크스를 부실하게 관리했던 구소련이나 국가적 실천이라는 경험이 부재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중국은 이들 좌파들에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아니었을 런지. 동양을 ‘발견한’ 이들 서구 좌파 마르크시스트(캘리포니아 학파?) 중 한 사람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책 제목이 <리오리엔트>라는 것이 눈에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