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통략(黨議通略) - 모략과 음모의 당쟁사 자유문고 동양학총서 39
이건창 / 자유문고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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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 최후의 광경>, 이 책을 어느 헌 책방에서 구했는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툰 그림솜씨가 분명해 보이는 표지화가 인상적이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가야금을 뜯고 있는 백발의 노인. 그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又半’이라는 출판사. 저자인 민영규 선생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인문관 출입구의 교수명단에서 본 바가 있었으나 그가 어떤 학자였는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가장 아끼는 ‘옛 책’이자 헌책방에서 구한 최고의 보물이다. 1994년에 나온 책이니 ‘古書’라 하기엔 다소 민망하다.

강화학은 구한말 강화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학자들이 축적한 학문전통을 일컫는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책에 기대어 송대 양명학의 조선적 지류로 섣불리 짐작할 뿐이다. 이 강화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조선후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두루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이다. 조선후기 가객 김천택이 麗韓八大家의 하나로 꼽은 영재 이건창, 그의 동생인 난곡 이건승, 일제 하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그리고 6.25 당시 납북된 양명학 연구의 대가 위당 정인보 선생이 바로 그 주역들. 위당의 제자인 저자 민영규 선생은 강화 양명학의 전통을 이은 직계 제자이자 마지막 세대이리라.


강화 양명학의 흐름은 멀리 지리산 인근 구례로까지 뻗어 매천 황현과 그의 동생 석전 황원으로 이어진다. 알다시피 황현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자결’로 생을 마감한 인물. 이 책의 표제이자 여기 실린 글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인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바로 매천의 동생인 석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석전 황원은 형인 황현이 죽은 1910년으로부터 34년이 지난 1944년 구례 천은사 앞의 연못에 몸을 던진다.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한국의 전통적 보수 지식인이라할 이 두 형제의 죽음 사이를 기록한 것이다. 이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강화 양명학자들의 ‘송장의 내력'을 더듬어간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황현은 “내가 꼭 죽어야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분해서”라는 유서를 남긴다. 민영규 선생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를 강화 양명학의 ‘엄숙한 動機論’으로 해석한다. 왕양명은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다.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라고 가르쳤다. 강화 양명학의 대가 이건창의 조부인 이시원은 손주에게 “질의 참됨만이 네가 갈 길이다. 결과의 大小高下는 물을 바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바로 이 지점, 지식인으로서의 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하는 자못 철학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홍구 교수는 참된 보수를 논하는 자리에서 강화학파와 영재 이건창을 불러온다.(http://www.moonmang.org/bbs/zboard.php?id=library&no=1094) 장엄하게 사라져간 한국의 전통적 보수지식인의 한 정점에 강화학파가 있다. 앎과 행함이 하나(知行合一)의 추상적 가르침은 강화학파에게서 그 구체적 현현으로 실감된다. 나는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죽음의 길을 택한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슬퍼서 눈물을 찔끔거리곤 했다. 영재 이건창이 귀양지 전남 보성에서 돌아와 강화도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만개한 강화학파는 이들의 죽음으로 원류가 끊겨 버렸다.


저자 민영규 선생. 2005년 유명을 달리함
이건창은 중세적 지배질서에 도전한 동학란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보수 지식인인 이유다. 갑오개혁 역시 그에게는 용납 불가능한 ‘개혁’이었다. “아닌 밤중에 일본군대가 기습해와서 서울의 요소와 궁궐의 안팎을 점령한 것이 무엇이 경사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라 체모를 뜯어 고친다고들 하니 이것이 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이건방) 명성황후 시해 직후 대신들이 내린 詔書는 “죽임을 당한 왕비로 말하자면 극악무도 죄당만사하기로 이제부터 왕비라는 칭호를 폐하고 庶人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니 모두들 그렇게 알렷다”는 것이니, 갑오개혁으로 추진된 상투 자르기는 “상투를 자르고 안 자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근대개혁기의 '보수적 태도'는 ‘엄숙한 동기론’에 바탕했던 것.


1910년 10월 2일. 이건창의 동생 난곡 이건승과 이건방, 홍문원, 정기승 일행은 만주로 떠난다.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한 채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치 이웃에게라도 가는 듯 길을 나서 북풍한설 몰아치는, 인연도 지인도 없는 만주의 회인현 홍도촌으로 향한다. 홍문원은 스물 둘에 대과에 급제하고 서른 여덟에 공조, 예조, 이조 참판을 지낸 명문 거족. 다른 인물들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면서 고관을 지낸 거물들. 정기당과 이건승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자결하기로 결심했으나 주변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기당은 칼로 자결을 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말리는 바람에 칼날에 손을 베어 한쪽 손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높은 벼슬에 올랐고, 재산도 넉넉했던 이들은 60이 훌쩍 넘어 자발적 가난과 고행의 길로, 만주의 허허벌판에서 송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1914년 61세의 나이로 홍문원이 죽어 돌아오고, 이건승은 1924년 67세로 죽어 돌아오고, 정기당은 1925년 7월 72세의 나이로 죽어 돌아온다. 앞뒤 16년의 세월동안 이들은 부러 고행을 자처하고 죽었어도 관 하나 살돈이 없어 들것이 들린채로 옮겨야 했던, 극도의 자발적 궁핍 속에서 살다 죽어간다.

식민지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중 하나는 아나키스트인 이회영 집안의 만주 집단이주일 것이다. 서울의 명문가이자 당대의 재산가였던 이회영 집안은 가산을 정리해 만주 삼원보로 이주한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간 이들 행렬은 마필 100여 마리, 포장마차 10여대, 이동식구만 67명에 이르는 대이동이었다고 전한다.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 말해주듯이 이회영의 만주행이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식민지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었다면, 강화학파 ‘노인’들의 만주행은 오로지 철저한 실존적 자기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허망하고 부질없으며 무책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망과 환멸의 한국 근대사에서 이같은 도저한 정신주의를 간직한 인물들의 존재만으로 나는 한줌의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을 두고두고 곱씹어 읽는 이유는 이들의 정신주의가 지금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프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의 누추하고 비루한 인간들에게 이만한 ‘엄숙한 동기론’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노릇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정리한 대로, 보수가 전통에 대한 존중의 태도에서 비롯한다면, 대체 이들에게 무슨 전통과 무슨 정신을 찾을 수 있을까. 고개 숙일 만한 원칙론과 동기론이 부재한 한국의 이른바 ‘보수’들의 지적 전통이나 교양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다. 빨치산이나 좌파 공산주의자, 비전향 장기수(가령, 이구영 선생)들 가운데 전통적 한학자 출신이 많은 이유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강화 양명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늦게 죽은 인물은 석전 황원이다. 1944년 2월 17일, 황현과 이건창, 이건승, 홍문원, 정기당 등이 모두 죽은 뒤 황원은 ‘투신’으로서 내면의 약속을 지킨다. 구례의 황원과 만주의 이건승은 평생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서신이 오갔을 뿐이며, 만주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이건승에게 海衣(김) 3백장을 보냈을 뿐이다. 민영규 선생은 “神交란 바로 그러한 것”이라 말한다. 한 도저한 정신이 다른 한 도저한 정신을 만나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 도저한 정신이 못되는 나는 신교와는 영 거리가 멀 모양이다.

追記 :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한홍구, 김호기 두 사람에 의해 소개된 바가 있다. 아래는 동아일보에 실렸던 김호기 교수의 짧은 글이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 / 김호기 연세대 교수 <강화학 최후의 광경>  


마음이 쓸쓸할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아닌 섬 강화도다. 강화대교를 건너 전등사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사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이 바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태어난 곳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건창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이자 유명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강화학(江華學)이라 알려진 조선 후기 양명학자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우국충정에 분노해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이 다름 아닌 영재의 할아버지였으며, 영재는 이런 정신과 의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내 전공은 아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책 가운데 하나가 조금은 이색적인 제목인 ‘강화학 최후의 광경’(우반, 1994년 출간)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민영규 선생의 글 모음집 중 첫째 권으로, 강화학 관련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양명학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지만, 이 책 1부에서 다뤄지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강화학자들의 삶은 흥미로우면서도 한없이 가슴이 아프다. 그 가운데 특히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단연 이 책의 백미(白眉)다. 강화, 개성, 구례, 서울, 그리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강화학자들이 기품 있게 견뎌왔던 삶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기도 했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바가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이 갈 길이라 한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구절인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글하는 사람 갈 길 헤아리기 어려워라’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은 지식인은 과연 자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지식사회학적 질문이다.

굳이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담론에 내재된 권력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리고 이것이 강화학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기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역시 바닷가 마을인 건평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재의 무덤이 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2001. 7.6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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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식민지사에서 '전통'은 모두 날조된 것이라는 요즘 상식화된 탈식민사 담론은 이런 구학문의 정신 지류가 실천적으로 존속된 사실과 의의에 대해선 맹목일 것 같습니다. 양명학은 전혀 모르긴 해도, 知行合一의 모토 자체가 서구의 실용주의를 넘어선 실존적 결단의 요청이 담긴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그 학문적 원리도 과거 중국에선 유심주의로 재단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내면의 자발성이나 의지적 필연(또는 극기)을 강조한 듯 합니다. 그것은 만주행이 단순히 체제의 선전이나 유인 정책에 이끌린 암묵적 체제 동조와 차별되는 근거일 수 있었겠죠. 이 참에, 사놓고 강산이 두어번 바뀌도록 안 읽은 뚜웨이밍 교수의 청년 왕양명 평전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1-07-18 16:01   좋아요 0 | URL
님의 댓글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저 역시 양명학에 대해서는 까막눈에 가깝고 뚜웨이밍 이름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군요. 동아시아담론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기억됩니다만.. 이 글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런 '전통'이 어떻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하는 아쉬움입니다. 전통이 제대로 이어졌더라면, 오늘날의 보수가 가진 저 한심한 수준의 담론은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 21세기의 계보 프런티어21 9
조반니 아리기 지음, 강진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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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아리기는 내게 이름만 익숙한 사회학자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저작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학자쯤으로, 세계체제론자, <뉴레프트 리뷰>에 간혹 글이 실리곤 하는 학자로 안 것이 전부다. 모리스 돕, 폴 스위지, 로버트 브레너 등 그보다 앞선 좌파 경제사학자들의 글에도 익숙치 않은 내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읽으면서 버거워 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이 두꺼운 책을 추천한 놈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아리기의 방법론적 시각을 보여주는 1부와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대목인 4부에 대한 정리와 인상기다.

아리기의 관심사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중국의 세기’를 역사사회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초까지는 동아시아가 서구사회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해 있었다. 그가 ‘大分岐’라고 부르는 이 시기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측 세계’(서구 선진국)가 전세를 역전시켜 20세기 초까지 세계경제를 주도했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다시 이 분기는 역전됐다. 바로 이 역전된 분기의 시기, 곧 ‘신아시아 시대’가 역사적으로 부상하게 된 연원과 매커니즘을 분석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경제발전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리기의 목적이다.  

 

 

그런데, 왜 애덤 스미스가 베이징에 와 있는가. 중국의 시장경제 확산은 그 속도와 파급력 면에서 가히 “시장레닌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리기는 ‘디트로이트의 마르크스’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대비시킨다. 마르크스의 논리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계속된 유럽에서 더 잘 관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노자대립의 ‘전형’은 미국, 그것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였다고 말한다. <노동과 독점자본>으로 유명한 해리 브레이버만이 “몸으로 쓴” 마르크스주의 노동과정론이 출현할 수 있는 맥락도 바로 여기서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미국 노동운동은 극히 쇠약한 지경이었지만, 브레이버만처럼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은 “시장의 확대가 경제발전 정도를 견인한다”는 스미스적 시각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는 아리기가 중국을 분석하기 위해 들이댄 이론적 프리즘인 셈이다.

동아시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의 ‘근면혁명’이라는 독특한 설명방법을 끌어온다. 19세기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발전은 소농경제에 입각한 노동집약적인 산업화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가족경영을 포함한 노동집약적인 농업경제, 곧 ‘인적자본’을  통한 경제발전을 통해 세계 GDP에서 서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가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의 기적’을 이루었다면, 동아시아는 노동집약적인 에너지 절약형 산업화를 통해 ‘분배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아리기가 애덤 스미스를 끌어들이는 부분이다. 그는 스미스에 대한 몇몇 이론가의 해석에 힘입어 “자기조정적인 시장의 옹호자, 노동분업의 옹호자, 경제팽창 엔진으로서의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아니라 강한 국가의 존재를 전제한 자본을 규율하고 통제하려한 경제학자로 부각시킨다. 스미스는 “공공서비스를 하기에 충분한 세입을 국가에 공급”하기 위해 강한 국가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본친화적이라기 보다 노동친화적이고, 기술적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그 유명한 핀공장의 사례)를 말하면서도 노동분업이 노동자의 지적 능력의 퇴화를 가져온다는 사실로 인하여 분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런 해석. <도덕감정론>에 기대어 시장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지적은 들어봤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계몽적인 대목이었다. 스미스는 중국이 내부의 농경의 확대와 개선이 제조업으로, 제조업의 확대가 외국무역의 진전으로 나아간 “자연스러운 발전경로” 밟았음에 비해, 서구는 외국무역이 제조업을 도입하고, 이것이 다시 농업생산의 개량으로 나아간 정반대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러운 발전경로”라고 평가한다. 중국적 발전경로에서 농업노동자는 생산과정에 대한 주의나 판단이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구 산업노동자보다 지적 퇴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스미스에게 중국은 “시장 기반 발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시장은 자본주의적 관계라기다 조금 더 포괄적인 상업적 거래를 의미한다. 유럽은 외국무역에 의존하고, 중국은 국내의 무역에 기반한 경로를 발전시켜왔는데, 스기하라가 말한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은 소농경제에 기반한 노동력이기 때문에 상황에 유연한 대처능력, 예견과 방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의 유연생산이론에서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노동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대목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능동적 참여를 보장하는 도요타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중국적 발전과정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서구의 경우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농업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되어 산업노동자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파괴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소농경제가 온존되면서 시장기반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적 설명이 중국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구의 경우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경제적 주도국의 변천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비자본주의 경제의 파괴와 식민화를 통해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에 대처하며 자본의 자기팽창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중국과 서구의 또다른 차이는 국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1500년 이래로 중국과 서구 자본주의의 분기의 원인은 서구는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를 발견했으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고, “서구와 중국의 경로의 차이는 특정 비즈니스나 국가제도의 존재가 아니라, 상이한 권력구조내의 조합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는 자본가들의 국가의 힘을 넘어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던 반면, 중국은 국가의 자본가들을 경쟁시키고 국익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말 “자본주의는 오로지 국가와 동일시되거나 자본주의가 바로 국가일 때만 승리한다”는 말은 서구의 경우에나 해당한다.

스미스적 시각에서 본 이런 ‘유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신자유주의적 개방에 따른 결과라는 것은 “깨져야할 신화”다. 중국과 인도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따르지 않았고, 그걸 따른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몰락했다. 중국은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내주지 않고 자신의 룰과 관습을 고집하는 “자국중심적 국민경제의 장점을 결합”하여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국가의 역할은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의 용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본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고 개혁 역시 사유화가 아니라 국가독점과 장벽 제거를 위한 경쟁 강화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중국에서의 자본가는 마르크스의 자본가가 아니라 국익에 복무하는 스미스적 자본가다.

강탈없는 축적과정.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역의 토착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이었는데, 이는 농촌의 잉여인구를 흡수하고 시장진입에 다른 경쟁압력을 완화하고, 농민에게 수입을 보장하여 농민의 조세부담을 완화하고, 이윤과 임대수입을 지방정부에 재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적 인프라로 작용했다. 노동자에 대한 “강탈없는 축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주목을 요한다. 윈펑의 자동차 공장에는 로봇이 한대도 없는데, 여기서 만드는 수제 호화 지프는 8만~15만 달러에 팔린다.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를 감축하지 않고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 아리기는 “중국의 경쟁우위는 노동자 임금이 싸다는 게 아니라 관리자 임금이 미국보다 35% 싸다는 것”에서 찾는다. 자본을 절약하고 노동에 더 많은 역할을 다시 맡김으로써 중국의 공장들은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실제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아리기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만들어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중국의 사회주의 전통은 국가개혁에 대한 내부 억지력으로, 국가의 부패나 불평등한 시장화에 대한 항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은 당과 관료들에게는 문화혁명으로 약화된 힘과 특권을 새롭게 부여했으며, 중국인민들에게는 중국 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공자산의 전유, 국가기금의 횡령 등 강탈에 의한 축적이 거대한 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같은 문제들은 경제적 성공이 낳은 모순들, 예컨대 당-국가와 중국의 서발턴 사이의 전통적인 마오주의적 관계(양방향 사회주의)가 당-국가와 신흥 부르주아지로 대체되는 방식의 문제를 낳았다. 현재로서는 “중국에는 노동운동이 없다”는 전통적 상식은 전복되고 있다.

후진타오는 농촌경제 중시와 균형발전 전략이라는 진로 변경을 꾀하고 있는데, 이는 1장에서 말하는 후진타오의 마르크스주의 재해석과도 일맥상통한다. 농업중심 전략은 마오주의적 전통의 재해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득불평등의 확대에 따른 대중의 불만이 혁명전통을 침식할 우려에 대한 공식적 대응전략이기도 하다. 이미 중국 경제는 마오시대의 사회적 성과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은 농업생산 혁명과 교육의 보급, 기초복지의 확대다. 요컨대, 덩사오핑의 경제개혁의 사회적 토대는 마오시대에 이미 갖춰졌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베이징 컨센서스의 등장이고, 이것의 핵심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와 지방화(localization)라고 규정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과거의 제3세계 비동맹 회의인 ‘반둥’의 부활인 ‘새로운 반둥 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대중전략은 제임스 핑커턴의 제3자전략 ; 1차 대전처럼 유럽국가들끼리 싸우도록 놔두고 자금과 군수품을 공급, 헨리 키신저의 ‘끌어들이기 전략 ;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질서로 편입, 로버트 카플란 ;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 등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마땅치 않다.

1997~98년 경제위기는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이 미국 패권이 관철되는 IMF에서 중국으로 옮겨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아시아 원조국가가 됐다. 흥미로운 표현 : “중국은 북쪽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정치적 단서는 더 적게 붙이고, 비싼 상담료도 없으면서 더 많은 차관을 남측국가들에게 제공하고 비용은 북측의 절반밖에 안드는 벽지의 대규모 복합 인프라 프로젝트를 제공하여 남측국가들이 보다 더 여유로운 조건으로 천연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와 중국의 거대인구를 고려할 때 휴대폰의 새로운 표준은 그곳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고, MS의 대체물 역시 중국제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부상을 설명하면서 아리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낙관적이다. 중국과 인도의 지배집단이 자국 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생겨난 생태적 황폐화에서 해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적 발전경로가 동아시아적 경로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근대화의 혜택을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는 서구의 길이 아니라 강탈 없는 축적과 농업기반의 자국중심의 경제발전 전략, 내식대로 말하자면, 내포적 발전전략을 통해 경제적으로 세계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디의 말 : “만약 3억명이나 되는 한 나라 전체가 비슷한 경제적 착취에 몰두한다면 세계를 메뚜기떼처럼 초토화할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4분의 1이라도 미국과 같은 생산 소비 방식을 취한다면 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질식사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결론 : “만약 이 방향전환이 중국의 자국중심적 시장기반 발전, 강탈없는 축적,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자원을 동원하고, 대중의 참여를 통해 정책을 만들어가는 정부 등과 같은 중국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은 문화적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문명연방을 출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방향전환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국은 아마도 사회적, 정치적 대혼란의 새로운 진원지로 변모하여, 흔들리는 세계 지배를 확립하려는 북측(서구 선진국)의 시도를 촉진할 것이다. 혹은 조지프 슘페터의 말을 다시 빌리면, 냉전 세계 질서의 청산에 수반하여 나타난 폭력의 격화라는 공포(혹은 영광) 속에서 인류가 불타버리는 것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리기의 논지. 두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그는 자주 중국=동아시아로 혼동하고 있는데, 중국은 동아시아의 일원이지만 곧 동아시아 전체를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국적 경제발전 과정은 일본과 한국과도 대단히 상이하며 일치보다는 불일치의 경험이 많지 않나하는 것이다. 복수의 동아시아적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 이는 해제에서 역자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세계사적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기여해왔고,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이다. 미국의 포식성과 중국의 포식성 중 어느 것이 더 잔혹스러울 것인가. 제국주의 미국과 제국주의 중국은 어느 것이 더 긍정적일까? 미국은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타자에게 강요하고 심어 왔지만, 중국 역시 과거 제국경영의 과정에서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티벳과 신장위구르를 보라.

어쨌든 방대한 두께만큼이나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해, 나로서는, 새롭고 신선한 설명이었다. 아리기의 중국에 대한 상대적 애정(?)은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역시 사회주의라는 국가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도 있다. 마르크스를 부실하게 관리했던 구소련이나 국가적 실천이라는 경험이 부재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중국은 이들 좌파들에게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아니었을 런지. 동양을 ‘발견한’ 이들 서구 좌파 마르크시스트(캘리포니아 학파?) 중 한 사람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책 제목이 <리오리엔트>라는 것이 눈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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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방문한 헌책방은 어디였던가. 충청북도 청주시 북문로의 후미진 뒷골목,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헌책방에서 내가 무엇을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고삐리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으로는 삼중당 문고 한 두권 쯤을 샀으리라.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죄와벌? 마농레스코? 다만, 세월의 더께가 자욱한 먼지로 뒤덮인 옛 책들의 포근한 아우라만이 기억에 생생하다.   

 

유종호 선생은 어린 시절  해방이후 청주의 한 고서점에서 일본 新朝社 판 세계문학전집을 사려다 돈이 없어 아쉽게 돌아섰다는 대목을 회고한다. 유선생은 한달여 뒤 큰 맘먹고 돈을 마련해 서점을 찾았는데, 그 전집은 이미 팔리고 없었다. 아쉬움 끝에 주인에게 누가 사갔느냐 했더니 청주사는 남재희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그 두 사람이 잘 알려진 다독가이자 해당 분야의 대가라는 점이 참 흥미로운 대목이다. 헌책방 드나들던 학창시절의 버릇은 유구하게도 한 사람의 생에 오롯이 남는 모양이다. 내가 고삐리 시절 다녔던 그 헌책방은 아마도 그 두분이 다녔음직한 곳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이 헌책방을 다시 찾았는데, 거기서 나는 당시로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김현과 곽광수의 <바슐라르 연구>(1978년 민음사 재판) 를 살 수 있었다. 어느 불문과 여학생이 팔았는지, '1985년 문화서림에서'라는 예쁜 글씨가 속표지에 쓰여 있었다. 책은 깨끗했고 표지의 바슐라르 캐리커처도 선명했다. 그러나, 게으른 불문학도였는지 밑줄 흔적도 책장을 넘긴 흔적도 없었다. 곽광수가 후일 <공간의 시학> 개역본의 길고도 긴 서문에서 김현의 논문을 마구 깔아뭉개기 전에 나온 책이니, 두 사람의 공동저자는 이 책에서 흐뭇해 보였다.

 

고삐리 시절 더 또렷한 것은 촌놈이 서울 광화문에 와서 놀랍고 신기해하다가 들어간 헌책방. 당시 그곳의 간판은 기억나지 않으나 추후 몇 개의 기록을 보니 아마도 신촌으로 이전하기 이전의 ‘공씨책방’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는 서소문 삼성플라자 건너편 쪽이었던 듯 싶다. 거기서 나는 시인 신경림이 편집한 <反詩>(실천문학사, 1983년판)라는 제목의 파란책 표지의 반시 동인들의 시집을 샀다.  

 

충청도 시골의 고삐리에게 시집 제목이 풍기는 불온한 이미지는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시를 몰랐어도, 시집에 수록된 시인들의 면면을 알지 못했어도 헌책방이라는 음습한 문화에서 건져 올린 불온함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서울 공기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고삐리였더 그 시절 읽은 박노해 <노동의 새벽>의 충격만큼은 못했어도, 뭔가 말랑말랑한 시와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위험한 시인들이 많구나.(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반시 동인 중 문학적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정호승, 김명인 쯤일 것이다.)

헌책방은 내게 옛 책을 찾는 ‘골취미’가 풍기는 역사적 퇴행성,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문화적 마이너리티(헌책방에 팔리는 책들이란 최초 주인에게 쓸모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받은 것들이다), 뒷골목의 음습하고 불온함 등의 이미지로 뒤범벅되어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감성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어둑한 공간. 마치 청소년기의 수음을 위한 골방 같은 곳. 그러고 보니, 헌책방은 내게 운동문화의 극성기에 스스로 찾아 들어간, 자발적 퇴영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때 연애하던 여자들은 헌책방 순례를 같이 즐기면서도 나중에는 한결같이 툴툴거렸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뻔질나게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우선 신촌의 공씨책방. 총리가 된 이해찬과 장관을 지낸 남재희가 유별난 교유를 했던 주인 공진석 선생은 없었고, 두 딸이 번갈아가며 카운터를 맡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건진 최대의 수확은 <박상륭 소설집>(1971년 민음사)의 초판이었다. 박상륭이 캐나다로 가기 직전 넘긴 원고를 김현이 맡아 민음사에서 펴낸 책. 발문에서 김현은 박상륭과 박태순이 서로 자기가 최고의 소설가라며 상대방의 이빨을 깨며 싸우다 다음날 다방커피를 마시며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희화적으로, 그러나 애정이 듬뿍 담긴 문체로 그려냈다. 하지만, 공씨책방은 책값을 너무 비싸게 불렀고, 옛주인 공진석 선생이 <옛 책 그 언저리에서>에서 묘사한 70년대 말의 지적 풍경, 가령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논하던 지적교유의 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산의 뿌리서점, 도대체가 책방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허름한 뒷골목에 서점 가득 책을 쌓아놓고, 건너편에 해묵은 LP판을 되는대로 쌓아두었던 곳. 내 눈이 밝지 못했던지, 거기서 산 책중 ‘감동스러운 발견’은 없었다. 그중 스튜어트 휴즈의 <의식과 사회>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은 2007년 개마고원에서 서구지성사 3부작중의 하나로 재출간됐다) 아마 이 곳에서 나는 책보다는 LP를 더 많이 샀을 것이다. 어느 헌책방 매니아의 찬사와 달리 내게 이 곳은 이원수, 이원호 류의 70-80년대 싸구려 대중소설과 철지난 몽롱한 에세이 책들이 가득한 곳으로 기억된다.

외대 앞의 최교수네 헌책방. 내가 연고도 없는 외대에 왜 갔는지 모르겠다. 이 서점은 나중에 나남출판사에서 출간된 <겐지 이야기>의 한국어 번역판을 산 곳으로 기억된다.  <原氏이야기>(유정 번역, 한국출판사 1982년)로 제목을 단, 전집 중에 끼워진 두 권짜리 번역본이었다. 완역이라기보다 발췌본이었지만, 적어도 나남에서 <겐지이야기>가 최초 번역이라고 광고해댄 것은 오버인 셈. 근처 헌책방에서 <겐지이야기>를 샀다고 했을 때, 부러워하던 삐돌이 형의 표정이 떠오른다. 강남 대치동의 학원강사 알바를 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은마 아파트 옆의 ‘책창고’. 강사료를 받으면 이곳에서 십여권을 한꺼번에 사 제꼈다.

헌책방에 가면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창비 같은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명가들에서 펴낸 책은 헌책방에서 찾기 어렵다는 것. 한길사, 나남, 문학동네, 그리고 과거의 명가였던 일조각이나 신구문화사 같은 데도 마찬가지. 대신 흔히 그렇듯이 당대의 베스트셀러나 에세이류, 전집류의 책들은 어딜가나 한가득이다. 중고삐리들의 ‘수험용’ 한국문학 작품집 들도 즐비하다. 박영사의 문고본 시리즈 중에서도 지금도 여전히 읽을만한 책들은 빠져 있다. 요컨대, 책의 내구성에 관한 문제다.  

 

적어도 헌책방에 잘 나오지 않는 책은 그만큼 ‘내구성’이 있고, 시간의 풍화작용을 잘 견디고 있다는 얘기다. 가끔 인터넷 사이트에 헌책방을 과잉낭만화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웃기는 건 그렇게 낭만화할 만큼 좋은 책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헌책방 매니아인 서양사학자 이광주 선생이 독일의 헌책방에서 막스 베버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저작을 샀을 때의 감회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헌책방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과학 책들의 상당부분은 80년대 일본어 중역을 통해 양산됐던 일본의 속류마르크스주의 관련 책들이거나 소비에트의 변유, 사유 교과서들이다. 한 시대를 증거하기에는 그 책들에 스민 지적 사유의 두께가 너무 얇다.

이런 류의 책들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전복과 한국사회의 혁명을 꿈꾸었다니, 하는 헛웃음만 나온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당시 쏟아져 나온 일본계 사회과학 책들은 ‘운동권 포르노서적’인 셈이다. 포르노가 해적판으로 수입되어 세운상가 뒷골목에서 팔리듯이, 해적판으로 번역된 책들은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에서 포르노처럼 유포되었다. 또다른 헌책방 매니아 연극평론가 안치운 선생이, 신촌의 ‘숨어있는 책’을 내게 추천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쓸만한 책을 고르고, 팔 줄 아는 서점 주인,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다. 내가 만난 서점 주인 중 최악은 10여 년전 서울대 앞의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이었다. 분명, 저울로 무게 달아 책을 사왔을 그는 납득이 가지 않는 가격을 매겨놓고, 고객 앞에서 그 책의 진가에 대해 아는 척을 해댔다. 책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무척이나 듣기 거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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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1-2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헌책방만 가면 눈이 희번득해서 찾아보는 책이 또 있잖습니까?
일본에서 판권 없이 마구잡이로 번역된 도미** 다케*의
여인추억 시리즈...포르노긴 한데 1950년대 일본 사회상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세태소설 아직 못 보았소.
사람마다 성정이 다르듯 헌책방에 얽힌 기억도 이렇게 다르네요.
제가 좀 잡스런 편이죠?ㅋㅋ

모든사이 2010-01-2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가 아직 '빨간책' 보던 중고삐리 시절 감성을 못벗어 났구나. 도미시다 다께오에게서 '세태'를 읽는 그 희한한 독법이라니, so*a 카페에 가면 다께오 형님들 두루 널렸느니라.

이진성 2010-02-0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께오의 후예들이겠죠
 
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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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는 늙었다. 60이 가까운 나이라니, “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해봤자 허사다. 육신의 나이는 늙어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절망과 황폐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의 집에서였던가. 내 20대의 한 때, 취한 눈으로 그녀의 시를 더듬거리며, 투박한 음성으로 술벗들과 더불어 주절주절 낭송하던 그녀의 시는 “이사 가고” 없다. 11년 만에 새로 나왔다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그래서 예전의 그녀에 비해 “담담하게, 밍밍하게” 고여 있다.

교보 신간시집 서가에서 그녀의 시집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파 어딘가에서 요양을 한다고 했던가, 정신병에 걸렸다던가, 가끔 번역서를 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칙칙하고 어두울까. 1쇄 발행일자는 1월 11일, 내가 산 것은 1월 18일자로 나온 3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으니, 최승자 시를 찾는 자들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또 그들 역시 그녀의 “잿빛으로 삭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경이와 숭고, 분노가 사라진(가고 있는) 시대에 오로지 퇴행밖에 남은 게 없지 않겠는가. 이명박 시대에 “이 시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최승자 독자들은 퇴행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나역시 그런 퇴행의 일원, 구체적 공간으로 말하자면, 숙대 앞 청파동이다. 그곳은 오로지 그녀의 시로만 기억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눈 덮인 꿈을 떠돌던/몇 세기 전의 겨울”(청파동을 기억하는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곳을 허술한 공복과 희미한 취기로 새겨진 신촌의 기억을 포개곤 했다. 그런데 새 시집에서 최승자는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며 “오랫동안 내 시 밭은 황폐했었다/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이사는 별로 반갑지 않다. 이젠 늙고 병들어 지친 시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포오란’의 질감은 풍요와 넉넉함, 부드러움과 넓은 긍정이다. 예각이 사라진 최승자? 이번 시집이 재미없는 이유다. 그 빈 자리에 그녀는 노자와 장자, 승무와 탈춤, 시간의 영속성과 불변성, 집단무의식과 융, 흐르지 않는 강, 빈 하늘, 사막의 이미지를 쌓아 놓고 있다. 그 풍경은 아득히 멀어서 쓸쓸하다. 언젠가 보았던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과 닮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일 것이며, 그만큼 격절과 외로움에 시달렸을 것. “그동안 늘 40대”로 알고 살았던 그녀의 자기확인은 그런데,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문”이 열렸지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고 바라기 때문. 병실 창가쯤에서 담배를 빨며 “하얀 낮달/푸른 붕새/멀고 먼 길/가다 가다 지치는 하늘//푸른 붕새 몇 점 띄워놓고 /다리 절룩이며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 쓸쓸하다.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쓸쓸해서 머나먼

아득히 먼 사막 위를 홀로 걷는 낙타. 시간은 바람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곳.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하늘 그 너머”를 몽상하는 그녀. 한때 여전사였다가 이젠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처럼.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 홀로가는 낙타  

 

중앙일보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 사진은 말기 암 환자의 그것처럼 깡마르고 강팔라 보였다. 온몸의 독소와 함께 진기까지도 빠져나간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늙음 탓만은 아니리라. 최승자의 광기를 이젠 다시 읽을 수 없으니,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계보를 이을 시인을 발견했다니, 그 후예인 진은영이나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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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1년 만에 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시인 최승자(58)씨를 20일 경북 포항의 한 대형 할인매장 카페에서 만났다. 최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말부터는 병원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최근 11년 만에 출간한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의 막판 교정 작업도 병상에서 이뤄졌다. 최씨는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만나 보니 건강해 보였다. “나, 비정상 아니다”라며, 문학세계의 변모와 근황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10여 년을 완전한 사막, 불모의 세월로 보냈으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며 “시는 물론 소설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인터뷰 덕분에 3박4일 ‘외박’ 허가를 받은 참이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최씨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시단은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억압적인 현실, 시대와 불화하는 분열된 자아 등을 증언했다. 황지우·이성복·김혜순·장정일·박노해·백무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를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일찌기 나는’)으로 표현하는 극단적인 자기모멸, 떠나간 애인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Y를 위하여’) 파격 등 최씨의 시 풍경은 강렬했다. “이전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여성시”라는 평을 받았다. 새 시집 얘기를 꺼냈다.

-시풍이 크게 변했다. 노자·장자는 물론 길가메시 같은 근동 설화, 융의 집단무의식도 나온다.
“1993년 『내 무덤, 푸르고』 낼 때 ‘너무 같은 얘기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영양학·식이요법 등에서 시작한 지적 호기심이 사상의학, 음양오행 관련 서적, 점성술 등 신비주의로 옮아갔다. 너무 심취하다 보니 정신분열증이 왔다. 신비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언가에 대한.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탈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는 철학책을 읽었다.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생겼다. 문명은 오랜 시간 축적됐다는 점에서 과거에 붙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핵심은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초시간성’이란 말로 요약되는데, 그 경지에서 신비주의와 만난다.”

-일주일 남짓 만에 3000부가 팔렸다. 30대 후반, 40대 독자도 많다고 한다. 강렬함을 원한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고민스럽지만 어쩌겠나.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다. 시는 계속 쓸 것 같다. 안 하면 병에 다시 걸릴 테니까.”

-옛날 얘기 좀 하고 싶다. 80년대, 극도로 강렬했고 비관적이었는데.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다 문학성 높은 작품에 감염돼 비관주의자가 됐다. 안에서 부글부글 끓던 게 억압적 현실에 눌려 있다가 박정희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온 것 같다. 강은교·이성복 등 당시 문단의 해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절반의 설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여성 시인이 모두 당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개성인가 보다. 나는 뭉친 게 한 번에 팍, 시로 터져 나온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프리랜서적 시인이랄까. 바깥과 의사소통이 없어 더 그랬을 수 있다.”

-건강은 어떤가.
“괜찮다. 혼자 있으면 먹지 않아 병원에 가는 거다. 병원에서는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는다.”

-계획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아름답고 슬픈 중편소설 하나 쓰려고 한다. 노자 『도덕경』에 대한 장시도 쓰고 싶다.”

포항=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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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보 2010-02-2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이사가 반갑지 않다는 건 퇴폐적 '환멸주의자'가 특유의 뽐 없이 흘린 말인 듯 오히려 절절하구만요. 연이어 유통기한을 훌쩍넘겨 바랄 것이 남지 않은 퇴물로 폐기처분을 선언하는 데까지 구태여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심보는 그래서 더욱 고약스럽습니다. 이제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 - 충분히 멋지구만. 덕분에 안 읽고도 그 시집 풍경 주루룩 펼쳐집니다. 일간 서점에 들러 다시 진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반가운 소개, 진진한 평에 감사를-.
 

 

센 강변을 어슬렁대고, 저녁이면 와인을 홀짝거리거나
몽마르트르 어름의 방 한켠으로 돌아와 누울 친구여.
기억하는가, 신촌 귀퉁이의 퀴퀴한 서적더미에서 보낸
우리의 이십대를, 함께 사무쳤던 그 시절들을.  

거기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허겁지겁 책을 사 모으고, 속살을 파먹었던 선배를,

마침내 밤이면 함께 누울 미운 아내를 만나지 않았던가. 
 

‘오늘의 책’은, 화려무쌍한 신촌 거리에서 우리가 망명할
오직 한 곳, 허기진 욕망의 가숙지가 아니었던가. 

늦가을 스산한 날씨 속에 들려온 우울한 소식 한자락.
한 시절 우리가 겸손히 마주하던 따뜻한 밥 한그릇을
마련해 주었던 그 조그만 서점의 몰락.
우리의 한 시절을 떼 메고, 우리 젊은 날의 기억을 지우며
저기 한 시대가 가네.

혹시라도 파리를 떠나 이 곳 신촌에 올적에도
갈 곳 몰라 서성이거나 우두망찰 서 있지는 말게나
우리가 찾을 곳은 이제 반가운 얼굴들 옹송거리는
‘오늘의 책’이 아니라네.

그곳은 켜켜히 쌓인 기억의 갈피 어딘가에
우리의 한 시절이 그러하듯이
흑백사진처럼 꼭 끼워져 있을 거네.
무릇, 기억은 가슴에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데자뷔? 만취에 비틀거리며 때 낀 유리창 너머로 ‘책’이 보이거든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의 그리움이 불러낸 허깨비인줄 알게나.
어느 날, 머나먼 이국의 꿈자락속에 비치는 휘황한 신촌 불빛이

어쩐지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면,
지상에 빛나는 별 하나가 떨어진 줄 알게나.  


 2000년 11월 10일 
 

주 : <오늘의 책>은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신촌 연대앞에 존재했던 한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이다. 2000년 가을 이 서점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았다. 폐점 당시 누군가가 추모사 비스무리한 것을 써달라는 부탁으로 쓴, 시같지도 않은 글. 이 서점과 인연이 있는 자들이 2006년 펴낸 '안녕? 오늘의 책'이라는 책에 실렸다. 이 서점의 작은 연대기는 연출가인 후배 김재엽에 의해 2006년 대학로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갔을까>로 만들어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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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의책 폐점 10주년에 대한 상상
    from 막내의 집 2010-03-29 08:24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 신촌에서 약속을 잡는데 "어디서 볼까" 서로 묻기만 하다가 "오늘의책에서 보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올해 11월이면 오늘의책이 문을 닫은지 벌써 10년이다. 하지만 신촌 굴다리 옆 골목엔 여전히 오늘의책 간판이 걸려 있다. 그 간판만 봐서는 10년이란 시간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