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강변을 어슬렁대고, 저녁이면 와인을 홀짝거리거나
몽마르트르 어름의 방 한켠으로 돌아와 누울 친구여.
기억하는가, 신촌 귀퉁이의 퀴퀴한 서적더미에서 보낸
우리의 이십대를, 함께 사무쳤던 그 시절들을.  

거기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허겁지겁 책을 사 모으고, 속살을 파먹었던 선배를,

마침내 밤이면 함께 누울 미운 아내를 만나지 않았던가. 
 

‘오늘의 책’은, 화려무쌍한 신촌 거리에서 우리가 망명할
오직 한 곳, 허기진 욕망의 가숙지가 아니었던가. 

늦가을 스산한 날씨 속에 들려온 우울한 소식 한자락.
한 시절 우리가 겸손히 마주하던 따뜻한 밥 한그릇을
마련해 주었던 그 조그만 서점의 몰락.
우리의 한 시절을 떼 메고, 우리 젊은 날의 기억을 지우며
저기 한 시대가 가네.

혹시라도 파리를 떠나 이 곳 신촌에 올적에도
갈 곳 몰라 서성이거나 우두망찰 서 있지는 말게나
우리가 찾을 곳은 이제 반가운 얼굴들 옹송거리는
‘오늘의 책’이 아니라네.

그곳은 켜켜히 쌓인 기억의 갈피 어딘가에
우리의 한 시절이 그러하듯이
흑백사진처럼 꼭 끼워져 있을 거네.
무릇, 기억은 가슴에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데자뷔? 만취에 비틀거리며 때 낀 유리창 너머로 ‘책’이 보이거든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의 그리움이 불러낸 허깨비인줄 알게나.
어느 날, 머나먼 이국의 꿈자락속에 비치는 휘황한 신촌 불빛이

어쩐지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면,
지상에 빛나는 별 하나가 떨어진 줄 알게나.  


 2000년 11월 10일 
 

주 : <오늘의 책>은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신촌 연대앞에 존재했던 한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이다. 2000년 가을 이 서점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았다. 폐점 당시 누군가가 추모사 비스무리한 것을 써달라는 부탁으로 쓴, 시같지도 않은 글. 이 서점과 인연이 있는 자들이 2006년 펴낸 '안녕? 오늘의 책'이라는 책에 실렸다. 이 서점의 작은 연대기는 연출가인 후배 김재엽에 의해 2006년 대학로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갔을까>로 만들어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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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의책 폐점 10주년에 대한 상상
    from 막내의 집 2010-03-29 08:24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 신촌에서 약속을 잡는데 "어디서 볼까" 서로 묻기만 하다가 "오늘의책에서 보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올해 11월이면 오늘의책이 문을 닫은지 벌써 10년이다. 하지만 신촌 굴다리 옆 골목엔 여전히 오늘의책 간판이 걸려 있다. 그 간판만 봐서는 10년이란 시간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