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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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는 늙었다. 60이 가까운 나이라니, “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해봤자 허사다. 육신의 나이는 늙어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절망과 황폐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의 집에서였던가. 내 20대의 한 때, 취한 눈으로 그녀의 시를 더듬거리며, 투박한 음성으로 술벗들과 더불어 주절주절 낭송하던 그녀의 시는 “이사 가고” 없다. 11년 만에 새로 나왔다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그래서 예전의 그녀에 비해 “담담하게, 밍밍하게” 고여 있다.

교보 신간시집 서가에서 그녀의 시집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파 어딘가에서 요양을 한다고 했던가, 정신병에 걸렸다던가, 가끔 번역서를 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칙칙하고 어두울까. 1쇄 발행일자는 1월 11일, 내가 산 것은 1월 18일자로 나온 3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으니, 최승자 시를 찾는 자들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또 그들 역시 그녀의 “잿빛으로 삭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경이와 숭고, 분노가 사라진(가고 있는) 시대에 오로지 퇴행밖에 남은 게 없지 않겠는가. 이명박 시대에 “이 시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최승자 독자들은 퇴행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나역시 그런 퇴행의 일원, 구체적 공간으로 말하자면, 숙대 앞 청파동이다. 그곳은 오로지 그녀의 시로만 기억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눈 덮인 꿈을 떠돌던/몇 세기 전의 겨울”(청파동을 기억하는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곳을 허술한 공복과 희미한 취기로 새겨진 신촌의 기억을 포개곤 했다. 그런데 새 시집에서 최승자는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며 “오랫동안 내 시 밭은 황폐했었다/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이사는 별로 반갑지 않다. 이젠 늙고 병들어 지친 시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포오란’의 질감은 풍요와 넉넉함, 부드러움과 넓은 긍정이다. 예각이 사라진 최승자? 이번 시집이 재미없는 이유다. 그 빈 자리에 그녀는 노자와 장자, 승무와 탈춤, 시간의 영속성과 불변성, 집단무의식과 융, 흐르지 않는 강, 빈 하늘, 사막의 이미지를 쌓아 놓고 있다. 그 풍경은 아득히 멀어서 쓸쓸하다. 언젠가 보았던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과 닮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일 것이며, 그만큼 격절과 외로움에 시달렸을 것. “그동안 늘 40대”로 알고 살았던 그녀의 자기확인은 그런데,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문”이 열렸지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고 바라기 때문. 병실 창가쯤에서 담배를 빨며 “하얀 낮달/푸른 붕새/멀고 먼 길/가다 가다 지치는 하늘//푸른 붕새 몇 점 띄워놓고 /다리 절룩이며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 쓸쓸하다.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쓸쓸해서 머나먼

아득히 먼 사막 위를 홀로 걷는 낙타. 시간은 바람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곳.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하늘 그 너머”를 몽상하는 그녀. 한때 여전사였다가 이젠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처럼.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 홀로가는 낙타  

 

중앙일보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 사진은 말기 암 환자의 그것처럼 깡마르고 강팔라 보였다. 온몸의 독소와 함께 진기까지도 빠져나간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늙음 탓만은 아니리라. 최승자의 광기를 이젠 다시 읽을 수 없으니,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계보를 이을 시인을 발견했다니, 그 후예인 진은영이나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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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1년 만에 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시인 최승자(58)씨를 20일 경북 포항의 한 대형 할인매장 카페에서 만났다. 최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말부터는 병원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최근 11년 만에 출간한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의 막판 교정 작업도 병상에서 이뤄졌다. 최씨는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만나 보니 건강해 보였다. “나, 비정상 아니다”라며, 문학세계의 변모와 근황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10여 년을 완전한 사막, 불모의 세월로 보냈으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며 “시는 물론 소설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인터뷰 덕분에 3박4일 ‘외박’ 허가를 받은 참이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최씨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시단은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억압적인 현실, 시대와 불화하는 분열된 자아 등을 증언했다. 황지우·이성복·김혜순·장정일·박노해·백무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를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일찌기 나는’)으로 표현하는 극단적인 자기모멸, 떠나간 애인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Y를 위하여’) 파격 등 최씨의 시 풍경은 강렬했다. “이전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여성시”라는 평을 받았다. 새 시집 얘기를 꺼냈다.

-시풍이 크게 변했다. 노자·장자는 물론 길가메시 같은 근동 설화, 융의 집단무의식도 나온다.
“1993년 『내 무덤, 푸르고』 낼 때 ‘너무 같은 얘기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영양학·식이요법 등에서 시작한 지적 호기심이 사상의학, 음양오행 관련 서적, 점성술 등 신비주의로 옮아갔다. 너무 심취하다 보니 정신분열증이 왔다. 신비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언가에 대한.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탈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는 철학책을 읽었다.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생겼다. 문명은 오랜 시간 축적됐다는 점에서 과거에 붙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핵심은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초시간성’이란 말로 요약되는데, 그 경지에서 신비주의와 만난다.”

-일주일 남짓 만에 3000부가 팔렸다. 30대 후반, 40대 독자도 많다고 한다. 강렬함을 원한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고민스럽지만 어쩌겠나.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다. 시는 계속 쓸 것 같다. 안 하면 병에 다시 걸릴 테니까.”

-옛날 얘기 좀 하고 싶다. 80년대, 극도로 강렬했고 비관적이었는데.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다 문학성 높은 작품에 감염돼 비관주의자가 됐다. 안에서 부글부글 끓던 게 억압적 현실에 눌려 있다가 박정희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온 것 같다. 강은교·이성복 등 당시 문단의 해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절반의 설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여성 시인이 모두 당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개성인가 보다. 나는 뭉친 게 한 번에 팍, 시로 터져 나온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프리랜서적 시인이랄까. 바깥과 의사소통이 없어 더 그랬을 수 있다.”

-건강은 어떤가.
“괜찮다. 혼자 있으면 먹지 않아 병원에 가는 거다. 병원에서는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는다.”

-계획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아름답고 슬픈 중편소설 하나 쓰려고 한다. 노자 『도덕경』에 대한 장시도 쓰고 싶다.”

포항=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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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보 2010-02-2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이사가 반갑지 않다는 건 퇴폐적 '환멸주의자'가 특유의 뽐 없이 흘린 말인 듯 오히려 절절하구만요. 연이어 유통기한을 훌쩍넘겨 바랄 것이 남지 않은 퇴물로 폐기처분을 선언하는 데까지 구태여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심보는 그래서 더욱 고약스럽습니다. 이제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 - 충분히 멋지구만. 덕분에 안 읽고도 그 시집 풍경 주루룩 펼쳐집니다. 일간 서점에 들러 다시 진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반가운 소개, 진진한 평에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