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파주출판단지는 아이들로 북적댔다. 여기가 출판단지이고, 입주한 출판사의 상당수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까먹었던 탓이다. 겨우겨우 헤르만하우스 근처에 차를 대고 헌책방 ‘보물섬’을 찾았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지만 자유로 인근에서 결국 포기했다. 휴일의 도로를 달리는 차는 너무 빨랐고, 자전거 도로는 곳곳에서 끊겨 있었다. 확실히 지자체의 생태도시, 자전거 도시 운운은 전시용이다. 파리의 밸리브를 흉내 낸 ‘fifteen' 자전거들은 아무도 그걸 타지 않아 거치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신도시는 날림으로 순식간에 지은 조립주택 같은 공간이다. 이창동의 <초록물고기>가 잘 그려냈듯이 신도시의 욕망은 허망하고 부질없다. 하기야 어디 신도시만 그러하겠는가. 역사가 거세된 모든 공간은 모두 허공위에 지은 집과 같지 않을까.
휴일에 헌책방이라니. 엊그제 휴일에 서점에 가는 사람의 내면은 황폐한 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었는데, 나 또한 이 무슨 구태인가. 보물섬은 그리 크지도 않고, 갖춰놓은 책들도 변변한 구색은 아니었다. 이 곳이 출판단지라서 파본이나 낙장으로 빠져나온 신간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느 헌책방과 다를 바 없었다. 헌책방에 가면 흔히 만나는 80년대 사회과학 책들과 철지난 에세이들. 한때의 베스트셀러와 예의 그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책들.
처음 집어든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김성기, 문학과 지성사).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1990년 무렵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비판논리로 시작되었던 서구의 맥락과는 달리 그 당시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을 풍미하던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적 대응의 성격이 강했다. 권택영이니 김욱동이니 하는 소장 영문학자들이 창비류의 리얼리즘과 민족문학을 넘어서기 위해 시작했던 것. 김성기의 이 책은 문화예술 중심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사회과학으로 이끌어간 선구적인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 이 책을 처음 건네준 한 여인은 밑줄을 꼼꼼히 긋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의 밑줄을 따라 동글동글한 글씨의 메모를 따라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읽었던 이 책이 어디로 간 것일까. 옛일이 생각나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두 번째는 두레에서 나온 문고본 레닌 저작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모택동의 <실천론/모순론>과 로자의 <러시아 혁명> 등과 함께 시리즈로 묶였던 책. 레닌의 비난만 믿고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을 역사에 다시 없는 반동적 인물이자 ‘배신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선배가 생각나 혼자 키득거렸다. 극우보수 일간지의 사회부 기자를 하다 대기업 부장으로 ‘영전’해 있는 그 선배는 그때 과연 ‘인터내셔널’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크크, 웃기는 일이다.
함께 집어든 <1985년>(최광렬 옮김, 신평론)도 비슷한 류의 책이다. 내 기억으로는 집안이 부유했던 한 미국 유학생이 유학갔다가 ‘트로츠키주의’에 빠져 귀국 후 국제사회주의를 널리 전파(?) 하려고 이 출판사를 차렸다.(10년도 더 된 술자리의 한 전언에 따르면 말이다) 그 뒤 책갈피라는 출판사로 개명하면서 참으로 집요하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책을 펴냈다.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은 이론가들의 책들. 이 출판사와 관계가 깊었던 몇몇 트로주의자들이 생각난다. 하나같이 문약스럽고 비리비리한 인물들이었는데, ‘구라’와 ‘인간성’만큼은 감동적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책, 서점, 출판사 언저리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1985년>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빗대어 그 후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라는데, 낯익은 오웰의 ‘언어학 사전’ 용어들과 빅브라더의 이름이 보인다.
김용학 선생의 <사회구조와 행위>(나남)도 챙겼다. 시카고대 출신의 이 명민한 사회학자는 어울리지 않게(?) 좌파인 캘리니코스의 <역사와 행위>(교보문고)를 번역 소개했었는데, 그 뒤에 써낸 책이 이 책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김교수가 <사회비평>이라는 잡지에 분석 맑시즘에 대한 글을 썼는데, 하마터면 나는 그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할 뻔 했다. 대학시절 사회학과 대학원을 준비하던 한 여인이 이 책을 탐독하던 기억이 난다. 그녀를 따라 1-2장 쯤이나 읽었을까? ‘강 00 씨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립니다’ 라는 저자의 헌사가 선명하다. 이 강모씨는 왜 이 책을 내다 팔았을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내가 봤던 것은 이 책의 초판(1985년)인데, 오늘 산 건 2001년에 나온 재판이다. 시인 최승자의 번역으로 유명했는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내 손으로 표지를 쌌던 책만해도 족히 30여권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왜 있잖은가. 아무리 읽어도 선명은 커녕 점점 몽롱해지는 듯한 ‘정신주의’를 부추기는 책들. 이를테면, 카잔차키스의 <영혼으로 서리라>(청하), 류시화 류의 책들. 나는 아마 이 책을 사놓고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잃어버린 책을 다시 산 경우. 대학 1학년 즈음에 읽었다가 1년 뒤쯤 대학에 들어온, 지금은 게이가 된 후배 놈에게 <중국의 붉은별>, <전태일 평전>과 함께 선물로 줬을 것이다. 아마도 그 넘은 그 책들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녀석에게 이 따위 책들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선배라는 넘도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전사> 시리즈는 아마도 1-4권까지는 가지고 있었을 텐데,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2권 밖에 없다. 다시 펼쳐보니 송건호, 임종국, 유인호와 같은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 ‘빨갱이 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도 보인다. 그때 선배들이 분단과정을 다룬 김학준의 논문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현대사상사). 책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읽지는 않았었다. <WAY OF SEEING>으로 잘 알려진 존버거의 <영상커뮤니케이션과 사회>(나남)도 샀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갖고 있었던가, 아닌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런가. 대학시절에 존 버거를 아주 좋아하던 한 철학도가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는 책이다. 존 버거가 쓴 소설 <결혼을 향하여>도 벌써 몇 년 째 중간에서 읽다 만 채로 있다.
박완서 선생의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문학사상사)는 세계사판 전집에서는 <도시의 흉년> 두권으로 묶였던 책. 학원강사 알바를 하던 시절,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하던 여중생에게 빌려 줬는데, 그녀는 박완서 선생의 세계사판 <미망> 3권과 함께 이 책을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했을 터인데, 말수가 적고 국어만 유난히 잘하던 그 여학생이 생각났다.
또하나의 구입목록은 우리로 치자면 대중소설과 본격소설 중간 어디쯤 되는 소설을 쓰는 명민한 작가 줄리안 반즈의 <10과 1/2로 쓴 세계사>. 반즈 소설은 집에 여럿 있었으나 ‘서재 이혼시키기’와 더불어 딴 곳으로 가고 말았다. 앤서니 기든스가 쓴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의 첫장은 반즈의 소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으로 시작한다. 성찰없는 욕망이 부르는 비극을 소재로 한 그 소설은 개인의 판단를 좌우했던 외적 준거가 사라진 시대의 윤리를 묻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최인훈의 문학과 지성사판 전집 일부인 <크리스마스캐럴/가면고>. 그가 <화두>를 써냈을 무렵 갈현동 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런 모습이었다. <광장>의 작가, <화두>의 소설가라는 신화는 그날 이후로 내게서 와장창 무너졌다.
소나무에서 나온 <제주민중항쟁>까지 포함하여 이 책들 전부의 가격은 1만9천원. 싸다, 싼 것이 이 책방의 미덕이다. 자유로를 달리면서 헌책방을 가는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퇴행성 질병임을 새삼 절감했다. 더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딜레탕트이자 스노비스트라는 것까지. 그런데, 가만, 스노비즘이라도 없다면 9 to 5의 삶에서 어찌 책 한권이라도 꺼낼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스노비즘을 은밀히 나누고, 키들거리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적 공동체라도 없으면, 얼마나 황막한 세계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