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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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에서 시인 김수영만큼 ‘문제적 인간’이 또 있을까. 헝가리의 문학평론가 루카치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적 인간은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영혼을 지닌, 시대와의 불화를 제 운명처럼 지닌 존재다. 김수영은 그 거침없는 독설과 야유, ‘불온함의 미학’으로 시의 정치성을 끝간 데까지 밀고 올라가면서도 소시민적 절망에 허우적댔던 시인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문학을 양분했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옹호자들로부터 동시에 찬사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그의 시를 경유하여 문단에 발을 디뎠다.

1981년 간행된 ‘김수영 전집’이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의 ‘고전’에 오른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인 황동규에 의해 편집되어 시·산문 등 두 권으로 나뉜 ‘전집’은 각각 27쇄, 25쇄를 거듭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최근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김수영 전집’은 22년만에 개정된 판본으로 초판의 오류와 표기법을 바로잡고, 새로 발굴된 작품들을 추가해 펴낸 완결판 전집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의 경험과 당시 한국문학에 횡행했던 일본식 표기법, 유행처럼 쓰였던 외래어 등을 수정해 현대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편집했다.

첫째 권인 시편에는 1945년에 쓰인 ‘묘정의 노래’, ‘공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8년 사망 직전에 쓰인 ‘풀’까지 모두 1백76편이 수록돼 있다. 시작 초기 김수영이 노출했던 모더니즘의 과잉, 난해시 경향과 함께 4·19 이후 준열한 사회비판으로 나아간 후기 ‘참여시’로의 변모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낮에도 밤에도/어둠을 지니고 있으면서/어둠과는 타협하는 법이 없”던 김수영의 비타협적 순수성,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던 역설적 자기 긍정,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는 ‘풀’의 역사의식이 제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 추가된 시는 1949년에 쓰인 ‘아침의 유혹’. 매서우리 만큼 철저한 자기 성찰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산문도 매력적이다. 새로 발굴된 산문 17편이 추가됐다.

김수영의 시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은 사후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다. 노무현 정부의 스타 장관 중 한명인 강금실 법무장관도 김수영 시의 애독자다. 강장관은 검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길이 끝나기 전에는/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 같이/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그리고 모든 것에서부터/나를 감추리”라는 ‘더러운 향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 시에서 ‘전사’의 이미지를 강장관은 “삶의 진정성은 전사로서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해석’이 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김수영은 허위의식과 불의, 정신적 나태와 싸웠던 ‘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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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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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여름, 대만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후일 ‘하멜 표류기’를 써 서구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알린 하멜 일행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네덜란드인은 아니다. 그들보다 26년 전 조선에 표류해와 아예 눌러 앉은 얀 얀스 벨테브레(한국명 박연)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네덜란드인 방문자다. 올해는 하멜 일행이 한국에 당도한지 3백50주년이 되는 해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은 2003년을 ‘하멜의 해’로 정했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인연은 각별하다. 이 나라는 월드컵 4강 신화를 남긴 히딩크의 나라로 한국인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연이은 노동파업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네덜란드 모델이 떠오르면서 또 다시 주목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여전히 낯선 나라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덕무는 “그들은 눈이 깊고 코가 길며 머리카락이 모두 붉고 발길이가 1척 2촌인데, 항상 개처럼 한발을 든 채 오줌을 누며, 서양의 예수교를 배워 이를 믿는다”고 말했는데, 현재 우리의 인식 역시 이같은 편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네덜란드 역사 문화기행이다. 저자는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네덜란드의 현재(1부)와 역사적 형성(2부)을 소개한다. 서구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으로 비 서구 사회를 그려냈다면, 비 서구 사회는 그 역편향인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거나 반대로 맹목적 서구 추종에 빠지곤 했다. 이 책은 타문화 소개서들이 빠지기 쉬운 이같은 ‘편향’에서 벗어난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타자는 숭배와 저항의 대상이 아닌,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던가.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는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일단 서로 협력해야 했다. 그들의 ‘사회적 합의’의 토대는 이같은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본과 노동간의 대타협이 이뤄지고, 우파 정당인 자유당과 좌파 정당인 노동당의 ‘자주색 연정’이 출범한 나라. 국가 주도형 경제성장을 뜻하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한국 사회가 네덜란드를 주목하는 것도 ‘사회적 합의’의 정신 때문이다.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관용도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독일·프랑스·영국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에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이 나라의 사례는 미·일·중·러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에게 쓸모있는 참고가 될 것이다. 프랑스인 데카르트와 영국인 로크는 이곳에 머물며 대작들을 펴냈고, 탈근대 철학의 시조가 된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를 살찌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적 자존심은 그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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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매니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함께살기’라는 필명을 쓰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최종규씨로부터 SF 평론가 박상준, 연극평론가 안치운, 그리고 인터넷에 서식하는 다수의 매니어들까지. 최종규씨는 헌책방 순례와 함께 고 이오덕 선생의 후예답게 ‘우리말 지킴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가진 언어순수주의에 대한 욕망은 좀 불편하지만, 그의 활동과 우리말에 대한 사랑은 크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물론,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후기 북경의 고서점가 ‘유리창’을 뒤지고 다니던 완당 김정희도 헌책방 매니어일 것이다. 6.25 때 집이 불타면서 수만 권의 책을 태워먹은 육당 최남선도 그렇다.   

  

서강대 김열규 선생은 부산피란 시절 국제시장 노점 좌판에 쏟아져 나온 미군부대 책들을 뒤지면서 수잔 K. 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영문본 같은 ‘보물’을 찾아내던 일을 회고하고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의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의 ‘캔디 차관’으로 연명하던 한국경제와 마찬가지로 미군부대에 기생하며 지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모양이다. 6.25 전란의 와중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책더미와 2차 대전 종전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더미를 뒤지던 사람 가운데에는 민병산 선생(1928-1988)도 있었다.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였던 선생은 오히려 ‘인사동의 디오게네스, 인사동 거리의 哲人’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나는 그의 번역으로 나쓰메 소세끼의 <나는 고양이다>를 읽었다.

내가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역시 헌책방에서 구한 책 그의 유작 <철학의 즐거움>(1990, 신구문화사)에서였다. 그에 대해서는 책과 신경림, 구중서, 박이엽, 김성동, 방영웅, 강홍구와 같은 인사동에 모여 그와 교유했던 6,70년대 문학예술인들의 애틋한 회고담을 통해 어림짐작할 뿐이다. 헌책수집가인 그가 수집대상으로 삼았던 것들은 특이하게도 ‘인물평전’이었다. 그가 남긴 인물평전은 <똘스또이>, <난센> <세종대왕> 등 여럿이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대학시절에 그와 그의 책을 발견한 이후 대체로 헌책방 순례와 같은 낡은 습속을 되풀이하는 자의 면모는 민병산 선생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전후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60년대 초, 그가 기록하고 있는 헌책방의 순례의 풍경은 이러하다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서 그 운명의 길을 더듬어 간다 - 고 하지만, 정말 여행을 많이 다닌다. 대여행가의 트렁크에 명산대천의 스탬프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장서인’이 셋도 찍히고, 다섯도 찍힌 책이 있다. 지구를 한바퀴 다 돌아온 책도 있다. 이 책은 절대 문밖에 나가지 않는다 - 는 엄숙한 단서를 붙이고 버젓이 돌아다니는 책도 있다. 그 형체도 천태만상이다. 손때가 묻어서 번지르르한 책, 겉장이 떨어져 나간 책, 물을 먹어 불룩한 책, 불에 그슬리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책, 좀이 먹어서 모서리가 쏠린 책, 그런가 하면 케이스 속에 들어앉아 반세기 이상 한번도 펼쳐지지 않은 책도 드물지 않다. 그 신분이나 유서도 형형색색이다.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최신 가요집> 밑에 고운 최치원의 <계원필경>이 나오기도 하고, <무전여행 세계일주> 옆에 영국 재상 디즈레일리가 젊은 날 대륙여행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 <알로이>의 삽화들의 호화판이 꽂혀 있기도 하다. 혹은 윌리엄 모리스가 찍은 켈름스코트판 <세익스피어>가 헌 신문지 다발에 가려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철학의 즐거움>에 실린 ‘고서 이삭줍기’의 한 대목이다. 본래 충북 청주 갑부집의 아들이던 그는 운전기사가 달린 세단을 타고 등교할 정도로 ‘귀족’이었으나 ‘문학청년’이 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유산도 포기하고, 가족과도 단절한 채 독신으로 살면서 책을 ‘줍고’, ‘읽고’, ‘쓰는’ 일로 나머지 삶을 살았다. 부모의 어마어마한 재산에도 욕심이 없었던 그인데도 책에 대해서만큼은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6.25때 조부를 포함한 3대가 모아놨던 책을 잃어버린 탓인지, 그는 평생 연애도 하지 않고 책만을 사랑하고 찾으러 다녔다.

 “고서가를 다니는 사람이 얻는 가장 큰 기쁨은, 어떤 책이 - 당연히 존속할만한 생명을 지닌 책이, 자칫하면 멸망을 하려는 순간에 내 손을 뻗어서 구출하는 일이다. 책 선반에 반듯이 꽂혀 있는 책은 언젠가는 임자를 만나서 팔려간다. 어여쁜 아가씨는 곧 시집을 가는 것처럼, 그런데, 신데렐라가 부뚜막 앞에 맨발로 쭈그리고 있었던 것처럼 고귀한 책이 - 참으로 고귀한 책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다가, 지금 막 저울에 달아서 휴지상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 그 찰나에 발견을 하는 예가 있다.”

헌책방 매니어들은 이런 묘사의 실감을 알 수 있으리라. 대학 3학년 때, 한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를 오래한 덕분에 증정본 책을 수천권 쌓아두고 있던 사람을 아버지로 둔 선배가 나를 불렀다. 이 책 죄다 헌책방에 팔아버릴 것인데, 네가 갖고 싶은 책 다 가져가라고. 책 좋아하던 친구를 불러 하루 종일 이 책 저책 뒤지고 챙기는데 도저히 내가 들고 갈 수가 없어 포기했던 책이 부지기수였다. 김승옥과 같은 4.19 세대 소설가로 단 한권의 소설만을 남겼던 강호무의 <화류항사>, 이윤기가 번역한 존바스의 <키메라>,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의 미술책들, 그리고 열화당에서 나온 화집들 정도가 생각난다. 겨우 30여권 정도나 챙겼을까.

내가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기자 그 선배는 헌책방의 주인을 불러 나머지 책들을 팔아 넘겼다. 용달 트럭을 가져온 헌책방 주인은 저울로 책 무게를 재어 선배에게 ‘폐지값’을 주고는 가버렸다. 민병산 선생이 묘사하는 저 찰나의 순간을 맛본 셈이다. 어떤 고귀한 정신, 혹은 어떤 작가의 불면에 찬 고뇌가 담겨있을지 모를 책들이 저렇게 ‘저렴하게’ 팔려나간다. 유종호 선생은 대형할인마트에서 책과 함께 고추, 마늘, 간장, 과자, 신발 따위가 들어있는 쇼핑 카트 안에 신간도 몇 권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인류의 정신적 산물을 저렇게 취급하다니 하며 안타까워 한 적이 있다. 저울에 달아 팔리는 책과 쇼핑목록에 포함된 책에 대한 탄식, 이건 지나친 책 물신주의일까?

그러나, 민병산 선생은 이런 책탐 마저도 버리고 떠났다. 그가 살던 단칸방에 불이 나면서 평생을 모아온 책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그는 헌책방 순례를 멈추고 이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따 민병산체, 혹은 청구자체(靑丘子體), 구불구불해서 호롱불체로 불린 그의 글씨는 지금도 오래된 인사동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술값이 모자라면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서 대신 지불했다고 한다. 후배들이 갹출하여 치러준다는 자신의 회갑연을 한사코 거부하다 바로 그 회갑전날 세상을 떠났다. 회갑연에 입을 한복은 그대로 수의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신경림은 이런 시를 썼다. “허름한 배낭 어깨에 걸고 / 느릿느릿 걷는 그 별난 걸음걸이는 / 이제 인사동 거리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 귀천 또는 수희재에 앉아 / 눈을 반쯤 감고 어눌한 말소리로 / 지나가듯 토하는 날카로운 참말도 / 더는 인사동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다”(인사동) 그는 멋진 오빠였던지, 장례식에 문인보다 인사동 술집 여주인, 여종업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생전의 그를 나는 오로지 그의 지인들이 남긴 글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 잡식성 독서 때문인지 그에 관한 글을 나는 여러 군데서 접했다. 창비에서도, 문부식이 만들던 ‘공동선’에서도, 이문구, 신경림, 강홍구, 구중서 등등의 글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한다. 나혼자 주절주절 헌책방 순례기를 쓰면서 문득, 그에 관해서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몇 달 전 중앙일보에 실린 조우석 선배의 칼럼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언론의 스타일리스트라 할 수 있는 조우석은 ‘인사동 디오게네스 민병산’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079523)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저자거리의 ‘고수’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점점 더 모든 것이 제도권 내(가령 대학)로 흡수 되어가는 세상이라 그럴까.

인사동 문우서림의 김영복 선생을 만났을 때 우연히 민병산 선생 얘기가 나왔다. 김선생은 인사동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고서화 전문가다. 그에게 민병산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반가워하면서도 놀라던 기억이 새롭다. 저 새까만 놈이 어찌 그런 옛날 사람을 아느냐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민병산의 책 <철학의 즐거움>도 인사동 거리의 ‘후배’이자 ‘도반(道伴)’인 그가 만든 책이었다. 나 역시 그저 책으로만 알고 있던 민선생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반가웠다. 그가 반가워 하며 “나한테, 민병산 선생 글씨가 좀 있는데, 하나 줄까?” 했을 때, 나는 받고 싶었지만 거절했다.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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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6-1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 선생 궤적은 타계 20년 맞춰 나온 추모집 『으능나무와의 對話』에도
자세하게 드러나 있죠.
그리고, 형이 청주 출신이니까 잘 알거유
일제 강점기 으리으리했던 민 선생 저택이
바로 청주 중앙공원 자리라는 거...
거기 1000년된 은행나무가 바로 민 선생 뜰에 있었다는 거...
그래서 제목을 은행나무의 충청도 사투리인 으능나무 라고 붙였다는 걸...

미국사람 2011-08-20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병산 선생이 번역한 책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이 있읍니다. 또 60년대 일본 바둑 최고수였던 사카다의 묘시리즈를 번역 했기도 하구요.

조우석의 글을 읽어보니 경제신문 바둑 관전기자가 쓴 민병산론인가를 보고 쓴 것이네요.(불행히 이 사람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

인사동에서 종로를 건너면 관철동인데 그곳에 한국기원이 있었읍니다. 지금은 경찰병원 건너편 왕십리 쪽으로 갔구요. 60-70년대 문인중 한국기원에서 죽치는 사람이 많았고 민병산 선생도 그랬나봅니다.

명인번역본에는 신경림의 작품 해설이 붙어있는데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시면 일독을 권합니다. 단 지금도 출판이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한국 사정에 어두워서....

모든사이 2011-08-21 09:50   좋아요 0 | URL
그 민병산론은 강홍구 선생의 글이 아닌지? 아무튼 반갑습니다. 민병산 선생을 아는 분이라니... 그런데, 이 조우석은 요새 좌파->리버럴-> 이제는 우익 이데올로그로 변신했더군요. 박정희 책을 하나 쓰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이승만-박정희를 찬양고무하는... 그런데, 조금 새로운 우파 논리를 들고 나올줄 알았는데, 어찌 그리 조갑제식의 조악한 우익 논리와 닮았는지.. 씁쓸하더군요,..

미국사람 2011-08-22 01:1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경제 신문관전기자이던 노승일 (1943- ) 의 굿바이 관철동 (1994년 출판)에 실린 글입니다. 다만 바둑관계 이야기라 바둑을 모르시면 읽기 곤란할 책 (책이 없어져서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민병산론은 꾀 길게 쓴 것으로 같읍니다.) 민병산 선생을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라고 한 건 한국기원에서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던가....

하여간 50년대 60년대 문인이야기를 보면 바둑이 많이 끼어있구요 종로2가 관철동일대가 아지트였던 듯하구요. 조연현이나 정비석도 50-60년대 한국 최고수 조남철선생과 교유가 있던 걸 보면 요즘과은 많이 다른것 같읍니다.

관철동을 둘러싼 문인이야기는 고인이 된 강홍규의 문학동네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절판이군요.(관철동이야기라는 재목으로 나왔다가 강홍규 사후 이름을 바꾸어 나온책입니다)

참고로 제가 민가여서..... 민병산선생은 족보로 제 아저씨뻘입니다. 물론 일면식도 없긴하지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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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시>는 시(예술)의 연원과 형식에 대한 사유로 보인다. 그것은 중년, 노년이 되어서도 ‘문학소녀/청년’이고자 하는 ‘시 동호회’의 속물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해와 깊은 교감이 필요하다는 전언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문학소녀 양미자는 자살한 여중생의 내면과 고통을 알기 위해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러한 공감의 회로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시 이전(以前), 예술 이전이다.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흐르는 강물, 어린 여중생의 고통을 받아 안은 저 자연은, 그렇게 두개의 상처를 잇고 포개며 시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창동은 그렇게 그만의 예술철학을 드러내는데, 서울 근교의 그저 그렇고 그런 삶들 속에서도 시가 예비되어 있음을, 미만하여 있음을 느릿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죽은 왕비를 위한 파반느>(예담)을 일주일 동안 느릿느릿 읽었다. 느릿느릿 읽은 것은 이 소설이 튼튼하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부재하기 때문이고, 아무렇게나, 아무곳이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무방한 에세이적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이야기. 여주인공이 늘 미인이었던 모든 소설의 관습적 클리쉐를 전복시키는 연애담. 스무살의 푸른 청춘들이 만나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박민규스럽지 않은(?)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것. 여기서도 ‘사랑’의 탄생은 고통에 대한 이해이자 교감이며, 그것의 연대다. 개인이 가진 내밀한 상처를 앎이 없이 어떻게 사랑이, 시가 가능하겠는가.

박민규를 별로 좋아하지도, 읽지도 않았다. 서너 개의 단편을 보고 나서 나는 그가 내 독서관습을 거스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매우 보수적인 독서관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위 말하듯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그에 대한 평가부터가 탐탁지 않았다. 정교하고 단단한 서사, 완미한 문체, 밀도 높은 서사와 같은 19세기 소설적 취향을 가진 내게 박민규는 별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인터넷 연재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불규칙한 행갈이와 단락구분이 주는 불편함은 독서관습을 심하게 거슬렀다. 스크롤의 압박도 없는 종이 책에 이 무슨 해괴한 실험인가.

소설속의 시간은 중고교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와 나는 거의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모양이다. 프로야구, 조다쉬 청바지, 나이키, 비틀즈, 아하, 영웅본색, 이선희 이런 8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 곳곳에서 상기되며 개발연대의 막바지였던 지방 소도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소설이 가버린 스무살 청춘을 회억하며, 순정했던 연애, 그 순금(純金)의 시간을 풋풋하게 불러오듯이, 잠시 옛적의 기억에 젖어 묵은 일들을 떠올렸다. 오래되어야 금이 되고, 더 오래되어야 순금이 되듯이, 기억은 묵어야 온전히 제 빛깔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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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추억 -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김연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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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를 읽은 건 꼭 천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겨레21>에 연재됐을 당시부터 김연철의 글을 흥미롭게 보았던 처지라 작년 6월 이 책이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바로 샀다. 1년 여 묵어 있던 이 책에 다시 손을 댔을 때, 마침 우리 사회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전쟁이 뭐 별것이겠는가. 휴전선에서 대북 확성기에 대고 선전방송을 해대고, 거기에 열받은 북한이 조준사격을 하고 우리가 대응사격을 한다면 그게 바로 국지전이고 전쟁 아니겠는가. 김연철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8월의 포성>(평민사)은 그런 ‘우연’이 만들어낸 1차대전이라는 대참사를 기록한 책이다.


바바라 터크만의 <8월의 포성>
<냉전의 추억>은 남북관계 혹은 남북교류에 관한 역사에세이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진행된 남북간 대화, 교류, 협력, 협상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자 평가다. 이 책으로 보건대 확실히 남북관계는 간헐적인 퇴행에도 불구하고 교류와 협력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진전돼 왔다. 김연철은 이런 관점을 오롯하게 드러낸다. 북한이 핵개발을 했던 노무현 정부 시대에도, 심지어 전두환 정부 시절 아웅산 테러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더디지만 조금씩 진전돼 왔다. 대결과 긴장의 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세계사적 진보다. 백낙청의 말을 빌면, 분단체제는 남북간의 적대적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흔들려” 왔던 것이다.


김연철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햇볕정책에서 달빛정책’으로 퇴행했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고려대 연구교수,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등 기업과 정부, 학계를 두루 거친 그의 눈에 비친 현재는 그렇다. 하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에 대한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북관계는 꼭 10년 전으로 퇴행했다. 현재의 긴장과 대결국면은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때 그 시절의 ‘올드보이’들이 다시 등장한 것도 그렇고,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에 실패하고 있는 점도 똑같다. 대체 이상우, 유종하 같은 사람이 언젯적 사람들인가. 북한에 대한 조갑제식의 인식으로 남북 평화프로세스를 풀어갈 수 있을까. 박정희, 전두환보다 더 퇴행적이었던 YS의 대북강경 노선과 그 주도자들이 10년 후에 재등장했다는 역사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보수정부가 들어섰을 때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만큼은 진보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진보정부가 남북화해를 추진할 때마다 불거졌던 남남갈등이나 대북퍼주기 논란은 한결 줄어들 것이라 판단했다. 보수여론의 발목잡기에 엉거주춤했던 진보정부보다 보수정부가 더 몸 가볍게 남북화해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있었다. ‘비핵개방3000’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많은 대북지원 내용을 담고 있다. 보수정부 역시 ‘대북 퍼주기’를 할 진대, 적어도 이 정부 이후로는 소모적인 대북 퍼주기 논란은 수그러들 것이라 전망했다. 역사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진전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현실은 이런 기대를 처절하게 배반하고 말았다.

<냉전의 추억>에는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과 산문적 인식이 교차한다. 이산가족, ‘관제’ 간첩 사건에 대한 글들은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남북협상과 북미관계사를 검토하는 글은 현실에 대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빛난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미 관계가 선순환을 이룰 때 가능하다”거나 “서해가 한반도 문제를 푸는 열쇠다”라는 진단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시간과 북미관계의 역사적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본격화하자 강경파인 부시가 등장하고, 부시가 일방주의에서 다자주의로 변화하자마자 한반도에서는 냉전적인 보수정부가 들어선다. 그 와중에 한반도 평화는 퇴행과 좌절을 반복하고.

김연철은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문제해결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남북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과 대화가 되지 않는 남한을 6자회담 테이블에 불러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서서 직접적인 북미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닌가. 1994년 1차 핵위기 당시 제네바합의 때가 그랬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해서 타결안을 내고, 우리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경수로 비용을 감당했던 것. 그토록 강조하는 6자회담의 진전을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는 협상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대로 가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조차 남의 손에 맡기는 꼴이 될 것이다.

김연철은 오늘자 한겨레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전쟁불사 패러다임은 원조 보수정권에서도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뉴라이트’의 특이한 인식일 뿐”이라 비판한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3234.html) 이 ‘특이한 인식’이 냉전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북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나는 김연철의 이 책이 많이 팔려 많은 사람들이 맹목과 무지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 좀더 차분히 남북관계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 안의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까스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2년 만에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토대가 허약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체제’와 ‘무의식’을 걷어 내기에는 지난 50년 반공국가주의가 너무 강력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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