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매니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함께살기’라는 필명을 쓰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최종규씨로부터 SF 평론가 박상준, 연극평론가 안치운, 그리고 인터넷에 서식하는 다수의 매니어들까지. 최종규씨는 헌책방 순례와 함께 고 이오덕 선생의 후예답게 ‘우리말 지킴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가진 언어순수주의에 대한 욕망은 좀 불편하지만, 그의 활동과 우리말에 대한 사랑은 크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물론,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후기 북경의 고서점가 ‘유리창’을 뒤지고 다니던 완당 김정희도 헌책방 매니어일 것이다. 6.25 때 집이 불타면서 수만 권의 책을 태워먹은 육당 최남선도 그렇다.
서강대 김열규 선생은 부산피란 시절 국제시장 노점 좌판에 쏟아져 나온 미군부대 책들을 뒤지면서 수잔 K. 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영문본 같은 ‘보물’을 찾아내던 일을 회고하고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의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의 ‘캔디 차관’으로 연명하던 한국경제와 마찬가지로 미군부대에 기생하며 지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모양이다. 6.25 전란의 와중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책더미와 2차 대전 종전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더미를 뒤지던 사람 가운데에는 민병산 선생(1928-1988)도 있었다.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였던 선생은 오히려 ‘인사동의 디오게네스, 인사동 거리의 哲人’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나는 그의 번역으로 나쓰메 소세끼의 <나는 고양이다>를 읽었다.
내가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역시 헌책방에서 구한 책 그의 유작 <철학의 즐거움>(1990, 신구문화사)에서였다. 그에 대해서는 책과 신경림, 구중서, 박이엽, 김성동, 방영웅, 강홍구와 같은 인사동에 모여 그와 교유했던 6,70년대 문학예술인들의 애틋한 회고담을 통해 어림짐작할 뿐이다. 헌책수집가인 그가 수집대상으로 삼았던 것들은 특이하게도 ‘인물평전’이었다. 그가 남긴 인물평전은 <똘스또이>, <난센> <세종대왕> 등 여럿이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대학시절에 그와 그의 책을 발견한 이후 대체로 헌책방 순례와 같은 낡은 습속을 되풀이하는 자의 면모는 민병산 선생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전후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60년대 초, 그가 기록하고 있는 헌책방의 순례의 풍경은 이러하다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서 그 운명의 길을 더듬어 간다 - 고 하지만, 정말 여행을 많이 다닌다. 대여행가의 트렁크에 명산대천의 스탬프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장서인’이 셋도 찍히고, 다섯도 찍힌 책이 있다. 지구를 한바퀴 다 돌아온 책도 있다. 이 책은 절대 문밖에 나가지 않는다 - 는 엄숙한 단서를 붙이고 버젓이 돌아다니는 책도 있다. 그 형체도 천태만상이다. 손때가 묻어서 번지르르한 책, 겉장이 떨어져 나간 책, 물을 먹어 불룩한 책, 불에 그슬리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책, 좀이 먹어서 모서리가 쏠린 책, 그런가 하면 케이스 속에 들어앉아 반세기 이상 한번도 펼쳐지지 않은 책도 드물지 않다. 그 신분이나 유서도 형형색색이다.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최신 가요집> 밑에 고운 최치원의 <계원필경>이 나오기도 하고, <무전여행 세계일주> 옆에 영국 재상 디즈레일리가 젊은 날 대륙여행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 <알로이>의 삽화들의 호화판이 꽂혀 있기도 하다. 혹은 윌리엄 모리스가 찍은 켈름스코트판 <세익스피어>가 헌 신문지 다발에 가려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철학의 즐거움>에 실린 ‘고서 이삭줍기’의 한 대목이다. 본래 충북 청주 갑부집의 아들이던 그는 운전기사가 달린 세단을 타고 등교할 정도로 ‘귀족’이었으나 ‘문학청년’이 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유산도 포기하고, 가족과도 단절한 채 독신으로 살면서 책을 ‘줍고’, ‘읽고’, ‘쓰는’ 일로 나머지 삶을 살았다. 부모의 어마어마한 재산에도 욕심이 없었던 그인데도 책에 대해서만큼은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6.25때 조부를 포함한 3대가 모아놨던 책을 잃어버린 탓인지, 그는 평생 연애도 하지 않고 책만을 사랑하고 찾으러 다녔다.
“고서가를 다니는 사람이 얻는 가장 큰 기쁨은, 어떤 책이 - 당연히 존속할만한 생명을 지닌 책이, 자칫하면 멸망을 하려는 순간에 내 손을 뻗어서 구출하는 일이다. 책 선반에 반듯이 꽂혀 있는 책은 언젠가는 임자를 만나서 팔려간다. 어여쁜 아가씨는 곧 시집을 가는 것처럼, 그런데, 신데렐라가 부뚜막 앞에 맨발로 쭈그리고 있었던 것처럼 고귀한 책이 - 참으로 고귀한 책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다가, 지금 막 저울에 달아서 휴지상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 그 찰나에 발견을 하는 예가 있다.”
헌책방 매니어들은 이런 묘사의 실감을 알 수 있으리라. 대학 3학년 때, 한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를 오래한 덕분에 증정본 책을 수천권 쌓아두고 있던 사람을 아버지로 둔 선배가 나를 불렀다. 이 책 죄다 헌책방에 팔아버릴 것인데, 네가 갖고 싶은 책 다 가져가라고. 책 좋아하던 친구를 불러 하루 종일 이 책 저책 뒤지고 챙기는데 도저히 내가 들고 갈 수가 없어 포기했던 책이 부지기수였다. 김승옥과 같은 4.19 세대 소설가로 단 한권의 소설만을 남겼던 강호무의 <화류항사>, 이윤기가 번역한 존바스의 <키메라>,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의 미술책들, 그리고 열화당에서 나온 화집들 정도가 생각난다. 겨우 30여권 정도나 챙겼을까.
내가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기자 그 선배는 헌책방의 주인을 불러 나머지 책들을 팔아 넘겼다. 용달 트럭을 가져온 헌책방 주인은 저울로 책 무게를 재어 선배에게 ‘폐지값’을 주고는 가버렸다. 민병산 선생이 묘사하는 저 찰나의 순간을 맛본 셈이다. 어떤 고귀한 정신, 혹은 어떤 작가의 불면에 찬 고뇌가 담겨있을지 모를 책들이 저렇게 ‘저렴하게’ 팔려나간다. 유종호 선생은 대형할인마트에서 책과 함께 고추, 마늘, 간장, 과자, 신발 따위가 들어있는 쇼핑 카트 안에 신간도 몇 권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인류의 정신적 산물을 저렇게 취급하다니 하며 안타까워 한 적이 있다. 저울에 달아 팔리는 책과 쇼핑목록에 포함된 책에 대한 탄식, 이건 지나친 책 물신주의일까?
그러나, 민병산 선생은 이런 책탐 마저도 버리고 떠났다. 그가 살던 단칸방에 불이 나면서 평생을 모아온 책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그는 헌책방 순례를 멈추고 이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따 민병산체, 혹은 청구자체(靑丘子體), 구불구불해서 호롱불체로 불린 그의 글씨는 지금도 오래된 인사동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술값이 모자라면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서 대신 지불했다고 한다. 후배들이 갹출하여 치러준다는 자신의 회갑연을 한사코 거부하다 바로 그 회갑전날 세상을 떠났다. 회갑연에 입을 한복은 그대로 수의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신경림은 이런 시를 썼다. “허름한 배낭 어깨에 걸고 / 느릿느릿 걷는 그 별난 걸음걸이는 / 이제 인사동 거리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 귀천 또는 수희재에 앉아 / 눈을 반쯤 감고 어눌한 말소리로 / 지나가듯 토하는 날카로운 참말도 / 더는 인사동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다”(인사동) 그는 멋진 오빠였던지, 장례식에 문인보다 인사동 술집 여주인, 여종업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생전의 그를 나는 오로지 그의 지인들이 남긴 글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 잡식성 독서 때문인지 그에 관한 글을 나는 여러 군데서 접했다. 창비에서도, 문부식이 만들던 ‘공동선’에서도, 이문구, 신경림, 강홍구, 구중서 등등의 글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한다. 나혼자 주절주절 헌책방 순례기를 쓰면서 문득, 그에 관해서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몇 달 전 중앙일보에 실린 조우석 선배의 칼럼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언론의 스타일리스트라 할 수 있는 조우석은 ‘인사동 디오게네스 민병산’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079523)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저자거리의 ‘고수’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점점 더 모든 것이 제도권 내(가령 대학)로 흡수 되어가는 세상이라 그럴까.
인사동 문우서림의 김영복 선생을 만났을 때 우연히 민병산 선생 얘기가 나왔다. 김선생은 인사동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고서화 전문가다. 그에게 민병산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반가워하면서도 놀라던 기억이 새롭다. 저 새까만 놈이 어찌 그런 옛날 사람을 아느냐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민병산의 책 <철학의 즐거움>도 인사동 거리의 ‘후배’이자 ‘도반(道伴)’인 그가 만든 책이었다. 나 역시 그저 책으로만 알고 있던 민선생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반가웠다. 그가 반가워 하며 “나한테, 민병산 선생 글씨가 좀 있는데, 하나 줄까?” 했을 때, 나는 받고 싶었지만 거절했다.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