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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이창동의 <시>는 시(예술)의 연원과 형식에 대한 사유로 보인다. 그것은 중년, 노년이 되어서도 ‘문학소녀/청년’이고자 하는 ‘시 동호회’의 속물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해와 깊은 교감이 필요하다는 전언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문학소녀 양미자는 자살한 여중생의 내면과 고통을 알기 위해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러한 공감의 회로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시 이전(以前), 예술 이전이다.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흐르는 강물, 어린 여중생의 고통을 받아 안은 저 자연은, 그렇게 두개의 상처를 잇고 포개며 시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창동은 그렇게 그만의 예술철학을 드러내는데, 서울 근교의 그저 그렇고 그런 삶들 속에서도 시가 예비되어 있음을, 미만하여 있음을 느릿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죽은 왕비를 위한 파반느>(예담)을 일주일 동안 느릿느릿 읽었다. 느릿느릿 읽은 것은 이 소설이 튼튼하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부재하기 때문이고, 아무렇게나, 아무곳이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무방한 에세이적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이야기. 여주인공이 늘 미인이었던 모든 소설의 관습적 클리쉐를 전복시키는 연애담. 스무살의 푸른 청춘들이 만나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박민규스럽지 않은(?)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것. 여기서도 ‘사랑’의 탄생은 고통에 대한 이해이자 교감이며, 그것의 연대다. 개인이 가진 내밀한 상처를 앎이 없이 어떻게 사랑이, 시가 가능하겠는가.
박민규를 별로 좋아하지도, 읽지도 않았다. 서너 개의 단편을 보고 나서 나는 그가 내 독서관습을 거스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매우 보수적인 독서관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위 말하듯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그에 대한 평가부터가 탐탁지 않았다. 정교하고 단단한 서사, 완미한 문체, 밀도 높은 서사와 같은 19세기 소설적 취향을 가진 내게 박민규는 별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인터넷 연재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불규칙한 행갈이와 단락구분이 주는 불편함은 독서관습을 심하게 거슬렀다. 스크롤의 압박도 없는 종이 책에 이 무슨 해괴한 실험인가.
소설속의 시간은 중고교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와 나는 거의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모양이다. 프로야구, 조다쉬 청바지, 나이키, 비틀즈, 아하, 영웅본색, 이선희 이런 8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 곳곳에서 상기되며 개발연대의 막바지였던 지방 소도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소설이 가버린 스무살 청춘을 회억하며, 순정했던 연애, 그 순금(純金)의 시간을 풋풋하게 불러오듯이, 잠시 옛적의 기억에 젖어 묵은 일들을 떠올렸다. 오래되어야 금이 되고, 더 오래되어야 순금이 되듯이, 기억은 묵어야 온전히 제 빛깔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