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추억 -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김연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를 읽은 건 꼭 천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겨레21>에 연재됐을 당시부터 김연철의 글을 흥미롭게 보았던 처지라 작년 6월 이 책이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바로 샀다. 1년 여 묵어 있던 이 책에 다시 손을 댔을 때, 마침 우리 사회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전쟁이 뭐 별것이겠는가. 휴전선에서 대북 확성기에 대고 선전방송을 해대고, 거기에 열받은 북한이 조준사격을 하고 우리가 대응사격을 한다면 그게 바로 국지전이고 전쟁 아니겠는가. 김연철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8월의 포성>(평민사)은 그런 ‘우연’이 만들어낸 1차대전이라는 대참사를 기록한 책이다.


바바라 터크만의 <8월의 포성>
<냉전의 추억>은 남북관계 혹은 남북교류에 관한 역사에세이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진행된 남북간 대화, 교류, 협력, 협상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자 평가다. 이 책으로 보건대 확실히 남북관계는 간헐적인 퇴행에도 불구하고 교류와 협력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진전돼 왔다. 김연철은 이런 관점을 오롯하게 드러낸다. 북한이 핵개발을 했던 노무현 정부 시대에도, 심지어 전두환 정부 시절 아웅산 테러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더디지만 조금씩 진전돼 왔다. 대결과 긴장의 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세계사적 진보다. 백낙청의 말을 빌면, 분단체제는 남북간의 적대적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흔들려” 왔던 것이다.


김연철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햇볕정책에서 달빛정책’으로 퇴행했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고려대 연구교수,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등 기업과 정부, 학계를 두루 거친 그의 눈에 비친 현재는 그렇다. 하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에 대한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북관계는 꼭 10년 전으로 퇴행했다. 현재의 긴장과 대결국면은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때 그 시절의 ‘올드보이’들이 다시 등장한 것도 그렇고,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에 실패하고 있는 점도 똑같다. 대체 이상우, 유종하 같은 사람이 언젯적 사람들인가. 북한에 대한 조갑제식의 인식으로 남북 평화프로세스를 풀어갈 수 있을까. 박정희, 전두환보다 더 퇴행적이었던 YS의 대북강경 노선과 그 주도자들이 10년 후에 재등장했다는 역사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보수정부가 들어섰을 때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만큼은 진보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진보정부가 남북화해를 추진할 때마다 불거졌던 남남갈등이나 대북퍼주기 논란은 한결 줄어들 것이라 판단했다. 보수여론의 발목잡기에 엉거주춤했던 진보정부보다 보수정부가 더 몸 가볍게 남북화해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있었다. ‘비핵개방3000’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많은 대북지원 내용을 담고 있다. 보수정부 역시 ‘대북 퍼주기’를 할 진대, 적어도 이 정부 이후로는 소모적인 대북 퍼주기 논란은 수그러들 것이라 전망했다. 역사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진전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현실은 이런 기대를 처절하게 배반하고 말았다.

<냉전의 추억>에는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과 산문적 인식이 교차한다. 이산가족, ‘관제’ 간첩 사건에 대한 글들은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남북협상과 북미관계사를 검토하는 글은 현실에 대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빛난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미 관계가 선순환을 이룰 때 가능하다”거나 “서해가 한반도 문제를 푸는 열쇠다”라는 진단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시간과 북미관계의 역사적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본격화하자 강경파인 부시가 등장하고, 부시가 일방주의에서 다자주의로 변화하자마자 한반도에서는 냉전적인 보수정부가 들어선다. 그 와중에 한반도 평화는 퇴행과 좌절을 반복하고.

김연철은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문제해결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남북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과 대화가 되지 않는 남한을 6자회담 테이블에 불러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서서 직접적인 북미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닌가. 1994년 1차 핵위기 당시 제네바합의 때가 그랬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해서 타결안을 내고, 우리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경수로 비용을 감당했던 것. 그토록 강조하는 6자회담의 진전을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는 협상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대로 가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조차 남의 손에 맡기는 꼴이 될 것이다.

김연철은 오늘자 한겨레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전쟁불사 패러다임은 원조 보수정권에서도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뉴라이트’의 특이한 인식일 뿐”이라 비판한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3234.html) 이 ‘특이한 인식’이 냉전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북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나는 김연철의 이 책이 많이 팔려 많은 사람들이 맹목과 무지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 좀더 차분히 남북관계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 안의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까스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2년 만에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토대가 허약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체제’와 ‘무의식’을 걷어 내기에는 지난 50년 반공국가주의가 너무 강력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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