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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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재인의 운명>을 오후부터 읽기 시작해 새벽 두시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시기가 거의 동시대라 할 수 있는 근접과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사회에 대한 시각에 대부분 동의했고,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참여정부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공한 정부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문재인이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듯이 ‘역량’의 부족이었다. 그의 과거사와 노무현과의 인연은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외모에서 풍기는 면모와 속에 품고 있는 마음결이 똑같은 보기 드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것은 이른바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에서였다. 진주 경상대의 진보적인 교수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같은 제목의 교양서가 국보법 위반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던 사건이다. 민노당 정책위원장을 했던 경제학과 장상환, 한때 서울대 폐지론을 말했던 사회학과 정진상, 그리고 여전히 완강한 ‘강단 트로츠키주의자’로 살아가는 정성진 등이 집필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산실이 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연구>라는 무시무시한(?) 정기간행물을 내고 있다.) 신문에는 그 사건의 변호인이 문재인이라고 나와 있었다. ‘인권변호사’하면 한승헌, 조영래, 홍성우, 이돈명 등을 떠올리게 마련이었는데, 부산에서도 이런 일로 변호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를 무렵, 가깝게 지내던 판사출신의 법조인은 노무현은 분수 모르고 날뛰는 ‘가짜’지만, 문재인은 ‘진짜 빨갱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명색이 판사로서 30여년 간을 일했던 그가 보여주는 대단히 ‘나이브한’ 인식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7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인권 변호사로서의 활동이 그가 말하는 ‘빨갱이’의 근거였는데, 법조인의 논리치고는 참으로 조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짜/진짜 논리는 노무현에 대해서는 서울대도 나오지 않은 ‘상고출신’이기에 인정할 수 없지만, 문재인은 ‘비록’ 경희대 출신이지만 사법연수원 차석이라는 뛰어난 성적이 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아마도 서울대를 나온 법조엘리트들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참여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여름에 추천하는 책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오영교 행자부 장관은 잭웰치의 자서전을 꼽았고, 곽결호 환경부 장관은 <꿈의 도시 꾸리찌바>를 꼽았고,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선물>(스펜서 존슨)를 꼽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박기영 과학기술보좌관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꼽았다는 점, 그리고 문재인이 <책 한권 들고 파리를 가다>라는 책을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정부혁신을 맡고 있는 행자부 장관이 가차 없는 구조조정으로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잭 웰치를 ‘사부’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환경부 장관이 꾸리찌바를 말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지만, 김근태가 ‘대중추수적으로’ 말랑말랑한 베스트셀러를 꼽는 것을 보고 다분히 정치인스러운 추천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프랑스비평가는 글은 곧 사람이다, 라는 말을 했지만, 이 말은 책은 곧 사람이다, 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박기영이 사라마구의 책을 선정한 것은 ‘정치인’이전에 ‘교양독서가’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한국의 관료사회에서 사라마구의 독자를 찾기는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중국인 부부가 쓴 파리 여행서를 추천한 것이다. 업무상 관련이 있는 책도 아니고, 그 책이 대단히 명성높은 책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문재인은 정말 그 책을 읽었던 것이고, 감동도 받았던 것이고, 언젠가 파리의 유적들을 돌며 프랑스 혁명의 흔적들을 찾고 싶은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참여정부 초기 민정수석을 하다 사표를 낸 뒤 히말라야 트래킹을 갔던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인간, 청와대 수석 가운데 그런 희귀한 내면을 가진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문재인의 성향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성(authenticity)이 그것을 형성하는 ‘주체’와 성찰적 ‘내면’, 그리고 그 내면의 주체가 투신하게 될 ‘공적 지평’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는 김홍중의 지적(<마음의 사회학>)을 따르자면, 문재인의 얼굴은 희귀하게 그런 진정성의 표정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느끼게 되는 그의 면모는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되지 않은 개인이면서 특정한 시기의 주요한 정치적 행위자였으며,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적 개혁과 일치시키려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문재인은  자신의 내면과 거기서 말미암은 공공적 실천행위가 행복하게 일치하는 보기 드문 존재다. 
 

그와 노무현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박정희와 김종필? 전두환과 장세동? 김대중과 박지원?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지적, 물질적 후원자라는 점에서는 노-문 둘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5·16 쿠데타에 함께 뜻을 모았다는 의미의 ‘동지’라는 점만 빼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전과 장에 비유했다가는 아마 돌에 맞을 것 같다. 김대중과 박지원은 주군과 가신으로 얽힌 엄격한 상하관계였다는 점에서 역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동업자’였으며,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으며, 대통령과 수석, 비서실장으로 얽힌 ‘정치적 동반자’였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길고 오랜 정치적 동반의 과정은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로 얽힌 존재들이 아니라, ‘가치의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노무현은 판사임용을 거부당한 그를 동업자로 끌어들이면서 관계를 맺었지만, 시국사범과 노동자에 대한 인권 변호를 통해 ‘가치동맹’으로 발전했으며, 참여정부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또다른 운명까지도 함께 했다.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인 그가 지키려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오랜 세월동안 공동으로 일구었던 ‘노무현의 가치’(그것은 또한 문재인의 가치이기도 하다)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은 이 가치의 공동체가 이룬 최고의 연대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언론에서는 이런 ‘문재인의 운명’을 두고 정치인으로 나설 것이라 섣불리(혹은 고의적인 부추김으로) 전망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정치인의 유전자를 타고나지 않은 것 같다.

문재인은 “진보 개혁 진영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혁’과 ‘복지국가’를 정권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 속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참여정부가 증명한 것, 참여정부가 남긴 교훈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보개혁 진영의 역량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진단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당이든 곱씹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에만 당선되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거나 대통령만 사라지면 모든 악이 제거될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메시아주의다. 우리사회의 진보는 한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하기에는 정치적 능력도, 사회문화적 역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보수는 달리 거론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이 책의 출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수부장의 “오만한 태도”는 논외로 하고, 문재인이 제기한 이런 문제나 차분히 성찰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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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은 곧 사람이다"는 18세기 佛 박물학자 뷔퐁이 학술원 회원될 때 연설에서 한 말이라고 정명환 선생의 "문학을 생각하다"에 나오네요..^^

모든사이 2011-06-25 17:44   좋아요 0 | URL
정명환 선생의 <문학을 생각한다>를 찾아보니, 글이 아니라,'문체는 인간이다'라고 나오는 군요. 뭐, 워낙 고전적인 말이라서 요즘 같은 세상에 거론하기에는 조금 올드패션이기도 한.. 정명환 선생이 이 글을 쓴게 1967년인데, 그때의 예술의 주류는 문학이었을 것 같은데, 참으로 머언 먼 나라의 이야기지요..ㅎㅎ

트레바리 2011-06-2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책 제목은 <문학을 생각하다>입니다..^^ 왜 <문학을 생각한다>로 짓지 않았는지, 그 책 저자 서문에 나오네요..^^

모든사이 2011-06-2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역시 찾아보니 그렇군요. 이 블로그의 배경이 되는 책꽂이의 위에서 두번째 오늘쪽 두번째 칸에 정명환 선생의 책이 꽂혀 있지요. 그런데, 정명환 선생의 책을 읽으시다니 그쪽 전공이 아니라면 님도 대단한 분이시군요. 평론집이 읽히지 않는 시대인데, 더구나 한참 전에 정년 퇴직한 사르트르 연구자의 글을 꺼내 읽는 것은 요즘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요. 반갑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1-08-2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타고 들어옵니다.
와~ 엄청난 글입니다. 모든사이님의 글을 보니 정말이지 제 자신이 원래 작고 수준이 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는데, 더더욱 느꼅니다. 글의 진정성에서 심오함이 배겨 나온 것이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8월 26일 부산 MBC에서 문재인 변호사님의 북콘서트 보러 가는데 정말 기대되는데, 이 글을 보면서 더욱 기대됩니다.

모든사이 2011-08-21 09: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께서 너무 과찬을 하시네요.. ^^ 글이 좋은 게 아니라, 문재인 변호사가 훌륭해서 그렇지요...

미국사람 2011-08-2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러 생각이 나는 글입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이 날뻔 했네요.

글쎄 현재 한국의 진보나 보수가 국가 운영능력이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노무현의 실패는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했고 이명박의 현재 모습은 실패한 정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듯한데 이는 국가운영 철학의 부재에서 출발한 듯 합니다. 철학이 부족한게 아니라 아주 없는 듯...

지도자의 능력이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이 있지만 80년 이후 한국 지도자의 수준은 국민 수준을 못따라간게 아닌가 합니다. 아니면 한국 정치의 수준이나 과정이 능력있는 정치인을 도태시키는 것이었든지...

님의 진정성이라는 말의 사용방식에 진정으로 동의하고 싶네요. 진정성이란 작위적으로 만들어낼수 없는 법. 문제인에게서 진정성을 보았다는 것. 그렇군요.

불행히도 이명박에게서는 진정성을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시대의 불행입니다.

참 훌륭한 글이네요. 혹시 글로 먹고사시는지....

모든사이 2011-08-23 09: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노무현이 포스트모던 정치가였다는 일각의 평가가 맞다면, 그의 수준을 국민이 못 따라간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엠비 정부는 철학도 방향도 없는데, 이건 그의 기본소양이 너무 없어서 라고 봅니다. 공부와 사고의 수준이 칠십년대에 머물러 있는. 거창한 철학의 문제가 아니고요.


저는 글 써서 밥먹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전엔 그 비슷했지만... 거듭 관심 감사드립니다.

미국사람 2011-08-24 02: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렇게 훌륭한 글이 이렇게 숨어있다는게 아깝군요.

하긴 글써서 먹고 살기 쉬운 세상은 아니죠. 혹시 김재태라고 아는지 모르겠읍니다. 대학 동창이고 시사저널 기자였고 괜찮은 친구였는데 먹고 살기 힘들었는지 이상하게 되었더군요. 이 친구를 탓해야할지 아니면 세상을 탓해야할지. 10여년만에 한국에 갔더니 이 친구를 탓하기보다는 신세가 딱하게 됐다고 동창들이 동정을 하더군요.

슬픈 세상입니다.


모든사이 2011-08-2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사람, 말씀하신 분은 잘 모르겠군요. 아마도 시사저널 파업을 하면서 대다수 기자들은 거기를 나와 시사인을 차려 독립했고, 그 분은 원래의 시사저널에 그냥 남은 것 같네요. 시사저널 사태는 대기업과 언론의 관계, 특히 삼성의 '언론관리술', 그리고 광고와 언론산업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남은 자들은 남은자들의 논리가, 떠난 자들은 떠난 자들대로의 논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오묘한 실존의 논리(?) 앞에서는 뭐라 말하기가 그렇네요. 문제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언론의 길을 갈 수 있는 환경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현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세가 딱하고 말고 이전에 말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들은, 저를 포함하여 두루 딱하지요.

2011-09-0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1-09-02 17:2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
 
애초의 당신 민음의 시 172
김요일 지음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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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일의 시집 <애초의 당신>(민음사)를 읽다. 책 앞 날개에 소줏잔을 들이키는 시인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 전체에서도 주정류(酒精類)의 향기가 독하게 뿜어져 나온다. 술을 마시며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혁명을 꿈꾸었던, 한때 모두가 혁명가였던 시절을 회고한다. 다행히 그의 회고취미는 누추하지 않은 것이어서 간결하고 압축적인 시어들은 그가 취기의 와중에도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마시는 ‘독주’처럼, 몇 개의 시들은 가슴을 후벼 파더니 결국 저녁 술자리를 불러내어 “세속적으로, 세속적으로/빠르게 독주를 들이”켜게 만들었다. (이 점, 이 자의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전염력이리라.) 이 사람, 참으로 청승맞고 멜랑꼴리한 ‘술자리 낭만주의자’다.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카치올리’라는 집시들의 마을에서 가서도 술을 마신다. 그는 카치올리에 있는 “급진고물소(急進古物所)”의 “음표 가공수리사”인데(카치올리의 음악가), 사람들은 그가 닦고 수리한 ‘음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든다. ‘시인을 위한 카덴차’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자신의, 그리고 시인의 운명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버려진 음표들을 닦고 만들어 거리에 뿌려 마을에 음악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낮에도 “한 잔의/태양”(낮술)인 술을 마시며, “출렁이는 선창에서는 독주 한잔에도 취하는 법”(밀항)이니, “그늘 한 점 없는 마른 나무 밑동에 기대어/그도 한 잔, 나도 한 잔”하면서 “안주는 필요치 않”(순례의 노래)으니, 어김없이 그 옆에는 “밀주든 독주든 그윽이 잔을 치던 여자”(인어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그는 술마시고 음악에 빠진 음유(飮遊)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가 내 눈을 끌게 된 것은 ‘우드스탁을 떠나며’라는 시 때문이다. “고백컨대, 신촌의 절반은 내것이었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대학로, 강남, 신촌에 퍼져 있는 몇군데의 우드스탁 중에 유독 ‘신촌의 우드스탁’을 불러내고 있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잔 없이 병째 들이키는 맥주, 술집 바깥에까지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음악소리, 옆 자리의 사람에게도 고함을 쳐야 대화가 가능한 그곳, 90년대 초반 신촌의 우드스탁을 떠오르게 했다. 그 때 저쪽 구석에서 뻑뻑 담배를 피며 헤드뱅잉을 하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 그때, 에릭 사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던가, 낙서로 가득한 벽면에 걸린 그림은 에곤 쉴레의 그것이었던가. 나야 우드스탁의 그 ‘자폐적이고 매니어스러운’ 분위기가 싫어 길 건너 ‘놀이하는 사람들’에서 술벗들과 ‘anarchy in the UK'를 듣거나, ‘studio 70's’의 70년대적 낭만주의를 더 좋아했지만. 그도 아니라면, ‘케자르’에서 10여년째 철학과 박사과정을 다니며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던 한 늙은 철학도를 술벗삼아 김추자 노래를 들으며 1천원짜리 치즈안주로 맥주를 마시거나. 
 

철없던 계절의 뒷골목아, 안녕
뒤돌아보지 않으마 
 

(3번테이블,볼셰비키앉아맥주를마신다) 
 

안녕, 쓸쓸히 머리 푼 가로수야 마른 잎들아
나는 너를 떠난다
색 바랜 청동의 영웅도, 자욱한 최루탄 연기 같은 추억도
이젠 게워내련다 돌아보지 않으련다 
 

(늦게떠나는바캉스처럼기대도낭만도담지않고이것저것아무거나배낭에구겨넣고서간다)
(에릭사티도,에곤쉴레도이젠없다이곳엔) 
 

푸른 피 가득한 거리를 지나
냄새나는 추억을 밟고
폭설이 퍼붓기 전에 처마의 고드름 심장에 처박히기 전에 
 

간다, 황급히 도망가련다 
 

(깊게패인옷을입은클라라의하얀가슴위엔반달이뜬다)
(숨이막힌다흩날리는꽃잎꽃잎꽃이파리들...) 
 

세월이 조롱할지라도, 이제 난 꿈을 꾸련다 
 

(지미핸드릭스의기타가부서진다)
(거리엔보르헤르트,비틀대며걷는다) 
 

누르고 참았던 슬픈 기억처럼
울컥,
태양이 솟는다, 찬란한 비애여! 
 

건배! 
 

 - ‘우드스탁을 떠나며’ , 고백컨대, 신촌의 절반은 내 것이었다
 

여기엔 볼세비키와 에곤 쉴레와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리고 지미 핸드릭스가 공존한다. 색바랜 청동의 영웅인 레닌의 동상, 최루탄 연기와 같은 그의 옛 시절은 “냄새나는 추억”인 모양이다. 그것들이 모여 옹송대는 거리를 그는 떠나려 한다. 하지만, 울컥, 찬란한 비애가 솟는다. 이 격정적인 회상과 돌연한 결별은, 신촌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술을 마시고 취해본 사람만이 온전히 알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어디로 떠났는가. 별로 갈 데도 없는 모양이다. 그가 건너간 곳은 신촌 우드스탁에서 겨우 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신촌 현대백화점 부근의 족발집이었으니, 그 이름은 ‘은경이네’다. 하기야, 술과 추억에 취한 자가  몇 걸음이나 갔겠는가. 
 

별빛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바빌론 강가의 네 번째 동방박사처럼,
사내는 오지 않을 누군가의 잔에 술을 따른다
 

그녀는 졸고 있다
 

잠쫓던 그녀의 눈처럼 반쯤 열린
문밖으로
신촌의 밤이 지나가고, 쉰내 나는, 뒷골목의 계절이 지나가고
쓸쓸한 옆 얼굴들이 지나간다
 

그는 어디 있을까?
 

종국의 생에 자리잡은 듯 사내는
말라 가는 안주처럼
무료한 눈빛으로 앉아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봄이 되어도 부활하지 않는 꽃들에 대한 낡은 소문을 듣는다
 

전생도 영원도 확신할 순 없지만
취한다는 건 종국의 생을 선명히 떠올리는 일
사내는 세속적으로, 세속적으로
빠르게 독주를 들이켠다. 
 

제 갈 길을 분명히 알고 떠나는 별들처럼
그도, 꽃들도 제 안식처로 유성처럼 홀연히 흘러들어 갔겠지
 

늙은 암탉처럼 꾸벅 꾸우벅 졸던 그녀가
푸드덕, 
 

홰를 치며 잠에서 깨어난다
- 은경이네
 

지금은 소설가가 된 한강이 등단작으로 쓴 시가 ‘신촌’에 대한 시였던가. 그녀가 “기어이 떠나리라”던 신촌, 그 “쉰내 나는” 후미진 뒷골목의 족발집에 앉아 시인은 ‘종국의 생’을 생각한다. 종국의 생은, 죽음이 아닐 것인가. 바타이유가 “에로스는 죽음에 이르는 삶의 희열”이라고 말했듯이, 취하여 이르는 “명정(酩酊)”의 순간은 죽음 직전의, 생이 도달한 마지막 고비가 아닐 것인가. 거기가 시인이 가고자 하는 카치올리이자, 체게바라와 ‘아바나의 피아니스트’가 있는 곳이다. 취한 시인의 청승이자 멜랑꼴리요, ‘환멸의 낭만주의’다. 신촌의 술집 ‘섬’도 사라지고 없는 시대, 김요일이 지난 연대의 신촌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을 불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한 감각만큼 미각은 발달하지 못한 모양인데, ‘은경이네’의 족발은 찰지지 못해 푸석푸석한 것이어서 그닥 단골로 삼을 만한 곳이 못된다. 아무려나, 족발 먹으러 간 게 아니라 세속적으로 독주를 들이키기 위해 갔으니, 미각을 탓해 무엇하랴.) 이 시집에 실린 시는 ‘사랑’, ‘뿐’ 두 개의 시의 다음 구절로 기억하고 싶다. 
 

버릴 수 없다면 아무것도 낳을 수 없는 법
붉은 비에 젖어 떨고 있는
당신을, 버린 나는
당신을, 가진 나는
 

밥짓는 냄새에도
울컥,
입덧을 한다.
- 사랑
 

그래
그냥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고 못 박아 두자
꽃그늘 하나 드리우지 못하는 가여운 나무의,
그 깡마른 그림자의,
말라 가는 비애쯤이라 해두자
 

(........)
 

그냥
쓸쓸한 별의 벼랑 끝에서 잠시
아찔, 했을 뿐
황홀, 했을 뿐
 

뿐,
-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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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2011-08-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크허,, 김요일의 시를 먹고 자신을 내비치는 솜씨하고는...
님이야말로 김요일의 시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시인이 써댄 시를 이렇게 공명하는 사람은, 숨어있는 '낭만주의자' 괴물일지도...^^
 
쿨하게 사과하라 - 정재승 + 김호, 신경과학에서 경영학까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신뢰 커뮤니케이션
김호.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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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10) 아침 신문을 읽는데 ‘반값 등록금’ 집회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는 여대생이 들고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재승과 김호가 쓴 <쿨하게 사과하라>(어크로스 펴냄)라는 책. 저간의 사정을 찾아보니 반값 등록금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참가 대학생들에게 이 책 100권을 기증한 모양이다. 제목 그대로 ‘쿨하게 사과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 책인데, 이들 표현대로 ‘미친 등록금‘을 두고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벌써 몇 달 째 책장위에 놓여 있는 이 책을 최소한 같은 사무실 사람들에게라도 소개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부추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늙어 백발이 휘날리는 써(Sir) 엘튼 존이 1976년부터 내리 30여 년간을 “사과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이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과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뿐이랴. 팝그룹 시카고 또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Hard To Say I'm Sorry)라고 속삭이고 있으니, 이쯤 되면 사과는 만인의 공통적 고민거리 쯤 되는 것 같다. 명분 중시의 한국문화에서 사과를 주고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사과 자체도 어려운 마당에 ‘쿨하게 사과하라’니, 사과를 잘하지도, 게다가 쿨하지도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 책을 유용하게 참고해야할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 섰던 분들처럼, 자신의 잘못 혹은 높은 자리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타인의 잘못까지 덤터기로 떠안고 불가피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들일 것 같다. 기자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마이크 앞에 서서 사과를 해야만 하는 사람의 외롭고 고독한 내면(?)을 범인이 어찌 알 수 있으랴만, 그 자리에 서기 전에 이 책 한번 들춰 봤으면 조금의 출구는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저자들은 “사과는 결코 패자의 언어가 아니라 승자의 언어이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리더의 언어’”라고 말한다. 연신 “국민여러분께 송구 스럽습니다”를 되뇌며 눈물 콧물 흘리느니, 쿨하게 사과하는 게 21세기 한국국민의 일반적 윤리감각에도 맞는 것 같다.

두 명의 공동 저자는 잘 알려진 물리학자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정재승은 카이스트 교수로 이미 <과학콘서트> 등의 검증된 베스트셀러를 낸 학자이고, 김호는 그쪽 동네에서 꽤나 내공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홍보전문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직업 탓인지 대체로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통 ‘실용서’쯤으로 분류되는 책들의 경우도 대체로 허망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교훈을 얻기 위해 300여 페이지나 되는 같은 제목의 책을 읽느니,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의 공허함을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가 메워주고 있는 형국이다. 실용서치고는 꽤나 탄탄한 셈이다. (김호는 ‘사과’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세상에, 별게 다 논문이 되는 세상이다.)

이 책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대목만 살펴보자. 우선 잘못된 사과가 일으킬 2차 후폭풍을 막기 위해 피해야할 표현 세 가지. 그 첫째는 조건부 사과(conditional apologies)다. 가령, 이것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같은 경우다. 이런 사과는 듣는 사람을 별거 아닌 일에 기분 나빠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더 나아가 사과의 내용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백희영 여성부 장관 후보자는 다운 계약서 의혹에 대해 “적절치 않은 점 있었다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가 도리어 비난을 샀다. 김태호 총리후보자는 “그렇게 돼 있다면 저는 인정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가 결국 낙마했다. 이 경우, “사과하고 싶다”는 표현 역시 ‘사과 아닌 사과’란다. 사과하려면 쿨하게 ‘사과한다’고 단정해야 맞다는 얘기다. “살 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실질적인 체중감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그러나, 하지만’ 같은 접속 부사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뒤에 붙는 “하지만”은 구차한 변명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사과 아닌 사과로 끝나고 만다. 한 철학자는 “사과란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표현”이라 지적한다.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미국 NSC 대테러 자문담당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그러나’ 대신 ‘그리고’를 써서 이렇게 ‘쿨하게’ 사과했다. “정부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할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이런 실패와 실망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세 번째는 “실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의 수동태 사과다.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deliberate ambiguity)을 깔고 있는 사과인 셈인데, 이런 경우 사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모호하다. 저자들은 이를 두고 “워싱턴의 언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헨리 키신저는 전쟁범죄 관련 의혹에 대해 “내가 일했던 행정부에 의해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뭐가 뭔지 도대체 요령부득의 언어인 셈이다. 이는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 사과의 방식으로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비겁한 사과다. 이런 사과를 듣는 사람은 분노 게이지가 더 치솟게 마련이다.

언어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모여 바람직한 사과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연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1) 사과의 앞 뒤로 변명을 붙이지 마라(“미안해, 하지만 네가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 2)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그냥 ‘미안해’가 아니라, “내가 약속을 까먹는 바람에 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3)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의미로 “내가 잘못 했어”라고 명확히 표현해라. 4)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개선의 의지나 보상의사를 표현하라. 5) 재발방지 약속을 해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해 놓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면 외려 무책임해 진다. 정말 방지를 해야 한다.) 6) 쉽지 않지만 용서를 구하라. (“나를 용서해 주겠니?”라는 말을 하라는 것인데, 이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여섯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방식의 사과를 종합하면 이렇다 : 지난번 전화로 정보를 알려주기로 해놓고, 잊어 버린거 정말 미안해. (유감과 사과의 내용)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책임),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할 게(재발방지 약속), 조금이라도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알려줘(개선책 제시). 그런데, 저자들이 주장하는 이런 ‘이상적 사과’를 보니,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입밖으로 드러내기에 조금은 민망하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했던 사과를 위의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어떨까? 짐작컨대, 그리 만족할 만한 점수는 아닐 것 같다. 대통령의 ‘사과’ 이후에도 여론이 사그러들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커뮤니케이션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부부 혹은 연인 사이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언쟁이 대형 참사로 이어졌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사과할 일 만들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일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쿨하게’ 사과하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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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유종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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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선생이 새로 낸 책은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선생은 이 제목을 에릭 홉스봄의 ‘과거는 타국이다’라는 말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그보다 앞서 영국 작가 L.P 하틀리가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라고 말했다는 점도 쓰고 있다.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적정한”(이 말은 선생이 책에서 자주 쓰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인용은 언제나 감탄스럽다. 내게는 얼마 전에 본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1986년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과정을 다룬 영화 제목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죽은 두 사람의 벗들은 분신으로 사람이 죽었음에도 신림동 네거리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끔찍스러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이 쓴 책이 또한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책 제목으로 자주 쓰인다는 것은 그게 어떤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현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한순간에 대한 총체적인 열망일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벗어난 존재는 그리움에 값하지 않는, 훼손된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리움이란 허망한 노릇일 터이다. 과거는 나의 조국이 아니며, 나는 거기를 떠나 다른 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이다.

유종호 선생의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내게 아주 편안한 경험이다. 만연체인데다 특유의 조어까지를 고려하면, 그의 문장은 보통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벌써 20여년 가까이 그의 글을 읽어온 처지에서 보면 그렇다. 번뜩이는 통찰과 넉넉한 긍정, 노년에 걸맞지 않은 ‘캐주얼’한 재치, 아마 고급의 인문학 문장이 있다면 바로 유선생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글에서는 백낙청의 지사적 ‘계몽주의’도, 김우창의 가끔 이해 못할 ‘철학’도, 김윤식의 도무지 요령부득의 ‘독백’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선생이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는 소식을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로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몇 년 전에 펴낸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그리고 <그 겨울 그리고 가을>(현대문학)의 연장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정교한 기억력과 섬세한 사회사적 세목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이 ‘구술 사회사’들은 한국 현대사의 ‘생활세계’(lebenswelt)를 생생하게 증거하기에 충분한 사료일 것이다. 해방 전후에서 한국전쟁 전후까지 ‘증언’을 했으니 이제는 아마 50년대 대학시절 얘기쯤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모두 3장으로 구성된 책 중 1장의 일부 글만 ‘회고’에 부응할 뿐, 나머지는 선생의 본령인 ‘에세이적 비평’이다. 그것도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정지용의 <향수>, 손창섭의 소설들,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로셀리니와 잉그리드 버그만, 프랭크 커모드와 조지 슈타이너 등의 텍스트를 종횡하면서 특유의 인문적 사유를 풀어놓고 있다. 송욱 교수가 'listen'을 “귀 기울여라”라고 번역했다거나 제자들의 높은 추앙을 받고 있는 고 서울대 철학과의 박홍규 교수가 기실은 이름값에 못미치는 부실한 강의를 했다거나 하는 등의 한국 전쟁 직후의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 대한 호사취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이미 정평이 높은 유선생이고보면, 아마도 그가 풀어놓고 있는 이런 ‘전근대의 대학풍경’은 실질에 부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의 경우 목동 아파트의 거실에서 서너 시간을 내리 구라를 푸는 과정에서 풀어놓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여전히 관통되고 있는 유선생의 사유는,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북위 37도의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위 37°는 선생이 태어난 충청북도 증평의 위도이다. 북위 38°와 36°사이에 위치한 이 지리적 공간은 선생의 정치적, 사회적 사유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선생이 펴낸 <나의 해방전후>의 첫 장 소제목은 바로 이 위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서울의 사유도 아니고, 변방의 사유도, 그렇다고 ‘남도’의 사유도 아니고, ‘좌’의 그것도, 온전히 ‘우’의 그것도 아니다. 때로 그것은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우파에 대한 부분적 수용과 비판으로, 혹은 엘리티즘에 대한 비판과 대중주의에 대한 혐오로 부단히 유동한다. 어정쩡한 정치-지리적 위상이다. 긍정적으로 말해 중용이겠고, 충청도스러운 기질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중용의 정치학은 대부분 보수로 귀결되는데, 그의 보수주의는 정치적 보수주의, 문화적 고전주의라는 내용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 보기드문 섬세한 문장가였다가 월북한 이태준(그는 사상적으로 투철한 좌파는 아니었다), 한국시의 언어를 한단계 끌어올린 정지용과 청록파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고평, 좌파 역사가 홉스봄에 대한 ‘인식론적 수용(가치론적이 아닌)’, 아이자이어 벌린, 프랭크 커모드, 에드먼드 윌슨, 조지 슈타이너에 대한 경사(이들의 성향은 좌우로 나뉠 수 있으나 공유하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요구되는 고전적 기율에 철저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등으로 나타난다. 북위 37° 는 위 아래의 위도 사이에서 유동하되 한계를 넘지 않는다.

유선생은 선우휘의 회고를 빌어 해방 직후 국군이 조직될 때 “일찌기 X장군은 조국광복을 예견하시고 이에 대비하기 군에 입대하여 군사적 경륜을 쌓은 바”라는 식의 낯뜨거운 당시 장교들의 말을 써놓고 있다. 일본 육사에 들어간 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낯뜨거운 자기기만이다. 정치사로는 포획되지 않는 당대의 풍경이자 ‘사회사’의 한 대목인 셈이다. 문학텍스트를 통하여 사회사적 세목을 확인하고 풀이하려는 노력은 이같은 타국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세밀한 역사상을 그려보기 위함일 것이다. 비숍의 책을 빌어 ‘타자의 시각’이 가진 위력을 말하면서 민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때, 선생의 인식론적 진보성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비숍과 더불어 바흐찐의 ‘외재성’(exotopy)를 말할 때,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세계문학’을 거론한 맥락이거나 중고등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소르본 대학의 임용을 거부한 철학자 알랭을 말할 때, 인문학에서 그리고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끌어올리는저 ‘적정한 인용’의 설득력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고전주의자로서의 풍모가 짙게 배어 있는 글은 하루키에 관한 에세이 <문학의 전락>이다. 하루키를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 폄하하는 그는, <상실의 시대>를 두고,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쓰여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혹평한다. 그 책과 반대편에 놓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보여주는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문학이 한때는 정신귀족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양의 핵심부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파괴적 허드레 문학”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보봐리 부인>은 <안나 카레니나>를 낳았지만, 하루키의 경쟁상대는 텔레비전과 스포츠와 비디오란다. 하루끼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나는 이런 비판이야말로 유선생과 같은 문화적 고전주의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마땅히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뛰어남, 곧 탁월함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시대, 유선생의 비관주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문화적 고전주의의 필연적 귀결일 터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향수는 인간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자율과 선택의 주체적 영역이다. 문학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표절과 상호텍스트성의 맥락을 말하는 <기이한 상봉>은 유선생의 특장이 발휘된 에세이다.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진 잉그릿 버그만이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커플이 된 이후 만든 영화 <이탈리아 여행>으로 시작하여,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사자>로, <안티고네>와 마르케스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콜토가 연주하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을 둘러싼 담론의 전개는 현란하면서도 “적정하다.” 칠십노인과 십대 소녀 사이의 성공하지 못한 섹스를 미학화하는 마르케스를 두고 “임박한 성적 무능이 빚어 내는 플라토닉 러브의 환상적 서사”라고 평가하거나, 조이스의 단편에서 “나이들어 볼품없이 시들고 쇠하기보다 어떤 열정의 찬연한 불길 속에서 과감히 저승으로 가는 편이 낫다”는 대목을 끄집어 내거나, 중간 중간에 삽입된 “불후의 연인을 그려낸 시인은 흔히 하숙의 평범한 하녀밖에 알지 못하였다”는 프루스트의 대목을 끌어들인 것도 그러하다. 다른 평론가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박람강기, 독서의 넓이와 깊이의 문제다.

가끔 막막한 장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도 준다. 그가 책 밖에서 내놓는 언설들을 통해서 나는 북위 37도의 유연성에서 문화적 고전주의의 완강한 보수주의로, 급기야 우파적 인식을 넘어 정치적 반동주의로 귀결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유선생의 정지용 <향수> 옹호가 그 정교한 분석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배경이기도 하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두고 그가 만든 동요가 없었다면 식민지 시기의 유년이 얼마나 황폐했었던가를 묻는 것은 타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유선생의 친일에 대한 상황논리적 이해와 청록파 혹은 정지용 비판에 대한 반비판의 맥락은 ‘문화적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스스로 기투하여 전사임을 자임한데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종부세에 대한 날선 비판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판도 그렇게 이해된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유튜브로 조지 슈타이너의 강연을 듣는 그에게, 괴테가 보여준 너그러움과 포용력을 기대하는 어려운 일일까. 프랭크 커모드를 두고 “에드먼드 윌슨 이후 마지막 박람강기의 문인이라는 말은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얼추 커모드의 위치를 가리켜 준다”고 하니, 그 말을 유종호 선생에게 돌려도 크게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있어 유종호 이후에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그의 정치적 수사도 문화적 보수주의도 조금은 유연하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 ps. 유종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마지막 대목을 두고 말하면서 베르테르의 시체 옆에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놓여 있었다는 부분을 거론하고 있다. 흔히 베르테르는 실연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에밀리아 갈로티가 지배계층에 의한 성적 폭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체제와의 창조적 유대가 불가능했던 생기발랄한 청년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로테와의 사랑은 죽음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서문당 문고로 나온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었을 때, 아버지가 딸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장중한 비극성에 감동받은 바 있는데, 그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유종호 선생 때문이다. 문학독서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인데, 나는 레싱도, 에밀리아 갈로티도, 그것을 인용한 하이네의 <독일, 겨울동화>도 잘 알지 못했던 것. 이 책을 읽고서야 10여년 저쪽에 유선생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 ps 2. 이 리뷰를 본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하이네의 작품은 <독일 겨울 동화>가 아니라, <아타트롤>이라고, 아, 찾아보니 그게 맞다. 창비에서 교양문고로 나란히 <아타트롤>과 <독일 겨울동화>가 출간된 터라 두 작품을 헷갈렸던 모양. 블로그 글인데도 부실한 기억에 기대 대충 쓰면 안되는 모양이다. <아타트롤>의 해당 대목은 이러하다. "시민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 자기 딸 에밀리아 갈로티를 단도로 찔러 죽였던/아버지 오도라도처럼/아타트롤도 차라리/앞발을 들어올려 / 자기 딸을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 (23장, 김남주 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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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1-06-02 08:5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 책에서 <피아니스트>의 감독인 폴란스키 얘기가 나와서 제가 헷갈렸던 모양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2011-06-0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앵보 2011-06-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 더 잘 썼네. 님 글의 특장 - 유려하고 단정하고 '멜랑'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이 네 개가 같이 있다는 - 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난다요. 삘이 제대로 꽉 찼던 모양.

페크pek0501 2011-07-0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방문했는데, 책장이 놀랍군요. 맘에 들어요. 책도 책장도 참 잘 생겼습니다. 글 당선을 축하 드리며...

다음 방문엔 글을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꽂혀 있는 책만 보고 감.

모든사이 2011-07-10 12:28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책장은... 보시다시피 좀 잡스러운데 맘에 드신다니 더 고맙습니다.
 
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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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 둘 데가 없어 정처 없이 부유할 때에 시집을 펴든다. 어려워 몇 번을 곱씹어야 제 뜻을 아는 시 말고, 읽는 대로 주르륵 의미가 닿고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시들. 언젠가 내 안에도 서식했을 ‘서정’의 한순간으로 문득 귀환하게 만드는 시들. 이것은 대낮에 들이키는 막걸리 맛과도 비슷한 것이어서, 김현이 정현종 시를 두고 말한 ‘술 취한 거지의 시학’ 쯤에나 해당할 마음자리로 삽시간에 유체이탈하게 만드는 시들 말이다. 가령, 언제 읽어도 마음 맑아지는 곽재구의 이런 시들,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 되어 흐르는
눈물 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그래, 지금은 봄이거니, 돌돌돌 흐르는 봄 물살에도, 연분홍 진달래 한송이에도 내 안의 순정을 모조리 갖다 바칠 수 있는 때이니, ‘술취한 거지’처럼 대낮 막걸리에 취해 가물가물 뜬 눈으로 보는 세상은, 사무치도록 사랑스러운 것이리라. 돌아가신 시인 아버지의 시집을 준다던 모 양의 기별이 늦어지던 차, 동네 서점에 간 김에 심호택 선생의 시집 <원수리 시편>(창비)이 눈에 뜨이길래 냉큼 샀다. 몇 장 펼치자마자, 아하, 내가 이런 직정적인 서정, 착하고 푸근한 서정을 그리워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도 농촌 언저리 시골쯤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시인의 과거, 정년 퇴직을 앞두고 귀향한 지방 도시 근교의 한 농촌 마을의 풍경, 거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흐뭇하게 상상되는 것이다. 

 

쌀 떨어진 딸네 집
양식 물어다 주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인가
우리 할머니
부엌 창문 콕콕 두드리다
알은체해주니 오히려 날아간다
찔레 덤불 속인지
외딴 절인지
간 곳은 알 수 없어도
까마종이 두알
글썽한 눈매
남기고 가셨다
- 할미새
 

포르르 날아온 할미새 한 마리를 두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거나, 어쩌다 키우게 된 진돗개는 육친만큼이나 가까워 함께 밥술 뜨는 족속[食口]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귀한 거라며 갖다준 어린 풍산개는 마당에 풀어 놓자 수선화 한송이를 따먹고 사흘동안 앓다가 죽었다. 이어서 임실 구수골에서 얻어온 아기 진돗개는 차에서 내리자 살아 있는 거미와 마른 지렁이를 삼키고도 멀쩡했다. 우리가 구수라고 부르면서 아직도 키우고 있는 놈이 그놈이다. 누구는 집터 탓이라지만 어차피 개고양이 같은 짐승도 자기 몫의 명을 타고나는 법이겠지. 녀석은 어릴 적 한 때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바람에 명아주 막대기가 부러지게 매를 맞은 이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쓰다 달다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멍청한 것인지, 무던한 것인지. 제때 교육은 못 시켰으나 제 혼자 힘으로 애꿎은 족제비와 뒷산 고라니를 잡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녀석이 짖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행인인지 찾아온 손님인지 분별한다. 녀석이 그중 좋아하는 것은 명절 때 나타나는 동네 꼬마 녀석들이고 제일 증오하는 것은 개나 염소를 산다며 마을을 순례하는 개장수 차다. 녀석은 또 앞 뒷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택배 자동차가 못내 수상쩍은 눈치다. 그게 무엇이든 집에서 물건을 내가는 꼴은 봐줄 수 없다는 것인지. 우리 식구 중에는 심지어 녀석이 밥을 안 먹으면 자기도 밥 맛이 없고 녀석이 아프면 자기도 아프다는 사람도 있다.
- 한 식구

 

배고픈 날 막걸리에 취해 하늘이 노랗고 온산이 빙글빙글 돌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거나, 

 

우리 마을은 바다도 기어들다
그만둔 마을이었다
기차를 타도 버스를 타도
또다른 십리를 걸어야 하는 곳

집에 와 목마르다 투정하면
어머니는 우물물 권했다
그건 말고 달리 목마르다 조르면
중학생 아들을 위해
할 수 없이 막걸리 받아 왔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아랫목 단지 속
술 괴는 소리를 사랑했다
일곱 살 때 전내기술 마시고
마루에서 굴러 떨어졌다
- 어린 날의 술

 

김민기의 노래가사마따나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라며, 알 수 없는 도회지의 풍경을 몽상하는 어린 시절.


군산이란 데는 어떻게 생겼나
아이는 그게 궁금한데
어른들은 말했다
나중에 가보면 안다고 
 

어둑한 헛간으로 뒤안으로
혼자 하는 숨바꼭질도 시들하면
아이는 마루에 드러누워
서까래 밑 제비집 바라보았다.
- 철모르장이

이 시집을 읽는 것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심호택 시인과 더불어 안온했던 유년의 자궁 속으로 잠시 스스로 유폐하는 경험인 것이다. 해석도 평가도 모두 다 췌사일 뿐이고, 그저 착하고 쉬운 단어들을 좇으며 모든 것이 명료했던 놀랍도록 단순했던 시절로 귀향하는 것이다. <하늘밥 도둑>과 <최대의 풍경>에 이어 이 시인의 시집을 읽은 것은 이 책까지 세권. 이 시집은 시인이 이승과 작별하기 직전에 쓴 시를 모은 유고시집이다. 모든 시집이 유고시집일진대, 이 분은 이런 착한 시 좀 더 쓰시지 ‘왜 그리 서둘러 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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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리 2011-04-0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회식 가기 전 들렀는데.. 선배 글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갑니다...^ㅂ^헤헤

모든사이 2011-04-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참 좋더구나. 그냥 읽고 말 것을, 리뷰를 쓰기 보다 그냥 읽으면 될 것을, 리뷰를 쓰고 나니 쓰잘데 없는 말만 늘어놓은 거 같아서.. 그런데, 아버지 향기가 너무 독해서 시집 펼칠 때마다 네가 눈물깨나 흘리겠구나 했는데.. 따뜻해졌다니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