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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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인상적인 배경은 ‘기차역’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곳도 기차역이었고, 안나가 자살한 곳도 기차역이며, 연인을 잃은 브론스키가 안나를 처음 만난 시절을 회상하며 전장으로 떠나는 곳도 기차역이다. 기차가 질주하는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식의 해석은 이미 진부할 것이다. 그보다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분별없는 열정”을 비유하는 상징적 장치로 보는 게 낫다. 그것 역시 진부한 해석이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그것만큼 이들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살아있는 비유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되돌아가지 못하는 기차는 사랑이 싹트고 나아가며 위반하고 넘어서는 선조적(linear) 일방향성의 운명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을 흔히 말하는 대로 한 유부녀와 청년이 벌이는 불륜행각의 파국적 일대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 대체로 많은 소설에서 불륜은 단골소재로 등장했고,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보봐리 부인>에서 줄리안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게 끝난 경우는 드물다. 소설은 안나-브론스키의 스토리와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이야기로 엮여져 있다. 그 두 이야기는 러시아 귀족 사회라는 경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얽히기도 한다. 레빈의 아내인 키티는 전에 브론스키에게 연정을 품었고, 그 때문에 레빈은 한동안 실연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는 마치 독립적인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병치되며 전개된다.  

안나-브론스키의 스토리는 뒷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지만 레빈의 이야기는 그렇질 못하다. 그것은 아마도 톨스토이가 레빈을 통해 당대 러시아 사회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풀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이런 식의 톨스토이식 계몽주의를 장광설을 펼치며 자신의 소설에 끌어들인 바 있다. 물론, 춘원의 계몽주의는 그의 친일행각만큼이나 싸구려다. 농업사회주의 혹은 농업 중심의 아나키즘에 기독교적 성찰까지 더해진 레빈의 사유는 때로 지나친 관념론으로 치달으며 성급한 독자의 부아를 자극한다. 민음사판 세계문학 전집으로 세권이나 되는데다 각 권이 모두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한달 동안 읽으며 이성과 감성을, 합리와 비합리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꽃이 지더니 이내 장마가 시작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녀와 유사한 소설적 인물, 예컨대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에 비해 훨씬 매력적이다. 쿤데라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녀의 남편 카레닌을 개 이름으로 붙여 놓고 있다. 보봐리가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보봐리즘’의 속성 그대로,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미학화하려는 속물적 욕망을 대변한다면, 안나의 사랑은 그보다 적극적인 능동성으로 하여 더욱 빛이 난다. 보봐리의 사랑은 애정-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 경제적 파산에 이르게 되지만, 안나의 그것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가진 속성과 운명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그것은 보봐리가 재미없고 시시한 시골 의사의 아내라는 것과 안나 역시 답답하고 고루한 남편을 갖고 있지만 러시아 귀족 사회의 일원이라는 현실적 여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안나는 경제적 파산 때문에 몰락하거나 자살에 이르지는 않는다.  

안나의 사랑을 읽기 위해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의 한 대목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루만에게 사랑이란 ‘소통의 코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상태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코드화’할 수 있으며, 열정이라는 고양된 감정의 상태 또한 그 내부에 내장된 코드를 읽어내고 그 변천과정을 이론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한 코드로서 열정적 사랑은 현대적 사랑의 원형이 되었던 낭만적 사랑을 형성한 한 계기였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열정이 개체화(개인화)하면서 사랑의 능동성을 실현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은 연원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저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인간 주체의 능동적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바닥에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겸손한 기품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곧 누군가를 찾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들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흘러넘쳐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137-138)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묘사를 꼽으라면 아마도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안나를 처음 만나는 이 장면이 아닐까. 브론스키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와 안나가 가진 “절제된 활기와 차분한 생기”를 말하는 이 대목은 두 사람 사이의 열정적 사랑이 예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마담 보봐리가 교외를 산책하다가 자신의 결혼생활이 가진 진부함과 불행함을 탓하며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을까”라고 주저앉는 대목과 비교하면 사랑의 기원이 이렇듯 다르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안나의 면모는 사랑을 향한 내면의 능동적 계기를 잠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안나는 자신의 남편이 “그가 단 한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난 살아 있는 여자야. 내게는 죄가 없어. 하느님은 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그런 여자로 만들었어”라고 독백한다. 자신의 사랑을 찾는 능동적 여성 주체, 그 사람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다. 

다시 루만에 의하면, 열정은 합리적 통제 영역의 외부에서 작용한다. 사랑은 다양한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정복하는 복종, 고뇌를 원하는 것, 눈 뜨고 있는 맹목, 기꺼이 병에 걸리는 것, 기꺼이 감옥에 갇히는 것, 달콤한 순교”와 같은 ‘역설’을 만들어낸다. “가장 커다란 달콤함은 남몰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이 사랑의 역설은 ‘열정의 과도함’이라는 코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열정을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열정을 잘못 보여주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비합리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열정은 통제불가능하며 무절제함과 과도함으로 건너간다. 안나의 사랑도 그런 운명이다. 사랑에 빠진 뒤에 그녀는 “난 그를 사랑해요. 난 그의 연인이에요. 난 당신을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이 무서워요. 난 당신을 증오해요”라며 과감히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다. 담대함으로서의 사랑, 그게 안나 카레니나의 열정이다.  

그런데, 루만에 의하면 사랑과 결혼은 양립할 수 없다. 사랑은 법적 형식으로 규제되는 결혼에 맞서 분화된다. 사랑의 신이 격노하여 연인들을 결혼으로, 따라서 타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열정의 과도함에는 한계가 없어 충동, 욕망, 요구에 대한 제한도 없지만, 시간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랑은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며 게다가 아름다움보다 빨리 따라서 자연보다도 빨리 끝난다.” 행복의 순간성과 고통의 영원성, 이것은 열정적 사랑이 숙명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장벽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과도함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 과도함이 바로 사랑을 종말로 이끌게 된다. 그러니, 안나의 사랑은 애초부터 비극적 파국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랑은 시간에 의해 부식되며 더 이상 연인은 자신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안타까운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그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라며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 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455-456)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은 이렇듯 갑작스럽게 타오르다 꺼지는 초의 불꽃으로 묘사된다. 열정적 사랑이 마침내 이른 곳,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자 죽음이다. 여기서 루만을 인용하자면, 열정적 사랑이 과도함에 이르렀을 때 “사랑은 총체화”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애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찮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하게 만든다. “애인의 모든 체험과 행위는 사랑/무관심, 정직한 사랑/부정직한 사랑과 같은 도식 아래서 끊임없이 관찰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가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마침내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소설상의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안나가 가진 열정의 과잉이 불러낸 허깨비다. 그녀가 바보여서도 아니고, 사랑에 눈 멀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열정적 사랑이 내장하고 있는 고유의 코드가 작동한 것일 따름이다.  

<보봐리 부인>의 마지막에서 남편 샤를르와 그녀의 정부 로돌프는 어색하게 만난다. 샤를르는 로돌프에게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게 모두 그 운명 탓이지요”라고 말한다. 아내의 죽음과 경제적 파산이라는 현실이 주는 압도함 때문이었는지 샤를르의 현실인식은 “그저 운명”이라는 환멸이 섞인 진부함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내 보봐리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녀와 정부 로돌프의 사랑과 배신이 운명이라는 것인지, 자신의 처지가 운명이라는 것인지 모호할 뿐이다. 플로베르는 이 단 한마디 말을 통해 남편 샤를르의 성격과 한계 등 모든 것을 압축해 놓았다. 그것은 안나에게 와서 19세기 후반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상의 한 러시아 귀족 여인의 운명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안나의 운명이 아니라, ‘열정적 사랑의 운명’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라는 레빈의 고백으로 끝난다. 레빈의 고백은 아마도 톨스토이가 공들여 고민하고 썼겠으나 내게 감동을 주진 못했다. 그 이유는 안나가 행위의 인간이었음에 비해, 레빈은 사유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파국적 종말로 귀결될 지언정 상호적이며 능동적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면, 사유는 자신의 우주 속에서 홀로 유영하는 것에 가깝다. 루만은 ‘열정 이후’에야 현대적 사랑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의 모던화 이전, 19세기적 사랑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안나 카레니나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프로이드가 말한 대로, 때로 시가는 그저 시가일 뿐이다. 안나는 19세기 소설가의 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일 뿐이고, 루만도 그저 독일 사회학자 루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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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여자 교도관한테 추천한 책이 바로 이 소설이라더군요. '열정'은 역시 혁명과 사랑의 공분모인가 봅니다. 암튼 고전의 신선하고 정치한 재음미, 안나-보봐리-루만을 엮는 사랑론, 혀를 내두르며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보봐리는 젊은 정부와 바람나서 마차로 파리 시내를 목적지없이 계속 달리며 파국을 향해 달려가죠. 보봐리 불륜의 그런 시간구조를 누군가 "파국을 향한 절망적 반복"이라고 했던데, 말씀하신 "선조적 일방향성의 운명"과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환멸'이 '열정'을 집어삼키는 시대성을, 같은 세기의 안나와 달리 보봐리는 잘 보여주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안나의 열정에 우리가 더 이끌리는 것도 사실이겠죠. 톨스토이는 첨엔 안나를 부정한 여자로 지탄할 목적이었는데, 써가면서 그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안나는 나요'라고 할만큼..?) 그런 점에서 소설은 애당초 아이로니컬한 예술이라는 쿤데라의 경구도 새겨 들어야 할 듯합니다..^^

모든사이 2011-07-11 14:43   좋아요 0 | URL
네 로자가 이 소설을 좋아했다니,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열정은 아마 유사한 내면적 동기에서 출발할 테지요. 금기를 넘어서는 위반의 열정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더구나, 대중의 자발성을 누구보다도 존중했던 로자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 같네요. 보봐리 부인의 마차장면은, 아마 플로베르가 그것 때문에 기소되었던 것 같기도 한데, 묘사가 아주 재밌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아이엠러브>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 여주인공의 모습이 안나와 상당부분 겹쳐 보이길래, 아마도 안나의 열정에서 보이는 것은 어떤 '슬라브적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을 한달여 전에 읽고, 안나의 열정을 어떻게 이해할까 곱씹다가 저런 식으로 정리를 해봤는데, 쓰고나서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님께서 공감해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방문과 댓글, 거듭 감사드립니다.

트레바리 2011-07-13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카레닌'을 개이름으로 삼은 쿤데라의 '가벼움'의 소설에서 어쩌면 '슬라브적 열정'의 '무거움'이 지적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카레닌에 대한 테레사의 사랑 방식을 말하면서,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송동준 역)라고 성찰하는 대목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은 또한 카레닌의 죽음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가 우리들의 감정--사랑, 반감, 호의, 혹은 악의--의 결과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개인 간의 항상적 권력 놀음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결코 확실하게 확증할 수 없다."고 하는 대목과도 상통하는게 아닐까요?

모든사이 2011-07-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님의 이번 댓글은 뭐라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가 애매하군요. 다시 쿤데라를 들춰볼 수도 없는 일이고.ㅎㅎ 어쨌거나 위에 인용된 부분을 보자면 님의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게 됩니다. 후자의 인용문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들의 감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개인간의 항상적인 권력 게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우리가 일상적 경험으로서 많은 경우 확증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라고 바꾸고 싶네요. 쿤데라와 달리 적어도 감정의 실재성 혹은 감정이 낳은 긍부정의 결과 앞에서 망연해본적이 있는 자로서 말이지요.

트레바리 2011-07-1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사실 안나와 테레사를 대질시켜 따져 볼 재량은 없는데, 괜시리 저런 막연한 비교 충동이 생기는군요..^^ 저 역시 안나를 다시 들춰보지도 않고 '슬라브적'인 걸 잘 아는 척 했구요. 하여간 쿤데라 문장의 변용은 참 그럴듯하고 멋지네요..^^ 그리고 아마 안나의 첫 페이지에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복음서에 적힌 예수의 말이 나왔던듯 합니다. 안나의 열정은 남편에 대한 복수의 한 방식이었고, 남편 역시 그녀한테 철저히 되돌려 주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보니 카레닌이 참 마른 장작개비 같아도(화력은 좋아서?) 교활했던 넘 같아요..^^ 암튼 쿤데라의 장난기가 그를 더 살려주는 듯 합니다.

모든사이 2011-08-01 10:44   좋아요 0 | URL
벤야민에 대한 글 뒤에 쓰신 댓글은 왜 지우셨는지? 댓글을 달면 바로 이메일로 댓글 내용 일부가 전송되어 오는데, 안타깝게도 지운 댓글은 일부만 알아볼 수 있어서 말입니다. 여기 리뷰가 다른 분들에 비하면 많지도 않은데, 님께서는 제가 올린 포스팅의 대부분을 보신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군요. 감사합니다..

튤립나무 2011-08-1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요일 시인의 <애초의 당신>에 쓰신 글을 읽고 이 서재에 들어왔다가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나까레니나는..소설로는 여태 읽지 않고 있고..최근 오래전 흑백영화를 봤었지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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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창비)를 읽다. 그녀의 단편에서 느낀 것은 어떤 단단한 결기와 야무진 문체였는데, 이번 장편은 단편이 주었던 믿음직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물론, 장편으로서 이 소설은 잘 쓰여진 소설이고 재미도 있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소설가로서의 재기도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꽤 된 것 같은데 이번 소설에서 느껴지는 ‘아마추어리즘’은 어쩔 수가 없다. 조로증에 걸린 아이라는 매우 특이한 소재를 아주 흥미롭게 풀어가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2%가 아니라 한 10% 쯤 부족해 보이는 통찰과 깊이는 불가피하게 아마추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소설인데, 아마추어의 채 익지 않은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면 괜한 후회스러움이 밀려온다. 이런 소설 읽을 때 차라리 고전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첫 단편집이 나왔을 때 아주 인상적이고 기대가 컸던 정이현이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한국 소설 버전을 썼을 때, 그걸 읽느라 허비한 시간에 대해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른바 본격 문학 취향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정이현의 칙릿 소설은 잔재주로 소설을 엮어가는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으로 보였던 것.

김애란은 그래도 거기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간 듯한데, 여전히 내 성에 차지는 않는다. 소재의 특이함을 찾는 수고로움을 넘어 사람의 삶에 대한 고민의 수고로움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진부한 인식에 균열과 충격을 내고,새로운 인식과 삶의 지평으로 안내할 수 있는 길의 지도가 되려면 말이다. 장편으로서의 이 소설만 보자면 ‘대학생문학상’을 받은 ‘문학소녀’에서 별반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다. 뭐, 소설 따위에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게 지나치게 구닥다리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재기발랄한 대화 정도로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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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0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작가들의 문체 수준은 예전보다 고르게 다들 좋아진 듯한데, 새로운 지도가 될 인식의 충격이 적은 것은, 그것도 결국 상품적 표준을 지향한 균질화의 소산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회의를 줍니다. 정이현은 저도 소재의 파격성을 떠나 문체 기량이 만만치 않은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에 했었습니다. 하지만 "문체는 곧 상품"인가 봅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3: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저도 참 게으른 독자이긴 하지만, 김애란은 최근 젊은 작가들중 주목할만한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리뷰를 저렇게 썼지만, 이 사람이라면 더 잘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이 정도 밖에 안됐나 하는 아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트레바리 2011-07-0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게으른 독자'시라뇨..?^^ 그럼 종잇장에 손자국도 안 남는 저희같은 미물들은 뭐란 말입니까..?^^

모든사이 2011-07-04 14:49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저 게으른 독자 맞습니다.. ㅎㅎ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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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생각보다 과격하지 않다.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를 전복하라는 것도 아니다. “불법체류자를 차별하는 사회, 이런 사람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고 있는 팜플렛 쯤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 얇은 책 뒤에 쓰인 글에서 “투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의 성향으로 보아 ‘한나라당’에 투표하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결국 ‘정권교체’를 위한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한국적 버전의 결론은 기껏해야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조국)라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발기문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스테판 에셀이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이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평의회에서 합의한 이념과 정책방향은 좌우를 넘어서 프랑스 사회가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합의하고 있는 규제적 원리로 작동한다. 한 사회가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합의할 수 있는 사회적 지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미국의 ‘애국주의’가 그러할 것이고, 일본의 천황제가 그러할 것이다. 물론, 애국주의나 천황제가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에셀이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은 프랑스 혁명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계사적인 보편이념을 현실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문제는 한 사회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이념적 혼란 속에서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이념이 존재하고 그것이 규제적 원리로 작동할 때, 그것은 최소한의 공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 무엇에 근거하여 분노하는가. 바로 레지스탕스 정신에 반하는 것들에 분노하는 것이다. 보편적 이념을 거스르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그럼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무엇에 대해 분노해야 할까. 우리 내부에 사회적으로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은 존재하는가. 유시민이 말하는 대로 헌법?(<후불제 민주주의>) 바로 그 헌법정신은 조갑제도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헌법 해석은 전혀(!) 다르다.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헌법적 가치에 비춰 그게 부합하는가, 아닌가하는 논란이기도 하다. ‘종북 좌파’의 타도를 외치는 조갑제의 헌법에는 유시민과 달리 헌법이 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가 없다. 이것은 에셀이 말하고 있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정신’이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서 투쟁해서 쟁취해낸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 모두가 몸과 마음을 바쳐 투쟁해서 얻어낸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이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헌법이 몇몇 소수의 정치엘리트의 작품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가 독일의 교양소설을 말하면서 미성년의 주인공이 이런저런 방황을 거치면서 사회적 이념에 동의하고 순응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있다. 교양(bildung)의 사회적 자아가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이같은 보편적 이념이 존재했음에 비해 우리의 근대는 그러한 이념이 부재했다. 유교도 반공주의도 민주주의도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우리의 근대는 부정하고 극복되어야할 것이지 수용되고 내면화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그동안 말해왔던 ‘애비 죽이기’는 이런 맥락에서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제 ‘부친 살해’에서 ‘애비 찾기’로 전환되었다고는 하나, 도무지 ‘애비’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조국 교수도 이 책 뒷날개에 쓰인 신영복, 홍세화의 ‘추천사’도 방향을 상실한 채 그저 분노하고 참여하라는 막연한 ‘선동질’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한나라당에 투표하지 말고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에 투표하라는 얘기인데, 그것이 젊은층에게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고 과연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도 투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니, 투표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스테판 에셀의 이 작은 책이 부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우리 사회가 ‘레지스탕스 정신’같은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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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0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 "그대의 세기와 더불어 살되 시대의 피조물은 되지 말라. 그대의 동시대인들을 위해 일하되, 그들이 찬양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행하라. 그들의 죄를 함께 하지 않되, 고귀한 체념으로 그들의 형벌은 나누어 지고, 그들이 없이 지내지도 못하면서 잘 감당하지도 못하는 질곡 아래 자유의지로 몸을 굽히라."(안인희 역)라는 구절이 있는데, 모름지기 사회적 자아의 '형성'이란 바로 이러한 내재적 초월의 수련과정이기도 하지 않은가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3:31   좋아요 0 | URL
'내재적 초월'이라... 어려운 말이기도 하군요. 쉴러와 괴테의 세기는 그래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념이 있었으니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이르게 된 지점이 거기이고, 하우저가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기도 하지요. 의견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4:51   좋아요 0 | URL
요즘 다른 소설들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인데요. 님이 말씀하신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절망한 독일(권) 엘리트의 자살과 유언이라는 점에서 독일 엘리트주의(=독일 고전주의?)의 심리적 귀결을 보는 듯 하더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트레바리 2011-07-0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써놓고 쑥스러워 지웠던 댓글에 어떻게 답글 달아주시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럼 망명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리뷰도 기대합니다..
 
써니 - Sunny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영화 ‘써니’가 500만 관객을 넘어 상반기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경기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있는 극장이었는데, 과연, 흥행작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말 9시 20분 상영이었는데도 객석이 모두 매진되었다. 옆 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와 아이들은 낄낄 대면서 영화를 보았고, 가끔 눈물을 찔끔거렸다. 남편은 부인에게 휴지를 건네 눈물을 닦게 했고 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코를 팽 풀기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마다 낄낄대고 깔...깔대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영화. 영화평론가들의 미학적 평가와는 별개로 이 영화가 남녀노소를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을 보면, 대중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건드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80년대 여고생들의 학창시절을 다루고 있다. 삐쭉삐쭉 솟아난 머리의 신디 로퍼가 부르는 “여자애들은 그저 즐거움만을 바랄 뿐이야”(girl just wanna have fun)가 여학교에 울려 퍼지고, 디제이 박스에서는 리처드 샌더스의 멜랑콜리한 음악(‘reality’)이 나온다. 나이키로 상징되는 당시의 브랜드 열풍, 전투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한 거리에 나붙은 ‘록키4’ 포스터에서 실베스터 스탠론이 촌스러운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보고 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우리 곁에는 우정을 나눌 따스한 친구들이 있었다. 너도 나도 대입에 목매달지 않았고, 매일 저녁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극장에 몰려든 중년의 부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잠시 그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거역한다는 의미에서 ‘자발적 퇴영’의 경험이다.
 

누구에게나 ‘순금(純金)의 기억’은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적 시대가 인류의 유년기였던 것처럼, 개별적 존재인 우리의 유년기 역시 루카치가 말한 대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모두의 가슴 속에는 순수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다가올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행복은 잠시였을 뿐, 세상에 내던진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이번 달 실적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보험설계사가 되어, 시부모와 아이들에 시달리는 주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글라데시인이 아니라, “부자되세요”가 새해 덕담이 되고 있는 시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미나(유호정 분)와 그녀의 딸은 사뭇 대조적이다. 미나가 딸 나이였을 때 그녀는 전남 벌교에서 올라온 순진한 여학생이었지만, 딸은 용돈을 위해 아빠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사랑해요, 아빠”라고 말할 줄 아는 여자애다. 세상의 섭리가 시장논리임을 아는 딸은 “사랑해요”라는 말을 팔아 용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순금의 기억’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직 ‘시장화하지 않은 내면’일 것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 시기이면서도 시장화되지 않은 ‘잉여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시장화하지 않은 순진성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눈물 콧물 흘렸던 중년 부부의 눈물은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낸 것이면서도,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절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병원의 환자들이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알고 보니 남매였다”라는 황당무계한 드라마다. 영화속의 환자들처럼, 막장드라마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순정이 남아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영화속에서는 순정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순정함을 소비하면서 잠시 눈물을 흘리고 추억에 젖으면 그만인 것, 내일이면 다시 출근하여 거래처 사람을 만나고 상사에게 굽신 거려야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부모세대가 저질렀던 학창시절의 ‘일탈’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바로 그 부모들은 자식들의 일탈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옆 자리의 중년 부부가 영화가 끝난 뒤, “영화 끝났다, 빨랑 집에 가서 씻고 자야 내일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지”라고 말할 때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순금의 기억’은 어차피 영화 속에나 있는 법, 우리는 극장에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퇴행성 질환을 잠시 앓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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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내포한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는 유서깊은 수용(受容)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알겠어요...

모든사이 2011-06-26 18:43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고는 대체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정적 사유를 내면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탈주'가 이론 밖에서 어찌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시몬느 보봐르가 쓴 <이별의 의식>은 병든 사르트르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에세이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보봐르가 사르트르의 시체 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다. 의사는 사르트르의 살이 썩어 들어가니(이를 회저(壞疽)라고 하는데, 최승호의 시집 <회저의 밤>에서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시체와 접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시체에 모포 한 장을 덮고 그 곁에 누워 평생의 반려였던 사내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랑했던, 그리고 바람기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이기도 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보봐르 식의 ‘이별의 의식’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보봐르와 함께 살면서 젊은 여자를 연인으로 두기도 했고, 보봐르 역시 사르트르와 부부로 지내면서도 미국인 사내와 열정적인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끈질기게 부부관계를 유지한 셈이다. 김현이 ‘모포 한 장의 사랑’이라는 에세이 소재로도 써먹은 이 장면은 이 책을 읽은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알리스>는 바로 그런 보봐르의 에세이를 상기시킨다. 자신이 사랑했던, 혹은 아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남자 다섯 명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는 사십대 중반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별 이후 여자가 겪는 외로움이 아니라, 이별하는 과정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리움과 상실감, 허무와 고독, 그리고 남은 삶에 대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별과정의 내면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꽤 괜찮은 소설이다. 알리스 주변의 남자들은 실연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죽어서 사라져간다.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는 ‘이별하는 과정’에 어울리는 연령대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암으로 쓰러져 죽을 수 있는 나이이며, 존경했던 10년~20년 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죽을 수도 있다. 소설가 유디트 헤르만의 문체는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다거나 감정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다. 담담한 견디기라고 해야할 마음의 상태를 이 여자 소설가는 대단히 세밀하고 단단한 문체로 실어나른다. 사람들과의 이별의 과정은 이런 식의 비유적인 풍경묘사로 나타난다.

“가로등은 맥없이 스러져 갔고, 간이매점과 광고지가 부착된 기둥은 공중으로 날아갔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삐걱거리고 치익거리고 부스럭거리면서 노글노글해지고 얇아졌으며 한줌 먼지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시청 종탑의 윤곽은 멀리서 흐물흐물해져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갔다. 낡은 종탑 시계는 다른 모든 것에 섞여 들어가면서도 한동안 하늘에 걸려 있다가 사라져 버렸다.”

옛 연인 미햐는 병으로 죽었고, 알리스는 그의 아내와 아이 곁에서 죽기 직전의 며칠을 함께 보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70대 노인 콘라트도 열병으로 죽어가고, 알리스는 그의 남은 아내와 함께 마지막 나날을 함께 보낸다. 리하르트도 그렇게 죽어갔고, 그녀는 마르가리테와 장례식 준비를 한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자살한 삼촌 말테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게이 짝을 찾아 죽음의 흔적들을 좇기도 한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연인 라이몬트 역시 죽었다.  모두들 죽었는데도 알리스는 그들이 곁에 있음을 느낀다. 사람은 가도 흔적은 남고, 그 흔적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짙푸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날마다 보았다. 매일,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어디에서나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라이몬트가 가지고 있었던 형상과 존재 형태가 그렇게 다양했단 말인가. 그는 세상 누구일 수도 있었다. 그는 중앙역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었고, 역의 높은 회랑을 떠다니듯 걸어갔고, 가벼운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옆모습을 보이며 걷기도 했다. 여행자이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사람 같았다. 알리스는 누군가를 옆으로 밀치며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가면서 라이몬트가 에스컬레이터를 벗어나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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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보니, 저는 왠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즈>의 "죽은 자들"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의 묘사가 떠오르네요...

"한사람 한사람, 그들은 모두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음울하게 빛바래고 시드는 것보다는 수난의 충만한 영광 속에 과감하게 저승으로 건너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는 자기 곁에 누운 여자가 그녀에게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던 연인의 눈동자를 가슴속에 그토록 오랜 세월 꼭 품고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 그의 영혼은 무수한 죽은 자들이 사는 영역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불안정하고 깜박이는 존재를 의식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만져지지 않는 어떤 잿빛의 세계 속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견고한 이 세계 자체가, 이 죽은 자들이 한때 키웠고 세웠고 또 그 안에서 살았던 그곳이 해체되고 또 줄어들고 있었다." (김정환&성은애 역)

모든사이 2011-06-26 22:37   좋아요 0 | URL
네, 더블리너스의 하고 많은 판 중에서 저와 똑같은 번역본을 읽으셨다니 더욱 반갑네요. 님 글의 댓글은 더블리너스에 대해 예전에 쓴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혹시 읽으셨을지 모르겠으나, 이 블로그 뒤편에 있습니다.(http://blog.aladin.co.kr/myforties/4206267)

트레바리 2011-06-2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블리너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풍부하신 독해력 감탄합니다. 창비본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위에서 '수난의 충만한 영광'에 나온 '수난'이 원문에는 passion으로 되어있어, '열정'으로도 옮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습니다. "상대역들"이란 단편은 해방 전에 양주동이 "샐러리맨"으로 번역한 적도 있습니다.

모든사이 2011-06-27 14: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양주동과 조이스라, 조이스가 더 나이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참 안어울리는 조합처럼 느껴지는군요. 모더니즘과 향가 연구의 차이 때문일까요? ㅎㅎ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