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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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 둘 데가 없어 정처 없이 부유할 때에 시집을 펴든다. 어려워 몇 번을 곱씹어야 제 뜻을 아는 시 말고, 읽는 대로 주르륵 의미가 닿고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시들. 언젠가 내 안에도 서식했을 ‘서정’의 한순간으로 문득 귀환하게 만드는 시들. 이것은 대낮에 들이키는 막걸리 맛과도 비슷한 것이어서, 김현이 정현종 시를 두고 말한 ‘술 취한 거지의 시학’ 쯤에나 해당할 마음자리로 삽시간에 유체이탈하게 만드는 시들 말이다. 가령, 언제 읽어도 마음 맑아지는 곽재구의 이런 시들,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 되어 흐르는
눈물 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그래, 지금은 봄이거니, 돌돌돌 흐르는 봄 물살에도, 연분홍 진달래 한송이에도 내 안의 순정을 모조리 갖다 바칠 수 있는 때이니, ‘술취한 거지’처럼 대낮 막걸리에 취해 가물가물 뜬 눈으로 보는 세상은, 사무치도록 사랑스러운 것이리라. 돌아가신 시인 아버지의 시집을 준다던 모 양의 기별이 늦어지던 차, 동네 서점에 간 김에 심호택 선생의 시집 <원수리 시편>(창비)이 눈에 뜨이길래 냉큼 샀다. 몇 장 펼치자마자, 아하, 내가 이런 직정적인 서정, 착하고 푸근한 서정을 그리워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도 농촌 언저리 시골쯤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시인의 과거, 정년 퇴직을 앞두고 귀향한 지방 도시 근교의 한 농촌 마을의 풍경, 거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흐뭇하게 상상되는 것이다. 

 

쌀 떨어진 딸네 집
양식 물어다 주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인가
우리 할머니
부엌 창문 콕콕 두드리다
알은체해주니 오히려 날아간다
찔레 덤불 속인지
외딴 절인지
간 곳은 알 수 없어도
까마종이 두알
글썽한 눈매
남기고 가셨다
- 할미새
 

포르르 날아온 할미새 한 마리를 두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거나, 어쩌다 키우게 된 진돗개는 육친만큼이나 가까워 함께 밥술 뜨는 족속[食口]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귀한 거라며 갖다준 어린 풍산개는 마당에 풀어 놓자 수선화 한송이를 따먹고 사흘동안 앓다가 죽었다. 이어서 임실 구수골에서 얻어온 아기 진돗개는 차에서 내리자 살아 있는 거미와 마른 지렁이를 삼키고도 멀쩡했다. 우리가 구수라고 부르면서 아직도 키우고 있는 놈이 그놈이다. 누구는 집터 탓이라지만 어차피 개고양이 같은 짐승도 자기 몫의 명을 타고나는 법이겠지. 녀석은 어릴 적 한 때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바람에 명아주 막대기가 부러지게 매를 맞은 이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쓰다 달다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멍청한 것인지, 무던한 것인지. 제때 교육은 못 시켰으나 제 혼자 힘으로 애꿎은 족제비와 뒷산 고라니를 잡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녀석이 짖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행인인지 찾아온 손님인지 분별한다. 녀석이 그중 좋아하는 것은 명절 때 나타나는 동네 꼬마 녀석들이고 제일 증오하는 것은 개나 염소를 산다며 마을을 순례하는 개장수 차다. 녀석은 또 앞 뒷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택배 자동차가 못내 수상쩍은 눈치다. 그게 무엇이든 집에서 물건을 내가는 꼴은 봐줄 수 없다는 것인지. 우리 식구 중에는 심지어 녀석이 밥을 안 먹으면 자기도 밥 맛이 없고 녀석이 아프면 자기도 아프다는 사람도 있다.
- 한 식구

 

배고픈 날 막걸리에 취해 하늘이 노랗고 온산이 빙글빙글 돌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거나, 

 

우리 마을은 바다도 기어들다
그만둔 마을이었다
기차를 타도 버스를 타도
또다른 십리를 걸어야 하는 곳

집에 와 목마르다 투정하면
어머니는 우물물 권했다
그건 말고 달리 목마르다 조르면
중학생 아들을 위해
할 수 없이 막걸리 받아 왔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아랫목 단지 속
술 괴는 소리를 사랑했다
일곱 살 때 전내기술 마시고
마루에서 굴러 떨어졌다
- 어린 날의 술

 

김민기의 노래가사마따나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라며, 알 수 없는 도회지의 풍경을 몽상하는 어린 시절.


군산이란 데는 어떻게 생겼나
아이는 그게 궁금한데
어른들은 말했다
나중에 가보면 안다고 
 

어둑한 헛간으로 뒤안으로
혼자 하는 숨바꼭질도 시들하면
아이는 마루에 드러누워
서까래 밑 제비집 바라보았다.
- 철모르장이

이 시집을 읽는 것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심호택 시인과 더불어 안온했던 유년의 자궁 속으로 잠시 스스로 유폐하는 경험인 것이다. 해석도 평가도 모두 다 췌사일 뿐이고, 그저 착하고 쉬운 단어들을 좇으며 모든 것이 명료했던 놀랍도록 단순했던 시절로 귀향하는 것이다. <하늘밥 도둑>과 <최대의 풍경>에 이어 이 시인의 시집을 읽은 것은 이 책까지 세권. 이 시집은 시인이 이승과 작별하기 직전에 쓴 시를 모은 유고시집이다. 모든 시집이 유고시집일진대, 이 분은 이런 착한 시 좀 더 쓰시지 ‘왜 그리 서둘러 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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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리 2011-04-0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회식 가기 전 들렀는데.. 선배 글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갑니다...^ㅂ^헤헤

모든사이 2011-04-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참 좋더구나. 그냥 읽고 말 것을, 리뷰를 쓰기 보다 그냥 읽으면 될 것을, 리뷰를 쓰고 나니 쓰잘데 없는 말만 늘어놓은 거 같아서.. 그런데, 아버지 향기가 너무 독해서 시집 펼칠 때마다 네가 눈물깨나 흘리겠구나 했는데.. 따뜻해졌다니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