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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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 남편은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며 죽음의 천사에게 그녀가 ‘한 시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천사는 그녀에게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사람은 평생 “죽음이 인간에게 허용된 가장 소망스러운 상태”라고 떠들어온 철학자. 죽음이 최선이라고 말해왔던 이 철학자는 그러나,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떼어 주기를 거절한다. 병이 들어 곧 죽어갈 남자도, 백살이 된 노파도, 곧 교수형을 당할 사형수도, 애인과 함께 죽고 싶다던 여자도 모두 ‘한 시간’을 거부한다. 모든 이들로부터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주기를 거절당한 죽음의 천사는 오직 한 사람, 맨 처음의 사내 곧, 남편만이 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죽겠노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죽음의 천사는 그의 소망을 배반하고 사내의 생명을 데려가지 않는다. 사내는 “당신은 왜 나를 속였습니까?”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죽음의 천사는, “너는 네 입으로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게 너의 진심이라고 믿었단 말이냐, 네가 빠져 있는 모든 사랑,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 이런 것을 단숨에 꿰뚫어서, 그 뒤편에 숨어 있는 네 영혼의 깊고 깊은 곳, 너의 진정한 소망이 숨겨져 있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아니 그런 능력이 인간인 너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사랑의 묘약>, 아쉽게도 절판이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집 <사랑의 묘약>에 수록된 ‘한 시간만 더’는 이렇듯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을 배반하는지를 보여주는 깔끔한 우화다. 프로이드가 왜 슈니츨러의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소설이다. 프로이드는 슈니츨러에게 “저는 평소 작가들을 찬미해왔는데, 이젠 그들을 시샘하지 않을 수 없군요”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슈니츨러는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 활동한 세기말의 천재들 중 하나. (슈니츨러를 비롯해 프로이드, 코코슈카, 클림트, 쇤베르크 등으로 대표되는 세기말 비엔나의 천재들의 활약상은 칼 쇼르스케의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 노을>(생각의 나무)에서 현저하다. 지난 여름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2장 링슈트라세와 도시적 모더니즘에 멈춰 있으니, 이 책을 선물해준 모씨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 지난 한 주 동안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문학과 지성사),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을 읽으면서 세기말 비엔나의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산책하며 ‘말 속에 숨은 말’을 더듬었다. 


<꿈의 노벨레>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나온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eyes wide shut>의 원작소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점에 갔을 때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은데 그냥 나오기가 섭섭할 때 곧잘 손에 드는 시리즈가 문학과 지성사의 ‘문지스펙트럼’이다. 이 시리즈는 적당한 가격과 예쁜 장정, 그리고 컬렉션의 질도 괜찮다. 이중 외국소설 시리즈는 인문서의 레퍼런스용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에드가 알란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아마 라캉의 <에크리> 때문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발자크의 <사라진느>는 롤랑 바르트의 <S/Z> 때문에 포함된 것 같다. 슈니츨러는 아마도 프로이드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물론 모든 목록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이런 짐작이 맞다면 지극히 문지스러운(?) 선택인 셈이다. 하여간,<꿈의 노벨레>는 세기말 비엔나의 밤거리, 검은 옷자락과 함께 선명히 대비되는 빨간색, 가면무도회, 경쾌하고 밝은 왈츠,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무의식, 커피향이 풍기는 안락하고도 음울한 카페 등의 소품들로 인해 마치 한편의 느와르(noir)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설은 비엔나의 한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딸은 동화책을 읽고 있고, 부모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대견한 듯 딸을 바라보는 거실. 동화책 읽기를 마친 딸은 보모의 손에 이끌려 자러 가고 부부는 어젯밤 그들이 참석했던 가면무도회 이야기를 꺼낸다. 가면무도회는 꼭꼭 감추어져 있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부르주아 가정의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 욕망이 활개 치는 자리다. 이 부부는 가면무도회에서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겼던 ‘위험한 순간’을 토로하고, 뒤이어 각각 다른 이에게 욕망을 느꼈던 과거의 경험을 풀어 놓는다.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가장 명징하고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을 칙칙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 남편 프리돌린은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의사, 아내 알베르티네는 “천사와 같은 눈빛에 가정 주부의 모성과 자태”가 흘러넘치는 인물. 그러나, 이 평온한 부부는 덴마크를 여행했을 때, 호텔 계단에서 스친 사내에게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하거나, 해변 탈의실에서 만난 나체 소녀의 눈빛과 마주친 뒤 “민절(悶絶)해서 쓰러질 뻔”한 경험을 감추고 있었다. 부부는 그런 욕망의 경험을 서로에게 털어놓은 뒤 “지금부터 그런 일이 있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도록 해요”라고 서로 약속한다. 하지만, 남편은 반문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

소설은 상당부분은 남편 프리돌린의 ‘욕망의 모험’으로 이뤄져 있다. 약혼을 앞둔 마리아네는 죽은 아버지를 사망진단을 위해 방문한 의사 프리돌린에게 돌연 눈물의 애정고백을 한다. : “당신이 여기에 다시 못 오신다 해도 당신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해도, 저는 당신 곁에 살고 싶어요.” 프리돌린은 사창가에서 만난 소녀가 섹스를 거부하자 마치 양가집 규수에게 하듯 구애를 하나 결국 거절당한다. 그리고는 가면을 쓴 채 에로틱한 누드쇼를 관람하는 비밀클럽에 몰래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나지만 또다른 가면의 여인에 의해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난다. 다음날 그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만나려던 여인은 찾지 못하고 그러지 말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그는 비밀클럽에서 자신을 구해준 여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소설은 프리돌린의 모험을 마치 스릴러 영화처럼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음울한 비엔나의 밤거리와 함께 비주얼하게 보여준다. 검은 색과 빨간 색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이미지들.

남편 프리돌린과 달리 아내 알베르티네의 모험은 “꿈”이다. 꿈 속에서 그녀는 나체로 사내들에게 에워쌓여 있고, 남편 프리돌린은 사슬에 묶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프리돌린은 아내가 벌거벗은 사내들과 있는 동안 여왕으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이를 거부해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알베르티네의 꿈 속에서 욕망의 대상(나체의 사내들)과 현실적(사회적) 대상(남편 프리돌린)은 분리되어 있다. 반면, 프리돌린에게 욕망과 현실은 알베르티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그는 아내 앞에서 여왕의 청혼을 거절한다.) 알베르티네에게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의 세계일 뿐이고, 남편 프리돌린에게는 현실속에서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욕망은 자신이 처한 부르주아적 일상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니 프리돌린의 선택은? : “이 모든 질서,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거짓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금 들었다. ... 일종의 이중적 삶을 사는 거야. 믿음직스럽고 앞날이 창창한 유능한 의사, 성실한 남편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난봉꾼으로, 호색한으로,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냉소주의로 사는  거야.”  손쉬운 해결책이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리돌린은 침대의 알베르티네 옆자리에서 자신이 쓰고 다녔던 가면을 발견한다. 현실의 자신과 욕망의 자신, 의식과 무의식, 내면과 외면이 전면적으로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욕망의 모험을 아내에게 모두 털어 놓고 말한다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알베르티네의 대답 :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 겠지요. 그 모든 모험으로부터 우린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 현실에서의 모험, 그리고 꿈속에서의 모험,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당신도 정말 그걸 확신하오?” “네 확신해요, 하룻밤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니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조차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돌린은 ‘꿈’에서 영원히 깨어났다고 말하려 하지만, 알베르티네가 속삭인다 :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아이즈와이드셧>의 실제 주인공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를 찍은 뒤 이혼했다. 현실은 영화와 소설을 배반한 것, 그러니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현실원칙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쾌락원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슈니츨러는 세기말 비엔나 상류사회의 부르주아적 가치 뒤에 숨어 있는 욕망과 무의식을 말하고 있지만, 프로이드를 따르자면, 그 시대 그 곳에서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간이 처한 조건이기도 하다. 내면과 외면의 일치, 현실과 쾌락의 일치는 루카치에 따르자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고 갈 수 있었던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리스 서사시 세계에서나 가능했다. “환멸의 낭만주의” 이후,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존재하는 것들은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내면의 진실은 말하자면 일종의 “숨은 신”인 것인데, 그것은 ‘말’로서 나타나고(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가 가진 내면적 경험과 무의식은 두 사람의 ‘말’로서  드러난다.)이고, 욕망의 불일치와 그것의 화해 역시 ‘말’로서 이뤄진다.(프리돌린의 실제적 모험과 알베르티네의 꿈속의 모험은 서로에게 ‘말’해지고, 이로서 둘은 서로의 욕망을 수락하고 화해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라고 할 밖에. 우리는 아직 “말 속에 숨은 말”을 읽고 짐작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하지만, 슈니츨러는 ‘한 시간만 더’에서 그 말조차도 ‘숨은 신’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냉소를 보낸다. 그러니까, 정말로 “꼭 말로 해야 하나?” , 아니 그 말은 도대체 믿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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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 - 영국정부와 예술 정책
김정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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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정환이 <기차에 대하여>(창비)라는 걸출한 ‘프롤레타리아 시집’을 내고 난 뒤 그당시 부상하던 ‘압구정 문화’에 대해 “우리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24시간 편의점의 실내만큼 화려하게 그려본 적이 있던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노동해방과 사회주의를 말하던 한국의 숱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은 19세기 러시아만큼이나 우중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려보이는 문화의 미래 또한 낫과 망치로 묘사될 수 있을 만큼 후진적인 것이었다. 제임슨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라고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수입상들에 의해 한국에 상륙했을 때조차도, 이들은 그것이 가진 소비자본주의와의 결탁과 반민중성을 분석하고 폭로했을 뿐, 이렇다할 대안적 논리도 보여주지 못했다. 20세기 초반 마야코프스키가 참여했던 시대착오적인(?) 미래파 운동인 프롤레트쿨트만큼도 ‘화사한 미래’를 그리지 못했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스타일은 저 누추한 개량한복이고, 남은 논리는 <문화과학>류의 ‘구라’일 뿐이다. (이건 너무 심한가?)

1970년대 이래 한국의 민중문화 운동이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듯이 한국의 주류문화도 이렇다할 문화적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동물원 옆에 처박힌 과천 현대미술관에 가보아도, 예술의 전당에도, 세종문화회관에도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의 문화는 “없다.” 동남아와 아랍인들을 사로잡았다는 이른바 ‘한류’도 기실 따지고 보면, 헐리우드의 문화적 독점력이 약화된 시대에 그것의 손쉬운 대체물로서 선택되고 소비된 것일 따름이다. 일본문화는 로컬리티가 너무 강하고, 중국은 세련되지 못했으며, 유럽의 그것은 흡인력이 약하다. (백원담, <한류>) 최근 한달여 동안 꾸역꾸역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김정희 지음, 서울대출판문화원)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한국의 문화적 빈곤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부정적 유산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성숙과 변동은 자본주의의 진전과 변화와 더불어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복지에 따른 병폐를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공공의 문화를 위한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문화국가’ 운운한다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다.

이 책을 한겨레에 실린 작은 소개기사를 보자마자 주문했는데, ‘영국정부와 예술정책’이라는 부제가 유독 눈길을 끌었던 탓이다. 480여 쪽에 3만원씩이나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저력이 참으로 부러웠다. 감히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과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빈약한 유산과 얄팍한 문화는 빗대어 볼때 한층 더 초라하다. 영국은 알려진 대로 수백 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전형적 발전과정을 밟아온 국가다. 경제발전의 과정만큼이나 문화적 성취도 오랜 축적의 역사와 탄탄한 기반을 자랑한다. 이 책은 오늘의 영국과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상당부분 ‘국가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글픔과 초라함은 우리는 이제껏 그런 국가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 때문이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영국에서 일년간 연구년을 보내면서 이 책을 썼다. 그녀는 런던의 화랑가와 국립도서관,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영국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다.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는 품격과 교양, 천천히 진행되는 북유럽의 봄, 영국 도서관의 고요함과 쾌적함, 사우스뱅크의 질이 있고 종류가 다양한 음악과 영화 프로그램, 런던 하늘의 드라마틱한 구름, 리전트 파크의 자작나무 이파리 소리와 그것이 만들어주는 바람의 느낌”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국립 박물관/미술관의 무료입장과 저렴한 음악회 티켓 가격 같은 것이다. 영국은 한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고, 국가는 그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범적 사례를 제공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18세기 이후 영국의 문화정책과 그것이 목표로 한 바를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그 출발점은 1759년 1월 15일 개관한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다.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자 대영제국의 영광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이 거대한 박물관은 국민 교육을 통하여 영국사회를 ‘문명화’하는 것을 존재이유로 삼았다. 대영박물관의 이사들은 “컬렉션은 전체가 다 보존되어야 하고, 보기 위해 무료로 접근하고 숙독하고자 하는 일반 국민의 사용과 이익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담긴 문서에 서명을 했다. 국왕의 통치행위를 위한 보조기관으로 설립된 우리의 ‘규장각’과는 애시당초 비교가 안된다. 대영박물관은 엘리트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배우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다윈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간디도 이 곳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었으리라.

국립으로 세워진 대영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원칙은 다른 국립 문화기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내셔널갤러리나 “영국 국민을 하나의 조직체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설립된 테이트 갤러리, 빅토리아앤앨버트(V&A) 박물관 역시 국민에 대한 예술교육과 문명화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그 핵심이 바로 이들 국립 미술관/박물관의 무료입장 원칙. 미술관의 소장품은 “국가의 재산이고 국민의 교육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무료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짧은 영국 여행 동안 나같은 외국인 여행자가 공짜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18세기 영국인들 덕분인 것이다. 국가가 박물관을 국민 계몽과 도덕교육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박물관의 정치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장품의 상당수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따른 유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계몽주의적 열정’은 감동스럽다. 문명화의 과제는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중상주의와 결합하여 ‘공예산업’의 진흥과 같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도덕의 열정은 상업적 열정으로, 기술과 산업에 대한 강조로 변화했다. 1851년 5월 1일 시작되어 11월 31일까지 열린 국제 대박람회와 거기서 선보인 수정궁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열정을 상징하는 예술과 산업, 기술의 집약체였다.

20세기 초부터 대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영국의 문화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케인즈는 주식투자에 능하고 매력있는 여자를 찾아내는 데만 귀신인 줄 알았는데, 그는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화정책가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CEMA(음악과 예술 장려회의)의 2대 의장이었는데, 이 기관은 “최대 다수에게 최고의 것을”(the best for the mos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는 최고를 지향하고, 최대 다수(the most)의 국민들이 그것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을 내세운 CEMA의 전략은 복지국가론의 문화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국가는 ‘팔길이 거리’ 원칙을 내세워 예술에 대해 공공적 지원을 하지만 간섭을 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세금이라는 공공재원을 통해 운영되기 때문에 대다수 문화예술기관들은 모든 국민들이 무료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케인즈는 “과거에는 혜택받은 소수를 위해 비축됐던 순수미술의 즐거움을 도래하는 시대에는 대중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가 한 사회의 문화를 위해, 그 문화를 즐기고 수용하는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책의 두 번째 제목인 ‘문화주의’는 바로 이 시기의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용어다.

문화적 케인즈주의로 불릴만한 이같은 논리는 20세기초부터 1979년 대처 집권 이전까지 영국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었다. 문화적 복지국가가 거의 80여년을 지속했던 것이다. 1970년대말 이른바 광산노조의 파업으로 불거진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을 배경으로 등장한 대처정부는 빅토리아 시대 이후 계속된 ‘문명화’, ‘문화주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목표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대처주의의 신념은 정부지원을 받는 공공기구(quango)들에게 강력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이제 예술은 영국의 ‘기업문화’를 확산시키고,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게 대처리즘의 예술정책이었다. 대처시대에 많은 유적들과 공공박물관/미술관들은 먹고 살기 위해 ‘무료입장’ 전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적의 상품화, 공공정책의 상품화, 공공문화의 상품화. 영국의 문화예술정책을 주도하는 아츠카운실은 “노동당의 요새”들이었기 때문에 폐지되거나 개혁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민영화와 자율을 주장하는 대처리즘 시대에 공공예술기관들은 ‘팔길이 원칙’에서 벗어나 국가의 ‘간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것. BBC도 ‘임명권’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이 점에서 BBC는 KBS의 선례가 된다.) 복지국가 시기에 독립적 기관들은 ‘중앙’의 통제를 받는 기구들로 바뀌었다. “팔길이 원칙이 손목 길이 원칙으로 바뀌었다.”

“아츠카운실, 즉 ACGB는 케인즈에 의해 국민에게 ‘위대함과 선’을 교육하고 국민의 복지와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중개하는 기구로 탄생했다. 케인즈와 같은 문화주의자들은 미술과 산업을, 문화를 실용성과 그리고 레저를 노동과 구분했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기금을 통한 국가의 예술지원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을 상업주의와 물질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츠카운실이 기금을 분배할 때 ‘예술적 가치’, ‘기준’, ‘질’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칙은 경제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77년까지도 지속됐다. 그러나 아츠카운실은 대처시대에 두명의 의장이 기업들로부터 기금을 받고 이름을 빌려 줌으로써 상업주의적인 기업들을 국가가 문화애호적인 것으로 ‘인증’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관들로 변했다. 아츠 카운실이 기업들의 사업도구가 됨으로써 그것들로부터 보조금을 전달받는 예술기관들도 기업의 상업주의에 종속되어 갔다.”(278-279)

저자는 대처시대를 예술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시기로 묘사한다. 대처 시기에 테이트갤러리에는 다국적 기업인 일본의 노무라 증권에 의해 ‘노무라방’이 만들어지고, 기업들은 “문화경영자적 자본주의자들”이 되어 미술에 스폰서를 한다. 맥주회사 벡스는 영국 미술을 후원함으로써 벡스가 영국의 ‘아방가르드 술’이 되고, 앱솔루트 보드카는 옥스퍼드 현대미술관의 ‘새로운 영국 회화’전을 후원하면서 독특한 ‘예술적 아우라’를 획득한다.  영국의 유명 광고회사 사치&사치의 찰스 사치가 “슈퍼 컬렉터”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 그는 자본의 힘으로 미술품을 사들이고, 젊은 미술가들을 후원해 그들을 키우고, 작품값을 높여 엄청난 수익을 내고 되판다. 데미안 허스트(수족관에 포르말린을 넣고 상어를 집어넣은 이 작자의 작품이 왜 그렇게 비싸야 하는지 도대체 나는 알 수 없다), 트레이시 에민 등 대처와 사치의 아이들인 'yBas' 그룹이 등장하여 천문학적인 작품값을 기록한다. “오늘날 미학적 산물은 일반적으로 상품생산속으로 통합됐다”(프레드릭 제임슨)

대처 시대의 문화와 예술정책이 ‘기업문화’로 요약된다면, 블레어 노동당 시기는 ‘문화경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노동당의 옷을 입은 대처라는 표현 그대로 블레어는 대처의 공공문화기구의 민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문화 예술 자체를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로 변형시켰다. 예술은 이제 ‘가치(교환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산업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무료입장과 같은 최소한의 공공성은 유지되었지만 민영화는 계속되었고, 예술은 더욱 기업화되었다. 블레어의 문화노선은 “예술과 문화를 창의적 산업들로 상표를 바꾼 것”이며, “문화활동과 에이전트 보다는 상품들의 경제적 이익들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적 글로벌화의 제국주의적 확산에 기여하면서 분명히 자율적으로 고립되어 실행되며 더 중립적으로 비치는 창의성이라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적인 문화를 주변화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블레어가 문화경제 노선을 위해 만든 기구는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s)다. 이 부서의 목표는 “접근, 우수함, 교육, 경제적 가치”(access, exellence, education, economic value)로 설정된다. 접근은 모든 계층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수함은 예술의 질적 탁월함을, 교육은 국민계몽과 문화교육을, 경제적 가치는 말 그대로 부를 창출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블레어 이전의 문화예술이 담당한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라는 패러다임은 모두 ‘문화경제’ 패러다임 안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영제국 시대의 문명화라는 잔영과 복지국가 시대의 케인즈주의와 대처리즘이 공존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문화체육관광부(MCST,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가 블레어의 DCMS에서 빌어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블레어 시대에 이르러 “예술이 방송과 영화를 통해서 문화의 범주 안으로 통합되면서 예술의 경계와 질적 수준의 차이”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예술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아우라를 상실한 채 월마트 안에 쌓인 수많은 상품 중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문명화, 문화주의를 거쳐 기업문화와 문화경제에 이른 영국적 경로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차라리 문명화 이전 혹은 거쳐야할 단계를 건너 뛰어 느닷없이 문화경제가 운운되는 시대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차라리 비동시성의 동시성?) 국가가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과 계몽을 국민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제공해준 적이 없는 역사적 빈곤 속에서, 문화강국이니 소프트웨어를 키우자느니 하는 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노릇이 아닐까. DJ 정부는 콘텐츠 산업의 육성을, 노무현 정부는 창의산업을 외쳤지만 그것으로 역사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런던의 테이트모던에서, V&A에서, 내셔널 갤러리에서 절망하고 서글퍼 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부재로서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족 한가지.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자료와 논문에 근거해서 책을 쓰고 있는데, 인용문들은 거칠고 어색하게 번역되어 있고, 문장은 학자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난삽하기 그지 없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 하나는 대학원생의 보고서 같다고 평가했는데, 수긍이 가는 평가다. 영국 문화정책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미문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책을 비싸게 구입할 독자의 처지도 마땅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좀더 정돈되고 압축된 문장이었다면 이 책이 그렇게 두꺼워질 이유도, 따라서 비쌀 이유도 없을 것이다. 대처리즘 시기의 서술은 지나치게 미술작품과 미술계 동향에 집중되어 있어 정책와 기구, 패러다임 중심의 서술인 앞부분에 비해 돌출적이다. 책 전체의 균형이 기우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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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 발터 벤야민 전기소설
제이 파리니 지음, 전혜림 옮김 / 솔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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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무실을 오고 가며 발터 벤야민의 전기소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을 읽었다.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문학연구자이자 소설가인 저자 제이 파리니에게 주어진 자료는 게르숌 솔렘의 <한 우정의 역사>와 벤야민의 편지, 아샤 라시스의 회고록, 그리고 벤야민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리사 피트코와의 인터뷰 정도가 전부다. 이 재료들은 벤야민의 여정을 중심으로 짜이면서, 게르숌 솔렘, 아샤 라시스, 리사 피트코, 마담 루이스(그녀는 벤야민이 자살한 스페인 국경마을 포르부의 호텔 여주인이다)의 입으로 다시 태어나 벤야민의 삶을 증언한다. 저자는 이 부실한 자료를 가지고도 벤야민의 삶과 사랑을 정교하게 짜여진 직물처럼 아주 잘 직조해 놓았다. 벤야민이 파리를 떠나 피레네 산맥의 시골 호텔에서 모르핀으로 자살할 때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누가 벤야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 책을 건네줘도 좋을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마드리드행 급행열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진 벤야민의 마지막 원고뭉치가 눈에 밟힌다. 사라진 책은 몇가지 단서와 추론을 뒤로 한 채 신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가득했던 파피루스 책들이 그러했고, 에코가 자기 소설의 재료로 써버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러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남아있다면 일본의 <만엽집>이 부럽지 않았을 <삼대목>도 그런 운명이다.(한국의 고대 시가가 절간 언저리에서 쓰여진 몇 편으로 남아 있다는 건 비극이다. 문학적 기록을 보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전혀 문화민족이 못된다.) 죽어가는 벤야민으로부터 원고뭉치가 든 서류가방을 부탁받은 꼬마 호세는 이 소설에서처럼 정말,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의 눈물을 흘렸을까. 한 명민하고 예민한 정신이 한땀 한땀 써내려간 원고에 담겨있을 ‘파사주 프로젝트’는, 그 뒤 서너 명의 학자에 의해 다시 쓰여지긴 했어도 그건 벤야민 에피고넨들의 작품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1892년에 태어나 1940년 만 48세로 죽었다. 1942년에 태어나 1990년에 죽은 김현과 똑같은 나이에 죽었으니 때 이른 죽음은 아니다. 그가 남긴 글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는 사람이 남긴 기록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어떤 여자와도 성공적인 결합에 이르지 못했던 그의 부실한 연애처럼, 그가 남긴 기록은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미완성이고, 그나마도 단편적 에세이와 파편화된 이미지로 그쳐 있다. 그러나, 이 짧고도 시적인 에세이들의 매혹은 아주 독한 것이어서 몇 번을 다시 읽어야 겨우 그 의미의 파편을 건질 수 있음에도 거듭 찾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와 같은 동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들의 글이 가진 건조함이거나 논리적 견고함이 느껴지질 않는다. 벤야민의 에세이는 주관적 감성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으며, 곳곳에서 낯선 이미지들이 돌출한다. 대학 시절 그의 ‘역사철학테제’를 읽으며 내 지적 능력의 빈곤을 자책하고 한탄했었다.

벤야민의 시적인 에세이가 그렇듯이 이 책에 쓰인 그의 삶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라고 나는 쓰고 싶다.)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 동그란 안경, 투명하게 빛나지만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 그리고 그 눈에 스민 멜랑콜리, 작은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 외모에서부터 섬약한 지식인의 아우라를 잔뜩 풍기는 그는 국경을 넘는 와중에도 괴테를 읽는 숙명적 독서가이며, 사랑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말이 진부한 클리쉐(cliche)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의 우유부단함, 수집한 소묘 한점을 팔자는 제안에 “차라리 자살을 하고 말지”라고 대답하는 부르주아적 예술취미, 그의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전망과 양립할 수 없는 소심함과 유약함, 맑스주의 변증법과 양립할 수 없는 카발라주의에 대한 심취,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나 볼 법한 깍듯한 예의와 완곡어법. 파리니의 글솜씨는 이런 벤야민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서 가장 밝게 빛난다.

비극적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나 찌질하고 찌질한 그의 연애사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랑 없이 결혼한 아내 도라, 사랑했으나 한번도 행복한 충만에 이르지 못한 아샤 라시스와의 연애, 그리고 또 한명의 정부이자 연인 율라 콘. 어느 누구와도 성공적인 연애를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섹스마저도 그러했다. 이 소설에서 아샤 라시스는 모스크바 역에서 벤야민을 떠나보내고 나서 “참으로 지긋지긋한 남자”라고 말한다. 그 지긋지긋함은 그러나, 권태와 역겨움의 토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소리로 읽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똑같은 경험을 거듭거듭 반복할 것이다”라는 벤야민이 인용한 니체의 말대로, 그의 참담한 연애는 벤야민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그에게는 찌질한 연애가 운명이라고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뛰어난 철학적 정신을 소유한 지성인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문제에 도달하면 모두들 서로가 서로에게 저능아처럼 말한다.” 그가 사랑에 저능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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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6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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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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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최종철 옮김, 민음사)를 다시 읽었다. 이 비극의 출발은 물론 ‘사랑과 질투’이겠지만, 오셀로가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에서 읽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장벽으로 가로놓인 ‘인종’이라는 요소는 탈식민주의적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종엽이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고 누리는 주체의 자리는 남성 일반의 자리가 아니라 일본 남성의 자리가 된다”고 했던 경우다.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본 남성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더 격렬하다. ‘지배자’로서 향유의 자리를 빼앗긴 자의 ‘분노’는 원래 더 큰 법이지 않겠는가.

이야고는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에게 “늙고 검은 숫양이 당신의 흰 암양을 올라타요”라며 분노를 부추긴다. 그 무어인은 “음탕하고 저속한 이방인”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딸이 늙고 검은 숫양과 같은 유색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돌팔이가 파는 부적과 약물로 정신을 잃고 납치”됐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성을 가진 ‘베니스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로데리고가 이야고의 간계를 빌려 오셀로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는 원동력도 질투 이상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백인에게 흑인은 성적 경쟁자로 인식되나 성적으로 압도할 수 없다는 무기력의 대상이다. 그 무기력이 비극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보면, 이들 사내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자리’에 대한 심리적 고뇌와 쟁투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을 꿈꾸거나(로데리고),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거나(오셀로), 본의 아니게 남의 자리에 앉았다고 오해를 받거나(카시오)이다. 오셀로의 자리에 대해서는 인종적 편견과 그로 말미암은 집단적 배타성이 똬리를 틀고 앉아 그가 제대로 앉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인종주의를 벗겨내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 데스데모나다. “아버님은 제 모든 도리의 주인이시고/지금까지 전 아버님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남편이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머님이 외할아버지 앞에서/아버님을 택했을 때 보여주었던 도리/바로 그만큼이 제 주인 무어인의 몫이라고/주장하고 밝히겠습니다. 그러니, 오셀로의 ‘자리’는 원래 없었던 것,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셀로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오셀로가 사랑과 분노라는 감정의 양 극단을 오고가는 것에 비해, 데스데모나는 연인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순간에도 그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순정한 여인이다. 이야고의 ‘지옥의 신학’을 완성하는 것은 그 순정한 사랑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오셀로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사랑의 코드를 일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녀는 제게 고마워했고 이르기를/그녀를 사랑하는 제 친구가 있다면/ 제 얘기를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만으로/그녀에게 구애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그녀를 사랑한 것입니다./이것이 제가 쓴 유일한 마법입니다.”(1막3장)

그의 사랑에 대한 독법은 이렇듯 여인이 자신의 무훈담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만큼 지리멸렬하다. ‘위험’ 때문에 사랑하고, ‘동정’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오셀로의 사랑에 대한 파악은 ‘허구가 만들어낸 산물로서의 사랑’이지만, 데스데모나의 그것은 ‘규범’과 ‘운명’을 넘어서는 실재적인 것이며, ‘가슴’과 ‘마음’, 그리고 몸을 통한 ‘사랑의 의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베니스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필요로 하는, 운명의 여신을 거스르는 고독한 결단의 행위다.

“전 이 무어인을 사랑했고, 함께 살 것임을/제가 철저하게 규범을 깨뜨리고/운명의 여신을 조롱한 사실로/온세상에 알립니다. 제 가슴은 주인님께/최대의 기쁨을 드릴만큼 정복되었습니다./전 오셀로의 얼굴을 그의 마음에서 보았고/그의 명성과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였습니다/그런데, 의원님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저는 한가로운 나방처럼 뒤처져 남는다면/전 그와 나눌 사랑의 의식을 빼앗기고/뼈아픈 그의 부재로 어려운 시간을/견뎌야할 것입니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1막 3장)

“... 내가 사고과정이나 실제 행동에서/내 의지로 그이의 사랑을 어긴 적이 있다면,/내 눈이나 귀 또는 다른 어떤 감각이/다른 어떤 모습에서 즐거움을 취했다면/그리고 (그이가 날 떨쳐버리고 이혼하여/거지 신세가 되더라도) 언제나 그이를/이전에도 앞으로도 깊이 사랑 않는다면/나에겐 아무런 안락도 없으리라/무정함은 커다란 타격이 될 수 있고/그이의 무정함은 내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내 사랑은 절대로 더럽히지 못할 거야.”(4막2장)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일면적 이해는 ‘손수건’ 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죽음과 살인에 이르게 된다. 손수건이 “예언자의 광기”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오셀로는 그것을 자신의 자리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물건으로 받아들인다. 애시당초 마음을 읽지 못했으므로 데스데모나의 운명적 결단과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의 결속력을 손수건 하나에 가탁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급기야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아름다운 베니스여인과 결혼한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의 사랑과 질투이야기가 아니라, 남성성의 폭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어야 마땅할 일이다.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홀로 저 혼자 도깨비춤을 추다 자신도 연인도 망쳐버리는 폭력성 말이다. 스스로 초래한 일이니 “비참한 내 운명”은 데스데모나의 것이 아니라, 오셀로의 것이다.

“누가 자기 운명을 다스릴 있답니까?/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무기를 가졌다고 겁내진 마십시오./여기가 제 여정의 끝이고 목표이며/가장 먼 항해의 바로 그 표적이랍니다. /움츠리며 물러서요? 쓸데없는 두려움일 뿐입니다./오셀로의 가슴을 갈대로 찔러봐요./그는 물러갑니다. 오셀로는 어디로 가야지요?/그런데 넌 지금 어떤 모습이냐? 오 불운한 것,/ 네 속옷처럼 창백하구나. 이런 모습 때문에/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 둘이 만난다면/내 영혼은 천국에서 곤두박질칠 것이고/악마들이 가로채갈 것이다. 네 정절만큼이나/차디찬 내 님아. 오 저주받을 노예 놈!/악마들아 나를 쫓아내거라, /이 거룩한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도록,/나를 바람속에 팽개치고 유황불에 태우고/불타는 심연 속에 깊이깊이 처 넣어라!/오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가 죽었다./ 오 오 오.”  

 

과연 그는 ‘불타는 심연’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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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자본주의 - 금융위기가 왜 발생했으며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스베르너 진 지음, 이헌대 옮김 / 에코피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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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인 노력없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시장에 넘쳐나는 중국산 물품을 보거나 홍어집에 우리와 거의 대척점에 가까이 가 있는 칠레산이 넘치더라도, 이런 물품들이 경유해왔을 멀고 먼 길을 쉽게 떠올리지는 못한다. 현실의 변화에 둔감한 탓이다. 하물며 2008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더더욱 내 현실적 삶의 실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을 무렵에는 마침 뉴욕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거리에 나뒹구는 신문에 큼지막한 글씨로 ‘bailout'이라 쓰여져 있었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어쩌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충격을 가장 덜 받는 곳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카지노 자본주의>(한스베르너 진, 에코피아)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금융위기에 대한 지젝의 책을 사 놓고도 몇 달 째 2장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마당에 익숙하지 않는 금융용어가 무수히 튀어나오는 책을 자발적으로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저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들, 혹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결국 따지고 보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낳은 부정적 유산들일 것이다. 금융권의 억대 연봉자들은 그들의 고액 연봉이 자신들의 능력에 따른 것인 줄 알지만, 기실 그것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가져온 과실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내 둔감함에 약간의 충격을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월러스틴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근대 이전의 사회가 훨씬 더 행복하고 풍요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아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근대 사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곡물생산량은 차고 넘치는 데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부조리한 현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시장’을 언급했을 때 이미 그런 징조는 있었다. 한스베르너 진이 묘사하고 있는 글로벌 금융네트워크는 아슬아슬하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로 만들어진 그물망처럼 보인다. 특정 국가의 재정위기는 금새 이웃나라로, 역내 경제권 전체로, 급기야 전세계로 급속히 확산된다. 엊그제 보도된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재정위기는 이미 시한폭탄인 듯 하다.

2008년 금융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과 비교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 듯한데, 저자는 그때의 위기가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위기라고 평가한다. 1929년 10월 24일의 ‘검은 목요일’에는 주가가 10.1% 하락했지만 2008년 10월 10일 ‘검은 금요일’에는 전세계에서 주가가 18.2% 하락했다. 백 개 이상의 미국, 영국 금융기관이 사라지거나 국유화됐다.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는 지금, 세계 최대의 수출국가는 독일에서 중국이 됐고, 이 거대한 나라는 “위기에서의 거대한 승리자”로 떠올랐다. G8에서 G20으로 서둘러 국제공조가 시작된 것은 위기로 인한 전세계 경제의 파국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던 것이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기, 미중간의 환율전쟁 등 여전히 불안정성은 남아 있는 듯하다.

저자가 분석하는 금융위기의 전개과정은, 내 둔한 이해력으로는, 상식적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위기의 출발지는 미국이다. 주택담보대출에 근거한 분에 넘치는 미국인들의 생활, 자본수입에 의존하는 미국의 재정위기, 끊임없이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내는 월가와 미국의 투자은행들. 부실대출 채권이라는 약한 고리가 끊어지면서 와르르 무너졌고, 이것의 충격파는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그중 금융자본에 대한 개방성이 가장 컸던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영국 같은 나라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스베르너 진은 은행도산 과정, 도박장이 된 메인스트리트,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다 풀어버리고 감독기능도 수행하지 못했던 정부부문의 정책적 실패 과정 등을 통계와 수치와 나로서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용어들로 풀어낸다. 망해가는 나라들의 목록의 상위에는 일본,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 미국, 캐나다, 헝가리, 포르투갈, 프랑스가 있고, 하위에는 에스토니아, 룩셈부르크, 부가리아, 호주, 루마니아, 뉴질랜드, 리투아니아, 한국이 있다. 우리가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래도 위안이라고 할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미국의 잠재적 위협이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미국인은 이탈리아로, 유럽인은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될 것이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독일식 ‘질서 자유주의’인데, 이는 정부가 게임 규칙을 정해야만 시장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디제이의 경제정책을 설명할 때 등장했던 이 용어를 나는  거의 10여년 만에 다시 접하게 됐다. 이른바 디제이노믹스의 요체는 “시장을 창출하고, 시장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근대경제의 핵심으로서)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과제’로 이해되었고, 시장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과제로 이해되었다. 창비식으로 말해, 그것은 근대와 탈근대의 이중과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이것이 오독인지 아닌지 나는 판단할 길이 없다.) 그런데, 금융위기를 겪고 난 뒤에 다시 “시장의 자율규제와 같은 것은 없다. 국가가 정한 확고한 규제의 틀 내에서의 자율질서만이 존재할 따름이다”와 같은 진단이 등장하다니, 격세지감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저물어가는 미국의 경제적 패권,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몰락을 수치와 통계로 확인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실린 월러스틴의 인터뷰를 보아도 미국의 몰락은 불가피한 것 같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1116114742&Section=05) 서울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오바마가 여기저기에서 돌멩이를 맞고 쓸쓸히 빈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이런 위기의 근본에는 저자가 말하는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초래하는 부실한 금융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 잘 나갈 때 돈은 금융업자들이 챙기고, 망할 때는 국가와 납세자들이 부담을 져야 하는 이 부조리한 ‘욕망과 책임의 불일치’의 상황.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같지 않은가. 전성인 교수의 말을 빌자면, “재주는 곰이 넘고 실속은 왕서방이 챙기는 구조” 말이다. 조선일보는 ‘참 나쁜 신문’이지만, 송희영 칼럼은 가끔이라도 이 신문을 들춰보게 만든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1/20101001018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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