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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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는 늙었다. 60이 가까운 나이라니, “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해봤자 허사다. 육신의 나이는 늙어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절망과 황폐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의 집에서였던가. 내 20대의 한 때, 취한 눈으로 그녀의 시를 더듬거리며, 투박한 음성으로 술벗들과 더불어 주절주절 낭송하던 그녀의 시는 “이사 가고” 없다. 11년 만에 새로 나왔다는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그래서 예전의 그녀에 비해 “담담하게, 밍밍하게” 고여 있다.

교보 신간시집 서가에서 그녀의 시집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파 어딘가에서 요양을 한다고 했던가, 정신병에 걸렸다던가, 가끔 번역서를 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칙칙하고 어두울까. 1쇄 발행일자는 1월 11일, 내가 산 것은 1월 18일자로 나온 3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으니, 최승자 시를 찾는 자들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또 그들 역시 그녀의 “잿빛으로 삭은” 세계를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경이와 숭고, 분노가 사라진(가고 있는) 시대에 오로지 퇴행밖에 남은 게 없지 않겠는가. 이명박 시대에 “이 시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최승자 독자들은 퇴행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나역시 그런 퇴행의 일원, 구체적 공간으로 말하자면, 숙대 앞 청파동이다. 그곳은 오로지 그녀의 시로만 기억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눈 덮인 꿈을 떠돌던/몇 세기 전의 겨울”(청파동을 기억하는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곳을 허술한 공복과 희미한 취기로 새겨진 신촌의 기억을 포개곤 했다. 그런데 새 시집에서 최승자는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라며 “오랫동안 내 시 밭은 황폐했었다/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이사는 별로 반갑지 않다. 이젠 늙고 병들어 지친 시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포오란’의 질감은 풍요와 넉넉함, 부드러움과 넓은 긍정이다. 예각이 사라진 최승자? 이번 시집이 재미없는 이유다. 그 빈 자리에 그녀는 노자와 장자, 승무와 탈춤, 시간의 영속성과 불변성, 집단무의식과 융, 흐르지 않는 강, 빈 하늘, 사막의 이미지를 쌓아 놓고 있다. 그 풍경은 아득히 멀어서 쓸쓸하다. 언젠가 보았던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과 닮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일 것이며, 그만큼 격절과 외로움에 시달렸을 것. “그동안 늘 40대”로 알고 살았던 그녀의 자기확인은 그런데,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문”이 열렸지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고 바라기 때문. 병실 창가쯤에서 담배를 빨며 “하얀 낮달/푸른 붕새/멀고 먼 길/가다 가다 지치는 하늘//푸른 붕새 몇 점 띄워놓고 /다리 절룩이며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 쓸쓸하다.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쓸쓸해서 머나먼

아득히 먼 사막 위를 홀로 걷는 낙타. 시간은 바람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곳.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하늘 그 너머”를 몽상하는 그녀. 한때 여전사였다가 이젠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처럼.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 홀로가는 낙타  

 

중앙일보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 사진은 말기 암 환자의 그것처럼 깡마르고 강팔라 보였다. 온몸의 독소와 함께 진기까지도 빠져나간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늙음 탓만은 아니리라. 최승자의 광기를 이젠 다시 읽을 수 없으니,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계보를 이을 시인을 발견했다니, 그 후예인 진은영이나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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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1년 만에 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시인 최승자(58)씨를 20일 경북 포항의 한 대형 할인매장 카페에서 만났다. 최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말부터는 병원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최근 11년 만에 출간한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의 막판 교정 작업도 병상에서 이뤄졌다. 최씨는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만나 보니 건강해 보였다. “나, 비정상 아니다”라며, 문학세계의 변모와 근황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10여 년을 완전한 사막, 불모의 세월로 보냈으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며 “시는 물론 소설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인터뷰 덕분에 3박4일 ‘외박’ 허가를 받은 참이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최씨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시단은 비명처럼 내질러지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억압적인 현실, 시대와 불화하는 분열된 자아 등을 증언했다. 황지우·이성복·김혜순·장정일·박노해·백무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를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일찌기 나는’)으로 표현하는 극단적인 자기모멸, 떠나간 애인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Y를 위하여’) 파격 등 최씨의 시 풍경은 강렬했다. “이전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여성시”라는 평을 받았다. 새 시집 얘기를 꺼냈다.

-시풍이 크게 변했다. 노자·장자는 물론 길가메시 같은 근동 설화, 융의 집단무의식도 나온다.
“1993년 『내 무덤, 푸르고』 낼 때 ‘너무 같은 얘기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영양학·식이요법 등에서 시작한 지적 호기심이 사상의학, 음양오행 관련 서적, 점성술 등 신비주의로 옮아갔다. 너무 심취하다 보니 정신분열증이 왔다. 신비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언가에 대한.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탈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는 철학책을 읽었다.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생겼다. 문명은 오랜 시간 축적됐다는 점에서 과거에 붙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핵심은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초시간성’이란 말로 요약되는데, 그 경지에서 신비주의와 만난다.”

-일주일 남짓 만에 3000부가 팔렸다. 30대 후반, 40대 독자도 많다고 한다. 강렬함을 원한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고민스럽지만 어쩌겠나.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다. 시는 계속 쓸 것 같다. 안 하면 병에 다시 걸릴 테니까.”

-옛날 얘기 좀 하고 싶다. 80년대, 극도로 강렬했고 비관적이었는데.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다 문학성 높은 작품에 감염돼 비관주의자가 됐다. 안에서 부글부글 끓던 게 억압적 현실에 눌려 있다가 박정희 사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온 것 같다. 강은교·이성복 등 당시 문단의 해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절반의 설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여성 시인이 모두 당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개성인가 보다. 나는 뭉친 게 한 번에 팍, 시로 터져 나온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프리랜서적 시인이랄까. 바깥과 의사소통이 없어 더 그랬을 수 있다.”

-건강은 어떤가.
“괜찮다. 혼자 있으면 먹지 않아 병원에 가는 거다. 병원에서는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는다.”

-계획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아름답고 슬픈 중편소설 하나 쓰려고 한다. 노자 『도덕경』에 대한 장시도 쓰고 싶다.”

포항=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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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보 2010-02-2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이사가 반갑지 않다는 건 퇴폐적 '환멸주의자'가 특유의 뽐 없이 흘린 말인 듯 오히려 절절하구만요. 연이어 유통기한을 훌쩍넘겨 바랄 것이 남지 않은 퇴물로 폐기처분을 선언하는 데까지 구태여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심보는 그래서 더욱 고약스럽습니다. 이제 "늙어 초원부족의 무녀가 된 늙은 인디언 주술사" - 충분히 멋지구만. 덕분에 안 읽고도 그 시집 풍경 주루룩 펼쳐집니다. 일간 서점에 들러 다시 진경을 구경하고 싶군요. 반가운 소개, 진진한 평에 감사를-.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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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애무하기’(tipping the velvet)는 여성 성기를 쓰다듬는 레즈비언들의 은어. 사라 워터스의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한 여성 레즈비언의 人生流轉이다. 아니 빅토리아 시대라는 왕조적 배경보다는 차라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쓰여진 시대(1867, 1885, 1894)라 하는 것이 더 합당할 듯 하다. 19세기 말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빈곤과 계급갈등을 배경으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사회주의에 이르는가를 한 여성의 곡절 많은 인생에 담아낸다.   


줄거리 : 굴 원산지로 유명한 윗스터블 출신 낸시 애쉴리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남장 여성 키티 버틀러를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10대 후반 사춘기 소녀들이 흔히 보여주는 레즈비언 취향과 유사. 그녀는 키티와 함께 런던에서 지내면서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며 ‘커밍아웃’ 하게 되고 그녀와 더불어 진한 성적 탐닉에 빠져들게 된다. 키티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파국에 이른 뒤, 거리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을 연기하며 남창 생활을 하다가 레즈비언 귀족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이후 사회주의자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고, 당대 영국사회에 대한 계급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각성과정은 이와 유사한 계급적 자각의 과정이 전형적으로 그렇듯이 ‘확신에 찬 대중연설’로 절정에 이르고, 헐리웃 엔딩처럼 연인과의 결합과 화해의 키스로 마감한다.

이 소설의 레즈비어니즘은 페미니즘, 그리고 더 두드러지게는 사회주의와 행복하게 결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 : “그리고 이게 (레즈비언 섹스가) 정말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를 할까요?”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가 말했다. “오 그럼요!”, 나는 꿈틀거리며 좀더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그럼 이런 것도요?” “오 분명해요” 나는 시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 “맙소사” 내가 말했다. “몇 년째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전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벨벳 애무하기”는 레즈비언 섹스에 대한 노골적 비유이면서 혁명의 과정이자 여성적 연대의 구체적 현현(epiphany)이다. 가히 ‘섹스는 혁명이다’라는 68혁명적 사고의 재현.

내 기억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존재론적 전이과정은 매우 전투적이고 엄숙주의적이었다. 세계를 구원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주체적 각성 과정에 어찌 섹스 따위가 끼어들 수 있었으랴. (가령, 김정환의 ‘기차’라는 비유가 보여주는 엄숙주의!) 이 소설은 섹스의 은밀한 쾌락과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적 의지를 뒤섞어 부드러운 쾌락의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을 읽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았던 까닭도 이런 '마사지'에 있었을 것. 레즈비언을 소재로 했다는 점도 마찬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전형적인 남성서사이기 때문이다. 상류층 레즈비언들의 ‘할렘’에서 보이는 ‘폭력적 레즈비언 섹스’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섹스와 사뭇 대조적인데, 이는 그 섹스가 ‘남성적 섹스’의 변형(딜도)인 까닭이다.

Eleanor Marx, the youngest daughter of Marx
19세기 말의 런던은 확실히 새로운 욕망과 정치가 들끓던 혁명과 열망의 공간. 여주인공과 그녀의 여성 애인을 런던에 데려간 매니저는 런던을 ‘다양성’이 충만한 곳이라 자랑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레즈비언 소설이자 성적 정체성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셈인데, 과연 소설속의 런던은 귀족과 노동자, 레즈비언과 게이, 도시빈민과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이 공존한다. 주인공은 런던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수직으로 오가며 ‘몸으로’ 런던의 삶을 살아낸다. 당대 영국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역사적 삽화로서 등장한다. 엘레노어 마르크스를 비롯해 시드니 웹과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월터 휘트먼과 같은 시인 등 익숙한 이름도 여럿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읽으면 열광할 만한 대목들. 여성적 정체성, 성의 정치학 : 지배와 복종, 젠더와 계급, sisterhood, 여성적 주체의 ‘말하기’ 등. 특히, 주인공 낸시가 성적 정체성을 경유하여 계급적 각성에 이르면서 “자신의 언어”을 찾게 되는 대목은 여성-레즈비언이라는 ‘하위주체’의 자각과 주체화(말하기)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다소 감상적인 문체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시퀀스의 이음매가 꽤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요컨대, 공학적으로 잘만들어진 소설인 셈.

해설에 따르면, 저자 사라 워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소설을 처녀작으로 <끌림affinity>, <핑거스미스fingersmith>등의 작품을 썼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기를 사랑했으며, 레즈비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페미니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유전에 집착하는 걸 보니 19세기 소설에도 탐닉했으리라.

떠오르는 잡상들 : 나는 왜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좋을까 : 내가 생물학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남자’이기 때문? 영국의 사회민주연맹(SDF)에 대한 궁금증 : 윌리엄 모리스와 엘레노어 마르크스의 동시참여?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 : 공연예술과 동성애의 친화성, 몸에 대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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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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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꾸역꾸역 고종석의 책을 읽어왔다. 그가 처음 낸 <기자들>부터 이 <여자들>까지. 그중에는 실망스러운 글도 있었고(가령, 코드훔치기, 이건 지나치게 신문연재용이라는 티를 낸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좋은 글들은 ‘언어’를 제나름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그의 호사취미와 인문적 배경,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관심 탓이리라.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바로 그것. 나는 그것을 후다닥 탐독하고는 술자리 어디선가,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고종석의 ‘사랑의 말’들은 술집 어느 구석에서 알콜을 뒤집어 쓰다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버렸을 터.  

 

고종석이 편애해 마지않는 여자들의 목록은 예상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자가 포용하는 범위 내에 있다.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한국적 의미가 아닌 보편적 의미의 그것이고, 동시에 진보적 사유의 ‘안쪽’에 있다. 오른쪽으로는 복거일과 김현으로부터 왼쪽으로는 심상정과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지만, 오른편에 위치한 사람보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그의 자유주의가 맘에 들고 마음 편하지만, 노무현과 김대중을 향할 때 표나게 보이는 냉소적 비판은 불편하다. 그럴 때 그의 자유주의는 돌연 진보적이 되는데, 그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억압과 착취를 혐오하는 ‘호모사피엔스’여서이기도 하다. 

 

그는 마더 테레사에 대해 쓰면서 스탕달의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내게 영원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의 사유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적 사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의 자리에 서 있다. 그 ‘거리감각’이 그의 글을 편안하게 만든다. 김철이 말했듯이 그는 우파보다 더 우파같고, 좌파보다 더 좌파같은 유연함과 활달함을 보여준다.   

 

 

스탕달에 공감하는 그에게 편애하는 여자의 상당수가 ‘좌파’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첫머리의 로자부터, 라 파시오나리아, 아룬다티 로이, 콜론타이, 마리 블롱도, 로자 파크스, 죠피 숄, 클라라 체트킨, 시몬느 베이유까지. 물론 이중 로이나 베이유처럼 좌우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인물도 있다. 동시에, 열정과 격정, 성적 욕망과 팜프파탈적 기질을 가진 여자에 대한 매혹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화, 프랑수아즈 지루, 갈라, 사포, 니콜 게랭, 오리아나 팔라치 등. 하지만 고종석은 레니 리펜슈탈이나 마거릿 대처같은 우파적 열정은 사랑하지 않는다.  새된 목소리의 좌파 선동가부터 격정적인 욕망과 섹스의 화신까지,  남자의 욕망은 여자의 열정앞에 언제나 맥없이 무릎을 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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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쓰기 시작했구랴. 근데 너무 한꺼번에 확 올린 거 아니우?
글 올리는 텀이 일정해야 손님들이 많이 찾습디다
그만큼 부지런히 쓰겠다는 각오로 봐도 되는 거죠?
어쨌든 축하하며 새해에는 더욱 건필하시길!

참, http://sheshe.tistory.com 이라고 들어가 보세요
글 좋습니다

트레바리 2011-07-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 고종석 선생은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의 고종석 선생입니다. 어떤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도 닮게 쓰기 어려운 명쾌하고 재밌는 언어사랑의 글들이라고 생각해서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두 연인의 서한집 원문이 어떤 언어로 돼있는지 몰라도 선생이 새로 번역해주신다면 더 좋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이번에 읽어본 <여자들>에서는 '최진실' 편을 가장 인상깊게 읽고 공감했습니다. 딴 여자들은 대개 잘 모르는 님들이라서 더 그랬지만(^^;), 한 편의 절실한 '제망매가'를 읽은 기분이더군요. <제망매>에서 망매 '지원'의 이미지도 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암튼 본인의 누이 콤플렉스를 직접 고백한 양반이기도 하니, 책 제목을 차라리 <누이들>로 하지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25 09:54   좋아요 0 | URL
누이컴플렉스는 아마, 김현이 고은의 초기 시를 비평하면서 나온 말인 것으로 기억나는 데요. 님 지적대로, 고종석의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에게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기 보다, 친밀함의 대상에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성적 매력으로도 열려 있지만,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않는, 말하자면 프렌치 키스로 가기 직전의 키스 같다고나 할까요..

트레바리 2011-07-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게 표현하시니 <제망매>의 키스씬이 바로 그랬던 것 같네요..^^ 여사촌이 '아이스크림맛'이 난다고 그러던.. 다시 생각해 보니 '누이컴플렉스'는 고선생 본인이 직접 말한건 아니고, 말씀하신 김현 선생을 인유해서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던 듯 하네요..(선생이 여러 누이들 사이에서 자랐고, '제망매가'를 좋아하면서 '누이'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고, 또 누이같다는 연예인 허영란씨 팬인 것 등을 종합해서요..) 암튼 '누이'에게서 일종의 '久遠의 女像'을 보는건 미당이나 고은이나 고선생이나 비슷하군요..
 
기억의 타작 - 도저한 작가 정신을 위하여, 김병익 비평집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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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의 역사구분은 다분히 과거적이다. 그가 말하는 ‘황금시대’는 이미 사라진 저편의 시대다. 김병익의 <기억의 타작>을 읽으며, 나는 그가 황금시대의 전설과 영웅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회고하는 시대는 내 과거의 흔적들과 겹쳐지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 황금시대를 회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은 분석적 비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슬프고 안타깝다. 
 

슬프고 안타까운 까닭은 황금시대의 영웅들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현과 이청준, 홍성원, 박경리, 그리고 기형도까지. 앞의 세 명은 김병익에게 문학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와 같은 이들이었고, 뒤의 두명 역시 그와 함께 문학의 위의를 함께 누렸던 동시대인이었던 것. 나는 이들의 새로운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살아있는 김병익의 글 역시 앞으로 읽을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슬프다. 교보에서 사서 지하철 구석에서, 술기운으로 더듬더듬 읽으며, 문득문득, 서글퍼진 것도 그 때문. 
 

다음과 같은 기형도에 대한 김현의 글 ;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 없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할 힘일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명민한 글쟁이들이 다 사라지고 없을 때, 내 젊음의 한때를 장악했던 글쟁이들이 사라지고 없을때, 나는 과연 무엇을 읽어 살아갈만한 힘을 얻을 것인가.
 

<기억의 타작>에 실린 김병익의 글들은, 그래서, 축축하다. 그 축축함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늙음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김병익이 늙었다는 것만이 아니라(그는 1938년 생, 현재 70세가 넘었다), 늙어서 사람의 살림살이에 대해 더 넉넉하고 이해충만한 시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박완서에게 “원숙한 세계인식과 중후한 감수성, 이것들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을 말할 때, 그의 눈은 부드럽게 열려 있다. 나는 이 부드러움과 열림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
 

그의 문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문지적 자유주의를 이루는 뼈대다. “진보주의에 대한 이같은 조건적 수용태도가 문지동인들의 이념적 한계이지만 동시에 지적인 신중성이 될 것이고 태도에서는 보수주의이지만 정신에서는 개방적 진보주의를 이루고 있었으며 과격주의의 이념을 회피하면서 실제적 진보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같은 진술은 문지의 네명 중 바로, 김병익 자신을 겨냥한 것이다. 그것은 김병익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지적 자유주의가 보여주는 포용력의 깊이와 넓이다. 이만한 자유주의, 알다시피, 찾을 수 없고, 보기 어렵다. 그의 자유주의가 한국의 주류 자유주의가 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다. 
 

나는 그가 <들린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열림과 일굼>으로, <전망을 위한 성찰>을 해내며 <숨은 진실과 문학>을 캐고, <부드러움의 힘>을 신뢰했던 비평가로 기억하고 읽는다. 백낙청의 글은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어도, 마음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와 줄담배와 낮은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의 풍모는 글에서도 약여하다. 대입고사를 치르기 위해 상경했던 내 가방 속에서 김병익의 <전망을 위한 성찰>이 있었다. 그 뒤로도, 그는, 나 혼자만의, 그 몰래, 마음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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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1-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간혹 들춰보는 비평집이 김병익의 책인데요.
님처럼 많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문학의 중요한 정신이라 생각해서 그의 비평을 읽었답니다.
개인적으론 김주연의 비평을 더 좋아하구요.
 
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엠비시대가 되면서 내가 새삼 알게 된 최대의 지적 즐거움 중 두가지는 이준구 교수와 이상돈 교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일 터이다. 이준구 교수의 정밀한 경제학적 논리를 발견한 것, 그리고 이상돈을 통해 김일영 이후 가장 탄탄한 보수의 논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나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준구의 이 책은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외에 따로 쓰여진 행태경제학에 관한 책. 대학시절 경제원론이나 미시경제학을 배우면서 뜨악했던 “시장에서 합리적 행위를 한다고 가정할 때”, “완전경쟁시장이라고 가정할 때”의 그 가정에 내가 왜 동의하지 못했던가를 그는 요령있게 설명해낸다. 일종의 행태경제학 입문서인 셈인데, 내게는 경제학의 후진성을 새삼 발견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진성이란 다름아닌 경제행위를 해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되뇌이던 우연성, 돌발성, 비합리성과 같은 ‘삶의 논리’를 경제학은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던 것. 베트콩 한명을 죽이는데 드는 비용계산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경제학을 ‘계산’하는데 바빴던 60년대 미국경제학자들의 ‘차가운 가슴’에 대한 정운영의 비아냥이 생각나는 대목. 경제학적으로 계산되지 않는 전쟁에서 온몸을 기투하는 베트남 민중의 저항을 미국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계산’할 수 있었으랴. 행태경제학의 개념들 중 기억나는 것, 휴리스틱(heuristic), 그는 ‘주먹구구’로 번역하고 있는데, 과연, 주식시장을 보건대 주먹구구란 얼마나 생산적인가. 경제학은 수학에서 이제 심리학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유쾌하고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은 책. 그리고 경제학자의 문장이 이렇게 탄탄하고 쉽고 재미있을 수 있구나하는 새삼스런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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