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 남편은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며 죽음의 천사에게 그녀가 ‘한 시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천사는 그녀에게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사람은 평생 “죽음이 인간에게 허용된 가장 소망스러운 상태”라고 떠들어온 철학자. 죽음이 최선이라고 말해왔던 이 철학자는 그러나,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떼어 주기를 거절한다. 병이 들어 곧 죽어갈 남자도, 백살이 된 노파도, 곧 교수형을 당할 사형수도, 애인과 함께 죽고 싶다던 여자도 모두 ‘한 시간’을 거부한다. 모든 이들로부터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주기를 거절당한 죽음의 천사는 오직 한 사람, 맨 처음의 사내 곧, 남편만이 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죽겠노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죽음의 천사는 그의 소망을 배반하고 사내의 생명을 데려가지 않는다. 사내는 “당신은 왜 나를 속였습니까?”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죽음의 천사는, “너는 네 입으로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게 너의 진심이라고 믿었단 말이냐, 네가 빠져 있는 모든 사랑,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 이런 것을 단숨에 꿰뚫어서, 그 뒤편에 숨어 있는 네 영혼의 깊고 깊은 곳, 너의 진정한 소망이 숨겨져 있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아니 그런 능력이 인간인 너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사랑의 묘약>, 아쉽게도 절판이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집 <사랑의 묘약>에 수록된 ‘한 시간만 더’는 이렇듯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을 배반하는지를 보여주는 깔끔한 우화다. 프로이드가 왜 슈니츨러의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소설이다. 프로이드는 슈니츨러에게 “저는 평소 작가들을 찬미해왔는데, 이젠 그들을 시샘하지 않을 수 없군요”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슈니츨러는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 활동한 세기말의 천재들 중 하나. (슈니츨러를 비롯해 프로이드, 코코슈카, 클림트, 쇤베르크 등으로 대표되는 세기말 비엔나의 천재들의 활약상은 칼 쇼르스케의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 노을>(생각의 나무)에서 현저하다. 지난 여름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2장 링슈트라세와 도시적 모더니즘에 멈춰 있으니, 이 책을 선물해준 모씨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 지난 한 주 동안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문학과 지성사),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을 읽으면서 세기말 비엔나의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산책하며 ‘말 속에 숨은 말’을 더듬었다. 


<꿈의 노벨레>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나온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eyes wide shut>의 원작소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점에 갔을 때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은데 그냥 나오기가 섭섭할 때 곧잘 손에 드는 시리즈가 문학과 지성사의 ‘문지스펙트럼’이다. 이 시리즈는 적당한 가격과 예쁜 장정, 그리고 컬렉션의 질도 괜찮다. 이중 외국소설 시리즈는 인문서의 레퍼런스용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에드가 알란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아마 라캉의 <에크리> 때문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발자크의 <사라진느>는 롤랑 바르트의 <S/Z> 때문에 포함된 것 같다. 슈니츨러는 아마도 프로이드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물론 모든 목록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이런 짐작이 맞다면 지극히 문지스러운(?) 선택인 셈이다. 하여간,<꿈의 노벨레>는 세기말 비엔나의 밤거리, 검은 옷자락과 함께 선명히 대비되는 빨간색, 가면무도회, 경쾌하고 밝은 왈츠,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무의식, 커피향이 풍기는 안락하고도 음울한 카페 등의 소품들로 인해 마치 한편의 느와르(noir)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설은 비엔나의 한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딸은 동화책을 읽고 있고, 부모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대견한 듯 딸을 바라보는 거실. 동화책 읽기를 마친 딸은 보모의 손에 이끌려 자러 가고 부부는 어젯밤 그들이 참석했던 가면무도회 이야기를 꺼낸다. 가면무도회는 꼭꼭 감추어져 있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부르주아 가정의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 욕망이 활개 치는 자리다. 이 부부는 가면무도회에서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겼던 ‘위험한 순간’을 토로하고, 뒤이어 각각 다른 이에게 욕망을 느꼈던 과거의 경험을 풀어 놓는다.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가장 명징하고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을 칙칙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 남편 프리돌린은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의사, 아내 알베르티네는 “천사와 같은 눈빛에 가정 주부의 모성과 자태”가 흘러넘치는 인물. 그러나, 이 평온한 부부는 덴마크를 여행했을 때, 호텔 계단에서 스친 사내에게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하거나, 해변 탈의실에서 만난 나체 소녀의 눈빛과 마주친 뒤 “민절(悶絶)해서 쓰러질 뻔”한 경험을 감추고 있었다. 부부는 그런 욕망의 경험을 서로에게 털어놓은 뒤 “지금부터 그런 일이 있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도록 해요”라고 서로 약속한다. 하지만, 남편은 반문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

소설은 상당부분은 남편 프리돌린의 ‘욕망의 모험’으로 이뤄져 있다. 약혼을 앞둔 마리아네는 죽은 아버지를 사망진단을 위해 방문한 의사 프리돌린에게 돌연 눈물의 애정고백을 한다. : “당신이 여기에 다시 못 오신다 해도 당신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해도, 저는 당신 곁에 살고 싶어요.” 프리돌린은 사창가에서 만난 소녀가 섹스를 거부하자 마치 양가집 규수에게 하듯 구애를 하나 결국 거절당한다. 그리고는 가면을 쓴 채 에로틱한 누드쇼를 관람하는 비밀클럽에 몰래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나지만 또다른 가면의 여인에 의해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난다. 다음날 그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만나려던 여인은 찾지 못하고 그러지 말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그는 비밀클럽에서 자신을 구해준 여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소설은 프리돌린의 모험을 마치 스릴러 영화처럼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음울한 비엔나의 밤거리와 함께 비주얼하게 보여준다. 검은 색과 빨간 색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이미지들.

남편 프리돌린과 달리 아내 알베르티네의 모험은 “꿈”이다. 꿈 속에서 그녀는 나체로 사내들에게 에워쌓여 있고, 남편 프리돌린은 사슬에 묶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프리돌린은 아내가 벌거벗은 사내들과 있는 동안 여왕으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이를 거부해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알베르티네의 꿈 속에서 욕망의 대상(나체의 사내들)과 현실적(사회적) 대상(남편 프리돌린)은 분리되어 있다. 반면, 프리돌린에게 욕망과 현실은 알베르티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그는 아내 앞에서 여왕의 청혼을 거절한다.) 알베르티네에게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의 세계일 뿐이고, 남편 프리돌린에게는 현실속에서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욕망은 자신이 처한 부르주아적 일상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니 프리돌린의 선택은? : “이 모든 질서,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거짓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금 들었다. ... 일종의 이중적 삶을 사는 거야. 믿음직스럽고 앞날이 창창한 유능한 의사, 성실한 남편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난봉꾼으로, 호색한으로,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냉소주의로 사는  거야.”  손쉬운 해결책이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리돌린은 침대의 알베르티네 옆자리에서 자신이 쓰고 다녔던 가면을 발견한다. 현실의 자신과 욕망의 자신, 의식과 무의식, 내면과 외면이 전면적으로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욕망의 모험을 아내에게 모두 털어 놓고 말한다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알베르티네의 대답 :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 겠지요. 그 모든 모험으로부터 우린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 현실에서의 모험, 그리고 꿈속에서의 모험,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당신도 정말 그걸 확신하오?” “네 확신해요, 하룻밤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니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조차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돌린은 ‘꿈’에서 영원히 깨어났다고 말하려 하지만, 알베르티네가 속삭인다 :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아이즈와이드셧>의 실제 주인공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를 찍은 뒤 이혼했다. 현실은 영화와 소설을 배반한 것, 그러니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현실원칙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쾌락원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슈니츨러는 세기말 비엔나 상류사회의 부르주아적 가치 뒤에 숨어 있는 욕망과 무의식을 말하고 있지만, 프로이드를 따르자면, 그 시대 그 곳에서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간이 처한 조건이기도 하다. 내면과 외면의 일치, 현실과 쾌락의 일치는 루카치에 따르자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고 갈 수 있었던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리스 서사시 세계에서나 가능했다. “환멸의 낭만주의” 이후,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존재하는 것들은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내면의 진실은 말하자면 일종의 “숨은 신”인 것인데, 그것은 ‘말’로서 나타나고(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가 가진 내면적 경험과 무의식은 두 사람의 ‘말’로서  드러난다.)이고, 욕망의 불일치와 그것의 화해 역시 ‘말’로서 이뤄진다.(프리돌린의 실제적 모험과 알베르티네의 꿈속의 모험은 서로에게 ‘말’해지고, 이로서 둘은 서로의 욕망을 수락하고 화해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라고 할 밖에. 우리는 아직 “말 속에 숨은 말”을 읽고 짐작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하지만, 슈니츨러는 ‘한 시간만 더’에서 그 말조차도 ‘숨은 신’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냉소를 보낸다. 그러니까, 정말로 “꼭 말로 해야 하나?” , 아니 그 말은 도대체 믿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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