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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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최종철 옮김, 민음사)를 다시 읽었다. 이 비극의 출발은 물론 ‘사랑과 질투’이겠지만, 오셀로가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에서 읽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장벽으로 가로놓인 ‘인종’이라는 요소는 탈식민주의적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종엽이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고 누리는 주체의 자리는 남성 일반의 자리가 아니라 일본 남성의 자리가 된다”고 했던 경우다.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본 남성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더 격렬하다. ‘지배자’로서 향유의 자리를 빼앗긴 자의 ‘분노’는 원래 더 큰 법이지 않겠는가.

이야고는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에게 “늙고 검은 숫양이 당신의 흰 암양을 올라타요”라며 분노를 부추긴다. 그 무어인은 “음탕하고 저속한 이방인”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딸이 늙고 검은 숫양과 같은 유색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돌팔이가 파는 부적과 약물로 정신을 잃고 납치”됐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성을 가진 ‘베니스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로데리고가 이야고의 간계를 빌려 오셀로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는 원동력도 질투 이상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백인에게 흑인은 성적 경쟁자로 인식되나 성적으로 압도할 수 없다는 무기력의 대상이다. 그 무기력이 비극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보면, 이들 사내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자리’에 대한 심리적 고뇌와 쟁투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을 꿈꾸거나(로데리고),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거나(오셀로), 본의 아니게 남의 자리에 앉았다고 오해를 받거나(카시오)이다. 오셀로의 자리에 대해서는 인종적 편견과 그로 말미암은 집단적 배타성이 똬리를 틀고 앉아 그가 제대로 앉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인종주의를 벗겨내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 데스데모나다. “아버님은 제 모든 도리의 주인이시고/지금까지 전 아버님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남편이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머님이 외할아버지 앞에서/아버님을 택했을 때 보여주었던 도리/바로 그만큼이 제 주인 무어인의 몫이라고/주장하고 밝히겠습니다. 그러니, 오셀로의 ‘자리’는 원래 없었던 것,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셀로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오셀로가 사랑과 분노라는 감정의 양 극단을 오고가는 것에 비해, 데스데모나는 연인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순간에도 그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순정한 여인이다. 이야고의 ‘지옥의 신학’을 완성하는 것은 그 순정한 사랑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오셀로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사랑의 코드를 일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녀는 제게 고마워했고 이르기를/그녀를 사랑하는 제 친구가 있다면/ 제 얘기를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만으로/그녀에게 구애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그녀를 사랑한 것입니다./이것이 제가 쓴 유일한 마법입니다.”(1막3장)

그의 사랑에 대한 독법은 이렇듯 여인이 자신의 무훈담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만큼 지리멸렬하다. ‘위험’ 때문에 사랑하고, ‘동정’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오셀로의 사랑에 대한 파악은 ‘허구가 만들어낸 산물로서의 사랑’이지만, 데스데모나의 그것은 ‘규범’과 ‘운명’을 넘어서는 실재적인 것이며, ‘가슴’과 ‘마음’, 그리고 몸을 통한 ‘사랑의 의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베니스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필요로 하는, 운명의 여신을 거스르는 고독한 결단의 행위다.

“전 이 무어인을 사랑했고, 함께 살 것임을/제가 철저하게 규범을 깨뜨리고/운명의 여신을 조롱한 사실로/온세상에 알립니다. 제 가슴은 주인님께/최대의 기쁨을 드릴만큼 정복되었습니다./전 오셀로의 얼굴을 그의 마음에서 보았고/그의 명성과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였습니다/그런데, 의원님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저는 한가로운 나방처럼 뒤처져 남는다면/전 그와 나눌 사랑의 의식을 빼앗기고/뼈아픈 그의 부재로 어려운 시간을/견뎌야할 것입니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1막 3장)

“... 내가 사고과정이나 실제 행동에서/내 의지로 그이의 사랑을 어긴 적이 있다면,/내 눈이나 귀 또는 다른 어떤 감각이/다른 어떤 모습에서 즐거움을 취했다면/그리고 (그이가 날 떨쳐버리고 이혼하여/거지 신세가 되더라도) 언제나 그이를/이전에도 앞으로도 깊이 사랑 않는다면/나에겐 아무런 안락도 없으리라/무정함은 커다란 타격이 될 수 있고/그이의 무정함은 내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내 사랑은 절대로 더럽히지 못할 거야.”(4막2장)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일면적 이해는 ‘손수건’ 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죽음과 살인에 이르게 된다. 손수건이 “예언자의 광기”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오셀로는 그것을 자신의 자리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물건으로 받아들인다. 애시당초 마음을 읽지 못했으므로 데스데모나의 운명적 결단과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의 결속력을 손수건 하나에 가탁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급기야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아름다운 베니스여인과 결혼한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의 사랑과 질투이야기가 아니라, 남성성의 폭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어야 마땅할 일이다.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홀로 저 혼자 도깨비춤을 추다 자신도 연인도 망쳐버리는 폭력성 말이다. 스스로 초래한 일이니 “비참한 내 운명”은 데스데모나의 것이 아니라, 오셀로의 것이다.

“누가 자기 운명을 다스릴 있답니까?/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무기를 가졌다고 겁내진 마십시오./여기가 제 여정의 끝이고 목표이며/가장 먼 항해의 바로 그 표적이랍니다. /움츠리며 물러서요? 쓸데없는 두려움일 뿐입니다./오셀로의 가슴을 갈대로 찔러봐요./그는 물러갑니다. 오셀로는 어디로 가야지요?/그런데 넌 지금 어떤 모습이냐? 오 불운한 것,/ 네 속옷처럼 창백하구나. 이런 모습 때문에/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 둘이 만난다면/내 영혼은 천국에서 곤두박질칠 것이고/악마들이 가로채갈 것이다. 네 정절만큼이나/차디찬 내 님아. 오 저주받을 노예 놈!/악마들아 나를 쫓아내거라, /이 거룩한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도록,/나를 바람속에 팽개치고 유황불에 태우고/불타는 심연 속에 깊이깊이 처 넣어라!/오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가 죽었다./ 오 오 오.”  

 

과연 그는 ‘불타는 심연’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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