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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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프리모 레비가 쓴 장편소설이다. 그의 다른 책들은 일종의 수기(手記)라 할 만한 것인데, 이 책은 그중 드문 소설이다. 단테를 애독하는 화학자인 그는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탈리아 유태인으로, 반파시즘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책들은 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들이다. 서경식 선생의 책을 통해 그를 알게 된 이후 이 책을 포함해 세권을 읽었다.  이 책은 그중 가장 무겁지 않은(?) 책이다. 사람이 가진 잔학성의 끝간 데를 보여주는 레비의 다른 책들에 비해 조금 가볍다 싶을 정도로 잘 읽힌다. 아마 소설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멘델이 빨치산 부대를 찾아가는 과정, 빨치산 주둔지에서의 생활, 몇 번의 전투, 그리고 2차대전의 종전과 이탈리아로의 귀환과정을 다루고 있다. 빨치산 소설이기는 해도 나치와의 전투과정이나 냉혹한 빨치산 전사의 투쟁 같은 것이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파시즘이 지배하는 유럽 하늘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 유태인들의 생존방식이 오히려 또렷하다. 당시의 유럽 빨치산은 종류도 유형도 가지가지여서 유태인만으로 구성된 빨치산 부대가 있는가 하면, 러시아 빨치산, 폴란드 빨치산도 있고, 여러 국가와 인종들로 구성된 혼합 빨치산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처럼 지리산 언저리에 고립된 채 존재했던 빨치산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 빨치산들은 그렇게 모여 서로 사랑도 하고, 기아선상에서 헤매기도 하고, 축제를 벌이기도 하고, 때로 전투와 죽음을 겪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이태(본명은 이우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의 <남부군>을 떠올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전에 이병주의 <지리산>이 있었고, <지리산> 이전에 남부군 전사였던 이태와 박현채 선생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병주의 지리산은 이태의 구술에 빚을 졌고, 조정래의 소설은 박현채의 회고에 빚을 졌다. 빨치산 출신인 이태는 김영삼의 민주산악회에 들어가 보수 정치에 몸을 담았고, 박현채 선생은 재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살다가 죽었다. 이태의 삶이야 보수 반공주의가 득세하는 한국사회에서 그가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현채 선생은 조정래가 그의 소설에서 그려낸 것처럼 소년 전사 ‘조원제’의 나머지 삶을 오롯하고 충실하게 살았다.

빨치산 소년 전사인 박현채 선생에 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중부경찰서 앞의 연구실에서 책 더미를 쌓아두고 원고를 쓰던 그의 모습과 그 형형한 눈빛이 기억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영 훈련소 화장실에서 새벽에 몰래 담배를 피다 보게 된 신문 쪼가리에서 선생의 부음기사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건장한 체구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를 침을 튀기며 까대던 그의 기개는 사라지고 오랜 암 투병생활로 흉하게 마른 선생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빨치산과 아우슈비츠 이후 프리모 레비의 삶은 박현채 선생의 길과 달랐다. 마르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박현채 선생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한국 사회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마련하는 길로 나아갔고, 레비는 그의 과거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으로 삶을 다 했다.

이태의 남부군에 등장하는 연희전문 출신 ‘청년 시인’ 김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영은 산에서 내려와 빨치산 정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영등포 시장의 과일 노점상으로 평생 시를 쓰며 살았다. <깃발 없이 가자>(청맥)라는 그의 시집이 나온 것이 1988년이니 이 시인도 아마 유명을 달리했으리라. 레비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난 책 없는 빨치산 배낭은 실탄없는 총이나 조종사 없는 전투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자들은 좋은 세상이 와도 살 자격이 없는 쓰레기들이지. 그리고 책은 읽고 난 다음엔 반드시 덮게. 모든 길은 책 바깥에 있으니까.” 책을 읽는 빨치산과 시를 쓰는 빨치산은 전투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간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고전과 교양 때문 이었다”라고 고백한다. 빨치산 투쟁의 와중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자들은 영혼이 맑은 자들이다.

사랑에 대한 열정도 ‘청춘의 형이상학’이지만, 이념에 대한 열정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레비가 자살을 선택하고, 김영이 익명의 노점상으로 홀로 시를 쓰며 살아간 것(일종의 정치적 자살)은 유사한 선택인 것이다. 김영의 시 한편. “목숨이 백개 있어도 모자라는 싸움/매일 몇 번이고 죽음의 고개를 넘었다./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던 아들도 죽고/동생의 한을 푼다던 누나도 갔다./쌍치면 피재 한의 능선/수천의 탄환 중에 하나가 흰나리의/가슴을 뚫고 지나갔는데/나는 비껴서 무사한지 알 수 없다./억새풀 우거진 영마루에 강성구의 시신을 버리고/잡목 무성한 골짜기에 노병서의 묘비를 세웠다./죽어서 깃발로 펄럭이는 흰나리/삶을 넘어 죽음을 지나/용하게도 총알은 나를 피해갔건만/목숨이 백 개 있어도 모자라는 싸움에서/살아남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인 것을.”(김영, 사선)

유태인으로서 레비의 인식은 시온주의자들의 그것과는 한결 다르다. 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키에프 강경파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나치와 모종의 거래 조건으로 서민층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가 하면, 자기네들의 신성한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한다고 유태인 이민자 252명을 태운 배를 하이파 항에서 폭파시켜 버렸다네.”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포위된 요새론일 것이다. 적에게 공격받고 있는 포위된 요새 안에서는 다른 목소리, 다른 주장은 억압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다. 레비는 빨치산 대장 율리빈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자민족 약자들을 무시하고 학살하는 시오니스트들에게 타민족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 없겠지. 그들에겐 오직, 어쩌면 나치보다도 더 잔인한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가 깊이 뿌리박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동질성에 기반한 모든 집단주의의 망령은 이렇듯 흉물스럽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태인 빨치산들이 팔레스타인을 택하지 않고 이탈리아를 택하는 이유도 이 나라가 가진 개방성과 자유로움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 자신이 이탈리아 인이어서였을까. 하여간 이탈리아는 로마 가톨릭이 유태인들을 고리대금업자라고 경멸했을 때나 무솔리니 치하의 인종차별법 하에서도 유태인 학살이 한번도 없었다. 이탈리아는 “이방인은 적이 아니고, 법의 준수보다는 시민의 불복종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새삼 이탈리아를 달리 보게 된다. 그래서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렇게 뿌리 깊은 생명력을 유지하고, 마피아가 고향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발견이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 유태인 수용소를 찾아간 빨치산들이 대량학살에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유태인들을 만나는 장면. 이들은 총이 무서워 동료 유태인들에게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레비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라고 묻는다. 여자 빨치산인 라인은 “내가 살기 위해 당신 가슴에 총을 쏘아도 괜찮다는 얘긴가요? ... 왜냐하면 인간은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니까요. 그런데, 저 포로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 그런 생각을 모조리 유보해 버린 거예요! 무뇌아나 짐승이 됐단 말예요”라고 말한다. 인간이 다름아닌 호모사피엔스임을 말하는 이 대목은 이 책 전체의 주제를 집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랑신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고 말한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서의 운명애(amor fati)와 그럼에도 끝까지 호모사피엔스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 레비가 그의 온 생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는 총살되기 직전 나치에게 허용 받은 30분 동안 써내려간 시의 한 대목이다. 3연으로 된 이 시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이 길이 아니라면 어쩌란 말인가?/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ps. 눈 덮인 러시아 평원에서 본 자작나무가 인상적이었는데,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사람들에게 자작나무는 아주 유용한 삶의 도구였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  


“특히 시베리아의 광활한 설원에 눈보라에 맞서 쭉쭉 솟아있는 자작나무에 대한 관심이 깊었지요. 잘 아시다시피 자작나무는 기름덩어리라 추위에도 거뜬하고 우리 빨치산들로서는 횃불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지 않습니까. 불에 잘 타니까 땔감으로도 안성맞춤이구요. 또 얇은 껍질들을 벗겨 편지쓰기에도 좋지요.”
“편지도 써요?”
“그럼요. 아주 옛날엔 두루마리 대신 성경이나 코란, 토라, 탈무드 같은 것들을 기록했는데, 수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니까 그만이지요.”
“말하자면 천연방부제인 셈이군요.”
“그리고 천연생수이기도 하죠.”
“천연생수요?”
“어, 아직 그 기막힌 맛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요. 나무에 구멍을 뚫으면 수액이 나오는데, 아주 달짝지근해요. 무병장수제로 통하지요. 그리고 그 자작나무가 죽으면 버섯이 자라는데, 그게 또 암치료에 특효약이지요.”
“허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군요.”
“물론이지요. 게다가 술꾼들이 최고의 술로 꼽는 순도 높은 보드카도 바로 마지막 제조공정으로 자작나무 숯에 걸러낸 술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를 매혹시킨 건 그런 실용성에 앞서 자작나무 자체가 갖는 순도 높은 미학이지요. 혹한의 눈보라에도 아랑곳 없이 하늘을 향해 아득하게 솟구친 그 수직의 염결성이 나를 숨막히게 하지요. 내가 죽으면 인디언들이 이름을 붙인 그 ‘서 있는 키 큰 형제들’ 아래에 묻히고 싶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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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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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나오는 소설들은 잘 읽지 않는다. 굵직한 서사의 맛도 묘사의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고 왜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게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자연의 소멸’이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이른 후기 자본주의에서 ‘근대의 서사시’(프랑코 모레티)인 소설은 그저 쇄말적인 소재에나 매달리는 영락한 예술형식이 된 모양이다. 소설은 자본주의의 활력과 전근대의 낭만이 공존하던 시대를 다룰 때 가장 빛나는 예술이 된다. 서구의 19세기가 그렇고 한국의 70년대가 그렇다. 최인호, 황석영, 윤흥길, 김원일, 서정인 등 이른바 70년대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들이 그 시대에 가장 좋은 소설들을 펴낸 것도 이런 사정이다. 공장굴뚝으로 대변되는 산업화의 활기가 존재하면서도 노동자의 설움과 비애가 흘러나오고, 소박한 농촌 정서가 살아 있으면서도 이농현상이 극심했던 시기가 바로 70년대다. 역사적 변동기의 활력이야말로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일 것이다.

소설이 읽기 싫어질 때, 육중한 서사의 힘을 느끼고 싶을 때면 나는 플로베르, 발자크, 제인 오스틴, 스탕달을 읽는다. 이들의 고전은 결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다 읽고 난 뒤의 뿌듯함과 충만감도 여전하다.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형식주의적 ‘장난’이나 모더니즘 소설이 가진 뒤틀림이 없이 가장 정통적인 방법으로 소설의 진경을 보여준다. 내 보수적 독서관습도 이런 19세기 작가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저항하고 순응하면서 야심만만하게 성공에 도전하다가 좌절한다. 이들이 패배 후 돌아가는 곳은 그래도 남아 있는 순정하고 때 묻지 않은 공간,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이다. 거기는 사랑이거나 신뢰, 인간적 연대가 살아 있는 곳이다. 책읽기가 어수선해지고 소설의 본령이 그리울 때 펼쳐드는 작가들의 목록에 한사람 더 추가해야겠다. 그 이름은 찰스 디킨스다.

이틀 동안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인규 옮김, 민음사)를 푹 빠져 읽었다. 디킨스 소설이야 어릴 때 몇 권을 읽었지만 이 소설은 읽지 않았었다. 우리 집에 있던 문학전집에도 이 소설이 있었지만, 그 왜 있잖은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책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울고 웃었던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소설 따위 보면서 눈물 찔끔거리는 것은 주책스러운 일이나 나는 기꺼이 눈물 몇 방울을 바쳐줬다. 아마 디킨스 소설의 애독자들은 이미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알고 있었을 텐데, 뒤늦게나마 이 사람의 글 솜씨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무감하다고 느껴질 때 펴들 수 있는 책이 한권 늘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요즘의 시각으로는 ‘막장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핍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연은 얽히고설켜 “알고 보니 내가 니 애비였다”는 식의 우연이 남발된다. 그럼에도 그게 크게 거슬리지 않는 까닭은 각 인물들을 보여주는 디킨스의 묘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번역 소설’ 가운데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이토록 흥미롭고 유쾌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드물다. 특히, ‘조연급’들에 대한 묘사는 아주 사실적으로 재현된 시대극의 인물을 보는 듯한 인상이다. 핍의 매부인 선한 대장장이 조, 그의 아내이자 핍의 누나인 풍채 좋고 성격 괄괄한 조 가저리 부인, 시골 소읍의 위선적 인물인 펌블추크와 선량한 윕슬, 런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원 웨믹 등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그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디킨스가 왜 대가인지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인 ‘웨믹’이다. 그는 사무실이 있는 해머스미스와 주거지인 월워스를 오고 가는데, 사무실에서의 그는 냉정하고 차갑게 사무를 처리하고 철저하게 돈을 계산하는 인물인 반면, 자신의 집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착한 아들이자 인간미 넘치는 친구다. “(런던의 사무실로) 가는 동안 웨믹은 차츰차츰 메마르고 딱딱해져 갔으며, 그의 입은 다시 꽉 다물어져서 우체통 구멍처럼 되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가 그의 근무처에 도착하여 그가 상의의 목깃에서 열쇠를 꺼낼 순간이 되었을 때는, 그는 월워스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의 성과 도개교와 정자와 호수와 분수와 노인장 등이 ‘귀청 때리는 놈’의 마지막 발사와 함께 모조리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1권, p.384)

그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런던의 차가운 자본주의적 질서로부터 분리시킬 줄 아는 인물이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직은 식민화되지 않은 안온하고 따스한 공간을 유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근원으로 삼을 줄 안다는 얘기다. 확대하자면 그것은 디킨스가 보여주는 당대 영국 사회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런던과 시골 소읍, 변호사 사무실과 대장간, 착하고 선한 그의 매부와 런던의 속악한 인물들 사이에서 그는 천하고 남루한 하층민과 그들의 삶에 더 곡진한 애정을 보내고 있다. 가령, 도제인 핍을 런던에 데려가면서 돈을 주려는 변호사 제거스에 대해 대장장이 조가 보여주는 태도는 하층계급으로서의 자존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이들 계급의 모습은 자신이 속한 계급과 삶에 대한 자존과 위엄으로 도드라진다.

주인공 핍이 ‘신사’가 될 수 있도록 후원했던 익명의 인물은 늪지대로 도망왔쳐 왔던 죄수 프로비스였다. 핍은 공포에 질려 굶주린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줬고, 그것은 그에게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위안이 된다. 그는 천한 자신이 신사를 남몰래 키우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유형지의 험악한 삶을 견뎌내고 큰 돈을 벌었다. 그의 행위는 영국 사회에 대한 르상티망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지만, 디킨스는 그것이 굶주림에 빠진 자에게 어린아이가 보여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의’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생 복수를 꿈꾸며 차갑고 냉정한 세월을 보낸 미스 해비셤이나 그의 양녀인 에스텔러도 종국에는 그들의 내부에 지울 수 없는 인간애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디킨스는 “사람 잡는 덫을 설치해 놓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초기 자본주의 시기의 런던을 버티게 한 것이 바로 이런 인간성의 연대임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의 조와 비니는 삶에 대한 태도와 타인에게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고결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통해 그런 영혼을 지닌 자들과 만나는 것은 책읽기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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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 나는 중국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인문고전 깊이읽기 4
신봉수 지음 / 한길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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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삶과 사상에 대해 내가 읽은 것은 조나선 스펜서가 쓴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푸른숲)이었다. 스펜서의 <현대중국을 찾아서>(이산)나 <강희제>(이산)와 같은 책에 비해 그의 마오평전은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가 마오를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민주주의’를 잣대로 한 것이었다. 서구식 기준으로 볼 때, 마오는 끔찍한 독재자이자 우상숭배와 같은 전근대적 행태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은 대참사를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스펜서의 마오에 대한 시각은 대장정을 끝낸 1935년 전후로 크게 엇갈린다. 대장정 시기까지 마오는 민중의 지도자였지만, 준이 회의(1935)로 군사지휘권을 획득한 이후 ‘독재자’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혁과 같은 대재앙은 이미 그때부터 예고되었다고 본다.

스펜서의 시각은 마오에 대한 서구의 ‘표준적 이해’ 방식인 듯 하다. 그들로서는 한 개인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나 수 천만 명이 굶어죽은 대약진운동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일 뿐이다. 그 시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고수할 때 과거의 중국도, 현재의 중국도 제대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에서 끈질기게 ‘중국붕괴론’ 같은 것이 살아남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중국붕괴론을 한반도까지 연장하면 ‘북한붕괴론’이 된다. 이해가 불가할 때 그들은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과 상관없이 중국은 승승장구하고, 북한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마오쩌둥, 나는 중국의 유토피아를 꿈꾼다>(신봉수 지음, 한길사)가 내심 반가웠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짐작컨대 외국의 사상가나 인물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쓴 책들은 많지 않다. 한길사의 인물평전 시리즈도 독일의 평전시리즈(한길 로로로)를 번역한 것이었고, <닥터노먼 베쑨>으로 유명한 실천문학사의 평전시리즈(역사인물찾기)도 번역서였다. ‘인문고전 깊이읽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한길사의 인물 평전시리즈는 맹자, 프로이트, 부르크하르트, 마오쩌둥 등 네 종류가 최근 나란히 출간되었다. 나로서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에서 벗어난 마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국인 학자의 눈으로 꼭꼭 씹어 삼킨 마오의 모습을 말이다.

베이징대에서 마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마오의 사상으로 본 중국의 근대성’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가 서구적 근대화(후쿠자와의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다.)를 추종하는 길이었다면, 중국은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그 핵심에 마오주의가 있다. 저자는 마오의 사상을 인식론, 실천론, 모순론, 계급론, 민족해방론, 인민주의, 유토피아주의, 중국적 독자성, 근대와 탈근대라는 9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오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이같은 담론들이 바로 중국적 근대와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경로’를 이룬다는 점이다. 마오의 담론은 당대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맥락과 논리를 설명해준다. 담론의, 담론에 의한 중국 근대라고나 할까

하나의 담론, 그것도 한 지도자의 담론은 국가운영의 원리이면서 인민들의 삶을 좌우하는 핵심기제가 된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퀸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은 정치제도를 결정한다”는 말은 마오와 중국의 경우에 그럴 듯하게 들어 맞는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오의 사상이 경험 속에서 길어 올려진 실천적 담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의 추상적 담론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험적 현실과 내부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 담론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상호작용이 그만큼 긴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로 이 경험주의는 불가능한 현실을 창출하려는 정치적 욕망으로 인해 재앙을 빚기도 했다. ‘경험’은 ‘이론’과의 긴장속에서 스스로를 벼리고 풍성하게 만드는 법일텐데, 마오는 때로 과도한 경험주의로, 때로 과도한 추상으로 흔들거린다.

먼저 마오의 인식론. 그가 쓴(썼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정식화한(속류화한?) 변유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사물의 인식가능성, 변화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등 과거 소비에트 변유 교과서에서 반복되었던 주장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마오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식의 주체성’을 유달리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뒤이은 실천론, 모순론 등에서 재차 강조되며 마오주의, 곧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 다음 실천론. 마오는 “인식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식은 수준에 따라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으로 구분되는데, 감성적 인식은 객관세계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이성적 인식은 객관세계의 법칙성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마오는 여기서 실천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그는 행위 주체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객관세계의 조건은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인민대중의 자발적인 의지만 있다면 역사발전의 법칙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객관세계의 조건과 한계를 인간의 의지로 넘어설 수 있다는 ‘만용’에서 마오사상과 중국 근대의 비극은 시작된다. 중국과 북한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주의주의’(voluntarism)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주의주의의 극단적 형태일 것이다.

 

당시 소련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물질적 조건의 개선에 힘을 기울였지만 중국은 마오의 실천론에 입각해 그와 다른 발전경로를 추구했다. 마오의 주의주의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산관계, 이론, 상부구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은 정통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일 것이다. 마오가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열었다면 아마도 이같은 마오적 편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 저자에 의하면 편향이라기 보다 중국 전통사상(가령 공자)이라는 또다른 마오사상의 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오는 공자가 인식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한다고 보고, 이것이 기계적 유물론보다 우월하다고 지적한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의 마오식 변형 ;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객관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규칙을 인식함으로써 세계를 능동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실천론)

저자에 따르면 모순론이야말로 마오사상의 독창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미 중국의 전통사상에는 음양오행설과 같은 모순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전통들이 존재했다. 마오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초에서부터 시작하여 모순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한다. 그는 모순을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 중국혁명의 전략과 전술로 확장된다. 반식민지인 중국의 경우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면 제국과 식민지간의 모순이 주요모순이 되고, 내부의 계급모순은 부차모순이 된다. 또는 제국주의가 중국내 봉건계급, 자산계급과 결탁하여 인민대중을 탄압할 경우 주요 모순은 계급모순이 된다.

중국 현대사는 모순론으로 잘 이해된다. 중국공산당이 1, 2차 국공합작에 참여했던 이유는 주요모순이 제국 대 식민지간의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물러가자 이제 내부의 계급모순이 주요모순이 되어 국공내전에 돌입한다. 중국 공산당이 최종적 승리를 구가한 이후에도 주요 모순은 계급모순으로 계속되는데, 잔존한 봉건세력 및 내부 자산계급과의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오의 시각으로 보자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은 바로 제국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계급모순을 둘러싼 투쟁인 셈이다.

마오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계급인 산업노동자를 혁명의 중심세력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고향 호남성에 가서 작성했던 ‘호남농민 보고서’에서부터 이런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유학파 중국 마르크시스트들이 교조적으로 산업노동자의 우위와 농민계급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마오의 ‘경험주의’로 보건대 혁명의 주체는 농민이었다. (마오는 특히 거주지 없이 떠돌던 유민을 가장 혁명적인 세력으로 꼽는데, 여기에 비밀 폭력조직인 삼합회, 청방 등이 들어가 있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농민계급의 혁명적 성격을 본 마오의 시각은 당시 중국사회의 발전 정도를 볼 때 타당한 것이었다. 남미의 무장 반군들이 마오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마오주의여서가 아니라 농촌에 근거한 농민게릴라라는 특유의 투쟁형태 때문이었으리라.

마오의 민족해방론은 모순론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에게 민족과 계급은 주요모순의 시계열적 변화, 곧 민족-계급-민족-계급의 순환에 따라 중요도가 달리 파악된다. “구국이 계몽을 압도했던 시기”(이택후)인, 1921년 공산당 창당이전에는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이 되는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마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공산당 창당이후에는 계급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파악하게 되고,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등극한다. 사회주의 중국 이후에는 계급모순이 다시 마오의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덩은 마오의 민족모순에 대한 인식이 외국자본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낳았고, 이것이 중국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개방정책은 민족모순이라는 틀을 벗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민족모순의 해소과정은 동시에 계급모순의 심화과정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중국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대외개방적 자본주의(탈민족)는 현재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대국-화평굴기론?)와 결합하여 중국사회를 모순을 매우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낸다.

마오주의의 또다른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인민주의(populism)이다. 그중에서도 농민 중심의 인민주의다. (중국에서 인민주의의 역어는 민수주의(民粹主義)다) 마오는 봉건경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농민 중심의 인민의 의지만 충만하다면 말이다. 마오는 1959년 경제발전에 관한 보고서의 제목을 ‘2년내 영국 추월’이라고 고치면서 사상과 정치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풀어놓고 있다. 그 비밀이 바로 인민의 의지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힘이자 발전의 원동력인 인민. 그것은 반지성 혹은 반엘리트주의로서 문혁 당시의 홍위병의 난동은 이런 배경하에서 가능했다.

원초적 힘으로서 인민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마오의 인민주의는 ‘파시즘’의 논리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중국 전통사상에서 줄곧 강조되는 민본주의(민심은 천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민은 물과 같으며, 각급 지도자들은 물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물을 떠나서는 안되며 물에 순응하고 물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즉, 대중을 질책하면 안되며, 대중은 질책할 수 없는 존재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를 뜻하며, 권력의 원천이 인민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민을 절대화할 때 실상 그것은 반인민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이때의 인민은 지금 여기의 구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중은 옳지만, 민중주의는 글쎄올시다?

중국혁명의 독자성. 마오는 한때의 후원자였던 소련과의 긴장속에서 독자적인 중국혁명의 길을 모색한다. 대장정 시기 다른 지도자들이 코민테른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마오는 '중국적 현실'을 내세우며 자신의 길을 간다. 사회주의 중국 이후에도 흐루시초프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면서(특히 1959년 핵잠수함 관련 갈등) 이른바 평화공존 5개항이라는 외교적 원칙을 천명하는데, 이는 1) 주권과 영토의 상호존중 2) 상호불가침 3) 상호내정 불간섭 4) 평등호혜 5) 평화공존 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주권국가에 대한 불가침 원칙을 뜻하는 ‘절대적 주권’ 개념이 추가되면서 마오의 외교독트린이 완성된다. 덩사오핑하의 중국에서도 이 원칙은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데, 1) 주권을 침해받는 국가가 이에 동의하고 2) 외국의 간섭을 유엔이 승인하고 3) 물리적 수단 이전에 정치외교적 협상이라는 세가지 조건속에서 수정가능하다. 이라크전이나 북핵문제 등 국제분쟁에 대해서 중국이 취하고 있는 태도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저자는 마오 사상이 근대적 성격과 탈근대적 성격 모두를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오가 근대적일 수 있는 이유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오가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으로서 추구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마오의 사회주의는 일종의 근대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왕후이의 말은 매우 적확해 보인다. 그는 마오를 ‘반근대적인 근대성’이라 평가하는데, 마오주의는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주의 근대화 방식에 대한 비판, 곧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오의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추구는 성공적이었을까. 문혁과 같은 사태를 보면 그렇지 않다. 주체의 해방은커녕, 개인숭배와 전근대적 억압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마오는 문혁이 70%는 성공, 30%는 과오라고 말한다.)

분명 근대성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누구의 말대로 ‘복수의 근대성’이 존재할 뿐이다. 서구적 근대를 지향한 일본은 천황제의 발명이라는 일본적 경로를 거친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경로를 밟았다. 우리는?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매우 불행한 경로를 밟았다. 현대의 중국을 서구적 근대의 시각으로 볼때 스펜서와 같은 이해방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실상이라기 보다 자기충족적 예견일 수 있다. 마오는 20세기 전반기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통한 중국적 사회주의를 열었고, 덩샤오핑은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의 중국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도대체, 이 놈의 나라는 자본주의인 것인가, 사회주의인 것인가. 학자들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니 ‘관료적 발전국가’니 하는 평가들을 내놓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평가기준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중국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현존했던 ‘역사’의 잣대(그것도 서구적 기준의)를 갖고 이리저리 평가하는 것은 정말 몽매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중국이라는 이 괴물(‘×’로서의 중국)을 어떻게 평가해야할 것인가.

 

2009년 다보스 포럼에 나온 중국학자는 “1949년에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1979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으나 1989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고, 2009년에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마오는 공자도, 맹자도, 마르크스도, ‘베이징의 아담스미스’도 아닌 그 모든 것의 복합체로서의 마오였다. 모두가 마오를 한물 간 정치가라고 떠드는 마당에 이런 책을 펴내 나같은 문외한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논리와 실천, 담론과 현실, 리더십과 민중, 이른바 ‘중국적’이라는 것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부디 책이 많이 팔려 신봉수 박사 같은 분에게 많은 위안과 보람을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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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이 진화하는 방식 - Copy Connect Cyberspace
임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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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앨빈 토플러의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미래학’으로 분류되는 그의 저술은 대부분 현상기술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어법은 지금 세계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변혁은 불가역적인 대세다, 라는 식이다. 그같은 현상기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과도하게 특권화하는 보수적 전망인 경우가 많다. 유토피아적 전망과 디스토피아적 불안이 뒤섞여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낙관론이다. 이는 애시당초 내가 미래학이라는 접근방법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과학은 자신의 방법론을 통하여 가능한 미래를 예측하는 법이거늘, 이 외에 무슨 다른 미래학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임문영의 <디지털세상이 진화하는 방식>(교보문고)을 하루 만에 짬짬이 뚝딱 읽었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진화방식을 현장에서 길어 올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매끄럽게 정리한 책이다. 그가 취하는 방식도 말하자면 토플러주의다. 한국의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기술’하고 ‘해석’하면서 조만간 도래할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토플러를 싫어하지만 이 책 저자에 대한 애정은 철회(?)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토플러주의를 좋아해야 하나. 아니, 임문영은 '기술'의 변화에 주목하면서도 그 기술의 중심에 놓인 인간,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현상기술적 토플러주의와는 다를 지도 모르겠다.

임문영은 인터넷 세상을 복제와 연결, 개방과 성장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정리한다. 컴퓨터의 복제본능에서 비롯된 인터넷 세상의 무한 복제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네트워크. 열려 있음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공간. 시뮬라크르가 만들어내는 지속적 성장. 그의 설명과 해석은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다.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읽었나 싶은 과학, 사회학, 철학 등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면서 이 요령부득의 세계를 깔끔하고 요령있게 설명해 낸다. 피에르 레비 같은 이분야의 이론가들 책과 다른 것은 디지털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과도한 추상성에서 벗어나 한국적 현실에 바탕을 둔  긴장감 넘치는 서술이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 인터넷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저자는 PC통신 시대를 열었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부터 시작해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ADSL, imbc 등을 두루 거치면서 인터넷 기업의 역사와 부침을 현장에서 몸소 겪었던 인물이다.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귀에 익숙한 모뎀의 ‘찌이익 칙’하는 소리를 회고하고 PC통신 시절의 대화방, 상퀴방, 문퀴방들을 떠올리게 된다. 야후에서 다음, 네이버로 이어지는 인터넷 패권의 이면도 재미있다. 한전과 도로공사, 대한송유관 공사의 망 사업 진출 과정, 골드뱅크의 성공과 몰락 등도 새로운 기억으로 떠오른다. 저자가 당시 바로 그 치열한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적 아이콘이 된 ‘386’은 카페 이름이었다거나 전길남, 이규행, 남궁석, 박현제 등이 인터넷 진화과정에서 했던 역할을 알게 된 것도 가외의 소득이다.(업계 관계자는 다 아는 사실일 것이나, 나에게는 새로운 사실이므로)

저자가 올드미디어의 미래를 논하는 대목은 침몰직전의 타이타닉을 보는 심정이다. 2000년을 전후하여 올드미디어 진영의 언론사들이 닷컴 자회사를 차렸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회사였던 것. <뉴스위크>가 망하고 <FT>가 오프라인 신문사업을 접는 마당에 이들은 기존의 올드미디어를 완강하게 고수한다. 빙하기 공룡이 보여주는 어찌할 수 없는 보수적 생존방식. “달라지지 않으면 미래가 없음에도, 언론사들의 인터넷에 대한 접근방식은 크게 변화가 없다.” 이 대목은 저자가 올드미디어 기업의 한복판에서 겪은 '피로감'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아마 이들 기업이 야심차게 준비하는 변화가 종편 채널일텐데, 뉴미디어의 도전을 또하나의 올드미디어를 추가함으로써 돌파하려는 이 무모한 시도는 자신들의 종말을 재촉하는 무덤이 될 것이다.

디지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커뮤니티 육성 전략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요리사이거나 경찰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원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놀판을 닦아주며 배려하는 것. 일방적 공급자여서는 망한다. 네티즌 무서워할 줄 알라는 이 전언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아주 절실한 대목이다. 결국 공공부문이 주력해야할 것도 규제와 통제가 아니라 그런 ‘판’을 통한 인터넷 거버넌스의 구축이 아닐 것인가. 물론, ‘인터넷 공포’에 벌벌 떠는 관료(특히 요즘의 관료들)들이 집단서식하는 마당에 이는 가당치도 않은 기대일 것이다.

스마트폰의 미래에 대한 설명 ; 스마트폰은 1) 장소의 편의성 2) 강력한 개인성 3) 위치라는 좌표값의 추가 등의 서비스가 가능해졌으며 앞으로는 이동통신의 지배력과 장악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 손 안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 스마트폰으로 흡수되면서 소프트웨어는 앱스토어 시장으로 변화하게 될 것. 디지털 전쟁의 이후 전망 ; 블록전쟁의 도래(애플등의 디바이스 중심 VS. 구글 등 서비스 중심), 규모의 싸움에서 영리한 싸움으로(대형 포털은 분산화된 서비스로 해체 재구성), 연결의 확장과 심화. 나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었다.

결론은? “창의적 변화야말로 인터넷 시대가 갖추어야할 최고의 핵심역량이다”라는 것. 다소 허망할 수 있으나 결국 창의성일 수밖에 없나 보다. 그런데, 그 창의성은 거대 조직이거나 대학에서 나오는 게 아닌 모양이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 스티브 워즈니악, 제프 베이조스 등 디지털 세상의 주역들은 어째 죄다 ‘차고’에서 시작하고,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스티브 잡스, 앤디 그로브는 죄다 ‘중퇴자’란 말인가. 미국 차고는 널찍하고 한국 차고는 좁아서 그런가. 미국 중퇴자와 달리, 한국 중퇴자는 온갖 비난과 편견에 시달리며 ‘사람’ 취급도 못 받아서 그런가. 한국 인터넷 주역들이 죄다 명문대에 관련학과 졸업자라는 건 참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리 글을 잘 쓰는 건가. 이건 괜한 ‘주례사’가 아니다. 문장은 매끄럽고 깔끔한데다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이다. IT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 건가. IT 전문가가 아니라 글쟁이로서의 임문영을 재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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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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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쉽지 않다. 더위 탓인가.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고종석의 신간 <독고준>(새움)과 이사벨 아옌데의 <에바 루나>(한길사). 아옌데의 소설은 10년도 전에 읽은 것이지만, 부실한 기억 탓에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 책을 구해준 어떤 ‘외로운 사내’에게 남은 복이 있을 진저. 고종석의 책은 영풍에서 ‘신간 사재기’를 하다 덤으로 샀다.  


<독고준>은 소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소설이 일정한 서사를 가진 양식이라고 정의했을 때 말이다. 이렇다할 줄거리 없이 최인훈 소설 속 주인공의 나머지 생을 고종석 식으로 연장, 재현한 것이다. 주인공 독고준은 고종석 자신의 자기투영으로 보인다. ‘회색인’이라는 이념적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이 책에서 숱하게 보이는 ‘교양체험’의 빛깔과 내용도 영락없는 고종석이다. 그러니 이 책은 고종석의 뛰어난 소설(<엘리야의 제야>같은)보다는 저널에 연재했던 글모음들, 가령 <코드훔치기>나 <여자들>과 같은 책들과 가족유사성이 있다. 내러티브의 전개가 주는 흥미가 아니라 고종석의 교양을 따라가면서, 단속적인 일기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 책에 대한 그의 사유를 엿보는 게 재미다.

고종석의 위치는 굳이 구분하자면 중도좌파 쯤 될 것 같다. 서구적 기준으로는 자유주의자일 것이나 한국적 기준에서는 좌파적 사유에 대한 공감과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전폭적 지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좌파에 대한 애정과 경사가 두드러지고, 공산주의를 비롯한 집단적 이념에 대해서는 대단히 냉소적이다. 그러면서도 김현과 복거일에 대한 애정이 표나게 도드라지고 서구, 그것도 유럽 지식인의 동향과 사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애와 집단적 가치에 대한 냉소.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한편의 호감과 싸늘한 평가는 이 책에서도 산견된다. 곳곳에 산재된 그의 시 해석과 감상은 화사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다. 시에 대한 그의 해석과 비평은 넘치고 부족함이 없어 질투가 날 정도다.

고종석은 최인훈의 소설 속 인물 독고준을 빌어, 그리고 독고준의 딸인 문학평론가 독고원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교양과 사유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자기에 대한 말하기(독고준의 일기). 그리고 그 자기에 대한 또 다른 자기의 말하기(아버지 독고준의 일기에 대한 독고원의 주석). 이 의도된 자기분열적 글쓰기는 두 겹의 자기성찰을 꾀한 것이겠지만, 고종석 식의 ‘구라’를 풀기 위한 방법적 장치이리라. 교양체험의 직접적 노출이 주는 적나라함을 감추기 위한 형식적 장치 같은 것.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쁜 소설이거나 읽을만한 게 못되는 건 아니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지식세계에 대한 조망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공감이 안가는 대목도 많다. 복거일에 대한 그의 존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복씨는 자유주의적 신념이 지나쳐 거의 맹목적 수준일 경우가 많다. 김현 보다 뛰어나지만 저평가된 김인환에 대한 높은 평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김인환이 특정 에콜에 속해 있지 않은데다 서울대가 지배하는 평론계에 드문 ‘고대’ 출신이어서 그럴 것이다. 독고준의 딸은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유종호 선생의 제자로 그려지는데, 그것도 좀 뜨악한 설정이다. 고종석은 문학평론가로서의 유종호 선생을 주목한 듯한데, 유선생의 최근 칼럼은 거의 조갑제와 동일한 수준이다. 문학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이 다른 사안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선생의 글은 보여준다. 하기야 고종석은 조중동을 보지 않는다니 동아에 가끔 실리는 유선생 칼럼의 극보수성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고종석이 잡식성 독서를 통해 보여주는 통찰은 그 의외성으로 하여 반짝거린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자가 좌파에 빚진 것이 아니라, 좌파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인식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한국의 좌파는 민주화에 일정하게 기여한 바가 있으나 그것은 기껏해야 모험주의적 극단이거나 지적 마스터베이션을 실천한데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실질적 동력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나온 게 맞다. 전대협이나 사노맹은 민주적 가치를 체현한 집단이기는커녕 자기도취적 행각을 되풀이한 19세기적 집단이었다. 이쯤 되면 고종석의 정치적 위상은 민주당 좌파거나 진보신당 우파 정도 될 것 같다.

덮고 나니 문예중앙에 실린 한민선(실존하는 시인인지, 허구의 인물인지 모르겠다)의 시를 평하면서 끄집어낸 ‘감정의 서민’이라는 말이 줄곧 머리에 맴돈다. 부자가 아닌 서민이니 참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서정을 가진 사람이란 얘긴데, 끊임없는 감정의 ‘복지혜택’을 받아야 겨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 것인가. 감정을 국가가 채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친서민 정책이 난무하는 이 세월에도 나같은 감정의 서민은 계속 서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옌데의 <에바 루나>. 마음이 가난한 한 때 아옌데의 풍성한 수다를 읽으며 허기를 달랬었는데, 올 여름에는 그조차도 쉽지 않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조로>, <파울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아옌데 소설은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역사와 신화, 여성과 주술, 인종주의적 다양성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이 남미식 ‘벽화’는 쫀쫀하고 왜소한 요즘 한국소설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아옌데는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이 가진 매혹의 비밀은 무엇일까. 제임슨이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만들어내는 설화적 서사의 매력도 있을 것이고, 인물들의 개성이 펄펄 살아 있는 풍성한 상상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렇지만 이 소설에도 분방하기 그지없는 섹스와 불온한 열정들이 등장한다. 근친 혹은 근친에 가까운 섹스,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사랑과 축축한 욕망.(왜 아옌데 소설에서 섬세하고 애정어린 섹스의 제공자는 항상 아시아나 아랍과 같은 백인 사회의 소수자일까.)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부엔디아' 가문도 그렇지만, 남미소설들에서 보여지는 금기를 슬쩍슬쩍 넘어서고 광기와 정상을 오가는 위반의 열정들이 흥미롭다. 대통령 선거에까지 출마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 같은 소설들. 여성의 엉덩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은 변태적 욕망으로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욕망이자 생의 환희다.

 

확실히 내 취향은 역사적 변동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취향이다. 판타지와 같은 장르소설의 반리얼리즘은 확실히 아니다. 현실과 역사가 부재한 완미한 단편도 그리 탐탁치 않다. 어느 모로 보나 내 독서관습은 아주 보수적인 셈이다. 누군가는 그런 구식 취향을 욕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쌓아온 훈련과 관습이 그러한 것을, 좋아하는 소설만을 읽어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엔 읽을 책도 많은 것을, 그냥 이런 소설들이나 읽으면서 늙어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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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08-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고준을 2/3쯤 읽었는데 모든사이님 리뷰 너무 잘쓰시네요^^ 아직 읽지 않은 대목인 듯하지만 '감정의 서민' 운운했다면 황인숙시인의 시입니다

모든사이 2010-08-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감사함다. 황인숙 시집을 읽고도 기억을 못해냈네요. 고종석의 트릭에 속은 듯..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