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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
김현경 지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사 놓고 책장에 그냥 묻어둔지가 꽤 된 느낌이었는데, 책을 다 읽은 후 펴낸 날짜를 보고는 나의 착각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초판인쇄 2006년 6월 1일. 얼마되지도 않았네? 하긴 작년 10월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으니, 이 책은 북한의 득을 본 것 보다는 아마 실이 더 컸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하튼 한반도 비핵화라는 큰 대전제에 확실한 금을 그어놨으니 온유하고도 느긋한 눈으로 북한을 보기보다 도끼눈 쳐든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그만큼 북한 관련된 일은 부침이 심하다.
북한에 대한 연구자들 사이에 '북한학'이라는 말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가 있다. 흔히 학문으로 인정을 받기위한 연구결과에 있어 기초적인 '자료(Data)'의 존재와 이의 검증이 아주 기본적인 사항인데 북한에 대한 자료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이라 자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어딜가도 북한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당연히 북한에서 자료를 내놓지 않는 폐쇄적인 국가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하니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다. 김정일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등과 같은 설(說)만 판을 칠 때가 많았다. 그런 시기에 비해 지금은 상당부분 서로의 정보들이 공개되고 교류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저자와 같은 북한전문기자들도 시인하는 것처럼 예전에는 정보에 상당히 목말라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아주 가볍게 읽고 싶었던 반면에, 한가지 욕심을 부리자면 기자들의 눈에만 비친 비공식적인 사실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런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었다. 저자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한참 시끄러운 시절에 대학 다닐 때 '의식없는 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가는 돈 버는 셈치고 딱 2년만 일하자고 들어온 MBC, 북한전문기자도 친구가 그만두는 바람에 비어버린 자리 대타로 떼우면서 시작했지만, 1994년 영변 핵시설과 한반도 전쟁위기, 지미 카터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의 개최예정, 이를 10여일 앞둔 시점에 김일성의 사망이라는 일련의 급박한 상황을 거치면서 저자는 남의 손에 전쟁이 운운되는 한반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지? 북한 제대로 알기라는 복잡한 퍼즐게임에 손발을 쑤-욱 담그고 만다.
북한전문기자로서 북한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직업적 유리함에, 남북을 아우르는 균형잡힌 시선, 투박한 남자들보다 훨씬 섬세한 여성의 시선으로 인해, 북한을 다루는 그 딱딱하고 불리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책은 한결 재밋어진다. 북한전문기자로서의 분석과 전망보다는 가슴으로 만나는 얘기들이 더 많다.
예를 들어, 남북간 도로/철도 연결을 두고 북한의 남침로를 열어주었다는 보수인사들의 우려를 현장을 방문해보니 그럴수도 있겠다고 이해해 주면서도, 오히려 북한의 강경보수세력들은 북침로가 열렸다고 남쪽 보수인사의 호들갑보다 더한 북북갈등이 존재함을 담담히 말해주고, 남쪽은 길만 열었지 땅은 주지 않았지만, 북은 땅을 내놓고 군사시설 옮기고, 장전항과 같은 천혜의 최남단 군사항구마저 금강산 관광 때문에 남쪽에 내어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퍼주기보다 북으로부터 퍼오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주저없이 말한다.
(60p) 그렇다면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금강산 연결 육로와 개성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는 북한의 보수 진영과 군부에게 어떤 의미일까? (중략) 남북이 철도도로 연결에 합의했을 때 북한 군부의 위기감은 남쪽 보수 인사들의 걱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늘 같은 '장군님' 명령이라 해도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로 달리면 불과 2시간. 북침 진격로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우회로도 없는 데다 공군력에서도 열세인 만큼 북한 군부의 고민은 더욱 컸다. 서부전선의 군사 작전 계획을 변경하고 포 진지를 이동한 뒤에야 어렵사리 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
(62p)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해상 호텔과 해상 골프연습장. 해수욕장과 횟집 등이 들어서 있는 장전항은 북한의 최전방 천혜의 군사항이다. 한 퇴역 군인은 과거 정보부대가 가장 갖고 싶어했던 정보 중 하나가 장전항 사진이라고 했다. 그런 장전항에 남쪽의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중략) 최전방 군사항을 내준 북한 해군의 속은 얼마나 쓰렸겠는가? (중략) 앞으로는 내륙 쪽 내금강까지 개방하기로 했으니 북쪽 군부의 걱정은 늘어가고 있다. 남쪽에서 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69p) 우리가 북한에 퍼주는 돈은 눈에 보이지만 남북관계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략) 핵문제나 남북관계로 인해 북한만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는 주장은 분명 착각이다. 북한의 한 해 예산은 삼성전자의 1/4분기 매출 정도이다. 이렇게 엄청난 경제규모의 차이로 볼 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안정으로 우리가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는 북한이 얻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되로 주고 말로 퍼오는 격이다.
(202p) 2000년 8월, 평양 2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다시 만난 그는 전금진이라는 본명으로 회담에 나왔다. 그는 베이징의 4성급 호텔 일반실이 아닌 북한 최고의 고려호텔 스위트룸에 묵으며 회담을 지휘했다. 대동강 유람선상에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1998년 회담을 진솔하게 회고했다.
"내 그때 조국으로 돌아가며 피눈물을 흘렸소. 남북대화 30년에 회담 탁자를 치며 고함을 치긴 그때가 처음이었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슬프고 분하게 했을까? 판문점에서 국회의장들과도 자신만만하게 회담하던 그는 굶주린 주민들을 대표해 베이징에 나와 비료를 얻기 위해 10여일이나 회담에 매달렸다. 회유도 해보고 소리도 쳐봤지만 그도, 그의 조국도 힘은 없었다. 받고자 하는 것은 많았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패장이 돼 빈손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서 그는 없는 자의 설움을 통감했으리라.
서글픈 회상도 잠시, 그는 웃는 낯으로 남쪽 인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S선생이 가장 악질이었소. 그때 다 될 뻔했는데 거기서 트는 바람에 안 된 거요. 그런데 이제 다시 마주앉아 이렇게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
그런 살아있는 뒷얘기들을 듣다보면, 결국 일이라는 것이 다 사람들이 하는 것인걸 하는 단순한 결론에 이른다. 험한 얘기들이 오가던 남북간 대화나 시시때때로 부침이 심했던 남북간의 상황은 저자의 말대로 뒤돌아보면 분명히 어렵고 험한 산길을 함께 꽤 많이 오른 셈이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소떼방북으로 시작된 세기의 이벤트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고, 서해안에서 해전이 일어나고 핵실험이 있어도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니 쌍방의 신뢰만 지켜지면 앞으로 더 나은 일들이 많을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은 그런 희망을 얘기하고 그런 꿈을 꾸는데 가볍게 접근하는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