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개막 전 롯데 자이언츠의 가장 큰 고민은 '3번 타자'였다.
'트리플 크라운' 이대호와 '검은 갈매기' 펠릭스 호세로 이어지는 4,5번은 믿음직스럽지만 정교한 타격으로 이대호와 호세를 보좌할 선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상무에서 제대한 좌타 외야수 이인구와 1번 타자 못지않은 도루 능력을 갖춘 김주찬 등이 물망에 올랐고, 호세를 3번으로 올리고 '공수 겸장 포수'로 부쩍 성장한 강민호를 5번에 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개막 한 달이 다가오는 지금, 3번 타자는 더는 롯데의 고민이 아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장 내야수 박현승이 그 자리를 완벽히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거인 군단'의 평범한 선수, 박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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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13년차 박현승은 그동안 별로 내세울 만한 특징이 없는 평범한 선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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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 |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롯데는 유난히 사연이 특별한 선수들이 많은 팀이다.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챙겼던 '무쇠팔' 최동원과 7차전 극적인 홈런 한 방으로 '반전 드라마'를 쓴 유두열부터 10대의 나이로 완벽한 투구를 펼치다가 오랜 기간 부상에 시달려야 했던 염종석과 주형광까지.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박동희와 7년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한 임수혁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파란만장한 롯데 선수들 사이에서 박현승은 너무나 평범한 선수다.
1995년 프로에 뛰어든 박현승은 13년째 롯데 유니폼을 입고 '매우 조용히'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경남고와 동아대 시절에는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쳤지만 '엘리트'만 모여 있는 프로 세계에서 박현승은 그다지 돋보이는 선수가 되지 못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폼나게 정장을 입고 개인 타이틀을 수상한 적도 없고, 모두가 감동할 만한 '투혼의 드라마'를 쓴 적도 없다. 입단 3년째였던 1997년에는 타율 .301 19홈런 12도루로 전성기를 보냈지만 3할 타율도, 두 자릿수 홈런도 1997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박현승의 포지션이던 2루수와 3루수 자리에는 '근성의 양대 산맥'이었던 박정태와 공필성이 버티고 있어 박현승은 본의 아니게 '부산 야구의 영웅'과 주전 자리를 다투기도 했다.
2루수와 3루수, 그리고 1루수를 오가며 롯데 내야진의 빈자리를 채웠고, 때로는 젊은 유망주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보냈던 시간이 벌써 13년이다.
박현승은 작년 시즌이 끝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지만 '대어급 선수'가 아니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프로야구 제도의 모순 때문에 'FA 선언'도 하지 못했다.
'폭주' 박현승, 14경기 연속 득점 신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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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승의 초반 활약은 팬들의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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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 | 성적만 보면 크게 대단할 게 없지만 박현승을 '그저 그런 선수'로 취급하는 것은 커다란 실례다.
조금이라도 기량이 떨어지거나 부상을 당하면 가차없이 트레이드나 방출 대상에 오르는 냉정한 프로 세계에서 '정상급 선수'로 분류할 수 없는 박현승이 13년째 한 팀에서 뛰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소리 없이 사직 구장을 지켜 온 박현승이 올해는 드디어 힘차게 소리를 내고 있다. 신명철(삼성 라이온즈)의 이적으로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찬 박현승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3번 타자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2일 경기까지 박현승의 성적은 타율 .350(5위), 최다안타 28개(3위), 출루율 .419(8위).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2할5푼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지 못했던 그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눈부신 활약이다.
중심 타선에 있으면서 타점이 5개 밖에 되지 않지만 박현승의 득점권 타율은 무려 .412(17타수 7안타)나 되기 때문에 이 역시 '옥에 티'라 할 순 없다. 박현승은 득점권에 주자가 있어도 방망이를 짧게 잡고 이대호, 호세에게 찬스를 이어주는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달 11일부터 26일까지 14경기 연속 득점 신기록을 세우면서 득점 부문에서 단독 선두(19점)에 올라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시즌 초반에 기대 이상으로 맹활약했다가 날이 더워지면서 '변신이 풀리는(?)' 선수들은 매년 등장하기 마련이다. 호세를 제외하고 롯데 야수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박현승 역시 시즌 내내 지금의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노장 선수의 '깜짝 활약'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2007년 프로야구를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