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입니다.
매번 이 계절이면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로 힘이나는 계절입니다. 밖에 어느새 피어버린 꽃들처럼 겨우내 숨겨두었던 비밀스런 마법을 펼칠 시간.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입니다. 다만 항상 그렇듯 봄날은 너무 짧습니다. 연녹색 잎을 피우고, 진초록으로 뽐을 내다, 스스로 제 살을 떨어뜨리고 시린 세월을 견디는 삶. 우리네 인생도 그럴까요? 이제 시간이 없다고 하면 제가 너무 조급한 것인가요? 인생의 봄날. 언제까지입니까?

민예총 수업은 들을만 한가요?

매번 나에게 일 벌인다고 그러더만, 이번엔 아줌마가 선수쳤구만요. 인사동은 한국근대에 사대부들과 고관대작들이 살던 가회동 같은 북촌과 청계천 넘어 일본인들의 거주지하고 하야시패가 주름잡던 혼마치, 지금의 명동의 중간지역으로 조선의 물건을 내놓고 흥정하던 지리적 교차점이라 합니다. 이제는 정태춘 노래처럼 때 빼고 광 내면 다 돈되는 물건들이 널린 거리가 되었지만, 그 면면을 내다보면 한국의 근대가 숨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그 재미없는 서양고전을 훑으신다니... 제가 커리큘럼을 뒤져봤더니 정말 재미없어 보이더이다. 하하..

며칠 전 필름을 정리하다 선조의 몽진길을 따라 올랐던 아카데미 답사사진들을 발견했습니다. 사진만 잔뜩 찍었지 정리는 하나도 안해두어 마음 한켠의 짐이었는데, 아직도 별다른 진전이 없어요. 사진들을 보면서 문득 아줌마와 만난지 벌써 10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충동 아카데미를 처음 찾았던 날을 아직 기억합니다. 건물이 어둡고 우중충했던 아카데미. 그게 벌써 10년 전이라니 믿어집니까? 은행잎 날리는 가을 우체국 앞은 아닙니다만 안암동 학교 앞에서 당신을 기다릴 때의 그 느낌은 그 노래말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봉사활동 다니신다는 이유로 나를 바람맞힌 그 날. 나빴습니다. 여하튼 우리인생에 아카데미는 봄날 꽃 같던 시절에, 즐거운 놀이터에 제대로 찾아간 듯한 유쾌한 경험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신과 MH와 보냈던 시간이 존재했던 그 시절이 얼마 살지않은 이 인생에서 참 즐거웠던, 참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MH의 탈선(?)에 인사동에 모여 대책회의하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즐거운 추억이요, 둘이서 나를 놀려대던 그 환상적인 언어의 유희도 내겐 즐거움이었습니다. 언제 셋이 다시 만나 같이 술 한 잔 기울일까요. 그리운 시절입니다.

'지적허영' - 이 말에 담긴 쁘띠적이고 소시민적, 소비적 이미지를 오히려 받아들이고 나니 한결 마음이 더 편합니다. 그렇지 않소?

이건 우리의 영원한 모토이니, 어쩌지는 못할 일이지만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좋은 재능 썩히지 말고 글을 쓰세요. 어찌 알겠습니까? 나중에 형님이 책이라도 내줄지. 내 대학시절에 생각했던 주부들이 내는 책의 모범은 사실 "빵점엄마, 백점일기"였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친구가 알바한다고 함께 찾았던 홍대앞의 'Book' 카페의 주인장이 쓴 책 아닙니까. 사실 책을 내든 안내든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일까마는, 당신의 글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게 쓰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해주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번에 개인적인 일을 경험하면서, 정서라는 것에 큰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성과 지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무게는 믿고 싶지않고 인정하고 싶지않아도 끌리게 되는 마력같은 힘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정서는 개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저변에 깔린 힘이자,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근원입니다. 또한 이제는 그것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리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정서라는 것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제가 고마운 것은, 같이 뭘해도 즐거울 수 있었던 '10년지기 친구'가 되어버린 것. 다 당신과 MH 덕분이라는 생각에 히죽히죽 웃으면서 오늘의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면 MH 불러 올려서라도 날잡고 술한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봄인데, 아.. 뭘 터트리긴 해야 할 봄인데, 아직은 움츠린 개구리마냥 삽니다. 그래도 봄이라 즐겁고 한번씩 당신이 웃겨줘서 즐겁습니다.

요즘에 불현듯 아주 어릴 적 꿈을 꾸었던 내가 살 집. 정확히 얘기하면 한옥을 공부해 볼까합니다. 마당 넓은 곳에 풀들 키울 수 있는 정원에 바람 잘 통하는 한옥이면 됩니다. 아주 늙은이 같은 애였다보니, 어릴 때 집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 것 그리고 있었다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하여간 남들보고 지으라고만 할 수 없으니, 공부를 해볼까 합니다. 책도 몇 권 구입했습니다. 담배도 줄이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도 은단 몇개 입에 넣고 자판 두들기고 있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심한 금단은 아닙니다. 그냥 술마실 때는 몇 대 피지 뭐...하는 편한 생각으로 줄이고 있습니다. 잘 살지요?

더불어 나의 친구들도 잘 살기를 바랍니다. 글도 쓰시길 바라고.
가끔씩 심심해지는 저를 불러 술 한잔 사겠다는 10년지기 친구를 그리워하며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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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wa 2007-05-0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내게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건 어찌 아셨누... 갑자기 관음증 환자가 되어버린 화끈함이... 그리고 자꾸 글쓰라고 그러시는데... 전 아저씨처럼 말랑말랑한 글을 못써서 안돼요... 미사여구를 많이 써야 분량을 늘여서 책을 만드는데 그게 안되잖아요. 근데 궁금하게 하나 있는데 '연녹색 잎을 피우고, 진초록으로 뽐을 내다, 스스로 제 살을 떨어뜨리고 시린 세월을 견디는 삶.' 이런 구절은 어디서 빼겨오는거예요? ㅎㅎㅎ

dalpan 2007-05-0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게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건 어찌 아셨누..." - 내가 모르는게 있나!
"아저씨처럼 말랑말랑한 글을 못써서" - 왕까칠인 제가 말랑말랑해 보이시오?
"미사여구를 많이 써야 분량을 늘여서 책을 만드는데" - 요즘 글자 큰책 많습디다.
"이런 구절은 어디서 빼겨오는거예요?" - 피나는 면벽수련이면 다 되오. MH한테 물어보시구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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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띠...나 며칠째 별보고 들어갑니다. 인제 집에 가야쓰것소. 눈깔이 빠질라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