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대학 졸업 때 남는 시간에 만들어 선물했던 진공관앰프를 먹통이 된 체로 작년에 돌려받기는 했는데, 먼지쌓여 집구석에 처박혀있다 지난 주말에서야 진공관앰프만의 그 은은한 소리를 멋지게 살려냈다. 집에 음악이 흐르지 않으니 그것만큼 또 삭막한게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다 잠원동의 '한사장님'을 찾아냈는데 주말에서야 묵직한 고물 앰프를 들고 아파트 작업실로 찾아갔다. 허리도 아픈데 이눔의 고물덩어리는 왜 이리 무거운지...

한사장님의 아파트 거실에서 수리를 마친 내 앰프로 살려낸 그 은은한 소리! 저음의 Jazz에서 찢어지는 소프라노, 튕겨져 구르는 가야금 소리까지 내 귀에는 완벽했다. 박수! 박수!

누가 이렇게 설계했냐며 한소리 듣고, 이래저래 수리했다는 설명도 듣고, 6개 중에 2개를 러시아산 진공관으로 갈아끼웠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던 순간 또 뭐가 맘에 안들었는지 앰프를 들고 작업실로 가신다. 대충해서 집으로 보내기는 싫으시단다. 또 다시 박수! 박수!
 

= 나의 진공관 앰프 (거친 외형이라 그다지 멋있지는 않지만, 밤에 불끄고 진공관의 붉고 푸른 불기둥과 함께 은은한 소리를 들으라치면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다) =

작업하시는 동안 친한 척을 했다. 이건 내 장끼다. 의도된 장끼가 아니라 내가 사람을 대하는 습관이다. 결국 한사장님은 미국 Texas에서 주재원으로 살았던 시절을 읊었고, 근무했던 회사까지 알아내었는데... 내가 아주 잘 아는 회사였다. 98년에 그만두었다하니 아마도 IMF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사장님'은 수리도 하지만, 직접 진공관앰프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방 하나는 아예 작업실이고, 거실을 비롯해 온 집안이 거의 앰프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젠 은퇴하고 집에서 좋아하는 일로 소일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엔지니어로서의 기질은 다분해 보인 것에 웬지 내 마음은 더 씁쓰레하다. 재능있고 하고싶은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마치 장인같은 중년의 엔지니어를 볼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 이유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40대 중반 넘어서까지 엔지니어 하는 사람 드물다. 회사에서도 엔지니어로 놔두지 않을뿐더러, 상대적으로 외국에 비해 국내에서는 수지타산도 안맞기 때문이다. 과거지사를 말씀하시는 안경너머의 반짝이는 눈빛만은 거짓없는 솔직함이라 믿었기에, 낯익은 사농공상의 흔적이 새삼스레 씁쓸했음이다.

그나저나 이제 집구석에 은은한 선율이 흐를테니 나도 좀 인간다워지려나? 생각만으로도 실실 웃음이 나는게 그저 뿌듯하기만 하다.

 

뱀꼬리 : 사실 작년에 스타 알라디너인 아프***님을 만났을 때, 고장이 나긴 했으나 저 앰프를 아프***님께 드리기로 했었다. 글만 잘 쓰는 똑똑한 서생인줄 알았는데, 아프***님은 인디에서 드럼을 친다는 말에 내가 획~ 가버렸고, 기분 좋게 '당신가져라'라고 했는데... 술깨고 집에와서 가만 생각하니 저 고물덩어리를 어찌 선물로 주겠나싶어 미안했지만 약속을 저버리고 그냥 쌩깠다. 그리고 몇 달을 묵히다 지난주에 알음알음 한사장님을 찾아가 고쳤다.

미안하오. 아프***님. 근데 저거 고치는데 돈 좀 들었소. 안가져간게 잘 한거요. 제가 음악없이 살아 상태가 메롱인지라, 좀만 듣고 드리리다. 담에 술 집에서 사는 얘기와 함께 저놈의 인도시기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술은 당신이 사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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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1-23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거 저거 부럽군요. 저도 저런거 하나 나중에 갖고 싶어요. 멋지다아.

dalpan 2008-01-23 10:20   좋아요 0 | URL
일단 우리집에 함 와서 차 한잔 즐기면서, 성능을 확인해 봄이 어떠하오?
님은 어찌 잘 지내시오?

마늘빵 2008-01-23 13:21   좋아요 0 | URL
오오 좋아요! 저런 진공관 엠프에는 왠지 계속 반복되는 유럽 테크노를 틀어야할거 같아요.

dalpan 2008-01-24 01:26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들어보고는 있는데, 여러 악기가 섞여 연주되는 것이 이상하게 끌리는구만요.
Fourplay 같은 Jazz와 사물놀이 음반이 아주 괜찮습디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편안한 날에 날 잡아야겠구만요! ㅎㅎ

다락방 2008-01-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때 이렇게 살짝 끼어들면 왕따당하는건가요, 저?

dalpan 2008-01-24 01:27   좋아요 0 | URL
하하..그럴리가.
아예 우리집에서 번개합시다.
소문대로, 아프님이 멋있긴해요. 하하하...

마늘빵 2008-01-3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뱀꼬리를 이제 봤어요. 전에 봤을 땐 못 봤는데. 근데 저한테 준다고 하셨었나요? 제가 취했었는지 기억이 안나서. ^^ 아 근데 이런걸 받아도 되는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