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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눈 앞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놓여 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즐거워져 버리는데, 그 감정을 느끼기까지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 맛있는 것을 보다.
망막 세포들이 어서 빨리 그 음식에 대한 정보를 보내야 한다고 시신경에게 알린다.
시신경은 빛이 감히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뇌의 시각 영역으로 돌진한다.
그 곳에서 그들은 기억 저장 창고로 달려가, 그 정보가 무엇인지 방대한 자료를
들추어내며 찾아낸다. 찾았다! 이것은 먹어본 적이 있는 음식이다. 해롭지 않다.
맛있는 것이다. 코의 후각 신경도 이에 가세해서 더욱 더 부채질을 한다.
이제 행동을 해도 된다. 팔과 손에 신호를 보내라. 입으로 넣어라!
뇌의 가장 중심부, 쾌감 중추가 미친듯이 외친다.
어서 먹어라! 어서 먹어라!
먹었다.
맛있다. 쾌감 중추는 행복하다. 단 몇 초 뿐이지만.
맛있는 음식, 좋은 향기, 멋진 그림, 아름다운 음악, 자연에 대한 감탄, 책과 영화 등을
통해 흡수하는 지식.정보에서 오는 놀라움과 감동 등등...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순간마다 '즐거움을 찾는 행위' 천지이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버는 것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이라고?
체온을 보호해줄 옷과 살기 위해 먹는 것, 자기 위해 필요한 집이 있는 것 등의 원초적인
갈망은, 모두 '뇌가 원하기 때문이다'.
몸이 얼고, 배가 등에 달라 붙을 정도로 영양 섭취를 못하는 상태가 되어도 원하지 않으면
그냥 죽을 뿐이다. 뇌는 살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만족스럽게.
그래서 단순히 영양섭취하는 수준을 벗어나 즐겁게 해줄 맛있는 것을 찾게 되고, 또 다른
즐거움들을 찾느라 분주하다.
소설 속 인물, '사뮈엘 핀처'는 부인과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다 갑자기 죽었다.
황홀경에 잔뜩 취한 표정으로. 경찰은 그가 오르가슴을 너무 심하게 느껴 심장 마비로
쇼크사 했다고 사건을 일단락한다. 하지만 두 명의 기자, '뤼크레스 넴로드'와 '이지도르
카첸버그'는 그것이 타살일 것이라 믿고 사건의 전모를 풀어나간다.
'사뮈엘 핀처'는 유명한 신경 학자이자 뛰어난 의사이며, 세계 체스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컴퓨터 '딥 블루 IV'와의 대국에서 이겨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자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사뮈엘 핀처'가 뇌의 쾌감 중추를 심하게 자극하는 바람에 뇌가 쇼크사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는 심장의 쇼크사가 아니라, 뇌의 쇼크사.
그러나 어떻게, 도대체 얼마만큼의 자극이 와야 뇌가 오르가슴을 느끼고 죽는가.
영화 [데몰리션맨]에서 '실버스타 스텔론'은 냉동인간이 되어 미래에서 깨어난다.
그 미래에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머리에 헬멧같은 것을 쓰고 오로지 정신적
으로 자극을 주고 받으며 쾌감을 느낄 뿐이다. 10년도 훨씬 전에 나온 이 영화는 약간의 힌트를
주고 있는 셈이다. 뇌의 쾌감 중추만 만족시켜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죽을 정도의 쾌감을 느끼기란 쉽지가 않다.
인간은, 아니 정확히는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주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고 수집
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침대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도중에도 딴 생각을
한다. 아까 샤워하고 나서 안경을 어디에 두었더라? 핸드폰 알람은 맞췄던가? 이 사람은 나를 정말로
좋아하나? 등등. 도무지 그 놈의 뇌는 잠시도 쉬려고 하지를 않는다.
아무 생각없이 오로지 쾌감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뇌에게는 불가능하다.
애시당초 그 엄청나게 작은 부분(글쎄, 소설의 비유를 빌리자면 0.5mm 였던가?)이 뇌의 정확한 어디
쯤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렇게 '원해서'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은 즐겁다는 것이다.
하하 호호 겉으로 웃어서 드러나는 즐거움은 아니야. 실제로 내 표정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딱 오해할
만하거든. '진지한 걸'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나의 뇌는 흡족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렇게
말하곤 하지.
[좋아, 이 정도면 되었어. 자, 이제 담배 한 대 피고...이런, 커피가 다 식어버렸잖아!
그냥 양치질을 해야겠어. 가만, 내가 이걸 쓰기 전에 뭘 하려고 했더라?]
뇌는 끊엄없이, 멈추기를 모르는 것처럼 생각의 분수를 내뿜는 녀석이다.
뇌를 자살하게 만들고 싶은가?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방에, 볼 것도 들을 것도, 느낄 것도 없이 멍청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면 된다.
더 이상 정보를 얻을 게 없어지면 뇌는 시름시름 앓다가 스스로 죽어버릴 것이다.
뇌는, 우리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쾌감 중추가 즐거워지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