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지식총서 182
홍명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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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흔히 암흑기라 부른다. 이 명명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중세를 암울한 시기로 여기는 까닭은 인간 이성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학의 가치가 모든 것에 앞섰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정신은 존중받지 못했다. 철학과 과학은 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추구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러다가 계몽과 이성중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객관적 지식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객관적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다만 한 부분을 강조하다보면 분명히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을 객관화 시킨다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부정될 수 있는 말이다. 객관성이라니?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 대부분의 사실들이 그러하듯이 주관적 판단과 가치가 개입된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인간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logos와 pathos로 구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본다.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해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감성의 역할과 위상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때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바슐라르의 힘겨웠던 삶의 과정으로 시작되는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삶의 역경이 그의 학문과 사유 방식을 지배할 수 없다는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 자신의 삶과 그의 업적은 분명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슐라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주관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사실은 주관적인 가치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P. 30)"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슐라르는 우리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관적 가치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규명해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인간에게 상상력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꿈과 몽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몽상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상상력이 활동한다. 이 몽상은 완전한 의식의 상태도,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도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의 독특한 정신활동이다. 밤에 꾸는 꿈이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 속의 에너지가 활동하고, 사색은 명료한 의식의 집중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데 비해서 몽상은 이 두 활동의 중간지대에서 이루어진다. - P. 43

밤에 꾸는 꿈이 현실적 자아를 벗어난 주체에 의해 실현되는 상상력이라면, 몽상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는 이 독특한 인간의 상상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되며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차이이지만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이미지의 역할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와 상상력을 이성과 합리보다 낮은 것으로 바라본다. 활자의 보조수단으로서 이미지의 역할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보였던 이미지의 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도스환경에서 윈도우의 출현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와 습득, 활용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산되었다. 단순히 쉽고 빠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지와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적용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엉뚱한 예로 여겨질 수 있으나 우리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감각적 이미지와 정신적 이미지와 같은 다양한 부분들은 홍명희 말대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 미래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미래가 어떤 미래일지라도 바슐라르의 탁월한 직관적 눈을 빌려야 한다. 그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감성적인 부이 사라져 가고, 개인들은 분별없이 육체적 자극에만 중독되어 가는 - 그럼으로써 갈수록 타율적 인간이 되어가는 - 지금의 현상은 결국 활발한 상상력의 퇴와 창조적 이미지의 화석화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현대의 이미지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P. 81

결국 문제는 이미지들의 어떠한 양과 질이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를 생산해 내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과연 진정한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P. 91


스무살 무렵 <촛불의 미학>으로 처음 만났던 그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재회는 즐거웠고 몽상은 달콤했다. 공상과 망상이라도 좋다. 백일몽이라고 불러도 좋다. 끝없는 상상력과 감각적, 정신적 이미지의 확산은 우리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꿈을 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날에 축복 있기를.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06073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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