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의 <섬>이라는 시 전문이다. 단 두 줄로 표현된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속에는 부모와 형제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성도 포함된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순간 영원히 분리될 원초적 ‘외로움’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법이다. 어떤 타인과도 영원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사랑’에 관한 논의는 좀 더 쉬워 보인다.모든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은은 <사랑의 철학>에서 그 이유를 결핍과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핍과 불완전성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인간에게 ‘사랑’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반쪽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운명이다.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 대한 자각이다. 왜냐하면 결핍을 자각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핍을 보완해 줄 대상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나의 결핍을 상쇄할 만한 풍족함과 장점을 지닌 대상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에로스이므로, 에로스에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 간의 ''차이''가 전제된다. - P. 63물론 정신적 결핍과 불완전성은 육체적 욕망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환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미’에 대한 본능적인 몰입으로 볼 수 있다. 내게 부족한 아름다움을 이성에게 찾는 노력은 가장 손쉬운 충족을 의미한다. ‘사랑’의 종류와 의미를 묻기 이전에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시도하는 노력은 재미있다. 철학적 의미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철학>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다.사랑에서 ‘차이와 동등성’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많은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이 등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동등성’을 무시하는 사랑은 곧바로 폭력이 된다.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도 마찬가지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차이를 확인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사랑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이렇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리들이 숨어있다.그러나 현실이 철학을 반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은 모든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틱한 사랑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사랑에 전제나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상황과 개별성에 기초한 감정들을 일관된 틀 속에 집어 넣을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이러한 틀과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의 분열과 공존을 위해서 작가는 인륜성과 상호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보편적 사랑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일반적 과정과 지루한 반복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독자 또한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사랑은 생명체의 감정이며 생명체의 활동이다. 사랑은 감성과 이성 모두와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며, 유한한 인간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며,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는 통일 작용이다. 인간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 담고 있는 생명성과 고귀성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결핍을 극복하고 무한성과 만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 P. 94‘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확인과 인정을 원한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심은 평생 지속되는 관심의 대상이며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사랑의 의미는 모두의 가슴속에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철학과 이성과 논리로 규정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흔히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부딪히는 ‘사랑이 뭘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벼운 사색을 위한 지침서로 여겨질 만한 책이 바로 <사랑의 철학>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사랑’이 뭔지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060727-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