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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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는 작가의 말이 잔잔한 물결에 작은 파문처럼 일렁인다. 김영현의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아니 어떤 소설이 동물에 대한 탐구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면 할말이 없지만 이 책은 김영현이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비의감을 드러낸다. 종교와 결부되어 왜 태어났니를 물어보면 참 난감하다. 인간의 탄생에는 선택이 없다.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죽음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해답을 달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그 대상이 신이어도 아니어도 좋겠지만 문제는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는 데 있다. 신산스런 삶에 때때로 환한 빛이 비춰지거나 제 길을 찾은 듯해도 길은 이내 끊겨버리고 벼랑이 기다리고 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이후 처음인가 싶어 책날개를 살펴보지만 그간 김영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소설은 참으로 낯설고 생경하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해 분류할 수 없다. 다만 특별한 경우와 예외적인 상황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런 것들이 소설 속에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 현실감을 상실하거나 비현실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재현에 불과하다. 물론 표현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 방식에 따라 일상에 탄력이 붙고 재미와 웃음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스토리 자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무딘 감각들을 일깨우며 발뒤꿈치를 간지럽게 한다.

 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나. 그런 것들이 소설이 될 수 있나. 더구나 김영현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추리 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나 은유는 죽어 있고 익숙하고 짐작할 만한 표현들은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 문장에 탄력이 떨어져 스토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정상에 올라 소리 한 번 지를 목적으로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겸허를 배우지 못하는 등산이 즐거울 리 없다. 독자는 소리를 지르기 위해 산 정상에 서지 않는다.

 인간 구원의 문제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고전에서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방법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 독자 개인의 성향이겠으나 즐겁지 않은 책읽기에 누가 나서겠는가? 낯선 사람들은 정말 낯선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구속되는 동연과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는 동생 성연을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한 소읍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그 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의 기준이 있든지 간에. 하지만 이처럼 파렴치한 인간을 정점으로 그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는 방식은 지루하고 감동이 없다.

 탐욕과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분명하며 인간의 삶은 과연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종교적 관점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를 소설로 부딪히게 될 때 사람들은 당혹스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박자 늦게, 혹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 문제와 만나게 되길 바란다. 나의 바람일지 모르나 추리 소설 형식으로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무거운 주제에 비해 분량이 부족하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끈끈하지 못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가 있고, 시대와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후자를 다루고 있는 <낯선 사람들>은 읽을만 하지만 권할만하지 못하다. 이상하게 식상한 표현들과 죽어버린 은유가 눈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의 내용과 형식 어느 쪽도 소홀이 할 수 없고 분리 될 수 없지만 어딘가에서 어긋나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 조금 넘게 부족한 소설을 만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더욱 어렵다.


07030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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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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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실의 막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구별되는 환상을 꿈꾸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일까?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280일간 태초에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모든 민족이 가지고 고유의 신화들 간에 공통성과 놀라운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실제로 바벨탑이 세워졌고 언어가 달라지기 전의 기억들을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 저편에 사는 장 보드리야르의 부고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호접지몽’과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이 현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과연 원본 없는 환상과 실체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셉 캠벨은 신화에 일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매료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게 신화의 아름다움이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비교 신화학을 통해 각 민족이 지닌 신화의 속성이나 공통적 특질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들은 신화와 현실을 연결시켜야 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현실 속에 상상의 빌미를 제공한다.

 도대체 신화는 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지 궁금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러일으킨 신화에 대한 이상 열기는 단순히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신화에 대한 무지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신화가 지닌 힘을 과대 평가하기도, 간과하기도 어렵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담을 엮은 <신화의 힘>은 신화학자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과 현실 세계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빌 모이어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캠벨의 적절한 답변들이 대화 형식으로 풀어져 있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 이야기를 듣다가 캠벨 자신이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P. 133

 인생은 개선한 사람이 없다는 단언에 절망한다. 이보다 나아지지도 않는단다. 이 부정적 현실 인식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놀랍고 굉장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환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연구한 학자는 이렇게 현실조차도 신화와 같은 환상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캠벨은 죽음 저편에서 신화 속으로 들어갔을까?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P. 375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고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꽃이 예뻐보이면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라는데 해 지는 저녁 무렵 한참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마치 종교의 그 무엇처럼 경건해지는 상태를 신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화의 어려움은 결국 모든 장면과 환상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왔지만 언어의 한계 혹은 이미지의 한계는 신화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저편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맥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선승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영역에 신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신화의 한 부분은 아닌지.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결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P. 415


07030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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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무덤 창비시선 272
엄원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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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이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거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 ‘갯우렁’중에서

 나이 오십이 넘어 남자의 후반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간결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생이 흔들리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쇳소리가 난다. 몸은 소모품이다. 한 생을 살다가 힘겹게 벗어놓고 가야할 무겁고 지겨운 지상에서의 갑옷이다. 몸이 늙고 병드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치스런 고통과 시련들은 각자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다. 생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들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물을 통해 바라보는 생의 감각을 느껴본다.

 물컹한 그리움도 그리움이고 송곳이나 드릴처럼 날카로운 그리움도 있을테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움 속에 견고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있는 그대로의 외형만으로 그것, 혹은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연상법.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파서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 ‘불탄 나무’중에서

 불탄 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다. 생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시편들 속에 엄원태의 감각은 살아 움직인다. 정지된 사물들에 대한 통찰과 평범하지 않은 시선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감각들에게 신선함을 부여한다. 자아 성찰적인 잠언과도 같은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말놀음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생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불에 타버린 나무는 이미 고통스럽지 않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더 심란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마음의 결들은 중심없이 흘러가고 뒤틀리고 굴곡진다. 몸의 중심만큼이나 마음의 중심은 더더욱 힘겹다. ‘꿈’이나 ‘사랑’이 그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2

내게도 이를테면 중심이 하나 생겼다
내가 품어 키운 꿈이라 해도 좋고
뒤늦은 사랑이라 해도 좋다
내 몸이 네 몸이 아닌 지경,
그 지경이란 몸만이 알 수 있는 거다
마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흔해빠진 거니까

다만 너를 떠나지 않고
온전히 내게로 되돌려주는 것,
그건 이미 네가 아니다
그걸 어떤 중심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 ‘어떤 중심’중에서

 해 저문 겨울만큼이나 을씨년스런 풍경을 떠올려 본다. 삭막하고 메마른 하늘은 어쩔 수 없다. 손닿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미련은 떨치기가 어렵다. 저녁 일곱 시 - 빛에서 어둠으로 전화하는 그 순간들, 시간들에 대한 상념이 예사롭다.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비유된 너의 마지막 눈빛이 그러했다. 시인이 보았던 그 눈빛은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인지 너에 대한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 남은 생의 시간들을 짐작해 볼 뿐이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의 마지막 시.

저녁 일곱시

저녁의 창문들은
제 겨드랑이를 지나간 바람이나
이마 위로 흘러간 구름들을 생각하느라
골똘하게 고요하다

나도 하루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푸른 저녁 공기는
어떤 위안의 말도 전해준 바 없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위로받은 것이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흰 죽지 새의
쭉, 경련하듯 뻗은 다리의 헛된 결기를 보면 안다

저녁 일곱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이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07030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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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 살림지식총서 271
이은정 지음 / 살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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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눈빛 때문에 두 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감동이겠지만. 김수영의 눈빛과 정호승의 눈빛이었다. 사진과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서늘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그 혹은 그녀의 눈빛을 평생 간직한다면 나는 문학, 특히 시를 처음 접할 때 두 시인의 눈빛과 마주친 강렬함을 기억한다.

 특히 김수영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간다. 그것은 이미 죽은 시인에 대한 경외감이 만들어낸 허상과 맹목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가 말하는 세상과 삶에 대한 냉소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처럼.

 김수영의 대표작이나 그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시는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시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거대한 뿌리, 1977>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를 다시 읽어본다. 이은정의 <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오래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 시다. 불안한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그 얼굴은 누구나 가슴 속에 숨어 있다. 아니 어둠 속에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로 해서’ 사랑을 배웠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다.

 이은정의 김수영론은 양극에 놓인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개진과 은폐, 방과 거리, 정지와 속도, 적과 사랑, 시인과 속인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시를 양극에 세워두고 비교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해 보인다. 시인의 추구했던 시는 극단적이지 않으며 몇 가지 분류법으로 재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면면과 특징들을 집어내는 저자의 방법이 낯설지는 않다. 왜냐하면 김수영이 살아냈던 시대와 김수영의 삶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지극히 고전적인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정신’에 가장 치열했던 시인 중에 한 사람이 김수영이기 때문이다. 그의 온몸시론이 주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시를 정의할 순 없지만 김수영처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극명하고 자신있게 주장했던 시인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는 에필로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흔들리는 시대 상황에서 시인이 걸어야 했던 형극의 길을 온몸으로 견뎌냈던 치열함과 열정은 ‘자유’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시적 자유와 생활인으로서의 자유, 모든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영혼의 자유를 갈망했던 김수영의 시는 한국 현대시의 정수이다. 그의 시는 물론이고 산문이 보여주는 울림은 영원하다. 손때 묻은, 웃돈 주고 구입했던 김수영 전집 초판본의 먼지만큼 세월이 쌓여가지만 그에 대한, 그의 시에 대한 경건함은 깊어만 간다.


07030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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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세트 - 전4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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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나 방법에 객관성은 없다. 기준이나 잣대가 모두 제각각이며 상대적이다. 비교 대상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를 놓고 이야기할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동일한 사실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평가와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안중근이 독립 운동가냐 테러리스트냐의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는 방향과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史 1~4>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적 평가와 관점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숨겨진 사실들이다. 대충 전해진 이야기들이나 알지 못하고 추측했던 이야기들, 혹은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부정확한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과 거짓말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객관적 사실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도 취사선택의 문제부터 주관이 개입된다. 고무줄처럼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과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독자들 개인에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근대와 현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그 기준점들을 넘나들면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일은 하나의 용기이다.

 그 용기는 개인이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단순하고 치기어린 공명심과는 다르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근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 망령들을 찾아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을만한 사람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한겨레21>에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2006년 8월까지 이어진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 방식은 일관되고 분명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4권으로 정리된 이 책들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점검해야 할 쟁점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친일파 문제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거사 정리 문제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고 어려운 숙제가 친일파 문제이다. 용어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접근 방식과 처리 방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한홍구는 구체적 대안이나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에 공감했던 것은 친일파의 범위와 대상보다도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정부 수립과 정치 분야에 미친 영향들을 관련 사건들을 짚어가며 풀어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건과 정치적인 문제들은 개인의 성향이나 능력보다도 과거에 벌어졌던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들을 일목요연하고 정확한 기술에 의해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연결시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흥분과 열정적인 목소리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감상적인 어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이 이 책들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시의성이 있으며 쟁점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들과 어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 역사학자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담긴 감동과 애정 어린 시선들 속에서 발견하는 울분은 다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그대로 우리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군대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현역병들의 역할과 인권 문제에서부터 군 전체의 편제와 감축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들은 현실에서 월급 인상과 병역기간 단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던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와 감군, 모병제 등 이제는 수면위로 떠올라 군대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한홍구의 주장으로 관철된 문제들은 아니겠지만 그간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픈 100만 양민 학살 문제가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학살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 죽어간 군인이 아니라 이념과 복수심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국가적인 관심과 대책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유가족들은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앞으로도 그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 1권, P. 19

 이 책의 시작 부문에서 저자의 이 말이 다소 낭만적으로 들렸다. 단 한 번도 왕의 목을 쳐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혁명이란 말을 모른다. 시민 혁명에 의해 이전의 전근대적 요소를 척결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을 떠올렸을 저자의 낭만적 시선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역사학자로서 가정법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들에 목매고 있다가 현재의 문제들이나 미래를 향한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냐는 그들(?)의 주장은 이제 식상하다. 또 과거사 문제냐고 볼멘소리를 내는 언론들도 지겹다. 과연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과거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인가.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일 뿐이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미래도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픈 역사지만, 고통스런 역사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때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유산을 남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역사학자의 길고 지루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며 우리는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자각하는 민중으로 거듭나며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임을 확인할 때까지 그의 역사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비록 체계도 계통도 없고 일관된 흐름이나 시대적 구분도 없는 역사책이지만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는 21세기를 출발하는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책은 독자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맑은 샘물과 같다. 그 시원한 물, 기꺼이 뒤집어쓰고 하늘 한 번 쳐다보아야 하는 책이다.


070301-02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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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3-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를 읽으면서 평소 가지지 못했던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내용에는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약간은 자의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책에 나오듯이 미워할만한 놈을 응당 미워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sceptic 2007-03-0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렷한 하나의 주관도 또 하나의 시선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