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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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교보문고가 있다. 주말에 한 번씩 들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천천히 서점을 산책한다. 나는 이것을 눈으로 즐기는 뷔페라고 하는데 그 포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실제 음식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분류된 코너 매대를 돌며 신간을 확인한다. 관심이 가는 실용서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에피타이저를 마친다. 본격적으로 벽과 스탠드형 책꽂이로 발길을 옮긴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 있는 만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분야별 개론서와 전문서를 일괄하고 한 권씩 꺼내들고 목차를 읽고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다. 책등을 보인 채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책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름이 파악되고 내가 읽은 책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상하좌우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다름 도서 목록에 참고하기도 한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꺼내들고 강유원을 떠올리다가 <천의 고원>은 수없이 표지만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아 넣는다. 장석주의 말이 생각나서 사지 않는다.

  철학 분야 윤리학 코너의 책등을 읽다가 피어 싱어와 짐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이 윤리학 책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원제가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윤리학의 주체는 항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먹는 것까지 윤리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으로 보아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옮긴이 함규진도 후기에서 이 책을 끝까지 번역하고 나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고기를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젓가락이 채식 쪽으로 기울었다. 앞으로도 베건이 될 자신은 없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면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먹을 게 없단 말인가? 책은 나에게 희망과 즐거움보다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현대의 식단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살펴본다. 한 가정에서 먹는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장을 보는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한다. 소나 돼지, 닭이 키워진 농장의 현실을 파헤친다. 앨빈 토플러처럼 발로 쓴 <죽음의 밥상>은 올해 읽은, 내가 뽑는 추천 도서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이론에 치우치거나 일방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농장의 잡부가 되어 바닥을 기고 ‘쓰레기통 다이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직접 쓰레기통 속에 뛰어드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과 실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가나 책을 만나게 되면 경외감을 느낀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공장식 농장에서 길러져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보내야 하는 닭의 일생에 대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뛰어다니는 소에 대해, 꼼짝 못하게 갇힌 돼지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피터 싱어가 내세우는 동물에 대한 동정同情은 사실 인간에 대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각종 종교와 근대 시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낸 인종 차별의 극복과 남녀평등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그간 끊임없이 반박의 논리와 반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인간의 종種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마디가 살을 파고들며 뼈에 사무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제 유기농은 낯설지 않다. 공정무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로컬푸드는 화석 연료의 사용, 지역경제 활성화, 우리 농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문제로 얽혀 있다.
 
보통 미국인의 한 끼 식사는 그 거주 지역에서만 식재료를 구해 만든 식사에 비해 석유 사용량이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 P. 205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스스로 가꾸고 상추 한 잎이라도 키워 먹어야겠다는 뼈아픈 자각들이 생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피터 싱어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먹거리에 대한 윤리학이 철학적 문제를 동반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산업이 되어버린 우리의 식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긴 여행처럼 읽었다. 미친소 문제로 뇌용량 2MB임이 드러난 대통령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국가가 국민위에 존립할 수는 없다. <리바이어던>의 가르침이나 <아나키즘 이야기>의 주장이나 <코뮨주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실천적인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의 밥상’이 아닌 ‘건강한 밥상’은 국가라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차려 먹어야 한다.


0806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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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도 눈부시다 - 선시가 있는 풍경
김영옥 지음 / 호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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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다양한 풍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다. 현실은 언제나 치열하고 경쟁적이며 옆을 돌아볼 틈조차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 없이 뛰고 또 뛰다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쉰다.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전 생애를 뒤돌아보거나 막연한 미래를 걱정한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어냐는 질문은 참 부질없다. 정답이 필요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삶의 방법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어디로 가려는지 고개를 들고 조금 멀리 내다보고, 잠시 쉬어 뒤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연因緣으로 관계를 풀어내지만 그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세계는 범인의 세계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때때로 산사를 찾는다. 물론 종교적 목적은 아니다. 고즈넉한 산속의 거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道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만 깨달음이 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사는 동안 치열하게 앎과 삶의 과정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을 버리는 일이 쉽진 않으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조금씩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나보다. 경쟁논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참선參禪만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도道를 얻는 것은 아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인간은 한없는 자유를 느낄 것이다. <초승달도 눈부시다!>라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 밝고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김영옥은 그 풍경들을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 놓는다. 달빛 아래 조용히 흐르는 산사의 계곡 물소리처럼 시원하고 나지막하게 들리는 문장들은 담백한 차 한 잔과 어울린다.

꿈같고 환영 같은
육십칠 년 세월이여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 물이 하늘에 닿았네
- 천동 정각, ‘임종게’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 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 최승자, ‘미망 혹은 비망 8’


  소리 없는 창 밖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죽음은 명상과 침묵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쯤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것조차 욕심이겠지만.

그 때 고요히 바람이 불었나니
맑고 가난한 솔씨 하나
홀로 바다로 날아가
바다에 깊게 뿌리를 내렸나니
- 정호승, ‘해인의 바다’중

옷 한 벌과 밥그릇 한 개로
산문을 자유로이 들고 나네
저 모든 산의 눈을 다 밟은 뒤에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웠네
- 벽송 지엄, ‘의선 스님에게’


  선시禪詩가 있는 풍경은 소리도 없다. 오규원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진경처럼 맑고 투명하다. 빛도 색도 없는 물과 같다. 저자는 지하수처럼 시원하고 맑고 깨끗한 선시禪詩와 함께 산중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수행과정이 결코 만만하거나 즐겁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하는 산사의 풍경이 숙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길이 산을 내려와 문득
뒤돌아보면 따라 내려오는
저문 산, 물을 건너면
먼저 건너가 뒤돌아보는 저문 산
- 장석남, ‘산길이 산을 내려와’중

파란 바람아 불어오니라 불어가니라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일러 주고
저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주어라
- 고형렬, ‘바람 나뭇잎’중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알려주는 바람을 찾아 늘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싶다. 끝없이 버리고 또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다. 도道를 얻으려는 것조차 욕망이니 그것조차 내려놓고서.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그렇게.

08060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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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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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올 현실이 존재하는 한 여행은 영원히 모든 사람들에게 꿈이며 환상이고 향수이고 추억이다. 정착 생활 이전의 인간 생활은 정처없는 ‘떠돎’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저기-멀리’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생래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안에 유목적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못난 사람, 어느 곳에 정착하든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목적인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위고는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을 가장 상급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근원적으로 정착과 이동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도약과 좌절을 거듭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는 민족 간의 이동이나 머물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충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행과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이렇게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은 욕망과 안주하고 싶은 욕망은 늘 부딪힌다. 안전의 욕구와 호기심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삶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시대와 국가를 기억한다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자유와 행복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는 산문집이다. 대한민국,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 밖에서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산문집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좀 있다. 잠시 현지를 돌아보는 이야기나 스치듯 낯선 곳의 감상과 여정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중국, 미국, 일본을 통해 길어 올린 작가의 내면의 풍경들이다. 각국에 체류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혹은 곤혹스러움을 재미있고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적어나간 글들은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도 엿보이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소함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여행 관련 책들 속에서 단순히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들은 김연수를 좋아하거나, 소설가의 눈에 비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거나,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훈츈, 밤베르크, 버클리, 옌지, 룽징, 토오쿄오 그리고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김연수의 종횡무진 여행기는 얼굴을 웃음을 띠고 편안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서는 기분이다. 심각하고 사색적인 풍경도 아니고 우울하고 반성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물과 풍경들에 대한 관찰과 흥미가 아니라 사람과 문학,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읽어 낸 큰 장점은 유머와 편안함이다. 자칫 가벼움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다져진 내공과 문장이 힘이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되고 독자들 입장에서 문안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기록으로 혹은 이국적인 사람들과 낯선 곳에 관한 감상 차원에서 읽혀질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한 감은 지울 수가 없다. 편안한 주제로 묶어 내기는 했지만 장소나 방법의 일관성은 없다.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서 발언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이 책 전체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조건과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관점과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색다른 ‘여행’에 관한 관점으로는 훌륭하게 읽힐 수 있지만 그렇게 만만하거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여정과 색다른 것을 제시하는 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나름의 재미와 독특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김연수의 글은 읽을 만하고 그의 문장들은 나를 즐겁게 한다. 낄낄거리며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즐겁다. 어쩌랴 상상은 자유고 현실은 구속이니.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냐가 문제다. 어떤 술을 마시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어디를 가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즐기고 바라보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이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여행을 통해 확인 할 필요는 없다. 아, 그것도 나름의 방법인가?

  내일은 매주 돌아오는 토요일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이다. 요일과 무슨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일탈’하는 날임에는 틀림없다. 김연수의 말대로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쯤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떠나고 남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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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행복하니? - 보통 아이들 24명의 조금 특별한 성장기, 2004년 올해의 청소년 책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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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직도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마저 버릴 순 없다. 아이들의 기준과 나이가 모호하긴 하지만 나는 오늘도 믿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변하고 있다. 부모와 학교와 세상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사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있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목숨을 걸고 교육이 미래라고 외치지만 어쩌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제도권 공교육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성인이 되기 위해, 혹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발판으로 삼는 곳이 학교라면 일리히의 말대로 ‘학교 없는 사회’가 가장 행복한 사회가 될 지도 모른다. 학교의 어원은 ‘여가’에서 출발했다. 할 일 없어 모여 놀고, 부모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곳이 학교다. 지금은 학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해석일까? 언제까지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에 목숨을 걸고 지각했다고 운동장을 돌릴 것이며 강제로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킬 것인가? 죽기 전에 그것이 사라진 학교를 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의 상황이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여전히, 아직도 19세기식 사고 방식과 전근대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대의 아이들과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교사들이 모여 곳이라서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학교는 행복한 곳인가? 아이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김종휘의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자 센터의 김종휘가 만난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다. 24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너, 행복하니?>를 통해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행복의 반대편을 서성이고 있다. 진짜 행복은 무엇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뭔지, 정말 그걸 하면 안되는 건지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이 보통 아이들의 특별한 성장기를 들여다 보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한국식 교육 풍토와 한국식 경쟁 사회에서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반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이 24명의 아이들은 우리 주변의 모든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들이다. 김종휘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교육과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잃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의 학창 시절은 행복했나? 우리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적이 있나?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도 아이들을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틀 속에서 규격품으로 자라고 비슷한 미래와 당연한 과정을 상상하며 어른들의 방식으로 길러진다. 경쟁은 필수고 이기심은 선택이다. 그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을 물들이는 자본과 경쟁의 논리, 억압과 복종의 순응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도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고 있다.

  한 우물이 아니라 여러 우물을 파서 행복해 진 아이들, 가족의 경계 너머에서 행복을 찾은 아이들, 타고난 ‘끼’를 무기로 행복해지는 아이들, 시민운동을 통해 나를 찾고 행복을 얻은 아이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아이들, 자신이 학교를 만들어가는 아이들, 개혁을 위한 정치를 시작한 아이들,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가는 아이들.

  스물네 명을 몇 개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이 비슷해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행복은 멀어질 수도 있다. 꽃밭에 핀 꽃들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듯이 그들도 제각기 다른 모양과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교육과 사회는 불가능한가? 어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내기할까? 내가 세상을 바꾸는지, 세상이 날 바꾸는지”라는 당시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 문구를 개인의 신념으로 삼아 준표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 P. 117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며 꿈을 포기하는 일이며 이기심으로 가득해지는 일이며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일이며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며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준표가 옳다.

  아이들이 희망인 이유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들보다 준표같은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아지기를 그래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팔짱끼고 옆에서 구경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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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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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의 기억은 영등포 여고 교지에 수필 형식의 글로 실렸으며 어딘가 책장 구석에 그 교지가 한 권쯤 남아 있을 것이다. 1987년 서울역 앞에서 전경 버스가 불타오르던 순간 나는 시내버스 안에서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신문 1면에 실렸던 그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시위에 참가했던 건 아니었고 글자 그대로 ‘세상 구경’을 위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노선이 길었던 그 버스는 혜화동을 출발해서 마포대교를 건넜다. 한강 둔치에서 평화롭게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강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생각난 건 이글이글 타오르던 버스의 불꽃 속에서였다. 사회적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선배들이 가끔 들러 토요일 오후에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를 던져 주고 돌아갔다. 하얀 한복을 입고 길가에 앉아 시위대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던 할머니 빌딩 창문마다 매달려 함께 소리치던 넥타이 부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 - 내게 1987년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혹은 단편적인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 ‘노동의 새벽’을 읽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고, 황지우와 김정환, 신경림, 김지하, 조태일의 시집을 뒤적이던 시절이었다. 뭐가 뭔지 세상은 뒤죽박죽이었고 첫사랑은 아득했으며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처럼 혼자 끙끙거리던 시절이 1987년이었다. 친구 녀석과 처음 음악다방엘 갔던 것도 아마 1987년이었지 싶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2007년에 후마니타스에서 출판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인 감회를 더해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분명한 뒤돌아보기 작업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사 특별취재팀이 이룬 값진 성과이며, 21세를 향한 디딤돌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기 위한 거울이다.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읽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책이다.

  한겨레만 쳐다보며 이렇게 훌륭한 기획과 이슈를 모르고 지나쳤을 아둔함에 발등을 찍는다. 참 아는 게 없고 단순하며 정보에 어둡고 뭐든 잘 까먹는 개인적인 버릇들이 때때로 원망스럽다. 그래도 이 책을 만나 며칠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용은 결코 행복하지 않지만 독자로 만난 이 책은 올 해 만난 책 중에 가장 값진 책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 P. 37페이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의 말은 역설적으로 이명박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은 늘 비관적이었는지 모른다. 고병권의 말대로 만하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방황하지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 ‘자유 부동하는 지식인’, 그람시의 전체를 바라보는 계급의 눈으로서 ‘유기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통치 계급 이해에 복무하면서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적인 지식인’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인에 대한 정의였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이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시대가 변했고 지식이 대중화 되면서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달라졌다. 이영희 선생님과 같은 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상황도 아니지만 그것을 단지 시대의 변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특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수도 없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지식인은 이 책의 49페이지에 정리된 ‘2007년 한국 지식인 이념 분포도’를 참고하면 된다. 매스미디어나 책을 통해 자주 접했던 낯익은 얼굴과 이름들이 이념 성향에 따라 분포되어 있어 공간적인 개념으로 시각화 되어 있다. 다소 낯설지만 잘 정리되어 있다. 은퇴했거나 작고한 사람이 제외되어 있고 나름의 한계가 있겠지만 일목요연하게 일괄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 지식인의 풍경과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고 지식인의 위기에 대해 살펴본 후 정치, 경제, 문화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를 점검하고, 시민운동과 정책지식과 지식인의 관계를 정리했다. 지식인 생산 공장이 되어 버린 미국과 학술진흥재단을 검토했으며 마지막으로 대중지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지식인의 죽음’을 넘어라는 좌담은 결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은 ‘지식인’을 주제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제점과 그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어떤 식으로 다양한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지 혹은 그 지식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꼼꼼이 따져보고 있다. 이것을 또 다시 몇몇 지식인에게 분석을 의뢰하는 아이러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볼 수 있다.

  취재과정에서 부딪히고 고민했을 내용들이 고스란히 책에 드러난다. 그것을 읽어나가는 입장에서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등 한 권의 책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논리가 달라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민주주의나 민중해방이 아니라 경쟁과 자본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당연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기댈만한 혹은 믿을 만한 지식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유로운 소통과 대중지성의 시대와 왔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요구가 그들의 몫이다. 대중과 지식인은 이제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대중이며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점검하기 위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080526-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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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from 행복을 찾아서... 2009-05-19 14:34 
    저는 경향신문을 좋아합니다. 경향신문의 기사를 쓰는 시선이라고 해야하나, 독특한 관점이 있는데, 이걸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이라는 글귀만 보고 냉큼 사서 보게 된 책이 바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입니다. 지식인의 죽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후마니타스, 2008년) 상세보기 3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책에..